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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1868년 메이지유신 주역> 사이코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사카모토 료마, 카스 카이슈, 기도 다카요시/메이지 천황(1852~1912)
이장희 추천 0 조회 186 15.12.21 23: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은 대정봉환에 의해 조정이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조신(朝臣)과 반(反)바쿠후의 주동 세력인 사쓰마 한[薩摩藩], 조슈 한[長州藩]서남웅한[西南雄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여, 공의세론(公議世論)의 존중과 개국 진취의 방침을 밝힌 5개조의 서문(五箇條ノ御誓文)을 발표하였다.


신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도쿄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라고 고쳤다. 또 봉건적인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급속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정부는 문명개화라고 불린 구미(歐美)의 기술·제도의 직수입을 추진하는 한편, 왕을 신격화하고 신토[神道]에 국교적(國敎的)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야시쿠니 신사 건립


사족(士族)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운동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으로 진압하고, 또 번벌(藩閥) 전제정부 타도를 외치는 민권운동이 일어나서, 정부는 프로이센 헌법을 본 뜬 메이지헌법[明治憲法]을 제정하였다.


정부지도 하에 산업의 근대화가 추진되어, 제1차·제2차의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한편 청일(淸日)·러일[露日] 두 전쟁을 일으켜서 타이완[臺灣]·한국·사할린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여 제국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영일동맹(英日同盟)에 의해 동(東)아시아에서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큰 이득을 얻어 세계열강과 어깨를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대전 후 구미제국에 일어난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호헌(護憲)·보통선거 등의 운동이 일어났고 평화주의·국제주의의 풍조가 활발해져서 정당내각(政黨內閣)이 탄생하였다.


또 노동운동이 활발해져서 이른바 다이쇼[大正: 明治 다음의 왕(1912~1926) 또는 그 年號] 데모크라시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쇼와[昭和: 大正 다음의 천황(1926∼1989) 또는 그의 연호] 초기에는 세계적 불황(미국 대공황)의 물결에 휩쓸려서 일본의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륙침략을 꾀하였으며, 점차 군국주의·국수주의의 경향이 강해져갔다.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우고 다시 중국과 충돌하여 중·일(中日)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부아시아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영국 등과 대립하여 결국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다이쇼[大正: 明治 다음의 왕(1912~1926) >

 

(2) 쇼와(昭和)시대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하고, 농지개혁·재벌해체 및 전쟁범죄자의 재판·공직추방을 실시하였다. 또 국민주권 하에 남녀평등 및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의 패전에 의하여 한국이 8·15광복을 맞았고, 만주국이 중국에 복귀하였으며, 사할린·쿠릴 열도와 타이완이 각각 소련과 중국에 반환되는 한편 오키나와[沖繩]를 미국이 분할점령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전후에는 한국의 6·25전쟁에 의한 특수경기(特需景氣)로 경제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뒤, 1951년의 연합국의 대일(對日) 강화조약(소련 불참)과 미일(美日) 안보조약에 의해 주권을 회복하여 자유진영에 가담하였으며,


장기간에 걸친 보수당정권 밑에서 급속히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경제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 국민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공해문제·물가상승 등을 초래하였다.


한편 소련·중국 등과 공산국가와도 국교가 회복되어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높아졌다. 1989년 1월 쇼와왕의 사망으로 1990년 11월 아키히토[明仁]가 왕에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헤이세이[平成]이다.

 

1955년 이후 38년간 집권한 자민당1993년 중의원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정권을 상실했으며, 같은해 8월 7개의 야당연립정부인 호소카와[細川]정권이 탄생하여 전후 정치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94년 6월에는 자민당, 사회당, 신당사키가케 등의 연립정부가 탄생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고, 1998년 7월 자민당 당수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가 일본의 84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4월 5일 재임중 사망한 오부치 게이조의 뒤를 이어 모리 요시로[森喜郞]가 일본의 제85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다. 2001년 4월에는 자유민주당의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 3당의 지지로 제87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제 122대, 메이지 천황(1852~1912)

 

일본의 역사에서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봉건 정치 체제를 해체하고 일본 사회의 근대화 과업을 성취한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과업은 메이지 유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일본 사회의 근대화, 다시 말하면 메이지 유신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간략하게 요약하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정치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토에 있던 상징적 존재인 천황에도(지금의 도쿄)에 자리잡고 있던 실권 정부 막부 그리고 지방의 275개의 봉건 영주인 번주(大名: 흔히 다이묘라고 부른다)가 일본을 삼분해서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실체적 중앙 통치권을 행사한 지배 정부는 막부였다.


