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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최태연
1. 기독교 세계관의 탄생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스코틀란드 장로교 신학자이며 교육자인 제임스 오르(James Orr, 1844-1913)이다. David K. Naugle, Worldview: The History of a Concept,, (Grand Rapids/Cambridge: Eerdmans, 2002), 5.
그 후 이 용어를 사용해서 새로운 신학운동을 일구어 낸 사람은 네델란드(화란)의 르네상스적 인물 (그는 목사, 신학자, 신문편집인, 교회개혁가, 대학설립자, 수상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이다. 이렇듯 기독교 세계관 이론은 유럽의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전통에서 형성되었는데, 이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을 일종의 ‘세계관적 철학’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이미 개혁신학의 창시자인 칼빈(Jean Calvin, 1509-1564)에게 엿보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은 쓰고 있지 않지만, 1560년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불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록 성경은 아무 것도 더할 나위없이 완벽한 교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아직 성경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경험이 없는 사람을 안내하고 방향을 제시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내용 전부를 평범한 사람들이 발견하도록 안내하고 돕는 일은 성경 자체를 통해서 보다 기독교 철학(Christian philosophy)에 포함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잘 이루어질 수 있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 T. McNeil,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0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6.
여기서 칼빈이 말한 대로 ‘기독교 철학’이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활동이라면 칼빈의 신학적 후계자인 제임스 오르나 아브라함 카이퍼가 사용하기 시작한 ‘기독교 세계관’도 그와 비슷한 동기에서 탄생했다. 제임스 오르는 19세기 후반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던 유럽의 세속화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려고 노력했던 신학자이다. 그는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는 장로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독일 철학에서 사용되던 ‘세계관’(Weltanschauung)이란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론은 마침내 1893년 『성육신에 중심을 둔 기독교 신관과 기독교 세계관』(The Christian View of God and the World as Centering in the Incarnation)이란 대작으로 완성된다. 오르는 그 당시 독일 철학과 신학에서 흔히 사용되던 ‘세계관’의 개념을 받아들여 “어떤 특정한 철학이나 신학의 관점으로부터 세상의 사물 전체를 통틀어 파악하려는 가장 넓은 관점을 가진 정신적 태도” James Orr, The Christian View of God and the World as Centering in the Incarnation, (Edinburgh: Andrew Eliot, 1893), 3, (Naugle, Worldview, 7에서 재인용).라고 정의한다. 오르의 목적은 이러한 세계관의 개념을 사용해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데 있었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가 단지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실재하는 모든 사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일관되게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 변증의 수단이 된 것이다.
네델란드의 신학자 카이퍼의 관심은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생활 등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고 드러내려는데 있었다. 1897년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데 스탄다르드” 신문 25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한다: “한가지 열망이 나의 삶을 지배해 왔다. 하나의 고상한 동기가 나의 마음과 영혼에 흔적을 남겼다. . . 바로 그것은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이 가정과 학교와 국가에서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다시 확고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열망이다. 즉 국가가 하나님께 다시 경의를 표시할 때까지 성경과 창조세계가 증거하는 주님의 명령을 국가의 정신 안에 새겨 넣는 열망이다.”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bd Rapids: Eerdmans, 1994), iii.
따라서 카이퍼에게 기독교 세계관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냐, 아니면 불순종이냐의 태도, 즉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들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일으키는 광범위한 시각” Naugle, Worldview, 17에서 출발한다. 카이퍼도 이미 독일 철학에서 사용되는 세계관의 개념을 알고 있었지만, 오르의 책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자신의 기본관점을 체계화하게 된다. 카이퍼가 자신의 기독교 세계관 이론을 비로서 명확하게 제시한 계기는 프린스턴 대학과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강연한 1898년의 “스토운 강좌“(Stone Leture)였다. 오르와 마찬가지로 카이퍼에게 기독교 세계관은 근대의 세속주의(modernism)의 세계관과 대립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일관되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시하는 이론체계이자, 실천의 체계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세계관을 ”삶의 체계“(Life-system) 또는 기독교적인 ”삶과 세계에 대한 조망“(a life- and world-view)이라고 부른다. 카이퍼는 이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이성과 학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근대적 세속주의에 대해 그와 동일한 일관성과 체계성을 가지고 대응하려 한 것이다. 다음은 카이퍼의 절박한 호소이다.
