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즐기는 집,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지었다. 독락당이라는 이름은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사마광(1018~1086)의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자치통감』을 엮은 것으로 유명한 사마광은 왕안석의 개혁 정치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홀로 즐기는 집’인 독락원(獨樂園)을 짓고 은거했다. 사마광의 독락원처럼 이언적에게 독락당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마음을 수양하며 홀로 즐기는 집이었다.
이언적은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번(1461~1500)의 아들로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송첨 종택)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손소(1433~1484)였고, 외삼촌은 대학자 손중돈(1464~1529)이었다. 독락당이 있는 옥산에 처음 발을 디딘 이는 아버지 이번이었다. 이번은 그가 살던 양동마을과 가깝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수가 수려했던 옥산 땅을 택하고 계정을 지었다.
이언적은 10살 때 아버지 이번이 사망하자 외가인 서백당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외삼촌 손중돈의 학풍을 이어받았고, 이때 형성된 건축적 영향이 이후 독락당을 지으면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서백당과 독락당은 건축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다가 24세(1514)에 옥산에 있던 정혜사를 드나들며 글공부에 전념하기 위한 공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듬해(1515)에 아버지가 지은 계정 자리에 ‘역락재(亦樂齊)’라는 삼 칸 초가를 지었다.
이때쯤(24세) 이언적은 문과에 급제를 했고 경주향교의 교관(25세)이 됐다. 그러던 중 27세(1517)에 그 유명한 손숙돈과 조한보의 무극태극설 논쟁에 의견을 펼치면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두 사람을 모두 비판하여 “이단의 사설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는 후대 학자들의 극찬을 받게 된다. 훗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며 문묘에 종사된 대학자로서의 면모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41세(1531)까지 그는 여러 벼슬을 하며 승승장구했고 이상적인 도학 정치를 펼칠 경륜을 쌓았다. 그러나 41세 때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낙향했지만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옥산동으로 들어가 독락당을 지었고 5년간 은거했다.
42세(1532)에 안채를 새로 짓고 남쪽에 위치한 사랑방을 역락재라 했고, 기존의 역락재를 계정으로 중수했다. 이때 사랑채인 독락당을 새로 지어 학문에 정진했다. 아버지 이번이 독락당을 휴식과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다면, 아들 이언적은 강학과 저술의 공간으로 삼았다.
주변 자연이 모두 정원, 사산오대(四山五臺)
독락당은 한 번에 조성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 이번이 처음 터를 잡은 후 이언적이 본격적으로 옥산별업을 경영했고, 그의 아들 이전인과 손자 이준에 걸쳐 주요 배치가 완성됐다. 그 후에도 독락당을 유지하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이 18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언적은 독락당 주변의 산과 자연에 사산오대(四山五臺)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정원으로 삼아 산책하거나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사산은 독락당 주위의 네 산으로 화개산(華蓋山, 563m), 자옥산(紫玉山, 567m), 무학산(舞鶴山, 433m), 도덕산(道德山, 703m)을 말한다. 오대는 자계천 주변의 바위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독락당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반석 관어대(觀魚臺), 계정 맞은편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 영귀대(詠歸臺), 계정 북쪽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 탁영대(濯纓臺), 탁영대 북쪽에 있는 징심대(澄心臺), 옥산서원 밖 너럭바위 세심대(洗心臺)를 말한다.
흔히 독락당을 한국을 대표할 만한 정원으로 꼽곤 한다. 독락당은 소쇄원과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영된 별업(別業)이다. 소쇄원이 나름 개방적인 구조로 사회성을 띠는 반면에 독락당은 지극히 폐쇄적인 구조로 개인적이다. 소쇄원이 자연의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인간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면 독락당은 인간사회와 모든 것을 차단하고 자연으로만 개방되어 있다.
화엄사와 남연군의묘
영화 <명당>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 중 하나는 화엄사이다. 영화가 명당을 소재로 한 만큼 공간 그 자체만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할 장소가 필요했다. 거기에 제격인 곳이 바로 가야사로 설정된 화엄사였다. 화엄사는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대찰로 비단 영화의 유명세가 아니어도 꼭 들러볼 만한 절집이다. 이왕이면 화엄사 깊숙이 자리한 연기암, 구층암 등 암자들도 함께 순례하면 더욱 좋다.
영화에 실제 남연군의묘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이구의 무덤이다. 남연군의묘에 얽힌 이야기는 다양하다. 남연군이 죽자 한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나,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인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지관은 두 곳을 추천했는데,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땅으로 가야산 동쪽의 땅을, 만대에 영화를 누릴 곳으로 광천 오서산을 지목했다고 한다. 흥선군은 두말 할 것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 근데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어 흥선군은 결국 절을 불태워 그 자리에 묘를 썼고, 후에 보덕사라는 절을 지어 그 죄책감을 덜고자 했다.
그 자리에 묘를 쓴 7년 후 흥선군은 차남 재황을 얻었고, 11년 뒤인 1863년에 재황은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고종이고 그의 아들은 뒷날의 순종이니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온 셈이다. 남연군의묘는 풍수를 전혀 모르는 이가 봐도 탄복할 만큼 대단한 땅의 기운을 자랑한다. 남연군의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다.
글. 김종길(인문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