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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애 3:40-54
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42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애 3:40-54 / 그래,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바른길이 아니라면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손을 들자 하나님께. 마음을 다 쏟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그분께 기도하자. 이렇게. 42) `하나님!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주께 등돌려 배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는군요. 43) 분노하셔서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으시는군요. 우리를 그렇게 마구 쫓아오셔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쓰러뜨리셨군요. 44) 주님을 가리우고 있는 그 구름 너무나도 두터워, 너무도 빽빽하여 아무리 기도드려도, 주께 빌어도 주께 그 기도 올라가지 못합니다. 45) 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마치 쓰레기 대하듯 하는군요. 우리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군요. 주께서 이렇게 되도록 하신거지요. 46) 원수들마다 우리 잡아먹으려 있는 힘 다하여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47) 공포만 밀려올 뿐입니다. 우리 앞에는 함정이 놓여 있습니다. 파멸뿐입니다. 폐허뿐입니다. 48) 우리 겨레 망하는 꼴 바라보고 우리 눈에서는 눈물이 강같이 흐를 뿐입니다. 49) 눈물이,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시내처럼 그저 줄줄 흘러내릴 뿐입니다.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쳐다보시고 굽어보실 때까지 그러합니다. 51) 내 마음 찢어집니다. 이 성읍 여인들이 당하였던 그 일 생각만 하여도 내 마음 찢어집니다. 52) 까닭없이 나를 증오하는 원수들이 나를 새처럼 그물을 쳐 잡아들였습니다. 53) 저들이 나를 붙잡아서는 산 채로 구덩이에 처넣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그 구덩이를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려 하여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자신이 체험한 고통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깨달은 바를 진술했습니다. 40-47절에선 ‘우리’로 등장하는 공동체를 향해, 심판의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고통스러운 심판의 원인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먼저 성찰하며 여호와께 참회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40-45) 예레미야는 ‘우리’로 등장하는 공동체를 향해 자신의 ‘행위’를 조사하자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삶의 모든 행동과 행위들을 점검하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43-45절에서 다시 절망적 상태를 진술합니다. 비록 미래의 회복을 소망하고 있으나 여전히 고난 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46-51) 예레미야는 대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음을 계속 아룁니다. ‘입을 크게 벌린다’는 표현은 사나운 맹수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대적들의 공격이 얼마나 잔인하고 참혹한가를 추측하게 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멸망과 고난을 바라보며 시냇물과 같은 눈물을 쏟아냅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성읍의 여인들로 인해 가슴 아파합니다. 여기 ‘여인들’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겁탈당하거나 잡혀간 여인들일 수도 있고, 예루살렘에 속한 한 마을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참혹한 비극을 말해줍니다.
내 생명을 끊으려고(52-54) 예레미야는 자신의 운명을 여러 가지 비유로 진술해 나가면서 자신의 운명을 사냥꾼에게 쫓기는 새에 비유합니다. 또한 일찍이 자신이 경험했던 곤경(렘 38:6)을 떠올리면서 지금 구덩이에 빠져 돌을 맞고 물이 넘쳐 멸절될 처지에 있다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망 없는 자의 탄식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아뢰는 기도입니다. 멸절만이 남은 것 같은 삶을 사십니까? 있는 그대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적용: 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을 탄식할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해 슬퍼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 중에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주의 긍휼을 기다리며 이 참혹한 현실을 아뢰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눈물 흘리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라, 슬픔을 행동으로 바꾸어 곧 새롭고 보다 나은 삶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 회개이다.(M.R 빈센트) 우리는 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을 탄식할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해 슬퍼해야 합니다. 끊지 못하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과감히 죄를 끊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생명의 길로 들어서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 설 교 >
손을 들자
애 3:40-41 / 김삼환 목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시고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는 길인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는 인간이 다 하나님을 떠났다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멀리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맞이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모 때부터 믿었으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믿었다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부모 때부터 믿어도, 조상 몇 대를 믿었어도 우리는 다시 한번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다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절차가 어느 누구에게든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구주로 알고 영접하고 회개할 때에 얻는 기쁨, 구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말하기를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영원히 살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영원히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번 태어났다는 말은 부모부터 한 번 태어났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영원히 살고, 부모님에게서 한번만 태어난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원히 죽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영접하여 주십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 앞에 돌아갈 때, 회개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아버지는 잊지 않고 그 아들을 기다리다가 돌아오니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돌아온 자녀를 하나도 욕하지 아니하시고 옷을 갈아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우고 온 가족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두렵고 불안하고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그것은 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떠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니 떠나지 않는 자녀가 한사람도 없다고 봐야 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불순종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불의한 길로 가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선지자든 제사장이든 아브라함, 다윗 같은 사람일지라도 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끝까지 기다리시고 참으시고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찾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경고를 많이 합니다.