막부의 우두머리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라고 부르고, 천황이 이를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나 그 임명에 있어서 천황은 재량권이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통치 체제를 막번 지배 체제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세습제인 도쿠가와 막부의 대장군도 최강의 봉건영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지방 영주보다는 800만 석의 재정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할령과 하타모토 8만기라는 근위 무사를 거느린 막강한 재정적·군사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그 지배 체제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275개 지방 영주라고 하는 다이묘는 각자의 영지와 무사 그리고 독자적인 법체계와 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막부와 독립된 위치에서 통치를 행하였으며, 막부는 원칙적으로 각 지방의 영주에 대해서는 그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었다.

 

간섭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며 그것도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이 두 중앙(막부)과 지방(번)의 관계는 동맹국간의 관계와 유사하며 단지 막부가 힘이 강하여 일본 통치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 정치의 분할 통치 체제를 타파하고 지금까지 실세를 갖지 못한 상징적 존재인 천황을 실세 천황으로 만들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천황을 앉혀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대정봉환을 실현하였으며 그 결과 막부는 소멸되고 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275개의 번은 폐지됨과 아울러 현제도로 대치되어 그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바치는 판적봉환이 단행되었다.


두 가지 혁명적 조치로 일본에는 250여 년 간 지속된 봉건 정치 체제인 막번 체제가 해체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중앙 집권 정부가 확립되었다. 이때가 바로 1868년이며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의 일이다. 또 이때에 추대된 천황이 메이지이며 그는 그 전대인 천황인 고메이 사후 즉위하자마자 토막파정치 세력에 추대되어 메이지 유신을 수행했다.


1868년 3월 14일 교토 어소에서 공경 제후 및 백관의 군신을 이끌고 천지 신명에 서약하는 형태로 유신 정부의 기본 방침을 천명했다. 이것을 일본 역사에서는 5개조의 서문이라고 친하였는데


그것은 첫째, 널리 공의를 일으켜 만기를 공론에 의하여 결정한다.

둘째, 상하가 합심하여 경륜을 지속적으로 펴 나라를 번창하게 한다.

셋째, 관과 무는 물론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는 그 뜻을 수렴하여 언제나 민심을 헤아리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넷째,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여 천하의 공도를 세운다.

다섯째, 지식을 세계에 널리 구하고 황실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이를 번창하게 한다.


이로써 메이지 신정부를 출범시킴에 있어서 천황과 신민이 공동으로 서약한 통치의 기본 방향이 확정된 셈이다.


이때 메이지 천황은 16세이었다. 이 어린 천황이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근대화 과업을 독자적으로 영도력을 발휘하여 수행할 수는 없었다.

 

단지 유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당시의 선각자적인 유수한 지사들에 의해 당시 형식적인 왕으로 있던 그는 단일 중앙 집권 정부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을 뿐이다.

 

소위 말하는 일본 천황가의 만세일계의 정통성으로 보아 메이지 이외는 그 당시 추대될 인물이 없었다.


이러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의 일본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구체제가 붕괴되고 새 체제로 변혁되는 데는 반드시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있게 마련이고 또 그 필요성이 있게 마련이다. 또 거기에는 반드시 대외적 필요성과 대내적 당위성이 국민의 공감을 얻어 점차 일반적 공론으로 승화되며 이 공론을 목숨을 걸고 밀고 나가는 주역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있어서도 시대적 상황과 인물 등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250년 간의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는 일부 개항이 있었다고는 하나 원칙적으로 쇄국주의를 일관해 왔다. 그러던 일본에 1850년에 들어서면서 통상 개항을 강요하는 외세의 압력이 밀어닥쳤다. 이러한 압력은 조야를 막론하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태까지 보지도 못했던 외국의 거함(일본에서는 흔히 흑선이라고 했다)을 들이대면서 개항이냐 아니면 싸움이냐는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때는 1853년 7월 8일 아침, 사령관 페리가 이끄는 미국의 동인도 함대가 에도만 입구에 닻을 내리고 일본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필모어(미국의 제13대 대통령)가 일본 천황 앞으로 보낸 친서를 건네면서 통상 개항을 요구했다.


