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물들어 가는 모습이 아름 다워서.. 아름다운 석양은 구름이 있여야 만 그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구름(먼지)과 같은 시간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석양의 모습처럼 우리내의 인생도 아름다워 지길 위하여...
◈ 완주군 주변의 성지들
▶ 수청 본당시기(1942~1950)
이곳은 본래 되재 본당에 소속된 공소였다. 그러다가 1942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김영태(金永泰, 도미니코)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김 신부는 이때 기존의 공소 건물을 성당으로 삼아 사목에 임하였으며, 1944년 주임 신부의 공석으로 폐지된 되재 본당 지역까지를 관할하였다. 그 결과 되재 본당은 수청 본당의 공소로 남게 되었다. 이후 수청 본당은 제2대 서정수(徐廷壽, 알렉스) 신부가 재임하던 증 6 · 25 동란이 일어나 성당이 파괴됨은 물론 교우촌이 모두 불타 버렸고, 이로 인해 본당이 폐쇄됨과 동시에 삼례(參禮) 본당의 공소로 되었다가 1958년 고산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 고산 본당 시기(1958~현재)
1951년 삼례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활동하던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는 일찍부터 관내의 폐쇄된 본당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현재의 고산 본당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시 본당이 신설되지는 않았다. 이 신축 성당을 중심으로 고산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 4월 25일이었으며, 이로써 기존의 되재 본당과 수청 본당의 공소들은 모두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는 이후 5년여를 본당에 재임하면서 본당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전임되었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신부들이 사목에 임하다가 1992년 1월부터 박종충(박종충, 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3년 현재 본당의 신자수는 1,803명이며, 거룩한 말씀의 회 수녀들이 사목을 돕고 있다.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 전주교구 완주 고산 성당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정 붙이기 힘든 삭막한 도시보다 할아버지가 살던 시골 마을 풍정(風情)이 더 살가운 것도 그곳이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북 완주군 고산 지방은 한국 천주교 창립과 더불어 형성된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어 우리 믿음의 고향과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고산은 전주시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다. 갈대가 널브러진 만경강을 지나 읍내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고산 성당(주임 이태주 신부)이 있다. 성당 부지인 동쪽 대나무 숲을 경계로 해 고산 초등학교가 있고, 북동쪽 고산천변에는 향교가 있다.
고산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이지만, 그 모태는 1893년에 설립된 되재 본당이다. 고산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이다.
고산 지역은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에 저구리ㆍ넓은바위ㆍ다리실(천호)ㆍ차돌박이(백석)ㆍ석장리ㆍ되재 등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이 지역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현재 천호 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베드로)ㆍ손선지(베드로)ㆍ정문호(바르톨로메오)ㆍ한재권(요셉) 등 순교성인 4위와 김영오(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명이 고산 지역 출신이다. 또 한국전쟁 당시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창궐한 빨치산에 의해 순교한 신자들도 상당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