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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묵상글 (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조심은 하되 걱정은 않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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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조심은 하되 걱정은 않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어제와 오늘의 말씀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평화를 빌어줘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 마라!
발의 먼지를 털고 ‘쿨’하게 떠나라!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파견이
기본적으로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양들이 이리 가운데 가면 당연히 잡아먹히는 것이 뻔한데
주님께서는 그런데도 가라고 하시는 것이며,
그런데도 사람들을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보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게는 내가 너희를 위해 걱정하고 있으니
너희는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랑이 느껴지며
나의 사랑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걱정한다면 단순히 걱정하는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더 큰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어리지만 부모가 있기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더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걱정을 내가 한다면 부모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부모가 없다면 내가 걱정해야 하고,
부모가 있어도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걱정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걱정해주시는 하느님이 계신데도
걱정한다면 하느님의 그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표시지요.
그렇다면 조심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걱정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이고,
조심은 그래도 생산적이기에 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걱정은 진정 쓸모가 없고,
조심은 안 좋은 일을 예방하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앙적으로 보면
하느님이 보살펴주시니 조심 안 해도 된다는,
그런 무모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조심하는 것은
조바심하는 것과는 다르고,
방심하는 것과는 반의어이며,
깨어있는 것과는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방심하게 되면 악마가 침입해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에 비해
조심하게 되면 악마가 침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깨어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바 조심은 다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걱정하지 말고,
내일 보게 되겠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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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구상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무엇일까요? 호모 사피엔스, 즉 인간입니다. 최근에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온갖 동물이 모여드는 남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의 물웅덩이에 스피커를 설치한 뒤, 사람 말소리와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동물들은 사람 말소리에 40% 더 빠르게 반응하며 도망가는 것입니다. 어렵게 사냥한 먹이를 물고 가던 표범은 사람 말소리가 들리자마자 먹이를 포기하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도 사자 소리에는 오히려 스피커에 달려들어 망가뜨렸지만, 사람 말소리에는 서둘러 도망가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물리적인 힘이 세지도 않은 인간입니다. 빨리 달리지도, 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동물이 두려워하는 지구상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살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외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에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생각할 수 있게 해서 모든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또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커다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다, 힘이 없다 등의 말로 자기 할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며 지혜롭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아, 다시 이 세상에 그 사랑을 전달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의 만족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마음일까요? 부모가 자식을 군대는 보내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먼 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보내는 마음일까요? 아무튼 이런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자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능력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총독이나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 앞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연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기에 부족하고 나약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이 함께 하시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곁에 주님이 분명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굳게 믿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은 내가 아닌,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나를 발견하면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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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루이제 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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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이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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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항상 참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용수철을 누르듯이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신앙의 가치관을 확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언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셨는데 어찌 십자가를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 앞에 성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은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넘어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상황이 변화되길 바란다면“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하고 마음속으로 묻기를 바랍니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길 기도합니다. 모함이나 뒷담화에 마음 상하지 말고, 뒤에서 딴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하며 상처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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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슷한데 다른 것을 ‘짝퉁’이라고 부릅니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짝퉁은 사용하면 진짜와 다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사실은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지방에서 서울로 가려면 박달재 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한 선비가 주막에서 하루 지낸 뒤 서울로 올라가려는데 주모가 선비에게 보따리를 하나 주었습니다. 