그 친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미국 대통령은 강력한 함대와 함께 페리 제독을 귀국에 파견하여 귀국의 유명한 에도를 방문케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우, 둘째 통상, 셋째 석탄과 식량의 공급, 마지막으로 우리측 난파민의 보호입니다.


페리의 내항을 계기로 일본 조야는 시끄러워졌다.

 

그것은 1871년 한말의 대원군 섭정 시대에 신미양요를 계기로 조정의 강력한 쇄국양이 정책과 일부 젊은 세대의 개항론으로 국론이 시끄러웠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할 것이다.


페리 제독은 위의 네 가지 요구 조건 중 통상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요구 조건을 관철하고 돌아갔으나 그는 이듬해 1854년 2월 13일 에도 만에 대진용을 이끌고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미일 통상조약 초안을 가지고 왔으나 통상 부문에 대한 일본의 변함 없는 반대 의사를 확인하고 영사 파견에 대한 동의를 얻고 가까운 시일 내에 통상 조약의 교섭을 재개한다는 의사를 안기고 물러갔다. 그러나 페리 제독의 내항과 통상 개항의 요구를 계기로 일본 사회는 긴 잠에서 깨어나 세계의 흐름에 눈을 떴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적 문제에 대한 대응과 전략에 중앙 정부격인 막부의 무능이 드러남에 됨으로써 지난 250여 년 간 쇄국 정책을 일관해온 막부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교토에서 칩거하던 천황도 소리를 내게 되고 지방의 영주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천황 고메이는 강한 양이론에 섰으며 각 지방 영주들은 제각기 양이론개항론으로 편이 갈라졌다. 막부는 그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일본 역사에 있어 이때처럼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의 중심이 흐트러져 대외적 대응에 있어 갈팡질팡할 때가 없었다. 이제야 일본 정치에 있어 강력한 정치적 리더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봉건적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강력한 일원적 중앙 집권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 정치 체제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공감하는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인재들은 막부의 고관 현직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 또 지방 봉건 영주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방 봉건 영주에 속해있던 하급무사이거나 중류층 출신의 신진 엘리트이었다. 그들은 막부를 타도하는 길만이 일본을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는

 

토막파의 선봉자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조정(천황)과 막부를 한데 묶어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공무합체파도 생겨났으나 결국은 토막파가 승리하여 메이지유신은 성공을 거두고 일본 사회의 근대화 과업은 완수되었다.

 


토막파의 주류(=유신의 3걸)

 

규슈 남단사쓰마(가고시마현)하급 무사에 속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

 

주코쿠 조슈번(야마구치현)의 기도 다카요시와의 샷쇼동맹을 이끈,

지금의 시코구도사(고치현)사카모토 료마의 노력과

 

그리고 토막파의 무혈 개성을 이룩하게 한

도쿠가와 에도막부의 중카쓰 가이슈를 메이지 유신의 4걸이라고 부른다.

 

이들이야말로 일본 사회를 근대화로 바꾸어 놓은 핵심 인물이며 메이지 천황은 이 사람들에 의해 추대된 왕이다.


이들 메이지 유신의 4걸 중 ①사이고와 ②오쿠보사쓰마번의 하급 무사급의 서민 출신이고 각각 1827년 생과 1830년 생으로 비슷한 연배에 속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도사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국내외 정세에 밝은 재사로서 1835년 생이고, 사카모토 료마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

 

기도 다카요시주코쿠 조슈번(야마구치현), 또 한 사람의 주역인 이와쿠라 도모미넓은 의미의 조슈 출신으로 중류 출신(문사)이었으며 각각 1833년 생과 1825년 생들이었다.

 

메이지 유신에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인 카쓰 가이슈토막파인 위 다섯 사람과는 달리 도쿠가와 막부막신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막부의 직할 무사단인 하타모토 출신이다.


카쓰 가이슈는 1923년 에도(도쿄) 출신으로 어릴적에 4년 간 홍복사에서 좌선 수양했고 그 뒤 화란학에 눈을 떠 공부한 후 화란학 학원을 개소, 후진들을 양성하고 대포와 철포의 포대 설계를 하며 일본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 후에 막부의 우두머리 아베에게 천거되어 관운이 트인 재사로서 당시의 정부인 막부 신료 중에서 도미 경험을 갖는 등 세계 정세에 밝고 국제 감각을 가진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위 다섯 사람의 존왕토막파중앙 정부격인 막부의 뛰어난

카쓰 가이슈의 단수 높은 책략과 묘수가 엮어 낸 정치 예술이었다.


