|
Eulogia Ministry
신(김용규)
5부 하나님은 유일자다(1)
플로티노스는 로마황제 세베루스가 다스리던 204년 혹은 205년 이집트의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빵보다 지혜를 원했던 그는 28살이 되었을 때 고향을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갔지만, 그의 갈증을 채워줄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강가의 부두에서 부두 노동자인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암모니오스 사카스이다. 사카스는 ‘짐꾼’이라는 뜻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 불리는 암모니오스는 플로티노스에게 10년간 플라톤 철학을 전수하였다. 암모니오스와 제자들은 플라톤을 신적 존재로 여겼고, 짐작컨대 당시 오늘날 우리가 ‘중기플라톤주의’라 부르는 사상을 탐구하며 신플라톤주의의 터전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암모니오스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플로티노스는 스승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암모니오스에게는 기독교 신자가 된 제자가 여럿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리게네스였다. 오리게네스는 플로티노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오스의 미움을 사서 팔레스타인으로 추방된 상태였다. 그래서 둘은 만날 수 없었다.
플로티노스가 38세가 되던 242년에 암모니오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새로운 지혜에 목말랐던 플로티노스는 동방원정대를 따라나섰고, 2년이 못되어 메소포타미아에서 고르디아누스 황제가 살해되자 원정대는 곧 해산하게 되었다. 플로티노스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로마로 가게 되었고, 이 때부터 그는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사이에는 60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이 있었고, 두 사람은 성격도 원하는 것도 달랐다. 국가를 쓰기도 한 플라톤은 천상계 뿐 아니라 현실세계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플로티노스의 관심은 온통 천상세계와 영혼과 영원한 시간에 쏠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본의 아니게 플라톤의 사상을 약간 변형시켜 가르쳤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이다.
그는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돈에도, 권력도 명예도 탐하지 않았다. 그 덕에 황제 갈리에누스와 황후 살로니나가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가 스승의 말을 받아적어서 모두 합하니 아홉 벌씩 묶어 여섯 권이었다고 한다. ‘엔네아데스’는 ‘아홉 벌로 묶은 책’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먼저 우리는 플로티노스의 일자에 관한 교설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고백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단지 계시로 받아 교훈으로 전했을 뿐이다. 이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설명이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두 위대한 제자들의 작업에 의해 구축되었던 것이다.
우선 오리게네스가 최초의 조직신학서라 할 수 있는 ‘원리론’에서 삼위일체 가운데 성부를 플라톤의 ‘선 자체’ 곧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와 동일시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그 내용을 풍성하게 채운 것은 플로티노스의 일자 형이상학이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엔네아데스에 기록된 이론을 도구로 해서 그들의 교리와 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특히 6세기 초 ‘위-디오니시우스’라 불리는 사람이 플로티노스의 일자 형이상학을 기독교 신학에 깊숙이 침투시켜 동방정교의 근간인 ‘부정신학’을 개척하였다. 그러니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라는 말을 독선적이고 오만한 선포나 배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령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폭력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에피쿠로스도 ‘종교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데 그것이 너무나 위력적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늘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유일신 개념이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에 불과하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규정한 일자의 의미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9장 일자란 무엇인가
* 플라톤의 일자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불변하는 실체이고 만물의 근거이자 진리의 근거이다. 또 모든 존재물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하나’이기도 하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러한 존재 개념을 플라톤이 그대로 계승한다.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가 가진 ‘불변성’과 ‘진리성’은 갖지만 ‘단일성’과 ‘통일성’은 갖지 못한다. 이데아는 자기 자신을 사물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물이 존재함으로 단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동시에 이데아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만물의 궁극적 근거는 오직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다. 둘만 되어도 그 둘의 근거가 되는 다른 어떤 것이 최종적인 근거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이데아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 근거가 아니라 이데아의 배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실체인 ‘선의 이데아’를 확정한 것이다. 하지만 일자란 정의상 그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하면 더는 일자가 아니게 된다. 만일 누가 ‘일자가 선이다’라고 규정하면, 일자는 곧바로 선(A)과 선이 아닌 것(-A)으로 나뉘어 둘 중 하나로 머물기 때문에 더는 만물의 근거인 일자가 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플라톤이 몰라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이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서 확립한 ‘선의 이데아’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로 실체 중 실체이다. 그는 선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태양이 가시적 세계의 만물에 생육과 자양을 주듯이, 선의 이데아는 가지적 세계에 모든 이데아에게 존재와 본질을 부여한다. 만물은 변하지만 태양이 변하지 않듯이, 이데아들은 인식되지만 선의 이데아는 인식되지 않는다. 선의 이데아는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며 언어 형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미’로 권능과 위엄에서 모든 이데아를 능가한다.
플라톤은 결국 선의 이데아의 속성을 일자의 속성과 동일하게 정의함으로써 선의 이데아를 일자와 동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속에는 논리적 오류가 숨어 있다. “일자는 영원불변성, 불가지성 및 불언명성을 가진 가장 완벽한 실재다. 선 자체도 그렇다. 그러므로 일자는 선 자체다”라는 플라톤의 주장은 “A는 C이다. 그리고 B는 C이다. 그러므로 A는 B이다”로 형식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형식적 오류’이다. “남자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이다‘ 이런 형식적 오류이다.