선비가 ‘이것이 무엇이오?’하고 물으니, 주모는 ‘보따리에 싼(Pack up) 것은 비지떡입니다. 가시다 출출하면 드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 좋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두부를 만들면 남게 되는 ‘비지’라는 의미가 생겼습니다. 식당에서 두부를 먹고 나면 덤으로 ‘비지’를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싼 게(Cheap) 비지떡’이라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검사는 법과 정의를 실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과 검사가 권력의 하수인이 되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정치경찰, 정치검사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종교도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공동선을 위해서 연대할 때는 험난한 세상의 파수꾼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권력의 맛을 들이면 회칠한 무덤처럼 됩니다. 심하면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도 듣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비슷한데 다른 말을 꼭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솔직한 것과 직설적인 것’이 있습니다. 비슷한데 느낌은 아주 다릅니다. 솔직한 것에는 ‘측은지심’의 마음이 있습니다. 직설적인 것은 현상만 있습니다. 종교는 말씀이 있고, 말씀에 따른 현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과학은 현상을 먼저 연구합니다. 그 현상을 정리하면 이론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며칠씩 잘 먹지도 못하고 따라다니던 군중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복하신 후에 나누어 주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이 신발을 벗으니, 냄새가 심했습니다. 직설적인 신부님은 ‘어이구 이게 무슨 냄새야!’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한 신부님은 ‘열심히 일했나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직설적인 말은 때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울고 싶은데 뺌을 때리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당당한 것과 자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당당합니다. 욕심이 없으면 권력의 유혹에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당당하게 순교의 화관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도, 헤로데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많은 젊은이가 승리의 그날까지 당당하게 전진하였습니다. 자만한 것은 마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빌라도와 대사제는 자만했습니다. 자만한 사람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타인의 잘못과 허물을 쉽게 단죄합니다. 세리의 기도를 무시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웃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진심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헌금의 정성이 중요합니다. 불의에 맞서 일어설 수 있다면 당당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무시하고, 타인의 잘못과 허물을 쉽게 단죄한다면 자만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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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기를 바라시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기를 바라셨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뱀처럼 슬기로운 것은 무엇이며 비둘기처럼 순박한 모습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슬기로워야 합니다. 특히 뱀처럼 슬기로움을 넘어 간교하기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슬기로워야 하는 대상은 바로 유혹입니다. 어둠이고 악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슬기로워야 합니다.
슬기롭게 넘겨야 하고 슬기롭게 피해야 합니다. 슬기롭게 이것을 이용해야 합니다.
뱀과 같은 슬기로움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한 모습은 위의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순박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순박해야 할 대상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이며 사랑과 용서가 세상을 구한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순박함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우리 신앙인의 기본 자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느님의 빛 속에서 우리는 순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슬기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순박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모습에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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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지내며 백신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그와 더불어 백신의 무서움도 알았습니다.
얼마 전 ‘대상포진 백신’을 맞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를 지낸 저는 백신의 부작용을 먼저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발진이 있을 수 있고 발열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순간 고민했습니다. 맞을까 말까.
세상 모든 일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사고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입니다. 바다에서 물놀이한다는 것은 안전사고에 노출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두려움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면 우리 사람은 그 두려움이라는 방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눈 질끈 감고 한번 지나가 보세요. 두려움을 뒤로 하고 걸어가 보세요.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져 버리고 즐거움과 희망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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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난세(亂世)중 영적승리의 삶
“회개하라, 지혜로워라, 걱정하지 마라, 희망하라, 인내하라”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엊그제 처음 발견한 어휘가 있습니다. 모 정치인이 대표직에 도전하면서, “나는 단언컨대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르기가 돼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먹사니즘은 ‘먹고살다’와 이념, 철학등을 의미하는 영어 접미사 ‘ism“의 합성어로서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조어라 합니다.
예전 언제나 자주 듣는 말이 말세라는 단어였는데 어지럽고 혼란한 현실이 늘 말세요 난세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한국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지금부터 32년전 1992년 제가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미사에서 한 명강론 제목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인데 지금도 자주 강론에 인용되는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때나 여전히 난세같은 혼돈의 세상입니다. “호주는 재미없는 천국,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얼마나 한국이 역동적 사회인지 깨닫습니다.
‘먹사니즘’이 아니라 ‘하느이즘’이 우선입니다. 제가 방금 생각해낸 하느님 주의가 하느이즘입니다. 예나 이제나 늘 난세입니다. 난세를 극복하는 근본적 처방은 하느이즘의 즉 하느님 중심 삶의 생활화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은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1.33)
비단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정말 겸손히 기도하며 지혜를 청하는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종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기도해야할 난세같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은 난세를 살아가는 지도자뿐 아니라 모두가 경청해야 할 말씀같습니다.
