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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회주 혜산스님 입적 |
부안 내소사 회주 혜산스님이 13일 오후 2시 내소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3세. 법랍 43세. 1933년 전북 정주에서 태어난 우암 혜산(愚巖慧山)스님은 1958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1963년 내소사에서 해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해인총림 해인사 선원장,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조계사 주지, 서울 성북동 전등사 주지, 한일불교교류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89년부터 93년까지 내소사 주지를 맡았으며 입적 전까지 회주로 후학을 지도했다.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063)583-3636 장영섭 기자 다음은 본지 2136호에 실렸던 '선지식을 찾아서'의 혜산스님 인터뷰기사 수행자에겐 깨달음이 가장 큰 복 내소사 회주 혜산스님 부안 내소사의 명물은 입구에 늘어진 전나무 숲길이다. 500m 길이의 울창한 침엽수림은 피서철이면 삼림욕을 즐기는 행락객들로 북적댄다. 내소사 회주 혜산스님을 만나러 간 지난 8일은 평일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다. 길과 독대(獨對)했다. 인생은 보통 길에 비유된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땀을 식히긴 해도 도를 알고 가는 일은 드물 거라는 생각. 그래서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되 닫혀 있다. 그리고 왜 그 길은 늘 평지가 아니고 가시덤불인가.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길은 말이 없고 길의 저편은 보이지 않는다. 스님이 삶의 참된 길을 묻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이다. 진리에 대한 갈증은 목말랐지만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절대적 진리를 말하는 종교에 귀를 기울였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누구보다 열심히 성경을 탐독했지만 그 안에서 적지 않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했다. 목회자들에게 의문점을 물어봤을 때 그저 “믿음이 부족해서 비롯된 어리석음이니 신명을 다해 기도하라”는 허전한 대답만 돌아와 더 견디기 어려웠다. “스스로 의심이 가득찬 채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그리고 나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라 따지며 교회를 박차고 나왔다. “가장 잘 사는 법이 무엇일까. 나는 그게 대자유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절대적 진리라고 명명된 것은 하나같이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굴레였습니다.” 군산시청 공무원으로 임용돼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인이 됐지만 ‘내가 갈 길은 아니다’라는 부담감은 지울 수 없었다. 방황하던 어느 날 훗날 은사가 된 해암스님을 만났다. 알고 지내던 한 스님에게서 해암스님이 지은 <금강경> 해제를 건네받았다. 무심코 책장을 넘겨보다가 ‘무유정법 명(名)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구절에 눈이 번쩍 뜨였다. 발심이 터진 것이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법, 그것을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일컫는다.’ 눈이 번쩍 뜨였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의 세계가 금강경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선명해지자 스님은 주저 없이 산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해암스님과 편지왕래만 3년을 했다. 공부방법에 관한 질의와 응답, 다짐과 격려가 수십 통을 오고 갔다. 스승에게서 받은 마지막 서신내용에 부리나케 짐을 쌌다. ‘말로서 불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직접 뛰어들라.’ 내소사 옛 선원인 서래선림에서 입재한 용맹정진법회에 참가한 것이다. “정말 피눈물 나게 정진했습니다. 기필코 견성하겠다고, 어렵게 얻은 가르침을 허무하게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3주 간의 땀과 정성에 대한 보답은 오지 않았다. 법회가 끝나고 참석했던 재가불자들은 모두가 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스님은 실망과 억울함에 법당에서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해암스님이 넌지시 다가와 하산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내 필생의 과제를 못 마쳤는데 어떻게 절 아래로 내려가 천연덕스럽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재목을 알아본 해암스님은 청년의 머리를 깎이고 먹물 옷을 입혔다. 그렇게 내소사에서 출가한 지 40년이 넘었다. 전나무 숲길을 드나든 지도 능가산에 물드는 단풍을 바라본 지도 반세기 가까이 됐다. 오랜 세월이지만 성불해야 한다는 집념은 한번도 잦아들지 않았다. 1000년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불은 부처가 되는 것.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자기 안에 복덕과 지혜가 두루 갖춰져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인간만큼 복에 연연하는 동물도 없죠. 복의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몇 푼 거저 얻었다고 세상을 다 얻은 양 희희낙락하다가도 몇 푼 잃으면 자살을 고민하는 게 인간입니다. 깨달음보다 큰 복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라도 다음 생까지 지고 갈 순 없잖아요. 하지만 깨달으면 과거 현재 미래 영원히 자유롭고 평안합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성공을 꿈꾼다면 수행하세요.” 자기를 안다는 것은 나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구할 나가 없음을 깨우치는 것이다. “수행의 목적은 무아임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라는 불행한 경계를 지우면 삼라만상이 나와 계합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네가 아닌 내가 있다’는 망상은 재앙의 근원입니다. 