플라톤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A는 C이고 C는 A이며, 동시에 B는 C이고 C는 B이다. 그러므로 A는 B이다"라는 형식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논리학에서 ‘동치’라고 한다. ”일자는 영원불멸성, 불가지성 및 불언명성을 가진 가장 완벽한 실재이고, 영원불멸성, 불가지성 및 불언명성을 가진 가장 완벽한 실재는 일자이다. 선의 이데아도 그렇다. 그러므로 일자는 선의 이데아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숭례문은 국보 제1호이고 국보 제1호는 숭례문이다. 남대문도 그렇다. 그러므로 숭례문은 남대문이다”가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이런 논리적 오류를 무릅쓰면서 일자에 선의 이데아 개념을 부여했을까? 이것이 후일 서양문명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살펴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 플라톤이 일자를 선의 이데아로 규정한 것은 서양문명사에서 위대한 사건이었다. 우선 ‘신은 선하다’라는 이론이 가능해졌고, 그것이 악한 세력에 대한 불안에 노출되어 있었던 고대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신을 선과 악, 빛과 어둠, 온기와 냉기, 행운과 불운 같은 이원적 힘의 근거로 보았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의 가르침이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운, 재앙, 질병 등을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신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플라톤 철학이 가진 이러한 구세적 성격은 기독교의 ‘섭리 사상’과 연결되어 적어도 19세기까지 서양문명을 이끌었다.
게다가 만물의 궁극적 근거가 선 자체라는 플라톤의 사상은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할 도덕적 삶의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 사상을 기반으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선한 신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 사상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로마법의 기초가 되었고, 기독교 윤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플라톤이 논리적 오류를 고의로 범하면서도 일자와 선 자체를 동일시한 것은 ‘존재론적 목적’이 아니라 오직 ‘도덕론적 목적’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오해되고 있는 바와 같이 천상의 세계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이 지상의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 철학자였다. 그의 철학의 진정한 목적은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였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 철학을 적극 받아들였고 그에 대한 찬사도 아끼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클레멘트이다. 그는 ‘학설집’에서 “그리스인에게 철학을 준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율법을 수여한 것과 같은 목적”이라며 “플라톤은 그리스어로 저술한 모세”라고 말했다.
“플라톤 철학의 최고점은 신학이며”, “그 둘은 하나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플라톤은 수많은 종교적 교설의 근간이 되는 이론을 설파했지만, 그는 종교적 신비주의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여기 들어오지 말라”는 말은 플라톤을 종교인이 아니라 철학자로 남게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열어 놓은 ‘신비의 문’으로 성큼 들어선 사람이 바로 플로티노스이다.
* 플로티노스의 일자
플로티노스는 아르케를 찾을 때 일자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일자는 어떤 존재하는 사물일 수 없으며 모든 존재자에 우선한다.” 즉, 일자가 존재물 중 하나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일자의 두드러진 본질은 ‘첫째’가 아니고 ‘절대적 초월’이다. 일자 자신은 그 어떤 구분과 한계를 갖지 않으면서 모든 개별적 존재물이 가진 구분과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일자는 모든 개별적 존재물들을 자기 안에 포용한다. 요컨대 일자의 ‘일’은 기수나 서수의 일이 아니라 오직 유일하다는 의미에서의 ‘일’이다.
그렇기에 일자는 모든 존재물을 포괄하는 바탕이자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존재물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초월적이지만, 일자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포괄자이다. 그래서 일자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갖는 유일성이 바로 그러하다. 또 일자는 이러한 무규정성과 무제한성 때문에 인식과 언명이 불가능한 전체적 ‘하나’이다. 그래서 일자에는 감각적 범주든 정신적 범주든 그 어떤 범주도 적용될 수 없다. “일자에는 개념도 없고 지식도 없다. 그래서 신은 정신의 저편에 있다고 말한다.”는 플로티노스의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일자는 일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일자이기 위해서 그 어떤 차별성이나 배타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일자에 대한 사유가 기독교 사상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부로 발전했다. ‘엔네아데스’에는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를 곧바로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말도 들어있다.
“그리하여 원의 중심(일자) 자체가 존재하는 한편 원의 반지름(정신)이 원의 중심점에 기초해서 존재하며 나아가 그 반지름에 기초해서 하나의 원을 구성하는 원의 둘레(영혼)가 존재하듯이 일자, 정신, 영혼이라는 세 자립체는 하나로 존재한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퀴나스가 “이 모든 것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상정되었다.”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일자가 가진 속성이 성부 하나님의 속성과 같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진 속성이 일자의 속성과 같은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다.
초기 기독교학자들이 엔네아데스를 성서와 함께 펴놓고 일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의 가르침을 ‘단 몇 마디만’ 바꾸면 기독교 교리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과장이었다. 플로티노스의 사상과 삼위일체론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은폐되어 있고, 그렇기에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안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분쟁의 위험이 잠재되어 있었다.