“풀이 우거진 수풀도 사람이 자주 다니면 길이 생긴다. 지도자는 앞장서서 그 길을 간다.”<다산>
묵묵히 하느님의 빛의 인도하에 길을 내어 수풀같은 난세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바른 도리로 이끈다면 누가 바르지 않겠는가?”<논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말씀에 따라 바르게,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선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고맙고 반갑게도 복음의 예수님이 호세아 예언서 마지막 부분에서 호세아 예언자가 난세를 살아가는 영적승리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 당대나 호세아 시대 역시 난세중의 난세였습니다.
첫째, 회개하라!
회개를 통해, 회개의 여정을 통해 끊임없이 내적혁명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주님의 회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느님의 말씀도 참 아름답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에 정통한 신비가요 영성가요 사랑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회개의 축복을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이를 알것입니다.
둘째, 지혜로워라!
참된 회개의 열매가 겸손과 지혜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진 삶입니다. 옛 사막교부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우선적 관심사도 삶의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지혜를 회개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새벽 강론 쓰는 시간은 기도시간이자 회개시간, 그리고 지혜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주신 주님의 말씀은 오늘 이리떼들 무수한 난세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니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우리의 난세를 타개하는 참 좋은 처방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할 때 이런 슬기와 순박함의 선물입니다.
셋째, 걱정하지 마라!
몰라서, 주님을 떠나 걱정이요 불안이요 두려움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난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주님과 함께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위로와 격려말씀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무지로 인한 걱정과 불안, 두려움입니다.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이, 믿음의 빛이 걱정과 불안,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 말씀의 빛입니다.
넷째, 희망하라!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상징하는바 희망의 주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도래의 희망이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원천입니다. 희망해서 사람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선택하여 희망을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날마다 바치는 희망의 주님을 노래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순례자 되어 절망중에도 주님을 희망하며 희망의 여정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내하라!
최종의 승리자는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는 인내의 사람입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사랑, 인내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희망의 하느님께 눈길을 둘 때,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백절불굴의 믿음입니다. 이런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기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당시 주님 믿음으로 인한 처절한 박해상황임을 짐작합니다. 양상만 다를분 오늘날도 악순환처럼 반복되는, 연옥같은 힘든 상황을 살아가는 분들은 힘을 내십시오.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믿음이 나를 구원합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정주서원은 주님 불러 주신 삶의 제자리에서 한결같이 항구하고 충실한 이런 인내의 삶을 뜻합니다.
난세의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인간 고난의 현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묵묵히, 충실히, 끊임없이 회개하고, 지혜롭게, 걱정하지 말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견뎌내는 인내의 믿음으로, 날마다 난세중에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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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까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1)
늘 믿음
불신 뚫고
끝까지 믿음
오롯이 참 믿음
늘 희망
절망 헤쳐
끝까지 희망
오롯이 참 희망
늘 사랑
미움 녹여
끝까지 사랑
오롯이 참 사랑
늘 함께
홀로 헐어
끝까지 함께
오롯이 참 함께
늘 살림
죽임 밀쳐
끝까지 살림
