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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장애인 학살작전, ‘Aktion T4’ 이후 독일의 ‘과거청산’ ①
▲ 나치 시대 장애아동들이 살해된 함부르크-로텐부르크조르트 옛 아동병원 앞에 2024년 설치된 추모시설. 병상에 누운 아이의 형상과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Pauli-Pirat/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전쟁은 끝났다. 나치 독일은 패망했고 수용소는 열렸고, 세계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병원과 요양시설에서 선별해 살해했던 독일 정신의학계도 당연히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고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클레가 증보판에서 새롭게 확장한 제12부 「Die Aufarbeitung」의 광경은 ‘청산’이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보인다. 전후 독일 정신의학계가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자신들이 죽인 환자의 이름을 밝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신의학에 대한 사회의 신뢰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바이에른의 에글핑-하르(Eglfing-Haar) 정신병원에서 약 1년 동안 임시 의료책임자로 일했던 게르하르트 슈미트(Gerhard Schmidt)는 나치 시대 정신병원에서 이루어진 환자 선별과 살해를 조사했다. 그는 이를 『Selektion in der Heilanstalt』로 정리해 1947년에 출판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자이자 신경정신과 의사이기도 했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출판을 권하지 않았다.
더 결정적으로 이를 막은 사람은 슈미트의 스승 쿠르트 슈나이더(Kurt Schneider)였다. 슈나이더는 나치 시대에 에른스트 뤼딘(Ernst Rüdin)이 이끌던 독일정신의학연구소의 임상연구부 책임자를 지냈고, 이 무렵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교수였다. 뒤에 나올 하이델베르크 T4 연구의 칼 슈나이더(Carl Schneider)와는 다른 인물이다. 슈미트의 연구는 결국 1965년에야 출간되었고, 그때는 주목받지 못했다.
슈나이더가 제시한 이유를 클레는 제12부의 제목 자리로 아예 끌어올려 놓았다. 이런 일들을 그토록 세세하게 다시 파헤치는 것은 “정신과 의사의 지위, 나아가 독일 의사 일반의 지위, 그리고 재건과 새로운 신뢰를 얻으려는 노력에 좋지 않은 봉사가 된다(einen schlechten Dienst erweist)”는 것이었다(489).
이 말은 전후 독일 정신의학이 직면한 문제를 기묘하게 뒤집는다. 환자를 죽인 사실이 정신의학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세세하게 밝히는 일이 신뢰 회복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진실 규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런 요청은 슈나이더의 저지보다 앞서 이미 나와 있었다. 같은 에글핑-하르의 정신과 의사 안톤 에들러 폰 브라운뮐(Anton Edler von Braunmühl)은 미군 당국에 바이에른 정신병원에서 벌어진 살해를 가급적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특히 에글핑-하르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적게”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유는 주민들이 치료에 대해 갖는 신뢰가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489).
살해된 환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과 정신의학계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였는가. 클레가 전후사를 시작하며 던지는 질문은 이미 여기서 분명하다.
1. 아이들을 죽였지만 형사처벌은 중단됐다
1949년 4월 19일, 함부르크 지방법원은 19명의 피의자에 대한 형사소추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가운데는 이른바 아동 ‘안락사(Euthanasie)’에 관여했던 의사 바이어(Bayer), 벤츨러(Wentzler), 카텔(Catel)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아이들의 죽음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피의자 대다수는 함부르크-로텐부르크조르트(Hamburg-Rothenburgsort) 아동병원에서 아이들을 죽였고, 그 사실을 다투지 않았다(489).
그런데 재판부는 장애아동을 신고하고 감정하여 이른바 ‘치료권한’을 부여하던 제국위원회 절차(Reichsausschußverfahren)에 대해 “große Genauigkeit”, 즉 대단한 정확성을 갖추었다고 인정했다. 클레는 이 대목 옆에 느낌표를 찍어 놓았다(489). 정확하게 사람을 골라 죽였다는 사실이 범죄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절차의 신중함을 나타내는 말처럼 사용된 것이다.