플로티노스의 일자에서는 정신과 영혼이 순차적으로 유출되었고 이것이 각각으로 분리된 채 하나의 자립체로 존재하지만, 어쨌든 일자에 종속된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태초부터 동시에 하나로 존재하며 분리되지 않고 서로 동등하다. 사실상 이 차이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큰 논쟁인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이다. 이 논쟁은 318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시작되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감된다. 63년동안 지속된 이 논쟁을 통해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을 극복하고 독자적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때 그리스 철학에서의 일자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유일자로서의 성부의 특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다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에서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변증가 유스티누스는 ‘유대인 트뤼폰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나는 모세의 이 말을 다시 인용하려 한다. 이 말로부터 우리는 자명하게 하나님이 어떤 이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이는 숫자로 볼 때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이성적 존재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우리 중 하나 같다는 말은 어떤 이와 연관된 또 다른 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적어도 두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유스티누스도 하나님의 복수성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두 하나님, 세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하면서도 유일신론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육신이라고 말한 역사신학자 후스토 곤잘레스의 말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이 세상에 왔다는 선포를 기반하는 종교이다.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도 믿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히브리인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예수님이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도 하나님으로 믿어야만 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이러한 기록들이 성서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약은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라고 말씀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떻게 셋이 아니고 하나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문제는 일단 뒤로 미루고 아버지와 아들 문제를 먼저 설명하려 하였기에 마치 이위일체론처럼 다뤄지기도 했는데, 아들의 문제가 해결되면 성령의 문제도 같은 원리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도 교부들은 삼위일체 혹은 이위일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물론 이 때는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나오기 전이었으니 그저 성자 예수님을 성부와 동일시하는 표현으로 선포했을 것이다. 가령 2세기 초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그것을 선포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이론이 쏟아져 나왔고, 그럴수록 더 혼란이 야기되었다. 양상적 군주신론을 주장한 사벨리우스는 ‘성부수난론자’로 정죄되었고, 안디옥 감독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은 ‘양자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주장해도 안되고, 분리된 둘이라고 주장해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혹스러운 정황은 20세기 초 양자물리학이 당면했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광양자이론’을 발표하기 전만 해도 빛은 ‘증명되고 공인된’ 파동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빛이 고속으로 이동하는 에너지다발, 곧 입자라는 것을 증명하자 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아인슈타인도 ‘산란’과 ‘간섭’이라는 파동현상과 자신의 광자 개념 사이에서 드러나는 이 모순 즉 ‘파동-입자 이원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20년 쯤 지난 후 하이젠베르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라는 용어를 빌려와 이 모순을 해결할 길을 열었다. 그리스어로 ‘뒤나미르’, 라틴어로 ‘포텐티아’로 표기되는 잠세태는 ‘아직 그 본질이 확정되지 않은 가능태’를 말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빛과 같은 소립자들은 가능태일 뿐이며, 실험자의 관찰에 의해 입자 또는 파동으로 현실화된다고 설명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은 에르빈 슈뢰딩거가 빛을 파동으로 다룬 자신의 ‘파동역학’과 입자로 다룬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수학적으로 동치이며, 한쪽에서 다른 쪽을 유도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 인정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포텐티아’ 곧 잠세태라는 용어를 가지고 실험을 통해 드러나지만,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를 보통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학문에서 전문용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전문용어는 사유의 기본단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신학계에서도 하이젠베르크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 429년 반달족의 가이세렉이 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전까지 북아프리카는 서방 기독교 사상의 중심지였다. 경제적인 풍요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인 에게해를 통해 그리스 철학이 일찍부터 전해진 까닭이었다. 또 동쪽으로는 팔레스타인과 인접하여 기독교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다.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같은 도시들은 초기 기독교 사상의 온상이 되었고,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테트툴리아누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지역에서 태어났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이 지역은 법정 송사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렇게 논쟁을 좋아하고 송사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초기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성장을 도왔다고 하겠다. 안디옥 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동방 기독교 사상가들은 대부분 회심한 사변적 철학자인 데 반해, 아프리카 학파 사상가들이 대개 법률가나 수사학자 출신인 것이 그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한 수사학과 법학지식으로 삼위일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 논쟁에서 그는 ‘위격’(persona)과 ‘본질’(subtantia)이라는 법학 전문용어를 끌어들여 ‘삼위일체’(trinitas)라는 용어와 이론을 처음 만들어 냈다.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학문에서 전문용어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tres personae una substantia)이라는 사유와 언급이 신학 안에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위격’이라는 라틴어는 ‘페르소나’인데, 당시 법률적 용어로 ‘어떤 것이 법률상 밖으로 드러난 지위’를 말한다. 당연히 한 사람이 여러 페르소나를(가령 집에서 호주, 사회에서 상인 등)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페르소나’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서 person 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위격을 세 개체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삼신론’(tritheism)에 빠지게 된다.
‘본질’이란 그리스어로 ‘우시아’(ousia)라는 철학용어인데, 일상용어로 풀면 ‘어떤 것이 그것이게끔 하는 그 어떤 것’을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우시아의 라틴어 번역인 ‘수브스탄티아’를 사용했는데, 당시 법률용어로 이 말은 개인이 갖는 ‘소유권’을 뜻했다. 그 사람의 소유권이 그 사람을 법률적으로 그 사람이게끔 한다는 의미였다. 로마제국에서는 아버지의 권한을 아들들이 공동 소유했기 때문에 수브스탄티아라는 용어는 성부가 성자,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소유하는 신적 권능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테르툴리아누스가 만들어 설명한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 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다.
우리는 구속경륜의 새로운 뜻을 간직하자. 이 신비로운 뜻은 하나의 본질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셋은 지위가 아니라 정도에서,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서, 능력이 아니라 외양에서 나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분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정도와 형식과 외양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하나의 본질이며 하나의 조건이며 하나의 능력을 갖는다.
이렇게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에서 종말까지 오직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역사 안에서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는 이레나이우스의 ‘구속경륜’이라는 개념이 삼위일체론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게 된다. 본질적으로 하나인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자신 안의 세 위격을 단계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듯이 성자가 생겨나고, 이어 성령이 발출되었다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설명했다. 이러한 주장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부에서 성자가 나왔으니 ‘아들이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도 말했다. 세 위격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삼위가 어떻게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한 사람은 오리게네스였다.
