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의안대군(宜安大君, 1382년 ~ 1398년 음력 8월)은 조선 태조(太祖)의 왕자(8남)로, 시호는 소도(昭悼), 본명은 이방석(李芳碩)이다. 태조의 왕비(제2비)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소생이다. 조선 최초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폐위되어 향년 17세로 암살당한다. - 생애 - 세자 책봉 1392년 음력 8월 20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짧은 세자 기간 중 부인 현빈 유씨(賢嬪 柳氏)와 내시 이만(李萬)의 간통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유씨와 이만은 처벌[1]받고, 세자는 현빈 심씨(賢嬪 沈氏)를 새 부인으로 맞게[2] 된다. 1396년 음력 8월 13일에는 세자의 어머니 현비 강씨(顯妃 康氏·신덕왕후)가 사망하였다. - 제1차 왕자의 난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의 주도로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세자는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었으나,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 기병이 꽉 찼다는 봉원량(奉元良)의 보고[3]에 군사 대응을 포기하고 만다. 정도전, 남은, 박위 등 정안군에 부정적인 세력이 제거되고 난 뒤, 정안군 세력은 세자를 방석에서 영안군 이방과(永安君 李芳果·후일의 정종)로 교체한다. 유배되기로 한 폐세자 방석은 잠시 후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에서 나왔고, 이거이(李居易) 등 정안군 세력은 도평의사사와 합의하여 자객을 보내 방석을 죽이게 된다. - 가족 관계 •부 : 제 1대태조 •모 : 신덕고황후 강씨(神德高皇后 康氏)◦형 :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동생 : 경순공주 (慶順公主), 하가(下嫁) 개국공신 흥안군 이제(開國功臣 興安君 李濟) •정부인 : 현빈 유씨(賢嬪柳氏) - 폐출 •계부인 : 삼한국대부인 부유 심씨 현빈(三韓國大夫人 富有沈氏 賢嬪, ? - 1448년) -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1349년 - 1398년)의 딸◦장남 : 원손(元孫, 1398년 - ?) - 출생 기록만 남겨져 있다. ◦차남(양자)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1426년 - 1457년) - 조선 제 4대세종의 6남 ◦3남(양자) : 춘성군 도효공 당(春城君 悼孝公 ?, ? - 1485년 - 조선 제 4대세종의 서5남 밀성군(密城君)의 아들 - 사후 - 명예 회복 1406년 음력 8월 3일, 태종(太宗)은 방석에게 소도군(昭悼君·또는 소도공), 방번에게 공순군(恭順君·또는 공순공)의 시호를 추시한다. 1680년 음력 7월 27일, 숙종(肅宗)은 신원정치의 일환으로 방석을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방번을 무안대군(撫安大君)으로 추증하였다. - 무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의안대군방석묘역 내에 위치해 있다. 1998년 4월 13일에 경기도기념물 제 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의안대군 (宜安大君) 묘소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산12 의안대군 [宜安大君, 1382~1398]
이름 방석(芳碩). 시호 소도(昭悼). 1392년(태조 1) 정도전(鄭道傳) 등의 추대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때,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의 이복형들이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되는 도중 동모형(同母兄)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審)과 함께 방원 일당에게 살해되었다. 뒤에 의안군(宜安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큰길가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구불구불 걸어오면 묘소 아래 입구에 세워 놓은 이정표가 묘소가 있는 쪽으로 손짓을 하고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이 묘소가 위치한 곳 만큼이나 호젓함을 자아내고 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한가.... 지금이야 차길이 생기고 마을이 생기고 농사를 짓느라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 가까워 보이지만 옛날 옛적에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만큼 오지 산골이 아니었던가....짧은 생애만큼이나 외로울법도 하다.
묘역 정면
백호방에서 본 묘역 전경으로 앞쪽이 부인 심씨 묘이고, 뒷쪽이 의안대군 묘이다.
청룡방에서 본 묘역 전경
의안대군 묘 뒤에서 본 조안산과 주변 보국이 좋다.
입수처에서 본 묘역 전경
입수처에서 본 묘역과 조안산 전경
백호방 문인석
청룡방 문인석
비록 큰 자리는 아닐지라도 정혈을 깔고 앉은 것과 그러지 못한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점혈은 근처까지는 왔지만 재혈에 아쉬움이 있는 곳이다. 아니..당시에 산역을 주도한 인물들의 마음씀이가 이럴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의안대군이나 부인이나 모두 정혈처를 차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사진출처] [경기도 광주시] 의안대군 이방석 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