법원의 논리는 여기서 더 위험한 곳으로 나아갔다. 재판부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와 ‘빈 인간의 껍질(leerer Menschenhülsen)’을 절멸(Vernichtung)하는 일이 “절대적이고 선험적으로 비도덕적(absolut und a priori unmoralisch)”이라고는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표현이 호헤가 쓴 것이라고 판결문 스스로 밝히고 있다(490).
알프레트 호헤(Alfred Hoche)는 1920년 법학자 칼 빈딩(Karl Binding)과 함께 『살 가치 없는 생명의 말살에 대한 허용』을 펴낸 정신과 의사다. 1920년의 학술적 어휘가 1939년 이후의 살해를 거쳐 1949년 서독 법정의 판결문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도 은폐된 채가 아니라, 출처가 명시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재판부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살 가치 없는 생명’의 단축[클레는 여기에 ‘살해!’라고 덧붙인다] 문제는 매우 논쟁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시행을 일반적인 도덕률에 위배되는 조치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490)
전쟁이 끝난 지 불과 4년이었다. 나치 정권이 사람을 ‘lebensunwertes Leben’, 즉 ‘살 가치 없는 생명’으로 분류해 죽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독의 법원은 그 표현을 폐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정 인간의 생명을 끝내는 행위가 일반적인 도덕률에 위배되는지 자체를 논쟁의 영역에 남겨두었다.
▲ 나치의 ‘Euthanasie(안락사)’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뮌헨 인근 하르(Haar)의 추모공간. 옛 에글핑-하르 정신병원에서는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들이 살해됐다. ⓒ no bias/Wikimedia Commons, CC BY-SA 4.0
2. 뉘른베르크가 남긴 공백
이 판결을 1949년 함부르크 판사들의 개별적 오판으로만 읽으면 문제의 크기를 놓치게 된다. 앞선 연재에서 다루려다 멈췄던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이 바로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의사 재판의 재판부는 T4를 실행한 히틀러의 비밀 명령이 당시 독일의 기존 법률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끝내 판단하지 않았다. 국가가 법률을 만들어 자국민 가운데 특정한 사람들을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죽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재판부는 이 질문 자체에는 답하지 않았다.
칼 브란트가 자신이 관여한 T4를 ‘합법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지기보다 비독일인 피해자들의 존재와 브란트의 책임을 근거로 유죄를 인정했다. 같은 시기 진행된 RuSHA 재판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간 판단도 나왔다. 재판부는 리하르트 힐데브란트(Richard Hildebrandt)가 안락사 프로그램에 관여한 사실을 문제 삼으면서도, 그것이 독일 국가의 조치로 독일 국민에게 적용된 것이라는 이유로 이 부분에서는 인도에 반한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2년 뒤인 1949년 함부르크 지방법원의 판결을 이와 나란히 놓아보면 묘한 장면이 보인다. 뉘른베르크 법정은 국가가 자국민을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함부르크 법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살 가치 없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 일반적인 도덕률에 반드시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뉘른베르크의 판단 유보가 곧바로 함부르크 판결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두 재판 사이에 그런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두 판결을 이어서 읽으면 전후 독일에서 무엇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는지는 분명하게 보인다. 누구의 생명을 국가나 의사가 끝낼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완전히 닫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전후 처리의 문제를 단순히 ‘처벌이 충분하지 않았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몇 명을 처벌했느냐의 문제 이전에, 무엇이 범죄인가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일 자체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판사들도 그대로 남았다
클레가 이 판결에 분노하는 이유는 1949년의 판사들이 잘못된 법률판단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곧바로 누가 전후 독일의 법정을 구성하고 있었는가를 묻는다. 그는 알스터도르퍼 안슈탈텐(Alsterdorfer Anstalten) 관련 자료집을 인용한다. 함부르크에서 이런 절차 중단을 결정한 판사들 가운데 일부는 그 자신이 활동적인 나치였다는 것이다.