토막파대정봉환 요구가 막부에 의해 지지부진 진척이 없자 드디어 토막이 시작됐다.

1867년 12월 9일 사쓰마, 도사 등의 번병 중심으로 조정의 어소에서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 정치를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일본은 왕정과 막부의 두 개 정부가 탄생했다. 그 모임에서 토막파들은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사임과 반납지를 결정하고 막부가 이에 순응할 것을 통고했다.

 

이에 대해 막부는 쿠데타군 토벌을 발표하고 진군을 개시했다.

양군은 교토 부근의 도바 후시미 부근에서 충돌하였으나 토막파가 승리하였다.

그 세를 몰아 마침내 막부의 수도 에도를 공략하려 할 때

 

③사카모토 료마새 국가 구상론과 정치 철학에 깊숙이 젖어 있던

 

막신 ④카쓰 가이슈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고 막부의 대표로서

 

왕정토막군①사이고 다카무리담판하여 무혈로 성을 열어줌으로써 250여 년 간의 도쿠가와 정권은 멸망하고 천황 정부가 일본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실현되었다.


한편 지방 봉건 영주가 지배하고 있던 번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메이지 원년인 1868년부터 2년에 걸쳐 판적봉환(지방 영주들이 그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조치)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진척이 지지부진하자 왕정 복고의 대목적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메이지 유신 주역들인  ①사이고 ,②오쿠보, ⑤기도, ⑥이와쿠라 등이 협의하여 폐번치현(274藩을 폐하고 3부72현으로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명실공히 250여 년 간 존속되어온 막번 통치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전국 통일 중앙 집권 정부가 창건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일본은 근대화 과업을 성취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부국 강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개항 정책) 오늘의 일본이 있게 된 것이다.

 

* 유신3걸 삼두마차는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 정부를 수립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샷쵸동맹 알선 이후 : 1867년 12월 10일 (31) 암살 당함

 

1.사쓰마(가고시마현) 사이고 다카모리 49세 쿠데타 실패 자결1877년

2.사쓰마(가고시마현) 오쿠보 도시미치, 48세 암살 1878년 

3.조슈 번(야마구치현) 기도 다카요시 43세 질병 사망

4.막부 고관 -가쓰 가이슈(勝 海舟)

 1. 생애

 

 본명은 가쓰 야스요시(勝安芳)로 원래 가쓰 요시쿠니(勝義邦)였으나 메이지 유신 후에는 가쓰 야스요시(勝 安芳)로 개명했다.

 

에도 시대 및 메이지 시대의 고위관리다.

 

관위는 종1위 백작. 야마오카 뎃슈, 다카하시 데이슈와 함께 「에도막부 말기의 3슈」라고 불린다.

 

호인 가이슈는 사쿠마 쇼잔에게서 받은 전각「海舟書屋」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일본해군을 근대화하고 해안방어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1868년 무력충돌 없이 천황파가 에도에 입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막부의 자료를 수집하여 각종 제도에 관한 사료집을 편찬했다.《스이진로쿠(吹塵錄)》《개국기원》《해군역사》등의 저서를 남겼다.

 

 1823년(文政 6년), 3월 12일에 에도(江戶) 혼조(本所) 가메자와초(龜澤町)에 있는  본가인 오타니(男谷)가에서 아버지 고키치(小吉)와 어머니 노부(信)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킨이치(銀一)는, 에치고(越後)국 산토군(三島郡) 나가토리(長鳥) 마을의 빈농의 집에 태어난 맹인이었다. 에도(江戶)에 나와 고리 대금(맹인에게 허용되고 있었다)에서 성공해 엄청난 재산을 얻고, 겐쿄(?校)의 직위를 사서, 요네야마 겐쿄(米山檢校)를 자칭했다. 킨이치의 아들 헤이조우(平藏)는, 고케닌(御家人)株를 입수해서 오타니(男谷)가를 일으켰다. 오타니가는 후에 하다모토의 지위로 승격되었다. 그 헤이조우의 삼남이 가이슈의 아버지 가쓰 코키치(勝小吉)다. 고키치가 삼남이었기 때문에 오타니가에게서 가쓰(勝)가에 양자로 보내졌다. 가쓰(勝)가는 고부신구미(小普請組)라고 하는 직책이 없는 낮은 하타모토의 신분이다. 가쓰(勝)가는 덴쇼(天正) 3년(1575년)이래의 고케닌이며, 계보 상 가쓰 가이슈의 고조부에 해당하는 노부마사(命雅)가 1752년에 하다모토의 열에 끼게 되었다. 아버지는 당시 연간 20석 정도를 받는 하급관리였다.

