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흔을 처음 만난 순간 나는 같은 남자끼린데도 그에게 끌렸다. 혹 불교를 욕되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승복을 걸치고 산속의 절에 죽치고 앉아 세월을 죽이며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만 찾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대가 잘 갖춰진 체구에 적당히 발달된 근육질이며 호남형의 얼굴은 쉰 중반의 그를 청년처럼 보이게 했다. 난 그가 중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의 언행은 폭력조직 세계에서 ‘오야붕’에게 충성맹세를 하는 것처럼 비쳤다. 우리 5인이 벌인 사업을 자진해서 돕겠다고 큰소리를 쳐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들여온 만 개의 연등을 창고에서만 잠을 재운지 벌써 3년이 지나 자금회전도 필요했지만 그보다 제품의 부식이 더 걱정되었다. 그의 중학교 선배인 재직 때의 J부장이 그를 우리 법인에 소개하면서 일은 벌어졌다. “만 개쯤이야 멀리 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심더. 구인사에서 마 법주사로 해서 한 군데만 더 갔다 카믄 바로 끝납니더” ‘부처님에게 매달려 불도에 정진하면 저런 자신감도 생기는 것일까. 야아, 이 친구 대답 한 번 시원시원하구나!’ 그와의 상견례 장소에서 배갈로 불콰해진 우리 동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법인의 대표를 맡은 나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 골라도 저렇게 완벽한 사기꾼을 골랐을까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 이 엉터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서로 간에 상처 없이 잘 끝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아예 저는요, 돈 같은 건 전혀 필요 없심더. 그것만은 안심하이소. 모든 건 일을 일단 끝내놓고 계산하입시더. 알겠십니꺼?” 우리 법인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허술하고 취약했다. 동업법인의 사업구상에서부터 동업자 모집까지를 총괄한 선배는 사람만 좋았지 귀가 여려서 사업을 할 위인은 못되었다. 그런데다 이수흔의 두뇌는 그의 번득이는 눈망울만큼이나 사악하고 간교했다.
이수흔은 우리 조직의 허점을 완전히 간파하고 촉수를 들이댔다. 법인 차원에서 뜬구름 잡듯 허무맹랑한 그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일이 잘못되면 대표가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 있게 떠벌인 사찰을 돌면서 면담할 종무소 관계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구입하겠다는 연등 수량을 적고 확인을 받을 수 있는 서식을 급하게 만들었다. 이수흔이 아무리 사기행각에 능하더라도 이렇게만 대비한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싶었다. 대표가 미리 알고 서식을 내밀면서 빡빡하게 나오자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있는 선배에게 그는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삼사백씩 두세 차례에 걸쳐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우습게 빼갔다. 그렇게 큰소리 뻥뻥 쳐대던 절은 어디를 어떻게 돌았는지 일언반구도 없었고 단 한 개의 연등도 팔지 못한 것은 물으나 마나한 일이다. 이수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이 무슨 놈의 장사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연산교차로에 있던 사무실을 접었다며 돈을 주고 버려야할 생활쓰레기인 소파와 책걸상 그리고 장식장까지 범어사역에 붙어있던 우리 사무실에다 팔아넘겼다. 사무실 임대료도 제대로 못 낼 정도로 자금압박을 받는 판이라 빼빼한 체격인데도 난 그때 혈압이 올랐고 한동안 밥맛을 잃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재래식 기술로서는 배전선로를 떠받치고 있는 전주 위의 절연체인 애자에 가느다란 금이 생기면 그 개소를 일일이 사람이 올라가 점검해서 찾아내야만 했다. 이때의 어려움은 짙은 안개나 는개 때는 실눈금에서 고장현상을 보이다가도 날씨가 맑아지면 멀쩡해지니 고장진단을 담당하는 전력회사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고장개소를 진단하는 첨단 촬영장비가 전자시스템으로 개발되어 출시되었던 것이다.
신형 진단기기를 우리 법인에 팔겠다고 나타난 이승재 상임고문도 앞의 땡땡이 중 이수흔을 소개한 후배가 소개했는데도 우리 법인에 무슨 손재수가 들었던지 첫 인상에 그는 우리의 믿음을 사고 말았다. 명함에 나온 회사 주소는 서울 필동이었지만 은퇴한 후 고향인 부산에 주로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거구인 그가 뱉어내는 투박한 부산 말투가 믿음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팔겠다는 진단 장비를 차에 싣고 배전선로 밑을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전주 한 본 당 천팔백 원의 돈이 들어온다는 말에는 의문이 갔다.
우리가 그 장비를 갖추게 되면 전력회사의 영남지역 전체를 맡게 된다는데 백만 본 전주에서 간단하게 180억이 굴러들어오는 계산이 나온다. 평생을 전력회사에 몸담았던 사람이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엉뚱한 짓만 해대는 CEO 때문에 전력회사가 벌써 십 여 년째 누적적자에 허덕이고 있기에 난 그렇게 큰돈을 배전선로 진단에 쏟아 부을 여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전력회사는 틀림없이 직영을 할 것이 뻔했다. 부산역 인근 커피숍에서 첫 상담을 나눈 후 한두 달 간격으로 두세 차례 더 만나면서도 난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이번엔 선배도 나의 의견을 존중하며 진단장비 계약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장비 매매를 위한 상담이 난항을 거듭하자 판매하는 회사에서는 마지막 카드로 대구의 업체가 우리와 경쟁사로 나섰다면서 그쪽과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난 단번에 그 계약서가 가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이번엔 엉뚱한 데서 또 일이 터졌다. 우리 5인 동업자에 든 남전사 정 사장이 나서서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3500만원 계약금은 내가 책임지겠다’면서 큰소리를 쳤다. 난 정 사장이 빈손으로 출발해 자수성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의 근면성실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처지라 강하게 만류했다.
그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안타까운 마음 또한 크다. 자본금 일억을 5명의 주주가 분담해서 법인을 설립했다. 당초는 앞에서 언급한 선배가 직장에서 연을 맺은 선후배가 사랑방 같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제안을 했고 3명의 전문 기업인은 이미 답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난 8천만 원보다 1억을 맞추면 더 낫지 않겠느냐면서 자진 참여했던 것이다. 그땐 신재생에너지가 막 떠오르던 때였다. 그래서 ‘그린 코리아’를 표방하자며 회사명을 '그린코'로 정했다.
엘이디 연등 사업은 너무 욕심이 컸던 게 화근이었다. 천 개 정도 들여와서 판매해보고 수입량을 차츰 늘여나갔으면 좋았는데 자본금보다 큰 일억 삼천을 들여 만 개나 구입했던 것이다. 그러고 다른 데서 그 절반 가격에 연등이 거래된 것을 알게 되었고 계약금과 중도금까지 건넨 상황에서 가격을 다시 깎느라 홍역을 치렀다. 그러느라 낙동강을 수없이 건너다녔다. 우리에게 연등을 공급한 회사가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깎인 환급금 지급을 미루고 있는 거래처를 경찰에 고발하자 형사들도 나를 심심찮게 불러댔다. 동업법인을 시작하던 초기에 내가 법인의 대표를 맡은 걸 어디서 들었는지 아내는 “당신은 참 좋기도 하겠소. 안 해본 것 없이 원대로 직함을 다 가져보니…”라고 했다. 혹시 책임지는 문제로 구치소보다 더 높은 담장 안에 남편이 갇히기라도 할까봐 조바심을 내면서도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타들어가는 나의 속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