하인리히 할바우어(Heinrich Hallbauer)는 전쟁 중 프라하 특별법원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을 상대로 여러 건의 사형판결을 내려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이다. 엔노 부데(Enno Budde)는 나치 고위 기능인으로 ‘피와 땅(Blut und Boden)’ 계열의 저술을 다수 남겼고, 1945년 이후 함부르크 지방법원장이 되었으며, 1947년부터 1959년까지는 장애인 시설인 알스터도르퍼 안슈탈텐의 이사회에 앉아 있었다(490).
전쟁 이전과 이후 사이에 법원 건물은 남아 있었다. 판사들도 남아 있었다. 병원도 남아 있었고 의사도 남아 있었다. ‘1945년 5월 8일’이라는 정치적 단절이 곧바로 전문직과 제도의 단절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클레가 보여주는 전후의 풍경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연속성이다.
4. 1961년에도 의사면허를 빼앗지 않았다
형사처벌이 중단된 것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1949년 사법절차가 종결된 뒤에는 이 의사들의 전문직 책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아이를 죽인 사람이 계속 의사로 일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1961년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해 함부르크 보건당국과 의사회가 공동으로 검토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제목부터 명확했다. “Approbation wird nicht entzogen”, 의사면허는 박탈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발표문은 이렇게 밝혔다.
“함부르크 보건당국과 의사회는 공동검토 결과, 관련 의사들을 상대로 행정적 또는 직업법적 조치를 개시할 법적 가능성도 없으며 그러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490)
1949년에는 형사법적으로 처벌하지 않았다. 1961년에는 의료전문직에서도 퇴출시키지 않았다. 여기서 전후 독일의 T4 처리는 단순한 ‘처벌 실패’를 넘어선다. 이 사람들은 처벌을 피한 것만이 아니라 다시 정상적인 의사로 인정받았다. 범죄가 법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 사람이 다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 1946~1947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의사재판(United States v. Karl Brandt et al.)의 피고인들. 이 재판은 나치 의료범죄에 유죄를 선고했지만, 국가가 자국민에게 강제적 ‘안락사’를 법률로 부과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자체는 판단하지 않았다. ⓒ U.S. Army/USHMM, Public Domain
5. 죽음을 기록하지 않는 법
클레가 이어 제시하는 의사 헬레네 손네만(Helene Sonnemann)의 사례는 더욱 섬뜩하다. 로텐부르크조르트 아동병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살해를 위한 주사가 투여됐다. 그런데 병동 간호사들은 이른바 “Sterbehilfespritzen”, 즉 ‘죽음을 돕는 주사’를 환자의 경과표에 적지 않았고, 의사도 병력기록에 그 사실을 남기지 않도록 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손네만 자신이었다(490). 그가 남긴 다른 진술은 이 ‘기록되지 않은 행위’가 실제로 어떤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아이에게 5cc가 넘는 주사를 놓는 것은 아이를 붙잡지 않고서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아이는 저항하고 캐뉼러는 곧바로 부러질 것이다. 게다가 루미날의 기름진 액체는 주입이 어려워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491)
기록에서는 지워졌지만, 행위 자체는 최소한 두 사람이 아이를 붙들고 눌러야 성립하는 물리적 사건이었다. 살해가 이루어졌고, 동시에 살해의 흔적을 의료기록에서 지우는 방식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클레는 전후 손네만의 삶도 추적한다. 그는 1952년 히틀러의 부관이었던 프리츠 다르게스(Fritz Darges)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첼레(Celle) 지역사회의 상류층에서 생활했다. 다르게스는 독일적십자 지역 책임자가 되었고, 손네만은 지역 아동병원의 수석의사로 자리 잡았다(490–491). 이 사실은 2009년 12월에야 지역신문 보도로 드러났다.
이 역시 클레의 중요한 서술방식이다. 그는 가해자나 가담자의 이야기를 1945년에서 끊지 않는다. 1943년에 무슨 일을 했는가와 1953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었는가를 한 사람의 생애 안에 함께 놓는다. 그래야만 ‘청산’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T4 감정의가 전후 학회장이 되다
전후 독일 아동정신의학계를 보아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치 시대의 독일 아동정신의학·치료교육학회(Deutsche Gesellschaft für Kinderpsychiatrie und Heilpädagogik)는 전후 독일 청소년정신의학연합(Deutsche Vereinigung für Jugendpsychiatrie)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조직되었다. 새 이름에서 ‘아동’과 ‘치료교육학’은 사라졌다.