 

 유소년기, 오타니의 친척인 아챠노 츠보네(阿茶の局)의 소개로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손자인 쇼노죠(初之丞, 후의 히토츠바시 요시마사)의 놀이상대로서 에도성(江戶城)에 불러 들어갔다. 히토츠바시가의 가신으로서 출세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요시마사(慶昌)가 요절하여 그 희망은 사라졌다.

 

 오타니(男谷)가에서 7세까지 보낸 후, 아카사카(赤坂)에 이사할 때 까지 혼조(本所) 이리에초(入江町)에서 생활했다.

 

 검술은, 친아버지 고키치의 본가에서 사촌형제의 오타니 세이이치로의(男谷精一郎)의 도장, 뒤에 세이이치로(精一郎)의 수제자인 시마다 도라노스케(島田虎之助)의 도장에서 배우고, 지키신카케류(直心影流)의 면허를 전수 받았다. 도라노스케(虎之助)의 권유에 의해 선(禪)도 배웠다.

 

 에도(江戶)의 난학자·미츠쿠리 겐보(箕作阮甫)에게 제자로 들어가기를 청원했지만 거절당하여, 아카사카다메이케(赤坂溜池)의 후쿠오카(福岡) 번저택 내에 사는 나가이 세이가이(永井?崖)의 제자가 되었다. 1846년에는 주거를 혼조(本所)에서 아카사카다(赤坂田) 마을로 옮겨갔다. 이 난학수행중에 도후·하루마사전(ドゥ?フ?ハルマ, Doeff-Halma Dictionary)을 1년에 걸쳐서 2부 필사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부는 자신을 위해서, 1부는 팔아서 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대의 난학자라 할 수 있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알게 되었으며 쇼잔의 권유로 서양병학을 공부하였다.

 

 1850년 다마치(田町)에 난학, 병법학, 화포술 등을 가르치는 개인학원을 열었다.

 

 1853년 페리가 내항하여 에도 바쿠후에 개향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로쥬 아베 마사히로가 바쿠후(幕府)의 결단만으로 쇄국을 그만두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해방(海防)에 관한 의견서를 막신(幕臣, 바쿠후의 신하)은 물론 여러 영주에서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모집했다. 이에 가쓰도 해방의견서를 제출했다. 가쓰(勝)의 의견서는 아베(阿部) 마사히로(正弘)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바쿠후의 카이간보우교우가카리(海岸防禦御用掛, かいがんぼうぎょごようがかり)인 오쿠보 타다히로(大久保 忠?)를 알게되어 염원하던 역직을 얻을 수 있어, 가쓰는 스스로 인생의 운을 쥘 수 있었다.

 

 그 후, 나가사키 해군전습소(나가사키카이군덴쇼죠, 長崎海軍?習所에) 입문했다. 전습소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감도 겸하고, 전습생과 교관(네덜란드인)의 연락역(통역)도 맡았다. 이 때의 전습생에는 야타보리 고우(矢田堀鴻), 나가모리 코지로(永持亨次?) 등이 있었다. 나가사키(長崎)에게 부임되고 나서 몇주일 후에는 듣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인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제1기부터 3기까지 햇수로 5년간을 나가사키(長崎)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당시의 사쓰마(薩摩) 한슈·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彬)도 알게되어, 이는 후의 가쓰(勝)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860년, 바쿠후(幕府)는 미일수호통상조약(1858년에 체결)의 비준서 교환 때문에 사절을 미국에 파견한다. 이 미국 해외 출국의 계획을 세운 것은 이와세 타다나리(岩?忠震) 등 히토츠바시파의 막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세이(安政)의 대옥 사건으로 인해 은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 정사 신미 마사오키(正使?新見正興), 부사 무라가키 노리마사(副使?村垣範正), 메츠케 오구리 타다마사(目付?小栗忠順) 등이 선정되어 미국 해군의 포하탄(Pawhatan)호로 태평양을 횡단해 도미했다.