주의 종을 보내신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107편에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어 주의 종들을 보내서 우리를 돌아오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너라. 내게로 오면 너는 산다.” 개인이든 국가든 가정이든 기업이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풍랑은 잔잔해 지는 것입니다. 환난은 평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저주는 축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문제는 풀어지고 길은 열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삶은 복잡하던 모든 어려운 삶들이 안정되고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도록 사인을 합니다. 경고하는 것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면 위험한 선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내려가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선이 있습니다. 그다음 선은 “여기는 아주 위험합니다. 더 이상은 길이 없습니다.” 선인 것입니다. 거기를 넘어가면 마지막은 돌아설 수 없는 폭포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질병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돌아서라. 너 살려면 돌아서라.” 실패, 아픔, 자녀, 가족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너 돌아오너라. 내게로 돌아오너라. 너는 지금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다른 것이 마귀는 경고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속입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죽음 직전 손을 들자 에도 알 수 없도록, 망하는 직전에도 모르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을 따라가면 사탄은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저주의 길로 인도하고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인도해도 경고를 안 해 줍니다.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멸망을 당하는 데도 성경에도 보면 소돔 고모라와 노아시대 사람들과 같이 죽기까지 홍수가 나서 망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팔을 불어주는 기회의 시간인 것입니다. 은총의 시간입니다. 돌아오게 하셔서 저주받지 않게 하시고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길이 바로 교회 나오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상도동에서 11살 때 어떤 애가 친구 따라 집을 나가서 친구하고 같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주까지 갔는데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물어봐도 모두 모릅니다. 지금 37년 전이니까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두닦이 하고 고생고생 하면서 지금 40대 중반인데 아직도 부모님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상도동에 와 보니까 11살 때 30년 전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전세집이 없고 골목인데 그 많은 골목을 알수 없고, 다니던 학교도 애매하고 학교 가서 물어보니까 바로 몇 달 전에 그 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이것도 기록이 안 남아 있습니다. 이래가지고 그만 길을 잃어버렸는데 이 아버지는 70대 중반인데 아직까지도 그 아들을 잊지 않고 몸이 아파서 누워 있으면서도 아들을 찾아 있는 돈까지도 전단지를 뿌렸는데 이 전단지를 보고 아버지를 찾게 된 것입니다. DNA를 맞춰보니까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까지 끝까지 참으시고 찾으시고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오지 않는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성경에 보면 너무 속상해 하시는 것입니다. 멸망에서 건져야 되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고 죄의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유혹의 꿈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답답해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무도 몰라주는 것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 자신 외에는 모르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호세아 선지자를 불러서 결혼을 시킵니다. 어떻게 결혼시킵니까? “너는 저 길거리에 있는 윤락녀와 결혼해라.” 그래서 윤락가에 사는 고멜이라고 하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둘이 같이 삽니다. 마음은 찜찜하고 속상하지만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결혼해서 삽니다. 그런데 한달도 안 되어 고멜이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 윤락가에 가봐라.” 그래서 가보니까 거기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속상해서 왜 여기에 와 있느냐고, 그래서 고멜을 데리고 설득해서 집으로 옵니다. “나는 거기가 좋다.”