*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그리스 고전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 덕에 오리게네스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을 접하면서 자랐다. 소년이 되어 당대 최고의 신학자인 클레멘스의 신앙입문학교인 ‘카테케시스’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202년 17살이 되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아버지가 순교한다. 오리게네스는 자신도 순교하겠다고 관원을 찾아가려 했을 만큼 불같은 신앙을 가진 자였다.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순교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의 순교에 대한 열정은 유별났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순교를 권면하였고, 나중에 순교자들의 수난이 그리스도의 수난처럼 다른 사람들을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오리게네스는 스승 클레멘트가 박해를 피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자 203년부터 18세의 나이로 성서와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박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210년경 25세가 되었을 때 암모니오스 사카스 아래 들어가 5년 동안 플라톤 철학을 배웠다. 훗날 플로티노스가 이 스승을 찾아오기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오리게네스는 평생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헐벗고 굶주렸으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않았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와 기도에 매진하였고, 성욕을 잠재우려 맨 바닥에서 잠을 잤다. 그에게는 강철같은 사람이라는 ‘아다만티우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서른살 전후에 이미 유명해진 그는 로마, 팔레스타인, 안디옥 등에서 초청에 응해 강연을 했다. 한번은 팔레스타인에서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드로스와 가이샤라의 감독 테옥티스투스가 그를 장로로 장립하였는데, 평소 그의 명성을 시기하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오스가 이를 빌미로 그를 정죄하게 된다. 이유는 알렉산드리아 교인이 팔레스타인에서 장로가 된 것이 위법이라는 것과 사탄도 종말에는 구원받는다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이 이단이라는 것, 그리고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 23:1)라는 구절을 근거로 고자는 장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마 19:12)라는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서 스스로 고환을 절단하였다. 그는 결국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가이사랴로 갔고, 그곳에서 신앙입문학교와 부속도서관을 세우고 후진양성과 학문에 전념한다. 그는 니케아 이전 그리스도인들을 통틀어 가장 박식하고 가장 수준 높은 학자였다. 플라톤주의적 주장을 너무 강하게 한 탓에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받기도 했지만 오리게네스는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와 함께 기독교 사상사에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250년 오리게네스는 로마의 박해로 인해 투옥이 되었고, 모진 고문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254년 두로에서 사망한다.
삼위일체론과 연관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스승이 클레멘스였고, 암모니오스 사카스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살던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0년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가 도서관을 세우고 훌륭한 학자들을 모아서 학문을 권장한 이래 문화적 측면에서는 로마와 안디옥을 뛰어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였다.
암모니오스는 그의 제자 플로티노스 덕에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졌지만, 실상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은 중기플라톤주의 사상이다. 우리는 2, 3세기에 유행했던 플라톤 사상들을 중기플라톤주의, 후기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로 구분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17세기 라이프니츠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플라톤주의 사상들의 공통 특성은 플라톤 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 사람들의 종교적 요구들을 대폭 수용한 탓에 신비주의 경향을 띈다는 것이다.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그리스 철학은 점점 종교화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 이성의 힘으로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철학자들 대부분이 신비주의로 기울어져 종교 형태의 사상을 만들곤 했는데, 신피타고라스주의, 중기, 후기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 등이 그 예이다.
암모니오스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보다 조금 전 시기의 알비누스의 교설을 보면 암모니오스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신에 대한 오리게네스와 플로티노스의 사상과 알비누스의 교설에 같은 용어와 내용이 있다는 것이 그러한 추론을 뒷받침한다.
*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알비누스는 신을 제일신(protos Theos), 정신(nous), 영혼(psyche)으로 구분했다. 먼저 ‘일자’라고도 불리는 제일신은 ‘부동자’이다. 이 제일신은 자신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을 생성하거나 작용하지 않는다. 제일신은 오직 자기로부터 산출된 ‘정신’을 통해 사물들을 생성하고 ‘영혼’들을 통해 사물들에 작용한다.
이 체계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신의 영원한 관념으로서 모든 사물들이 그것에서 창조되는 틀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eidos)는 이데아의 복사물로서 사물들에 종속된다. 이러한 알비누스의 사상은 플로티노스의 일자 형이상학과 매우 흡사하다. 결론은 이렇다. 암모니오스의 제자인 플로티노스와 오리게네스는 알비누스가 설파한 것과 같은 중기 플라톤주의를 같은 스승에게서 20년의 시차를 두고 교육 받았다. 두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켜 나갔는데, 오리게네스는 그것을 삼위일체론의 틀로 사용하였고, 플로티노스는 일자 형이상학을 구축하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신학과 철학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두 사람이 전혀 교류가 없었는데도 거의 유사한 내용의 사유를 하게 된 이유이다.
‘원리론’에서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내용을 중기플라톤주의에 의거해 정리하였다. 그에게 성부는 플라톤의 선 자체, 알비누스의 ‘제일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동일하고, 성자인 말씀은 플라톤의 창조주(demiurgos),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정신’에 해당하며, 성령은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영혼과 같은 것이었다. 오리게네스는 신학 스승인 클레멘스를 통해 이미 터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라는 신학 용어와 교설을 알고 있었다. 또 철학 스승인 암모니오스 사카스를 통해 제일신, 정신, 영혼이라는 중기플라톤주의의 철학적 용어와 사상도 배웠다. 오리게네스가 ‘원리론’을 통해 한 일은 내용이 부실했던 삼위일체론을 중기플라톤주의 사상으로 채우고 체계화한 일이었다.