 

이 때, 호위라는 명목으로 간린마루호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해외 출국했다. 여정은 37일이었다. 간린마루호에는 군칸부교(軍艦奉行, 군함봉행) 기무라 세츠노가미(木村攝津守)가 최상위로, 가쓰(勝)는 미사절의 보충원으로서 승선했다.

간린마루호에는 미해군에서 측량선 페니모어 쿠퍼(Fenimore Cooper)호 함장 존·브룩 대위가 동승했다. 통역의 존 만지로, 기무라(木村)의 종자·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도 올라탔다.

 

간린마루의 항해를 가쓰(勝)도 후쿠자와(福澤)도 「일본인의 손으로 완수한 장거」라고 자찬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본인승무원은 배멀미를 때문에 대부분 도움이 되지 않고, 브룩들이 없으면 도미할 수 없었다라고 하는 설(說)이 있다.

후쿠자와(福澤)의 『후쿠옹자전』에는 기무라(木村)가 「함장」, 가쓰(勝)는 「지휘관」이라고 씌어져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현직은 없고, 기무라(木村)는 「군칸부교」, 가쓰(勝)는 「함장격(?授方取り扱い)」이라고 하는 입장이었다. 미국측은 기무라(木村)를 애드미럴(admiral)(제독), 가쓰(勝)를 캡틴(함장 또는 대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국에서 일본에 귀국할 때는, 가쓰(勝) 등 일본인의 능력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후, 반쇼시라베소(蕃書調所) 도우토리(頭取)·코우부쇼(講武所) 포술사범 등을 맡다가, 분큐(文久) 2년(1862년)의 바쿠후 정치개혁으로 해군에 복귀하고, 군함조련소 도우토리(頭取)를 거쳐 8월에는 군칸부교에 취임하였다. 고베(神戶)는 닻을 내리기 좋고, 수심도 비교적 깊어 큰 배도 기항할 수 있는 천연의 양항이므로 고베(神戶)항을 일본의 중추항만(구미와의 무역 거점)로 해야 한다라는 제안을, 오사카(大阪)만 순회를 안내하면서 14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에게 하였다.

 가쓰(勝)는 고베(神戶)에 해군학원을 만들었고, 사쓰마(薩摩)나 도사(土佐)의 무뢰배나 탈번자가 학원생이 되어 드나들었지만, 가쓰(勝)는 관료답게 않게 개의치 않고 그들을 받았다. 게다가, 고베(神戶) 해군조련소도 설립하였다.

 나중에 고베(神戶)는 동양최대의 항만으로 발전해 가지만, 그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가쓰(勝)는 부근의 주민에게 토지의 매점을 권하였다. 가쓰(勝) 자신도 토지를 사고 있었지만, 뒤에 막부(幕府)에 건네주었다.

 

 가쓰(勝)는 「일대공유의 해국(一大共有の海局)」을 내걸고, 바쿠후(幕府)의 해군이 아닌 「일본의 해군」건설을 목표로 하지만, 보수파로부터 견제되어 군칸부교로부터 파면되어, 약 2년의 칩거 생활을 보낸다. 가쓰(勝)는 이러한 칩거 생활동안 많은 서적을 읽었다고 말한다. 가쓰(勝)가 사이고 다카모리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이 시기로 (1864년 9월11일), 오사카(大阪)에 있을 당시다. 고베(神戶)항 개항 연기를 사이고는 자꾸만 걱정하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가쓰(勝)가 함께 이야기 했다고 한다. 사이고(西鄕)는 가쓰(勝)를 칭찬하는 서장을 오쿠보(大久保) 도시미치(利通)앞에 보냈다.

 

 게이오(慶應) 2년(1866년), 군칸부교에 복귀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로부터 제2차 조슈(長州) 정벌의 정전 교섭을 맡았다. 가쓰(勝)는 단신으로 미야지마(宮島)의 담판에 참석해 조슈(長州)의 설득에 성공하였다. 요시노부(慶喜)는 정전의 칙명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나. 분개한 가쓰(勝)는 어역어면(御役御免)을 청원해서 에도(江戶)에게 되돌아가 버렸다.