고멜은 죄악이 좋은 것입니다. 세상이 좋은 것입니다. “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우리 같이 살자.” “나는 이 집이 싫다. 거기가 좋다.” 그래서 집에 데리고 와서 옷도 잘 입혀주고 서비스도 잘해 주고 그랬는데 또 없어졌습니다. 너무 속상한 것입니다. 어디 있나 찾으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거기에 다시 가봐라.” 보니까 또 거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호세아 선지자는 계속 속상하고 미친 듯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몇 번 그런 일을 반복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구나. 우리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죄의 길로 가고 있구나’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죄의 길은 길이 아닙니다. 길이라고 해도 그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멸망의 길이야 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멸망의 길에서, 저주의 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개인이나 국가는 다 안 되는 것입니다. 낮아집니다. 배반당합니다. 열매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멸시천대가 온다라고 말합니다. 고난과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당할 때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가면 우리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돌아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목사님 아들인데‘ 그래도 돌아가야 됩니다. 장로님 아들도 돌아가야 됩니다. 누구든지 돌아가야지 안 돌아 가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임금님도 돌아가고 백성들도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으로 돌아갈 때 그의 품 안에 안기울 때만이 우리에게 샬롬(평안)이 온다라는 것입니다.
■ 한 분이 경북 청송에 있는데 4남매입니다. 9살, 8살, 7살, 3살 연년생으로 4남매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학교 교사였는데 30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남았는데 철저하게 미신숭배, 우상숭배하고 그런 우상에 빠져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유언하는데 “너희들, 교회 나가라. 예수 믿어라.” 그러더랍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자기가 우상숭배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30대 젊은 나이에 이 자녀들을 두고 가는 것을 이분은 알았습니다. “너, 교회 가야 산다. 우상숭배하면 안 된다.”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선생님이 그때 아무 보장이 없고 준비한 것 아무 것도 없으니까 서울로 올라와서 암사동에 살면서 이 어머니가 무엇을 했느냐 하면 금은방에 가서 청소심부름을 하고 하다가 거기에 눈을 떠서 금은방을 차렸습니다. 금은방 돈 많이 벌지 않습니까? 돈을 벌었습니다. 자녀들 4남매도 다 금은방을 해서 돈을 벌어서 우리 교회에 잘 나오고 헌금 생활도 잘 하는 우리교회 교인입니다. 저에게 편지가 왔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와서 축복을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사는 것입니다. 다 잃어버려도 잃은 것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에 오면 회복하고 치료가 되고 기적이 일어나고 자녀도 살고 본인도 살고, 할렐루야!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헨델이라고 하는 분은 인류 역사의 최고의 음악가이지 않습니까? 이분은 57살에 생활은 파탄 나서 거지가 되고 우울증에 걸려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도 다 떠나가고 등 돌리고 멸시천대 받고 언론에서는 멍청한 독일놈이라는 기사를 쓰는 등 이렇게 비참하게 위기에 몰렸을 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성도는 깨달아야 됩니다. 주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겠다.’ 하나님 앞에 어려움을 당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리라. 여러분들도 다 실수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질 때 돌아와야 됩니다. 주님께로 돌아와야 됩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손들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용서하여 주세요.’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모릅니다. 자기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죄의 맛이 너무 달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죄의 잠이 너무 단맛이기 때문에 깨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인을 보냅니다. 사인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인은 못 들을 지라도 두 번째 사인이라도 들어야 됩니다. 깨어나서 돌아오면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헨델은 예수님께 회개하고 3주간을 금식기도 하면서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기도하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회개하면 예수님 만납니다. 회개하면 주님이 내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가서 힘이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만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면 내 심령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안에