이것은 쉬운 일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초기 기독교의 사상가들은 ‘성부’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일위’로 인식하기보다, ‘만유의 창조주인 야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존재가 창조주라는 것은 모세만이 아니라 플라톤, 알비누스, 플로티노스에게도 계속 언급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 교설에 따르면 그들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존재, 곧 창조주는 ‘최고의 신’이 아니라, 그로부터 나온 제2원리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야훼 하나님을 창조주(demiurgos)일 뿐 아니라, ‘최고의 신’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인과 플라톤주의자들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최고의 신이 제2원리로 격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 플라톤주의자들은 절대적 초월자이자 불변자인 일자가 직접 창조라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영원불멸한 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리게네스만이 아닌, 이후 삼위일체 논쟁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전까지 고대 기독교 사상가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갈등이었다. 이것을 기독교적 용어로 바꾸자면,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여기서 두 상반된 입장을 동시에 취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들은 오리게네스 좌파와 오리게네스 우파가 되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고 로고스는 하나님의 ‘내적 언어’로서 모든 존재의 창조 원리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을 수는 없으며,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 이 교설로 플라톤주의의 유출설과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이 동시에 거부되고, 하나님은 영원불변한 세 위격이라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주장되었다. 이것이 후일 서방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이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해, 아버지만이 ‘자존의 신’이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양상적 군주신론자들과 싸울 때 그러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이자 얼굴이며 본질이지만, 아버지 자신은 아니며, 오직 구원 사역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터눌리아누스의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되살아난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 등식’이 성립해 후일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좌파’의 입장으로 자리 잡는다.
중기 혹은 신플라톤주의적 종속설은 창조주를 제일신과 세계 사이에 있는 ‘중간자’로 파악함으로써 한때 기독교 교리에서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제’로서의 그리스도로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이 이론은 아들의 신성에 제한을 두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동일하면서 종속적인지 설명하기보다 두 입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계시와 철학, 기독교와 플라톤주의에 각각 한 발씩 딛고 양쪽을 절충한 것이 오리게네스 신학의 두드러진 장점이었다. 하지만, 이 ‘양다리 걸치기’는 오리게네스에게는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론의 장점은 치명적 단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리게네스 좌파와 오리게네스 우파에 의해 삼위일체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불쏘시개가 되고 만다.
* 삼위일체 논쟁
삼위일체 논쟁은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드로스와 장로 아리우스 간에 벌어졌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와 안디옥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오리게네스 좌파 간의 세력 다툼이었다. 오리게네스 좌파의 대표인 아리우스는 아들에게는 시작이 있으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무로부터 창조 또는 조성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일자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플라톤주의의 이론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아들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그 자신은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피조물이고, 엄격한 의미에서는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한마디로 예수는 반인반신의 존재이거나, 양자그리스도론들이 주장하던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 리비아 종교회의’를 열고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정죄하고 면직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굴복하지 않고 니코메디아의 감독 에우세비오스의 보호 아래 자신의 세를 집결해 맞섰다. 이렇게 벌어진 논쟁은 교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갔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에서 첫 번째 교회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황제는 1,800여 명의 감독들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당시 감독들의 6분의 1정도가 니케아에 모였다. 그 이유는 전임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때문이었다.
아리우스는 장로이지 감독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 논쟁을 벌일 수 없었고, 그래서 오리게네스 좌파들은 니코메디아의 감독 에우세비오스를 앞세워 아리우스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에 맞선 오리게네스 우파들은 알렉산드로스 감독을 중심으로 대항하였다. 이때 갓 서른을 넘긴 아타나시우스도 그 현장에 있었다. 그는 본래 신학자보다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시대가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만들었다.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그것은 오직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구원이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직 불멸자이며 영원자인 하나님 한 분만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세주란 당연히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이 주장이 이후 ‘신의 세속화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라는 동방정교 신학의 중추가 되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타나시우스가 사벨리안이라고 몰리면서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을 강조한 이유였고, 이것이 그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사모사타의 바울주의자’(양자그리스도론자)로 몰면서까지 반대했던 이유이다.
“하나님 안에 마치 사람들처럼 서로 분리된 세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이교도들처럼 여러 신을 섬기게 된다. 오히려 마치 샘과 그것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이 비로 두 가지 형태와 이름을 지닐지라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옳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다.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시고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샘이 시내가 아니고 시내가 샘이 아니지만, 둘은 하나이고 같은 물이 샘에서 시내로 흐르는 것같이 신성도 구분 없이 성부에게서 성자에게로 부어진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아들은 하나님이며, 기독교는 유일신교라는 것이 아타나시우스의 생각이었다.
논쟁이 길어지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종교 자문관이었던 코르도바의 감독 호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용어를 신조 안에 넣을 것을 제안했다. 알렉산드로스를 비롯한 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하여 ‘호모이우시오스’(homoiouios)라는 용어를 내세웠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아리우스주의가 배격되고 반 아리우스주의가 채택되었다. 그렇게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다. 핵심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곧 일자=창조주라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동등성 등식이었다.
공의회가 끝난 후 황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면직시키고 갈리아로 유배시켰다. 하지만 니케아의 호모우시오스에 대한 해명이 없었기에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이 와중에 황제가 죽었다. 이제 니케아에 반대하는 세력이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다시 들고 일어나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도 두 번이나 면직되어 유배와 망명을 가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교회사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1054년이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니케아 이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
이 세 사람은 니케아 신앙을 보존하고자 했다. 이들 중 바실리우스는 학문 뿐 아니라 자선에도 뛰어나 ‘대 바실리우스’라고 불릴 만큼 존경을 받았다. 그는 부유하게 태어났으나 평생 동안 스스로 가난하게 살았다. 평생 옷 한 벌과 빵과 소금만으로 지냈고, 가이사랴 외곽에 대규모 빈민보호시설을 짓고 문둥병자들을 돌보며 그들과 입 맞추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위일체 논쟁 당시 신학자들은 같은 내용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단지 용어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모는 일도 생겨났다. 동일본질의 수호자였던 아타나시우스도 말년에는 유사본질을 주장한 앙키라의 바실레우스를 인정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정확한 개념 정의가 안 된 용어에서 오는 심각한 폐단을 그가 잘 알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당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위격’(prosop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휘포스타시스’(hypostasis)와 ‘우시아’(ousia)를 구분할 줄 몰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그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음을 나중에야 알아차린 것이다. 말년의 아타나시우스는 이 같은 혼란을 정리할 전문용어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이 일은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에게로 넘어갔다.