오롯이 참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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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16)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은 ‘양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이리 떼와 같다’고 하시지 않고 간단히 “이리 떼”라고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단지 제자들의 온유함 때문에 다시 말해 그들이 본성으로는 사람이지만 온유함으로는 양이므로 그들을 ‘양에 비유하셨다면 그들도 본성으로는 사람이나 잔혹함으로는 이리들과 같으니 그들을 ‘이리 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전자는 양과 같다’고 하시고 후자는 ‘이리 떼와 같다’가 아니라 한마디로 “이리 떼”라고 하신 이유는, 하느님의 창조물인 사람은 아무리 선한 이라 할지라도, 육에 따른 악한 것이 그 안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선할 때는 양이라고 불리지만, 사람이 완벽하게 선할 수는 없으므로 ‘양과 같다’고 표현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이리와 같다’가 아니라 ‘이리’라고 불립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안에 선한 것을 하나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관해서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영혼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가운데 시간과 장소를 잊는다.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가운데 우리의 시간 의식은 물론이고 우리의 장소 의식도 타파된다. 우리는 새로운 시간 감각과 새로운 공간 감각을 깨닫는다. 영혼 안에는 “지금” “여기”를 넘어서서 만물을 이해하는 능력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시간을 뜻하고, “여기”는 장소, 곧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뜻한다. 액카르트는 이러한 장소 의식을 타파하는 맥락에서 예루살햄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나의 영혼 가까이 있듯이, 예루살렘도 나의 영혼 가까이 었다.’ 나의 몸이 나의 영혼 가까이 있는 것만큼, 예루살렘에서 천 마일이나 더 떨어져 있는 대상도 나의 영혼에 가깝습니다. 나는 내가 사람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이 사실을 확신합니다.”(202)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아버지들의 말씀들”로부터
아버지들의 이야기와 격언들은 복음을 구체적인 어떤 특정한 상황에 맞추어 해설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들이 당시의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더라도, 당시에나 지금에나 별 다를 바 없이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히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비교적 긴 이야기들은 사색적 독서와 묵상을 위한 것인 반면에, 짧은 글들과 간략하게 압축한 금언들은 그날 하루나 한 주간 동안 실천할 생활신조로 삼아 의식적으로 노력하여 실천해 보도록 한 것이다.
영적 삶의 원칙들
기도하고 일하라
연세가 많으신 안토니오 아버지께서 기분이 언짧은 상태로 흐렷한 정신 속에 사막에 앉아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말씀올 드렸다.
“주님, 저는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한 후 밖으로 나간 그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저 멀리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하다 말고 일어나 기도하다가 다시 앉아 밧줄을 꼬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기를 반복했다. 그는 안토니오에게 확신과 가르침을 주기 위해 주님께서 파견하신 천사였다. 안토니오는 천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면 구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 말씀을 들은 안토니오는 큰 기쁨과 용기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러한 행위로 구원되었다.(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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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그분 가신 그 길 걸으면서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099242&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 07. 11 20:55 ㅣNo.174122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은 어떨까? 부모가 자식을 군대에, 더구나 외국어도 잘 못하는 자식을 유학 보내는 부모님 그 마음은? 장차 맞닥뜨려야 할 변화가 거대한 장벽으로 밀려올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고난을 미리 알려 주신다. 그 난관은 군대에서나 외국에서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험난함 정도가 아니리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회당에서 채찍질당하고 총독들 앞에서 증언해야 할 뿐 아니라, 부모 자식 형제간에 서로 싸우고 투쟁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리라.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면서 그 어떤 박해에도 무엇을 말할지 아예 걱정일랑 하지를 말라신다. 사실 스승님 말씀이 그렇다하여도, 그들은 걱정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을 게다. 그럼에도 걱정을 놓으라신다. 두려워하지도 말라신다. 다만 당신께 철저하게 맡기라신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는 슬기로워야 할 게다.
사실 저 못된 박해자들이 박해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세상이 박해하고 그렇게 거부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다. 우리는 단지 그분의 일꾼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박해하는 저들 앞에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언제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에. 미리 대비한다고, 그 두려움이 작아지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나. 주님 보호를 느껴야 두려움은 사라질 게다. 걱정도 습관이다. 그게 굳어지면, 작은 게 어느새 큰 것으로 바뀌리라. 팔자소관일 게다.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이와 그러지 못한 이는 크게 다르다. 자기 안에 가치관이 정립된 이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입장을 정리 어떻게 할지를 쉽게 선택한다. 그러나 그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이는 감정에 따라 반응하기에 늘 환경에 끌려만 다닌다. 신앙인은 주로 주도적인 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사는 이들이기에.