기쁨이, 용기와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작품을 이 작가가 작곡을 했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너무 장엄해서,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돌아가시는 마지막은 ‘할렐루야’로 계속 부르면서 끝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너무 감격스러워 가지고 영국의 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찬송을 부를 때는 누구나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찬양입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 일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 돌아갈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돌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다윗이, 삭개오가, 사마리아 여인이 돌아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잘 믿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이 부르셔서 다시 돌아간 삶입니다. 어거스틴이 돌아갔습니다. 헨델은 57살에 돌아갔고 베드로도 주님에게 돌아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나는 돌아갈 것 없다,
우리나라가, 우리교회는 돌아갈 것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돌아갈 일이 늘 있는 것입니다. 늘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회개하고 손들고 나아갈 때 긍휼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평강주시고 은혜 주시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돌아가면 누구든지 사는 것입니다.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 우리교회 어떤 시각장애자 한분이 새벽마다 나오십니다. 부부가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나옵니다. 저도 사람이 많고 하니까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젊은 분이 시각장애자가 되었으니깐 ‘참 안 됐다.’ 생각했습니다. 남자도 인물이 좋고 부인도 예쁩니다. 늘 데리고 새벽기도를 안 빠지는 것입니다. 하루는 당회장실에 있는데 이분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니까 그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 했는데 잘 오셨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자기 내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국방대학원의 학생인 중령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대령진급을 앞두고 한 달 있으면 졸업을 하고 대령이 되는데 높은 분이 오신다고 그래서 자기가 준비를 했답니다. 그런데 보름 동안 너무 과로를 해서 하다가 그만 열 때문에 두 눈이 실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통합병원에 가서 고쳐도 안 돼서 몇 달 만에 예편을 하고 너무 절망하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이 그러더랍니다. 제가 국방대학원에 집회를 두 번 갔습니다. 거기에서 은혜 받은 친구들이 “야, 너 명일동으로 가서 명성교회 새벽기도 다녀라.” 그래서 이분이 새벽기도를 3년을 나왔답니다. 시각장애자가 제일 불쌍하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라고 합니다. 못 듣는 것도 답답하고 말 못하는 것도 답답하지만 못 보는 것처럼 답답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다 보는데 다른 것은 쓸 수도 있는데 보지 못하면 쓰는 것도 잘 안 됩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리고 시각장애자는 눈 올 때가 제일 무섭습니다. 미끄러지기 쉽고 지팡이를 잡고 길을 찾는데 눈이 쌓여서 어디가 어디인지 모른답니다. 눈이 와도 겁나고 비 오는 날이 또 무섭다고 합니다. 비가 쏟아지니까 시각장애자는 소리 가지고 자동차인지 자전거인지 구분을 하는데 소리가 안 들리니까 사고가 비 오는 날 많이 난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목사님, 내가 이 교회 나와서 3년 동안 은혜를 받았는데 지난주부터 왼쪽 눈이 보인다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교회 실제로 있는 일입니다. 많고 많은 일 가운데 하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글을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은 보인다는 것입니다. 산도 보이고 길이 보이니까 그렇게만 보여도 이것은 완전히 세상이 내 세상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교회 에 계속 나와서 1년 만에 오른쪽 눈도 거의 회복되어 가지고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교수가 되었습니다. 내가 이 설교를 몇 년 전에 했는데 이 설교를 듣고 그분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 설교한 것을 들었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사람 이름이 이성호 집사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멀리 계시는 게 아닙니다. 멀리 있어도 여기에 있는 우리의 문제를 다 하나님의 손은 해결해 주십니다. 세계 의학이 발달해서 영국에 있는 환자를 미국에 있는 의사가 컴퓨터로 수술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영국에 있지만 로봇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인공위성도 멀리서 기계로 다 수리 하는데 로봇이 발달했습니다. 자동차도 손으로 조립하는 게 아닙니다. 로봇이 정확하게 위치에 꽂아서 나사를 조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사하고 조그만 컴퓨터 시계도 전부 기계가 만드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의학에 발달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한데 왜 못 고칩니까? 하나님의 손은 다 와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 모든 문제를 수술하고 사건을 수술하고 질병을 수술하고 가정의 환난을 수술하고 국가문제를 수술하여 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손들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해결해 주신다라는 것입니다.