물론 그들이 삼위일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전문용어나 이론을 개발하는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기존 용어에서 애매함을 제거함으로써 삼위일체 개념을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다.
*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위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휘포스타시스’와 본질이라는 말로 사용한 ‘우시아’라는 단어는 그때까지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여러 철학자들과 그 학파들이 전문용어로 사용하면서 제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한 단어이기에 정확한 개념을 구사해야 하는 학문에서는 방해의 요소가 있었다.
먼저, 우시아를 보자. 그리스인들에게 이 용어는 일상적으로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것, 즉 자산을 의미했다. 하지만, 철학용어로서 우시아는 ‘실제로 있는 것’을 뜻했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개념이 ‘이데아’이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그것으로 있게 하는 원인이자 모든 존재물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영원불멸한 실체이다. 즉 플라톤에게는 이데아만 실제로 있는 것이고 모든 존재물은 단지 이데아의 분여물, 곧 모상(eikon)일 뿐이다. 우시아는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실체’이고, 우리의 관점에서는 오직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존재물의 ‘본질’일 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완전하고 불변하며 단일한 실체로서 개별적 사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데에 반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시아는 현실세계에 있는 개개의 사물 안에 존재함으로써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형상, 곧 에이도스(eidos)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말할 때에는 플라톤이 우시아로 여긴 ‘보편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시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가시적 실체’를 의미한다. 이렇게 ‘우시아’는 원래 ‘실체’를 의미하지만, 4세기 당시에는 플라톤이 말하는 ‘가지적 실체’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가시적 실체’, 즉 본질과 실체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플라톤적 의미로, 때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로 혼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휘포스타시스는 어땠을까? 이 용어는 일상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배후에 있는 실체’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래서 ‘계획’, ‘의도’, ‘기본 개념’ 등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가 스토아 철학에 와서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우시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 또는 ‘우시아에 의해 실체를 얻은 것’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시아’를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가지적 실체’로, ‘휘포스타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처럼 우시아가 개별 사물에서 나타나는 ‘가시적 실체’로 인정했다. 즉 스토아철학에서 ‘휘포스타시스’는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우시아’인 것이다. 나중에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에 의해 위격을 나타내는 ‘페르소나’의 의미로 사용된 이 용어가 스토아 철학이 강했던 서방교회에서는 오히려 ‘본질’ 또는 ‘실체’를 뜻하는 ‘수브스탄티아’(substantia)로 오해된 것은 바로 이 이유이다.
그런데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휘포스타시스를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정신’과 ‘영혼’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다. 그럼으로써 이 용어에서 ‘가시적 실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가 제거되고,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개별적 사물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궁극적 존재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우시아로부터 유출되었지만 우시아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원인이되 사물을 초월해 존재하는 ‘가지적 실체’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물들의 궁극적 ‘본질’을 뜻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스토아에서 말하는 ‘가시적 실체‘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본체’라고 표기한다. 결국 4세기 당시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 역시 ‘실체’와 ‘본질’ 즉, 가시적 실체와 가지적 실체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고, 어떤 때는 스토아적 의미로, 어떤 때는 신플라톤주의적 의미로 혼용되었다.
정리하자면, 4세기 당시 그리스어 우시아는 플라톤적 의미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 즉 본질과 실체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런데 휘포스타시스도 신플라톤주의적 의미와 스토아 철학적 의미, 곧 본질과 실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철학적 문헌들이나 심지어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서도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가 종종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 두 단어가 똑같이 라틴어 ‘수브스탄티아’로 번역되기도 했다. 또 라틴어 페르소나도 때로는 우시아로 때로는 휘포스타시스로 번역되었다. 한마디로 아무렇게나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도 ‘삼위일체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본질 곧 에센티아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어로는 우시아이며 라틴어로는 수브스탄티아인 것이다. 그들은 휘포스타시스라는 말도 쓰는데,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의 뜻을 나는 알 수 없다. 그리스어로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은 “mia ousia, treis hypostaseis"라고 말하지만, 라틴어로는 ”한 에센티아, 세 수브스탄티아“(una essentia, tres substantia)라고 한다.
이 글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도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적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고, 휘포스타시스가 수브스탄티아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극심한 언어적 혼란 때문에 당시 동방교회 사람들에게는 테트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 정식이 어떤 형태의 그리스어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삼신론과 단일신론 사이에서 혼란을 가져왔던 것이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사용한 “세 휘포스타시스로 존재하는 하나의 우시아”(treis hypostaseis, mia ousia)라는 표현도 다른 사람들에게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세 휘포스타시스가 세 본질을 뜻하는지 세 실체들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우시아를 플라톤적 의미로 이해할지,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이해할지를 혼동했고, 휘포스타시스를 스토아철학적으로 이해할지 아니면 신플라톤주의적으로 이해할지를 혼동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도 이 같은 언어적 혼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는 한 본체만 있다고 했으나 다른 의미에서는 세 개의 본체도 동시에 주장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얼마든지 삼신론이나 단일신론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이런 언어적 혼란을 정리하였다. 그들의 원칙은 삼위일체를 단호하게 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우시아 - 본질, 휘포스타시스 - 실체, 곧 본체, 이렇게 하나님을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treis hypostaseis, mia ousia)이라고 선포하였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잘 들으면 당신들은 곧바로 하나의 불빛과 세 개의 불빛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개별성 또는 본체(hypostasis)로 보면 셋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위격(persona)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같은 뜻이므로 더는 명칭을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본질(ousia) - 즉 신격에서는 하나다. 언어적으로 표현하면, 나뉨이 없이 나뉘기 때문이다. 또한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있다.