곧 자신에게 닥친 것을 주위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실까?’를 물으며, ‘그분 방식’으로 줄곧 대응할 게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는, 언제나 성령께서 일러 주시니까. 그래서 우리도 무슨 일이 닥칠 때 ‘주님, 당신께서는 이 문제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라고 묻는 기도를 절실히 하면 참으로 도움이 될 게다. 평소에도 이런 훈련을 하고 성령께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면, 신앙은 물론 세상만사에서 어쩜 주도적인 이가 되리라.
예수님을 의지하며 사는 이런 이가 어떤 일에서나 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과 맞서셨다. 교회가 맡은 임무와 사명이 크면 클수록 장벽 또한 그만큼 높고 험난할 게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은 세상이 던져 주는 저 달콤하고도 손쉬운 유혹을 이겨 내야만 한다. 그분께서 택하신 외롭고 고된 십자가의 길에서, 오로지 가장 작은이와 함께하는 사랑과 자비로 그 모든 수치스런 조롱과 모욕을 견뎌야만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 결코 아니다. 예수님 제자로 증언하는 것이지, 세상살이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신앙생활이 귀찮다는 이들이 느는 것 같다. 남들은 놀고 쉬는데 믿음에 발목이 잡혀 성당 가는 게 그리 쉽지 않단다. 그래도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아니 무엇을 말할까?’라고 걱정을 말라신다. 당신 때문에 손해 보는 걸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단다. 그러니 이 길이 어렵다고 생각지 말고, 차분히 그분 가신 그 길을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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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가 있는 곳에 스스로 찾아가 순교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현실적으로 분별하여 박해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순교는 철저하게 하느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우리의 ‘의지’나 ‘신념’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박해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 주시는 일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처럼 슬기롭다.’는 것은 현실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박해로 드러나는 악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와 반대로 ‘비둘기처럼 순박하다.’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신비를 드러내신다는 순수한 믿음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를 뜻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순교는 ‘죽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생명과 사랑’,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순교의 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피를 흘리는 박해나 순교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명과 사랑’,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요즘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은 모두 다 피할 수 있는 신앙인다운 판단력을,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분께 향하는 판단력과, 가장 절망적일 때 그분께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키워 주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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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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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의 이 말씀은
소위 말하는 공관 복음 세 군데에
모두 있습니다.
세 복음을 비교했을 때
마태오에만 나타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
박해를 피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바로 앞 문장에서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데
이 문장은 박해를 피하라는 말씀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박해를 피하지 않고 거기에서 오는 미움을
끝까지 견뎌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피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아듣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박해는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나에게 다가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그 미움은 이유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나의 의지, 나의 행동과 상관 없이 이루어지기에
언제 어떻게 박해가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아버지의 영께서 알려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미리 준비할 필요도 없으며
그 상황을 넘어 갈 힘과 지혜도 주시기에
견딜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피하라는 말씀은
다른 목적 혹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박해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박해를 피하는 것이지만
다른 고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복음을 전해 받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박해를 받으면서 하는 증언이
말로 전해지면서
복음이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직접 파견하시는 방식을
더 선호하시는 것 같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움을 견디면서 박해 속에서 한 증언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나
직접 다른 곳에 가서 하는 것이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기에 견디는 것이 더 옳고
피하는 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선택에 있어서 그 기준이 복음이 될 때
이것을 선택하던 저것을 선택하던
복음 선포가 중심이 될 때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피하는 상황이
너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옳고 그름의 관점보다는
복음 선포에 집중하면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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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경쟁력 있고 전문성 있는 그리스도인>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 주신 가르침은 너무나 강력하고 혁신적인 것이어서, 때로 수용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
원수를 사랑하여라. 누가 오른 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까지 대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거던 십리를 가주어라.”