동서독이 통일되지 않았습니까? 동서독이 통일된 것이 무슨 힘입니까? 한순간에 기적같이 1989년에 동서독 장벽이 무너지고 그 다음에 동서독 전체가 통일이 됐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시작했습니까? 라이프치히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에서 기도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엔 5명이 모여서 목요 기도회를 하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경찰들이 많이 방해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늘어났습니다. 20명, 50명, 100명, 나중에는 20만으로 늘어났습니다. 50만으로 늘어났습니다. 동서독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동독의 고위간부였던 진더만 공산주의자가 실토를 했습니다. “동독의 통일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군사적으로는 절대로 안 되도록 막았고, 어떤 정보도 다 막았고, 어떤 정치적인 세력도 다 막았는데 라이프치히의 교회의 기도를 못 막아가지고 통일이 되었다”고 자기가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남북도 총으로, 핵무기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높은 사람이 만나자고 그래서 통일되는 게 아닙니다. 만난다고 통일되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의 앞날을 기도할 때 남북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총 쏘고 통일되면 안 됩니다. 수백만 죽고 통일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영국에 있는 환자를 치료하듯이 하나님이 천국에서 조절하면 남북 휴전선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에게로 나아가면 그에게는 길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넉넉히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8.15 해방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기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아니하면 지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병들었고 우리는 비전이 없고 온 나라가 우울증에 빠져서 어린아이들도 네 명 중에 한명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 웃어야 할 아이들의 웃음이 없고 폭력으로 가득 차 있고 애들의 삶이 얼마나 퇴폐의 길을 아이들도 걸어가고 있는 이 민족을 건지는 길은 모여서 주님께로 돌아가면 죄에서 해방하고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인을 하십니다.
롯이라고 하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롯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믿어도 돈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세상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데서 돌아가야 됩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물질이 더 좋은 것입니다. 물질을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게 아닙니다. 믿기는 믿어도 물질을 더 믿는 것입니다. 더 의지하고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믿는 곳으로 나가지 않고 소돔성으로 갔습니다. 소돔성에 가서 좋은 집 짓고 아내와 함께 멋지게 잘 살았습니다. 별장을 가지고 너무 화려하게 살았지만, 그 성은 죄악이 관영한 성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돌라 오멜이라고 하는 왕이 소돔성에 쳐들어 와서 소돔에 있는 사람들 다 붙잡혀 가는데 이 롯도 식구와 함께 다 붙잡혀 갔습니다. 그 때 회개를 했으면 참 좋았었습니다. 그게 1차 경고였습니다. 첫 라인을 통과한 것입니다. 거기서 그렇게 됐으면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아서 어려움이 왔다.’ 이렇게 깨달으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 후에 소돔성으로 또 갔습니다. 거기 가서 사는 것보다 여기가 좋다 이래서 또 간 것입니다. 결심을 해야 됩니다. 결단을 해야 됩니다.
우리 교인이 저에게 와서 말합니다. 자기는 룸살롱을 했는데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었답니다. 그러나 아이가 백혈병에 걸려서 어려워지면서 정리하고 교회 나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서 어려웠습니다. 룸살롱이 그렇게 돈을 번답니다. 강남에서 돈을 굉장히 벌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1차 경고를 딱 받고 그 아들 하나가 백혈병에 걸리면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서 떠나라고 한다. 그 다음 여기에 와 있는데 친구들이 다 룸살롱 친구들입니다. 한 달에도 몇 억씩을 번다고 계속 유혹을 하는데 끝까지 안 가고 나중에는 원주수양관에 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안 가려고. 보통 결심을 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중에 갈 길이 열려서 잘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고가 올 때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물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나아가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세상 죄악을 끊지 못하면 죄악은 여러분을 분명히 묶어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품안으로 안기면 주님 보호해 주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죄 많은 여인을 모두 돌로 다 던지려고 했지만 주님이 곁에 계시니까 돌을 다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를 위해 다 막아주시고자 합입니다. 누구도 우리 집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여러분의 기업과 여러분의 앞날을 누구도 돌을 던지지 못하도록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막아주실 것입니다. 롯은 다시 돌아갔다가 유황불이 떨어져서 그 다음에는 아내도 잃고 재산도 잃고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남북한을 위해서도 주님께 기도해야 되고, 이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되고, 이 나라의 무한한 발전과 축복을 위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또 일본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본과 관계에서 끊임없이 앞으로도 우리가 승리하려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일본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국도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고통당하는 시대를 넘어서서 참으로 8.15의 해방이 영원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 이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긍휼을 바라는 기도
예레미야 애가 3:40-54 / 한영복 목사
예레미야는‘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합니다. (40절) 여기서 우리는 참된 회개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조사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지칭하는 말 중에 ‘Can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정경’, ‘경전’이라는 말로‘척도’, ‘규범’, ‘표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옛날 측량을 할 때, ‘자’로 쓰인 갈대 도구를 지칭하는 것이 그 어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개선하려고 할 때, 과와 실을 조사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조사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조사하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남서울 은혜교회는 일원동 삼성병원 앞에 위치한 밀알학교를 주일 예배 장소로 쓰고 있어서 삼성병원 의사들이 많이 출석한다고 합니다. 그곳에 동기 목사님이 부목사로 있는데 의사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이와 같습니다.