결국 나라는 허상을 부지하기 위해 애쓰다 스스로의 삶을 망치는 격이지요.” 은사 해암스님은 혜산스님을 길 위로 안내해 그 길 위에서 희망을 준 사람이다. 제방을 돌며 당대의 이름난 선지식을 여럿 뵙고 지도를 받았지만 해암스님만한 분이 없었다는 평가다. “서래선림엔 안거철마다 20여명의 납자들이 방부를 들였는데 스님은 20명 한사람 한 사람을 아침마다 차례대로 불러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 점검을 해 줄 만큼 애정을 쏟아 부으셨죠. 견성의 방법에 대해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노심초사했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합니다.” “입선시간만 보는 것이 아니고 방선해 납자들이 경내를 포행 하는 모습까지 유심히 살핍니다. 조금이라도 화두를 놓친 듯한 눈치면 그 자리에서 불호령이 떨어지죠.” 수행이 좌선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 앉으나 서나 일어섰을 때나 누웠을 때나 화두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 전체가 수행이어야 합니다. 얼마나 삶에 치열함과 진정성을 갖추었느냐가 관건이죠. 재가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에 나온 부처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부단하게 자신의 일상을 성찰하고 채근하는 이가 참다운 불자입니다.” 스님은 “은사스님처럼 친절한 스승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스승은 일체 도를 깨달은 선지식이다. 선지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불만을 출세간에서나 세간에서나 종종 들을 수 있다. 지금이 부처님의 정법이 쇠한 말법시대라고 주장할 때 거론되는 사례다.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순식간에 멸종되고, 불교가 태동한 인도에서 지금은 그 번성했던 교세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제행무상입니다. 그렇다고 무상(無常)이라는 상(相)에 빠져 허무주의에 탐닉하고 있으면 말법에 기름을 들이붓는 셈이죠. 주변의 환경이 어떻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가로등이 전부 깨어졌다고 칠흑 같은 어둠의 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늑대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믿을 것은 화두를 움켜쥐고 있는 나 자신 뿐. 내소사 봉래선원의 안거는 법랍 30년 이상 된 스님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다. 화두를 타파하진 못했다 해도 어느새 가슴 속에 화두가 농익은 구참들이다. “옛 조사스님들은 복덕이니 보살행이니 일체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화두 하나에만 몰입하라고 강조할 따름이었죠. 포교도 중요하지만 애당초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겠다는 결심을 한때로 돌아가 보십시오. 견성하지 못하면 한평생을 다시 살아도 다 갚지 못할 수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안거의 계절이다. 안거에 들어간 납자들에 대한 당부를 청했을 때 스님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따로 할 말이 없어요. 오직 화두일념으로 정진하란 말 밖에는.” 불현듯 돌아서 전나무 숲길을 되돌아 올라가는 스님의 어깨가 70노구에도 다부져 보인다. 스님은 오늘도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나는 일체 도를 깨달은 선지식이 아니다”라는 겸양 속의 비장함은 선지식의 미소만큼이나 결이 깊고 아름답다. 물론 길게 늘어진 전나무 숲길의 끝은 여전히 희미하기만 하다. 그러나 길은 반드시 길 위에 있다는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부안=장영섭 기자 내소사 40여년 머무른 큰어른 봉래선원 개원 혜산스님은 1963년 입산해 40년 넘게 내소사에 머무른 사찰의 큰 어른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 스님이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천년고찰이다. 능가산(변산)의 커다란 바위봉우리를 병품 삼아 대웅전이 서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법당이다. 보물 제291호로 지정돼 있기도 한 내소사는 못하나 쓰지 않고 나무만으로 끼워 맞춘 건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잠시 종단의 소임을 맡던 스님이 완전히 정착한 1983년의 내소사는 지금처럼 웅장하지 않았다. 스님은 만허스님 관해스님을 거쳐 은사 해암스님까지 주석했던 사찰을 일신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은사스님에 대한 감사를 잊지 못해 불사를 시작했다. 본찰 요사채를 포함해 지장암, 청련암 등 무려 32채의 건물을 새로 짓는 놀라운 역량을 발휘했다. 2001년 서래선림을 대신해 봉래선원을 신설해 매년 꾸준히 20여명이 납자들이 방부를 들이고 안거정진하고 있다. 내소사 불사에서 보듯 스님의 종무행정 수완은 남다르다. 2년간 조계사 주지를 맡던 시절, 독특하고 의미 있는 행사를 자주 기획하고 개최, 중앙 일간지에 매주 한번씩은 조계사에 관한 기사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스님은 아직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본 일이 없다. “깨달음의 언어를 하지 못하고 남들이 해놓은 말을 앵무새처럼 지껄여 봐야 공연히 세상을 흐리게 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여생에 남은 과업은 정진뿐”이란 다짐도 잊지 않았다. 1933년 전북 정주에서 태어난 우암 혜산(愚巖慧山)스님은 1958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1963년 내소사에서 해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해인총림 해인사 선원장,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조계사 주지, 서울 성북동 전등사 주지, 한일불교교류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89년부터 93년까지 내소사 주지를 맡았으며 현재 회주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
2005-06-14 불교신문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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