이 선포는 ‘세 본체’라는 말 때문에 삼신론 경향을 띈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말한 ‘휘포스타시스’를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로 해석했을 때 가능한 오해이다. 바실은 이렇게 말했다.
본질(ousia)과 본체(hypostasis)의 관계는 공통된 것과 고유한 것의 관계와 같다. 우리 각자는 본질이라는 공동용어에 의해 존재에 참여하며,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런저런 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본질이란 용어가 선, 신성 또는 유사한 속성처럼 공통적이라면, 위격은 아버지 됨, 아들 됨, 또 거룩하게 하는 능력의 고유한 특성 안에서 직관된다......따라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에 고유한 것을 덧붙여야 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신성은 고유한 것이며 아버지 됨은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을 결합하여 ‘나는 성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들을 고백할 때도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과 고유한 것을 하나로 묶어서 ‘나는 성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해야 옳다. 이와 같이 성령에 대해 말할 때도 호칭에 알맞게 불러 ‘나는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한 분 신성 안에서 하나 됨이 온전하게 보존되며, 이와 동시에 각자에 대해 인지되는 고유한 것들의 차이를 통해서 위격들의 고유성이 고백된다.
이렇게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는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한 본질’이라는 새로운 정식을 구축하는 데에 오리게네스 좌파와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이 정식을 해석하는 데에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도 무시하지 않고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신적 본질이 다른 세 가지 고유한 존재양식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삼위는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 있기 때문에 오직 서로의 관계에 의해서만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것이 ‘니케아 신조’를 다시 확인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핵심이 되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그는 399년부터 419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총 열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론’을 썼다. 먼저 주목할 것은 그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터툴리아누스의 정식에서 위격을 나타낸 용어 페르소나와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 수브스탄티아가 모두 하나님에게 적합하지 않음을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본질’을 뜻하는 말로 쓰인 라틴어 수브스탄티아가 일상에서 보통 ‘속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수브스탄티아란 그의 위대함, 전능함, 참됨, 선함, 아름다움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포함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오직 존재라는 하나님의 본질만을 나타내는 표현인 ‘에센티아’(essentia)가 더 적합하다고 했다. 또한 위격을 나타내는 페르소나 역시 하나님에게는 적합하지 않은데, 이 용어는 일상에서 보통 ‘단일 개체’를 뜻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에서도 상이한 존재인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이러한 지적은 ‘삼위의 통일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그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는 우선 삼위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게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 1:11)라는 소리가 들렸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사람들은 삼위일체가 어떻게 성부만이 음성을 냈으며, 삼위일체가 어떻게 성자만이 처녀에게서 그 육신을 창조했을까 하고, 삼위일체가 어떻게 성령만이 나타난 그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 냈을까 하고, 이 일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만일 이 일들에 삼위일체가 함께 행동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삼위일체는 불가분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며, 성부가 어떤 일을, 성자가 어떤 일을,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떤 일을 함께 하시고, 어떤 일은 따로 하신다면, 삼위일체는 불가분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실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음성을 냈으며, 함께 처녀에게서 육신을 창조했고, 함께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삼위의 통일성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강조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마치 사벨리우스주의자처럼 ‘단일신론’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내포된 듯 보이기도 한다. 만일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삼신론’에 빠졌다고 오해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반대편에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의 동등성’ 또한 유별나게 강조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성서에서 아버지보다 아들이 열등해 보이는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서 해명하는 데 ‘삼위일체론’ 초반부의 상당 부분을 할애할 만큼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오리게네스 좌파가 종속설을 주장할 때 근거로 삼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라는 구절을 그가 인성을 취한 ‘종의 형체’로서 한 말일 뿐, 성부에 대한 성자의 열등을 나타낸 말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삼위는 구분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는 오직 ‘관계에 의해서만’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만 연합해 있다고 대답한다. 카파도키아 세 교부의 주장처럼, 이른바 ‘관계설’이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다.
하나님에 대한 말이 모두가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 같은 것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며,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라 부르고,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상대에 대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에 아퀴나스가 ‘하나님 안에는 오직 관계에 따른 구분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때나, 칼빈이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아들이라고 불린다‘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말한 것이다. 가령 우리 손에 종이 한 장이 있다고 하자. 이 종이의 앞면과 뒷면은 분리할 수 없이 하나로 붙어 있다. 또 어느 편을 앞면 이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머지 한 면이 뒷면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이 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관계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관계설의 핵심이다.
삼위일체론과 연관해서 많이 질문되는 물음 중 하나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왔다고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아들이 있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터툴리아누스조차 아들이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의 4세기에 동방정교 아리우스파의 에우노미우스가 이 물음을 던지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존재는 또다시 낳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바로 그때까지는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다.” 이에 맞서 대응해야 했던 바실리우스마저 그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출생”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출생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나에게 묻지 말라”라면서 정면대결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였다면 다른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아들은 태초부터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중 하나를 아버지라고 할 때 다른 하나가 아들이 된다. 따라서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계설은 이처럼 에우노미우스의 질문을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위대한 업적은 따로 있다고 하겠다.
*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용어들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처럼 용어 정리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가 육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이성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인간의 한계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그것은 삼위일체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또는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식을 떠나 ‘지혜’로 나아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세계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즉 ‘삼위일체 흔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몰두하였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피조물의 세계에서는 오직 유비로 나타난 흔적으로만 하나님의 삼위일체 관계를 확인하거나 우리 삶에 대한 지침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8권에서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 ‘삼위일체 흔적’이 들어 있다고 했다. 모든 사랑에는 사랑하는 자(amans), 사랑받는 자(quod amatur), 사랑(amor)의 세 요소가 있고, 그것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9권에서는 정신(mens)과 정신에 대한 사랑(amor eius), 정신에 대한 지식(noititia eius)이 삼위일체 흔적임을 밝히고, 10권에서는 기억(memoiae)과 이해(intellegentia)와 의지(voluntas)에서 삼위일체 흔적을 발견해 제시한다.