그로 인해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갈등과 방황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선해야만 하고, 세상의 불의 앞에서도 그저 참아야만 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야만 하고, 결국 한 걸음 뒤쳐져야만하는가?
늘 손해봐야 하고 바보처럼 살아야만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어느 한쪽에 지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이웃들 앞에서 순수하고 순박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험하고 악한 세상, 이리떼들과 늑대떼들이 우굴거리는 위험한 세상 안에서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오 복음 10장 16절)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ㅈ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적락하고 말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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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박해를 당해왔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미움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박해를 면치 못했고(요한 3,17; 15,18), 수난에서 절정을 이룬다(마태 23,31-32).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이 박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 역사 안에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라서 그분과 함께 그분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16,1-3). 그들 역시 그분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하고 그분이 받으신 세례를 받아야 한다(마르 10,38-39; 마태 20, 22-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박해를 당하신다(사도 9,4-5; 콜로 1,24). 제자들은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며(필립 1,29) 기쁘게 생각하였다(1베드 4,12-14).
자기 동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신뢰하셨으며(마태 26,53; 요한 16,32),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루카 23,34). 예수께서는 박해를 참아 견디는 최고의 표양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보여주신 태도를 제자들도 스승처럼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마태 5,44; 루카 6,27-28; 로마 12,14), 이겨내라 하신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마태 10,23; 사도 13,50-51). 그러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죽임을 당할 것을 항상 각오하여야 한다(마태 10,16-39; 요한 16,1-4). 이것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하느님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끊고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한 16,33).
제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판을 받을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참조: 마태 10,19-20).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할 때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지혜를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알려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삶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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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에게 실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송봉모 신부의 상처와 치유에 대한 강의 중에 많은 사람이 ‘용서’와 ‘화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며 이런 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성당 단체에서 한 자매가 다른 자매님의 말에 상처를 입어 마음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정과 기도 끝에 어차피 성당을 다니기 위해서는 그 자매를 다시 보아야 하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자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도리어 그러더랍니다.
“이제야 네 잘못을 뉘우치는군!”
결국 화해하려다 더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 실화는 더 충격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어렸을 때 성추행당했던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은 오랜 노력으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해를 청하여 아버지와 화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딸이 결혼하여 또 딸을 낳았는데, 자유롭게 딸 집에 드나들던 아버지는 어느 날 손녀딸에게도 또 몹쓸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문제는 위 자매들에게 뱀처럼 슬기로운 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여지라고 하시며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어떤 특정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세상에서 만나게 될 보통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며 제자들에게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 사람을 믿으면 안 될까요? 영화 ‘불한당’에서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지…. 상황을.”
르완다 종족 대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임마쿨레는 자신의 책에서 모든 인간이 상황이 바뀌면 다 배신하게 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자신의 절친들도 종족이 다르다고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고 목숨 걸고 자신을 숨겨주던 목사님도 상황이 어려워지자, 그리고 자기 목숨을 위해 살아남더라도 무인도에 가서 사람 만나지 말고 살라고 했습니다.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이렇게 만든 벨기에는 군대를 가장 먼저 빼버렸고 미국과 유럽도 모른 채 눈을 돌렸습니다.
이때 믿을 분은 하느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기도에 할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한 임마꿀레에게 절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평화를 주셨습니다.
한 사람 들어가기도 어려운 작은 화장실에서 여덟 명이 석 달 동안 숨어 살면서 그녀는 사람을 절대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께 의지하였습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뱀처럼 슬기롭게 되지 않으면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섭니다.
꼬마는 평생 처음 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 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 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립니다.
그리고 아빠는 아이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까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다정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오직 믿을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새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의 제자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비둘기와 뱀의 두 모습을 동시에 지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두 상반되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뱀이 되면 하느님께는 비둘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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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와 순교는 현실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16-23).”
