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② 이토와 안중근
이토 “러 위협 막으려면 조선 필요” 외교전
안중근 “이토 있는한 전쟁 되풀이 평화 요원”
현대 중·북한 위협 들먹이는 ‘제2이토’ 활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그는 침략의 선봉장일 뿐이다. 오히려 그를 살해한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든다. 두 인물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동아시아를 둘러싼 대립된 두 ‘이상’의 실체가 등장한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한·중·일이 함께 짚어야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어리석은 녀석과 간웅(奸雄)의 충돌= 1909년 10월26일 아침, 이토는 안중근에게 세 발의 총을 맞았다. 30분만에 절명한 그는 자신을 쏜 사람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듣고 “그런가, 어리석은 녀석이다”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죽으면 조선의 식민지화가 더 앞당겨진다는 사실을 모르느냐는 뜻이었다. 이토는 조선에서 자치식민지를 고려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이토를 가리켜 “영웅이 아니라 간웅”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다달이 발전하며 평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신문에 떠들면서 일본 정부와 세계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요원하고,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보았다.
■ 아시아를 위한 두 선택=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토는 그 해 6월에 특사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미국을 움직여 러시아와 종전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미국도 반대하지 않았다. 전쟁 승리의 숨은 공로자 이토는 초대 조선 통감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결과는 안중근에게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은 흥한(興韓)의 길인 동시에 동양평화를 지키는 흥아(興亞)의 길이었다. 그래서 1907년 7월 정미7조약 이후 블라디보스톡 부근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했다. ‘의병’ 안중근에게 이토는 조선은 물론 아시아의 ‘역적’이었다. 이토가 흥아의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외교와 무력, 병합과 독립= 이토는 전쟁이 아닌 외교적 방법으로 조선을 차지하려 했다. 1873년의 ‘정한(征韓)논쟁’에서 이토는 내치(內治)를 우선해야 한다는 세력을 단결시켜 당장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파’를 물리쳤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할 방파제인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며 ‘만한(滿韓)교환론’을 제기했다. 만주는 러시아에 주고, 대신 일본이 조선을 차지한다는 논리였다. 외교적 협상으로 조선을 독점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평화를 위해 무력을 피하지 않았다.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이 없는 손바닥 직인의 ‘대한국인(大韓國人)’이란 글자의 주인공이 안중근이다. 1909년초 12명의 동지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하고 단지를 결행한 것이다. 그 뜻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동시에 추구하자는 데 있었다. 의병활동에 이어 이토 살해를 결심한 그는 1909년 10월23일 차디찬 여관방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은 노래 한 수를 읊었다. ‘동풍이 점점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 제2의 이토와 안중근= 1950·1960년대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대한제국의 황태자와 이토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실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이토가 한국의 발전을 도와준 인물인 것으로 기억한다. 1963년부터 1984년까지 그가 1000엔권 화폐의 모델이 됐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이토를 존경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일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조선이 필요하다는 이토의 논리는 오늘날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인식과 일치한다. 이제 일본 우익은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과 북한이 위협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양심세력들은 민주화와 통일을 통한 한반도의 안정이 동아시아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아시아 미래를 결정짓는 한국의 위상은 바뀌지 않았다. 제2의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 살아 있다. 그들이 다시 ‘파국’을 맞을지 여부는 이 시대를 사는 한·중·일 시민들에게 달려있다.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 한 “침략의 원흉”- 일 “근대화 아버지- 중 “…“
국제정세속 이토 행보 상술
저격배경 15가지 동시 살펴
공동교과서에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한·중·일이 불러내는 역사의 ‘기억’이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한국의 중학생용 <국사> 교과서는 두 사람을 이렇게 서술한다.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초대 통감으로서 우리 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고등학생용 <국사> 교과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국지사들의 의거활동’이라는 짧은 글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을 비롯하여 이봉창, 윤봉길 … 등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고 소개한다. ‘원흉’이라는 원색적 표현은 고등학생용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한국 근현대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
그러나 일본 교과서가 설명하는 이토는 다르다. “초대 총리대신이 되어 메이지 국가건설의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다. … 이토는 타협에 의해 대립을 완화하고 사태를 매듭지으려 했다. … 이토는 항상 이상과 현실 쌍방을 바라보며 입헌국가 일본을 건설해낸 것이다.” (<새로쓰는 일본역사> 후소샤) 거의 한 쪽에 걸쳐 이토를 건국의 주역으로 칭송한다. 안중근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이토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기록돼 있지 않다. 서술상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동경서적판 <역사> 교과서는 이토와 안중근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곳은 중국 하얼빈이지만, 중국 교과서에도 이 사건은 물론 두 인물에 대한 일체의 서술이 없다.
이런 점에서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이하 ‘미래를 여는 역사’)는 동아시아 ‘공동의 기억’에 대한 지향을 강하게 표상하고 있다. 제2장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 한중 양국의 저항’ 편에서 따로 한쪽 짜리 칼럼을 두어 안중근과 이토를 동시에 서술했다. 1909년 10월26일 아침, 중국 하얼빈에서 발생한 ‘사건’을 상세하고 담담하게 적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도록 도운 데 있다. 먼저 1장 ‘개항과 근대화’ 편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상세하게 서술해 이토가 주도한 개혁의 성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토를 본격적으로 다룬 칼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편에서는 “안중근은 이토를 단죄한 이유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한 죄,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등 열다섯 가지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치외법권 지역인 하얼빈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일본이 관동도독부를 통해 ‘불법적’인 재판을 진행했음도 밝히고 있다. 안중근과 이토를 ‘동시에’ 살펴보면서, 이 두 인물을 사로잡은 이념적 지향도 함께 곱씹어 보도록 한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