1950년 10월 21일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이 단체를 창립하는 데 참여한 사람 가운데 뷔르템베르크 주 청소년정신과의사 막스 아이리히(Max Eyrich)가 있었다. 그는 1939년에 “어떤 정신박약자도 불임수술을 받지 않고서는 시설에서 나가지 못한다”고 자랑삼아 말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고, 1940년에는 그라페네크(Grafeneck) 살해시설로 보낼 정신병원 수용자를 파악하는 작업에 관여했다(491). 한스 뷔르거-프린츠(Hans Bürger-Prinz)와 게르하르트 쿠야트(Gerhardt Kujath)도 창립에 참여했다.
초대 회장이 된 사람은 베르너 필링거(Werner Villinger)였다. 그는 과거 T4의 감정의(Gutachter), 즉 서류를 보고 환자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판단했던 사람이었다. 전후에는 마르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명예회원으로는 엘리자베트 헤커(Elisabeth Hecker)가 위촉되었다. 클레가 ‘살인적’이라고 규정한 루블리니츠(Lublinitz) 청소년정신의학의 지도급 의무관(Leitende Medizinalrätin)을 지낸 인물이다. 또 다른 T4 감정의 한스-알로이스 슈미츠(Hans-Alois Schmitz) 역시 명예회원이 되었다(491).
학회의 이름은 바뀌었다. 그러나 그 학회를 만드는 사람들의 일부는 바뀌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클레가 말하는 청산(Aufarbeitung)의 문제가 분명해진다. 과거를 반성한다는 것은 단지 나치의 상징을 없애고 기관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누가 전문직의 권위를 다시 차지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7. 살해된 아이의 어머니에게 책임을 돌리다
클레가 슈미츠의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54년 11월 12일, 뒤셀도르프 시(市) 행정책임자가 보상 사건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본(Bonn)의 정신의학 기관에 편지를 보냈다. 한 어머니가 낸 신청이었다. 그의 장애아동 라이너(Reiner)는 1943년 12월 본 청소년정신의학에서 이드슈타인(Idstein)으로 보내졌고, 1944년 1월 다섯 살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시는 환자기록을 잠시 넘겨달라고 요청했다(491).
답장을 쓴 사람이 바로 슈미츠였다. 그는 나치 시대에도 본 청소년정신의학의 책임자였고, 전후에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슈미츠가 사건의 책임을 뒤집었다. “정신적으로 저열한 상태 때문에 위태로웠던 아이를 당 기관으로부터 빼내기 위해 가족 쪽에서 적어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추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491–492).
1954년에 쓰인 문장이다. 아이가 죽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그는 그 아이를 살해 대상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진단 언어를 그대로 다시 쓰고 있다. 언어는 1945년에 폐기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환자기록과 인사기록은 여기서 더 이상 찾을 수 없습니다.”(492)
그런데 클레가 덧붙이는 마지막 장면은 거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슈미츠는 ‘찾을 수 없다’고 답한 바로 그 환자기록철에 자신이 주고받은 이 편지를 철해 놓았다(492). 기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기록이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 빈 리징(Wien-Liesing)에 놓인 에리카 슈탄즐(Erika Stanzl)의 기억의 돌. 1925년 태어난 슈탄즐은 빈-슈피겔그룬트 아동병동에서 1943년 2월 28일 사망했다. 클레는 가해자들의 전후 복귀를 추적한 끝에 그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낸다. ⓒ Joe62/Wikimedia Commons, CC BY-SA 4.0
8. 가해자를 변명하면 피해자를 애도할 수 없다
클레는 이어 전후 독일 아동·청소년정신의학의 역사를 다룬 한 저술을 비판한다. 『Geschichte der Kinder- und Jugendpsychiatrie in Deutschland in den Jahren 1937 bis 1961』, 즉 1937년부터 1961년까지 독일 아동·청소년정신의학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다. 클레는 이를 ‘오도하는 제목’이라고 부른다(492). 제목이 표방하는 그 기간이라면 당연히 나치 시대에 살해된 장애아동들이 중심에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레에 따르면 살해된 아이들은 사실상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한다 해도 사람의 이름과 삶으로서가 아니라 ‘진단’으로 나타난다. 아이를 잃은 부모와 형제자매도 주제가 아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더 좋은 치료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시설에 보냈다. 그것은 아이를 죽일 수 있게 하기 위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살해된 뒤 부모들은 자신이 아이를 죽음으로 보냈다는 죄책감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살해되지 않고 나치 정신의학을 살아남은 장애아동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lebensunwert, ‘살 가치 없는 존재’라는 모욕을 당한 뒤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지만, 이들의 경험 역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기서 클레는 자신의 전후사 서술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을 적는다.