1)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을, 21절의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 때문에 가족의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경우라면, 바로 그 가족이 ‘양들’을 박해하는 ‘이리 떼’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식구들이 종교와 신앙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옛날이야기만은 아니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과 가족을 함께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고, 다른 박해보다도 더 큰 인내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라는 말씀을, 22절의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은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어떻든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단체나 집단 내에서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앞의 권고와 거의 비슷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말’로 논쟁을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논쟁은 적대감과 반감만 키우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바르게 처신하라.’는 말과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신앙인답게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것이 미움과 박해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3) “뱀처럼 슬기롭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신앙인의 ‘분별력’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별력’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없었던 능력이 원한다고 해서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고, 주님께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들을 늘 마음에 새기고 ‘온 삶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말씀은, 악에 맞서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과 용기가 없어서 맞서지 못하고 참기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에 선으로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쳐서 없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의 핵심 가르침은 ‘피하여라.’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중단하지 마라.”입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신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는데, 그들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했습니다(사도 8,4).
4) 오늘날에도 박해와 순교는 현실입니다.
결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이론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박해가 일어나고 있고, 누군가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또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충실한 신앙생활’ 자체가 곧 ‘순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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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며 그분 날개 밑으로 모이게 함으로써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신과 함께 그 일을 할 동료이자 일꾼으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주님 뜻에 따라 산다는 게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여러 유혹과 온갖 위험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재물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 휘둘려 알면서도 걷지 못하는 ‘구원의 길’을 우리가 걷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시기 질투하며, 그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도록 박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할 우리를 안쓰럽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굳은 신앙을 끝까지 잘 간직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첫째, 뱀처럼 슬기롭게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사람과 원수지간이 된 뱀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지요. 즉 이 말씀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함부로 믿어버리기에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 내 판단, 내 생각이 옳다고 믿기에, 그 교만과 부주의함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필요이상으로 기대하고 바라며 의지하다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게’ 되는 겁니다. 상처는 자기가 스스로에게 입혀놓고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원망하지요. 그렇게 그와 나는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할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 뿐입니다.
둘째, 비둘기처럼 순박해지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믿지 않는 대신 하느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재보거나 따져보지 말고, 내 기호나 취향에 따라 ‘좋고 나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굳게 믿으며, 그분 뜻이라면 일단 받아들이고 따르라는 뜻입니다. 마치 부모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철썩 같이 믿는 순박한 어린 아이처럼 말이지요.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가며 계산해봐야 어차피 삶은 내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은 내 뜻과 계획이 이뤄지는데서 오는게 아니라, 나를 위해 준비하신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실현되는데서 오지요. 그러니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단순하고 솔직하게 살며, 하느님 뜻에 비추어 ‘예’ 할 것은 ‘예’하며 따르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며 배격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리 떼 한 가운데로 당신 양떼를 보내실 때, 결코 양들만 보내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그분은 반드시 당신 양떼와 함께 계시지요.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뜻에 따라 사는게 힘들고 괴로워도, 어렵고 손해보는 거 같아 억울해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앞장서 이끄시는 주님을 잘 따라가면 반드시 그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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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0,16)
우리 모두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점은 창조 세계의 저변에는 양극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실재를 하나로 아우르는 방식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더욱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처세술(=성공과 출세 지향)이 난무하는 험한 세상에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전한 균형미를 유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다원적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자면 어려움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다고 인정합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균형 유지’가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는 확신을 오늘 복음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0,16)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균형 감각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연이 바로 안성의 ‘바우덕이 풍물단’의 ‘외줄타기 어름사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종 안성에 있을 때 찾았던 남사당 공연장에서 어름사니의 외줄 타는 모습에서, 마치 헨리 뉴웬이 서커스 단의 ‘공중 곡예사’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처럼 저 역시도 그런 느낌을 어름사니에게서 느낍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듣는 표현 중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표현이 오늘 복음의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라는 뜻을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0,16)라고 말씀하신 다음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리 떼와 같은 의회 의원들과 총독들과 임금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자면, 제자들에게 자기 신원을 보존하고 끝까지 견디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와 처신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사람들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조심하는” (10,17) 슬기로움이 요구됩니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막무가내로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슬기롭지 못한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는 표현을 역사가, 우리 경험이 이를 익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신하라.”(10,23)하고 권고합니다. 때로는 쏟아지는 소나기는 잠시 피하면 그치는 것처럼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고집스럽게 객기를 부리는 것보다 내일을 기약하면서 순박하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끝까지 견디다 보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0,22참조)라고 권고합니다.