요즘은 교육환경이 좋아져서 의술의 평준화가 많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과 같은 중병 치료율이 삼성 병원과 일반 지방 병원의 차이가 현저합니다. 이러한 차이의 가장 큰 이유는 기계의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큰 병원에서는 큰 돈을 투자하여 새로 생산된 좋은 기계를 일찍 도입합니다. 그리고 지금껏 사용한 기계는 더 작고 열악한 병원으로 가게 됩니다. 이 기계의 차이가 크게는 30년 정도 의술의 차이를 만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준으로 조사하지 않을 때, 우리는 30년 차이보다 더 큰 오진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오진과 오판으로 오는 가장 큰 손해는‘적절한 기회의 상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심판경고에도 불구하고 낙관하다가 결국은 경고 받은 대로 심판의 때를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실 상태를 주변의 무엇이나, 과거 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준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2.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진료의 목적이 적절한 치료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예레미야가 제시하는 조사를 통해 도달할 바른 목표는 여호와이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의 화해이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1995년 6월 29일 퇴근길이 긴급 뉴스에 뒤덮였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는 속보였습니다. 최종 집계 사망 502명(실종 30명 포함), 부상 937명. 최악의 건물 붕괴 참사였습니다.
준공 6년의 새 건물을 무너뜨린 것은 부실시공과 불법 설계 변경, 백화점주의 임의적 용도 변경 등 여러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쇼핑 공간을 넓히기 위해 기둥을 설계보다 25%나 줄이고 불법으로 한 층을 더 올렸다고 합니다. 부패 공무원들은 이를 눈감아주었을 뿐 아니라 공사가 40% 진행된 상황에서 영업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붕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더라도 수많은 인명피해를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백화점측의 안전 불감증 때문이었습니다. 사고 당일 오전 건물의 균열이 벌어지고 기둥이 옥상을 뚫고 나오는 상황에서 긴급 안전 진단을 실시한 설계 감리 회사가 '붕괴 우려'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백화점 측은 하루 5억 원의 매출을 지키려고 영업을 강행했습니다.
진단으로만 끝날 것이라면 아무리 정확하고 정밀한 진단이라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죄감을 가지거나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도달할 때까지 적용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41절에서는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로 들자’고 합니다. 성경에서 손은 종종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입니다. 마음과 행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여 드는 것은 ‘참된 믿음의 반응으로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41절은 ’믿음회복에 대한 촉구‘인 것입니다.
42절은 ‘범죄함’과 ‘반역함’에 대해 언급하고 47절 까지 그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반응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두드러진 반응은 ‘스스로 가리시는 것(43,44절)’과 긍휼을 베풀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관영한 곳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시행됩니다. 죄는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경멸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죄는 분리를 만듭니다. 생명에서, 은혜에서 분리시킵니다.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서 버림받게 만드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면 이스라엘은 이방에게 유린당하게 됩니다.(46절) 이스라엘의 최고 보호막은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죄는 이 천하무적의 보호막을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시각을 유지할 때, 그 고난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
52-54절 본문은 예레미야 자신이 겪은 수난에 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그는 공동체를 위해 울고 기도하며 촉구합니다(48,49절). 이스라엘이 유린당하는 실상을 목도하면서 심령이 상합니다(51절) 십자가 사명을 앞두고도 이스라엘을 향해 우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극도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50절)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하나님의 시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좌절과 절망의 현실에서 믿음이 소망임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그러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허락한 날들을 그러한 사명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