“Entschuldigung der Täter schließt Trauer um die Opfer aus.” (가해자를 변명하는 일은 피해자를 애도하는 일을 배제한다.)(492)
전후 독일 의료계가 가해자의 경력을 설명하고,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선의를 찾아내고, 그들의 전문성을 복원하는 동안, 정작 죽은 장애인과 그 가족은 역사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클레는 바로 뒤에 한 아이의 목소리를 놓는다. 1925년 12월 9일에 태어나 1943년 2월 28일 빈-슈피겔그룬트(Wien-Spiegelgrund)의 아동병동(Kinderfachabteilung)에서 죽은 에리카 마리아 슈탄즐(Erika Maria Stanzl)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와서 나와 같이 울어요. 내가 이렇게 나쁜 아이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어쩔 수 없어요.”(492)
공식 사망원인은 ‘폐렴’이었다. 이 한 아이의 말을 클레가 긴 전후 의료계 이야기 끝에 배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가 교수로 돌아갔는가. 누가 학회장이 되었는가. 누가 의사면허를 유지했는가. 누가 법정에서 처벌받지 않았는가. 이 질문들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자칫 또다시 가해자들의 이름만 역사에 남는다. 그래서 클레는 마지막에 죽은 아이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냈는지도 모른다.
9. 1945년은 끝이 아니었다
나치의 장애인 학살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1945년을 마지막으로 여긴다. 나치가 패망했고 T4도 끝났으며, 이제부터는 전쟁범죄자에 대한 처벌과 독일의 반성이 시작되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클레는 1945년이라는 선을 그렇게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정권은 무너졌지만 의료기관은 남았다. 전문학회도 다시 만들어졌다. 의사의 자격을 심사하는 사람도 의사였고, 법적 책임을 판단하는 사법부에도 나치 시대의 법조인이 남아 있었다. 무엇이 범죄인지를 확정해야 할 법정은 그 판단을 미뤘고, 미뤄진 자리를 국내 법원이 반대 방향으로 채웠다. 그래서 클레가 보여주는 전후 독일의 첫 장면은 ‘청산’이라기보다 복귀에 가깝다.
가해자가 사회 밖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다시 주변으로 밀려났다. 아이를 죽인 의사에게 왜 그런 일을 했는지를 묻는 대신, 다시 의사로 일할 수 있도록 길이 열렸다. 과거를 밝히려는 사람에게는 정신의학에 대한 신뢰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돌아왔다. 살해된 아이의 기록을 찾는 가족에게는 당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 장애인을 죽음으로 분류했던 의사들이 다시 독일 정신의학의 권위를 대표하기 시작했다. 클레가 「청산」의 첫머리에서 묻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의 사람과 제도까지 끝난 것인가. 그의 대답은 명백하다. 그렇지 않았다.
다음 글에서는 그보다 더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살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단순히 처벌을 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은 오히려 아이들을 살렸고 살해정책을 방해했으며 실제로는 인간적인 의사였다는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기변호는 수십 년 뒤 역사서술과 학교교육의 언어 속으로까지 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