참으로 슬기롭고 순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원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현실입니다. 슬기로움과 순박함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의 악에 두려움 없이 맞설 것이고 지혜롭게 그 악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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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새 언약의 백성 답게 살아가는 삶
<2024.7.12>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1:23~40절)
❝새 언약의 백성 답게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어진 옛 언약을 회복하시고 더욱 아름다운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 새 언약의 백성은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23~30절).
하나님은 남 유다의 백성이 해방되어 유다 땅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모든 곳이 본래대로 회복되었을 때,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다시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또한 마치 목자들이 양떼들을 돌보며 끝까지 떠나지 않듯이 하나님 역시 함께하실 것이며, 목말라 지친 자에게는 물을 주고, 배고파 힘없는 자에게는 배불리 먹을 것을 주겠다(25절)는 말씀을 듣고 예레미야는 단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습니다(26절). 하나님은 회복의 날에 상황을 완전히 역전하실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과 가축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게 할 것입니다(27절). 전쟁과 포로 생활로 인하여 감소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번성케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 사랑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이방의 포로로 내어주신 엄격함을 이제는 회복에의 사랑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입니다(28절). 나아가 회복의 때가 되면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을 겪었다는 오해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9~30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며, 모든 우리의 인생의 방황을 마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온 세상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험한 길을 걸어갈지라도 그 길에 하나님이 동행해 주신다면 그 길은 특별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약할 때, 일으키시고 연약해질 때 힘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새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의 도구로 쓰임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어 함께 승리의 때에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해 봅니다.
➲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31~34절).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회복에 관하여 ‘새 언약’으로 규정되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새롭게 갱신한다는 면에서 ‘새 언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친히 그분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후에 맺으신 시내산 언약과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게 된 배경은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기...’(32절)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하여 백성이 그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가슴에 새겨 두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33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새 언약은 옛 언약처럼 두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 인간의 전인격을 새롭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며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약속하기에 인간의 가르침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또한 죄에 대한 용서의 약속입니다(3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그분의 백성으로 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주어 지키게 하셨고, 이방 민족과 구별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구별된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그들은 하나님과 약속, 곧 언약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돌봄을 속박으로 여겼고, 언약의 조항을 겉으로만 지켰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보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면 나 역시 가장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사랑마저 저버릴 만큼 어리석고, 하나님의 주신 언약을 깨뜨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속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 새 언약에 따라 성령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셔서 통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백성이 되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언약의 백성답게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기를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약속의 증거로 열매 맺는 삶을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35~4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과 보장을 자연의 법칙을 들어 증거하고 계십니다(35~37절). 즉, 해를 낮의 빛으로,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주신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불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도 결코 멸절됨이 없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하늘과 땅을 측량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심오한 뜻과 은혜 역시도 측량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이 체결될 그날에 새 언약의 성취를 확증하기 위한 예루살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들판을 거룩하게 하시면서 그분의 임재가 가능한 구별된 장소로 만드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38~40절).
하나님이 새롭게 맺으신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달리 우리의 죄와 연약함으로 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세우시고 직접 이뤄 가시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붙들고 계신 이상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는 세상처럼, 하나님이 보증하시고 세우신 새 언약은 결코 없어질 수 없는 영원한 은혜의 언약이며,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인 침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쉽게 유혹에 빠지거나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회개하고 다시금 일어서는 견고한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거듭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처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전심전력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약속을 얻게 된 증거로 이 땅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힘쓰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거듭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언약 백성답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1:23~4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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