그는 이 밖에도 다른 유비의 목록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주장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에서 사랑(성령)에 의한 동등한 사귐과 교제로서의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하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성령은 두 분 중 한 분이 아니시다. 두 분은 그로 말미암아 결합되며; 그로 말미암아 낳은 이가 난 이를 사랑하고, 난 이가 낳은 이를 사랑하며; 그로 말미암되 그것은 그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본질로 인함이며; 위로부터 온 은사로 인함이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 인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엡 4:3) 힘써 지키신다. 우리는 은총을 받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향해서 이 일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령은 무엇이든 간에 성부와 성자와 공통적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사귐 자체는 본질공동체적이며 영원동등적이다. 그리고 이 친교를 우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렇지만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그리고 이 사랑은 또한 본질적 존재다. 하나님이 본질적 존재시며, 성서 기록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16)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기억, 이해, 의지의 통합에서 발견된다는 ‘심리적 유비’이다. 반면에 그가 삼위일체로부터 ‘인간 공동체의 원형’을 이끌어 낸 ‘사회적 유비’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인간사회의 바람직한 형태를 찾는 이론은 주로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를 계승한 동방신학자들이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글을 보면 뭔가 잘못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그것을 통해 그분들은 우리가 우리들 서로간의 친교를 세우고, 그분들과의 친교도 세우기를 원하셨다. 둘을 하나로 만드는 그 선물을 통해 그분들은 우리를 하나 됨으로 이끌기를 원하셨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선물이신 성령을 통해,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며, 그분을 통해 기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하나님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권고하였다. 이러한 사유를 감안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방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회적 유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현대에 와서야 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인간 공동체’의 모델을 찾으려 시도하기 시작했다. 위르겐 몰트만, 레오나르도 보프 같은 신학자들이다.
*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몰트만은 하나님의 단일한 통일성을 주장하는 서방신학 전통의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다원적 삼위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내세운다. 몰트만은 자신의 주장을 동방신학의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에서 가져왔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내주, 상호침투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몰트만은 이 주장의 성서적 근거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에서 찾았다.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리고 삼위를 하나로 묶는 이 사랑은 단순히 자신과 동일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종사랑’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까지 받아들이고 포괄하는 ‘이종사랑’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의 이러한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복음적 사랑’(caritas)이 플라톤이 규정한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라는 전통적 주장과도 궤를 같이 한다.
에로스란 대상이 가진 무엇 때문에 그 대상과 합일하여 ‘동일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이다. 따라서 ‘~ 때문에 하는 사랑’ 또는 ‘인간적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몰트만이 말하는 동종사랑이다. 하지만 아가페는 서로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됨’을 이루려는 욕구이다. 따라서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 또는 ‘신적 사랑’이라고 한다. 몰트만이 말하는 이종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몰트만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도 이런 의미에서 에로스와 아가페를 말했다.
에로스를 낭만적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타인 속으로 자신을 용해한다든가 더 높은 통일 속으로 타인과 함께 용해되려는 욕망 속에서 성립한다. 이와 달리 아가페는 용해를 넘어서서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존재들의 세계 속에서만 자리 잡을 수 있다.
요컨대, 아가페는 여러 가지 악기들이 자신의 역할을 함으로써 다성성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교향악과 같은 것이다.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서양음악 사이에는 예사롭지 않은 구조적 유사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17세기 말 유럽에서 완성되어 서양문명에 널리 퍼져 있는 조성음악을 말하는데, 이 음악의 특징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음이 동시에 울려 화성을 이룬다는 점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이종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삼위뿐 아니라, 그 피조물에게까지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매우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동종사랑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내세워, 인간은 신적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내주, 상호침투적 사랑 안에서 완전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실현하도록 부름 받았고, 인간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선언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그것(성령)을 통해 그분들은 우리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세우고, 그분들과의 친교도 세우기를 원하셨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연상케 하는 주장이다. 몰트만은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님의 세 인격이 상호내주를 통해 하나의 공동 공간을 형성하는 것처럼, 피조물 차원의 공동체 역시 상호 자기발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 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해석을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이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일자의 유일성보다 더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유일성은 단일성이 아니다. 오히려 통일성이다. 이 통일성 안에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 담겨 있다. 즉, 기독교의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이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배타성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eulogiachurch/articles/33218?art=ZXh0ZXJuYWwtc2VydmljZS1uYXZlci1zZWFyY2gtY2FmZS1wcg.eyJhbGciOiJIUzI1NiIsInR5cCI6IkpXVCJ9.eyJjYWZlVHlwZSI6IkNBRkVfVVJMIiwiY2FmZVVybCI6ImV1bG9naWFjaHVyY2giLCJhcnRpY2xlSWQiOjMzMjE4LCJpc3N1ZWRBdCI6MTc0MjE2Mzk0OTI5M30.PT7XhIrYCyVzce7gqbMMz0hP65DAd-6PIrU3f2LH2bk&useCafeId=false&tc=naver_search&query=%EC%95%94%EB%AA%A8%EB%8B%88%EC%98%A4%EC%8A%A4%2B%EC%82%AC%EC%B9%B4%EC%8A%A4%2B%ED%8F%AC%EB%A5%B4%ED%94%BC%EB%A6%AC%EC%98%A4%EC%8A%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