메이지(明治) 원년(1868년), 관군의 동정(東征)이 시작되면서, 대응가능한 적임자가 없었던 바쿠후(幕府)는 가쓰(勝)를 귀환시켰다. 가쓰(勝)는, 도쿠가와(德川)가의 가직(家職)인 육군총재(陸軍?裁)로서, 뒤에 군사총재(軍事?裁)로서 전권을 위임받아, 구 바쿠후(幕府)쪽을 대표하는 역할을 짊어졌다. 관군이 슨푸 성에까지 다다르자, 막부(幕府)측에 선 프랑스의 의도가 원인이 되어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오구리 타다마사에 대하여, 조기정전과 에도성의 무혈개성을 주장, 이로 인해 역사적인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우선 3월9일, 야마오카 텐슈(山岡?舟)를 보내 슨푸(駿府)의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교섭을 위한 기본조건을 갖추었다. 이 회담에 갈 즈음에, 에도 시내에서 교란 작전을 지휘해 부교쇼에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놓였던 사쓰마 무사 마츠미츠 큐우노스케(益?休之助)를 설득해서 안내역을 시켰다. 예정된 에도 성 총공격의 3월15일의 직전의 13일과 14일에는 가쓰(勝)가 사이고(西鄕)와 회담하였다. 에도 개성과 도쿠가와(德川) 종가의 이후 등에 관한 교섭을 하였다. 그 결과, 에도 성 아래에서 시가전이라고 하는 사태는 피해갈 수 있었으며, 에도(江戶)의 주민 150만명의 생명과 재산이 전화(戰火)로부터 구제되었다.

 가쓰(勝)는 교섭에 즈음하여, 바쿠(幕府)측에 붙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새정부측을 원조하고 있었던 영국을 이용했다. 영국 공사인 파크스(Harry Smith Parkes)를 이용하여 새정부 측에 압력을 가하였는데, 교섭이 완전히 결렬했을 때는 에도(江戶)의 민중을 지바(千葉)에게 피난시킨 뒤, 새정부군을 끌어들여서 불을 놓고, 무기·군량을 깡그리 태워버린 뒤 게릴라 소탕전을 준비하여 에도(江戶)와 함께 적군을 멸망시키게 하는 초토작전의 준비를 하였다고 하면서 사이고(西鄕)에게 결단을 강요했다.

 이 작전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을 막은 1812년 러시아 전역에 있어서의 전술을 참고로 했다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전을 실시하는 것에 즈음하여, 에도의 소화(銷火)를 담당하는(江?火消し衆)「오구미(を組)」의 대장인 신몬 다츠고로(新門辰五?)에게 대량의 화약과 함께 시가지에의 방화를 의뢰하고, 에도(江戶) 시민의 피난에는 에도(江戶) 및 주변지역의 배를 그 대소에 관계없이 조달, 피난민을 위한 식료품 확보하는 등 준비를 하였다. 또 요시노부(慶喜)의 신병은 요코하마(橫浜)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었던 영국 함대로 망명시킬 준비가 되고 있었다.

이 회담 후에도 바쿠후 잔여세력에 의한 보신전쟁이 계속되지만, 가쓰(勝)는 구 바쿠후(幕府)측이 신정부에 저항하는 것에 반대였다. 일단은 전술적 승리를 하여도 전략적 승리를 얻는 것이 예상되었으며, 내전이 오래 끌면 영국이 지원하는 신정부측과 프랑스가 지원하는 구바쿠후(幕府)측으로 국내가 2분 되는 우려가 있었던 것 등이 그 이유였다.

 

 유신후에도 가쓰(勝)는 구막신의 대표 격으로 외무대승(外務大丞), 병부대승(兵部大丞), 참의겸해군경(?議兼海軍卿), 원로원의관(元老院議官), 추밀원간관(?密顧問官), 백작(伯爵) 등을 역임하였다.

 가쓰(勝)는 이러한 신정부의 현직을 얻으면서도, 일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출근해서 의자에 앉아 가만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부하에게 일을 떠넘기고 도장을 내미는 것과 같은 일밖에 하고 있지 않아요」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좌담을 좋아하고, 특히 삿쵸의 신정부에 대하여 날카롭게 계속해서 비판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그 후의 새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와는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몇 번이나 의견이 대립하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그 요시노부(慶喜)를 메이지(明治)정부에 사면시키는 것에 만년의 인생의 모두를 바쳤다. 이 노력은 결실을 맺어, 요시노부(慶喜)는 메이지(明治) 덴노에게 배알을 허락받아 특지(特旨, 임금의 특별한 명)를 받아 공작을 수작하고, 도쿠가와(德川) 종가와는 별도로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를 새롭게 일으키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것 이외에도 구막신의 취직처 제공, 자금원조, 생활보호등, 막부(幕府)붕괴에 의한 혼란이나 반란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노력을 새정부의 작위권한과 인맥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유신 직후로부터 30여 해에 걸쳐 계속했다.