“모든 식물이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이 참인 것 처럼, 삶의 모든 현상아래 하나의 원리가 있는 것이 참이다. 각각의 원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가장 근본적인 원리에 공통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근본원리로부터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조망을 주는 주도적인 이념과 개념들의 전체가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된다. 그러한 자신의 원리와 일관되고 멋진 구조에 확고한 근거를 둔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근대의 세속주의는 기독교를 공격한다. 이러한 생사의 위기 속에서 크리스천은 동일한 분명함과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 자신의 원리에 확고하게 서있는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조망을 근대주의에 대립시킴으로써만 그의 거룩한 신앙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189-90.
2.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
오르와 카이퍼 이후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가르침을 일관되게 설명하고 그 가르침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데 강조를 두어왔다. 오르나 카이퍼 모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영혼의 구원’과 ‘내세에 대한 희망’(개인적 종말론)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타락한 이 세상과 전 우주의 변혁(일반적 종말론)에 관한 신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오르와 카이퍼의 직접적인 후계자들, 헤르만 도예베르트(H. Dooyeweerd), 고든 클락(G. Clark), 칼 헨리(Carl Henry), 프랜시스 쉐퍼(F. Schaeffer)와 캐나다와 미국에서 기독교 세계관 입문서를 쓴 월쉬(B. Walsh)와 미들톤(J. R. Middleton), 알버트 월터스(A. Wolters), 아더 홈즈(A. Holmes), 제임스 사이어(J. Sire), 폴 마샬(P. Marshall)이나 한국의 송인규, 양승훈, 이건창, 성인경, 신국원, 이승구 등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의 기본틀인 창조(creation), 타락(fall), 구속(redemtion)의 원리를 전제로 삼는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의미는 개인의 구원에서 끝나지 않고 세상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에 까지 확장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위대성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창조의 은총(일반은총)에서 출발하여 인간과 우주의 타락과 죄의 결과를 철저하게 인정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역사에 들어 온 구원과 성화, 종말의 완성을 내다보는 거시적인 신학이며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틀(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을 벗어나 모든 크리스천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의 기본 관점을 구체적인 사회적 경험에 적용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세계관은 유럽의 개혁주의, 영미의 청교도주의에서 나타난 것처럼 회심과 경건신앙을 현실생활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려는 개혁주의적 ‘생활영성’(폴 스티븐스) 운동이며 사회참여(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밥 하우츠바르트)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초하는 이론이고 성경에 충실한 신학적 해석을 존중한다. 그러면 기독교 세계관이 근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언급해 보자.
1) 창조주의 주권과 영광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 27-8)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
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 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시8:4-6)
2) 하나님의 일반은총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b)
3) 인간과 세계의 타락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
를 하였더나(창 3:7)
- 그 후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
고 다 치우쳐서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1)
-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2)
4)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회복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
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1)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 졌고 바다도 다시 있
지 않더라(계 21:1)
-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 문들이 낮에는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4-26)
3.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
기독교 세계관은 신앙생활에서 신비체험이나 은사체험 그리고 죽음 후에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는 개인적 종말론보다는 현실의 사회생활 속에서 신앙의 표현과 실천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에 올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지향하는 일반적 종말론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 욕구, 감성, 이성을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로 보되, 그것들을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섭리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모든 사회활동과 직업활동이 하나님의 평가의 대상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교수나 변호사가 되는 일”이 “생선장수나 자동차 수리공이 되는 일”보다 훨씬 더 가치 있게 평가되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요즘의 신세대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합리적이거나 필수적이라고 반드시 생각하지 않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결혼과 가정이 창조질서 보전의 중요한 사명이다. 성욕(sexual desire)도 근본적으로 창조의 선물로 인정되지만, 어떤 관계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도 평가되기도 한다. 일류대에 입학해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성공과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서울대나 하바드대가 성공의 최고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위치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열매를 맺는냐가 기독교적 성공의 최고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가 열매로 나타나기까지 우리의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일방적인 능력주의나 숙명주의 모두를 반대한다.
여하튼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적인 욕구나 감정이나 이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왜곡된 사회적 기준과는 달리, 그것들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재평가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을 일관되게 실천하는 일은 동양의 전근대적 전통주의와 서양의 근대적 합리주의,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불안정하게 결합된 우리 사회와 문화상황에서 매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연구와 실천은 이 땅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한 적극적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