 가쓰(勝)는 일본해군의 창설자라고도 말해야 할 인물이면서, 해군이 그 진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청일 전쟁에는 시종 계속해서 반대했다.

 

연합 함대사령장관의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는, 가쓰(勝)의 제자라고 말해야 할 인물이며, 칭(淸, 청)의 북양함대사령장관·딩뤼창(丁汝昌, 정여창)이 패전 후에 책임을 져서 자해했을 때는 가쓰(勝)는 당당하게 적장인 딩뤼창의 추도문을 신문에 기고하고 있다.

 

가쓰(勝)는 전승 기운에 고조되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구미의 식민지 정책을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였고, 중국 대륙의 크기와 중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상태를 설명하고는 중국은 비하하거나 경쟁하는 상대가 아니고 오히려 공동투쟁해서 구미에 대항해야 상대라고 주장했다. 삼국 간섭 등 궁지에 몰릴 수 있는 일본의 정세도 예견하고 있었다. 리홍장(李鴻章)과도 대면하여, 「정부가 하는 것 따위 실로 작은 이야기다」라고 뒤에 말하고 있다.

 만년은, 대부분의 시기를 아카사카(赤坂) 히카와(氷川)에서 보내고, 정부의 의뢰로, 자금원조를 받아서 『스이진로쿠(吹塵?)』 (에도(江戶) 시대의 경제제도대강), 『해군역사』, 『육군역사』, 『개국 기원』, 『히카와 청화(氷川?話)』등의 집필·구술·편찬을 맡았으며, 구막신들에 의한 「도쿠가와(德川)씨 실록」의 편찬 계획을 무코야마 고우손(向山?村)을 시켜 방해하고 있다. 그 독특한 허풍(큰보자기)적인 기술을 이해가 가지 않은 독자에게서는 「히카와의 대 허풍쟁이(氷川の大法螺吹き)」라고 힐책될 것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신문, 도쿄아사히 신문, 도쿄 마이니치 신문, 여학잡지 등 당시의 대표적인 언론 매체들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쟁하듯 실었다.

 만년은, 저널리스트를 시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만, 자식의 불행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였고, 게다가 손자의 비행도 있어, 고독한 생활이었다라고 말한다.

 

 메이지(明治)32년(1899년) 1월19일에 목욕 후에 브랜디를 마셔서 곧 뇌출혈에 의해 의식 불명이 되고, 21일 타계하였다. 최후의 말은 「여기까지가 끝이다.(コレデオシマイ)」였다.

 무덤은 가쓰(勝)의 별저 센조쿠켄(千束軒)이 있었던 도쿄(東京) 오타구(大田區)의 센조쿠이케(洗足池) 공원에 있다. 센조쿠켄(千束軒)은 후에 전재(?災)로 소실하고, 현재는 오타구(大田區)립 오모리(大森) 제6중학교가 세워져 있다.

 

2. 추가사항

1) 가이슈(海舟) - 가이슈는 가이슈라는 호를 쓴 것은 사쿠마 쇼잔이 쓴 '가이슈 서옥(海舟書屋)'이라는 현판이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 히키와 청화 - 요시모토 죠가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가이슈의 담화를 편집해 1898년에 출판한 기록.

 

3. 참조자료

Wikipedia - 勝海舟

 

메이지 유신 : 1868년

 

메이지 유신(일본어: 明治維新 (めいじいしん) 메이지 이신[*], 1868년 1월 3일 ~ 1889년[1])은 일본에서 에도 막부(에도 바쿠후)의 체제에서 일본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의 전환과, 전쟁(보신 전쟁),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의 개혁을 말한다.

일본의 정치, 사회 구조를 크게 바꾼 일련의 사건들이다.

 

미 해군의 제독 매슈 페리가 이끌고 온 흑선은 에도 막부(에도 바쿠후)와 일본 근현대사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편집] 배경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反)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다가 30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1866년 존왕양이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편집] 삿초동맹


1866년  삿초 동맹

 

사카모토 료마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

 

사쓰마 번(가고시마현)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

조슈 번(야마구치현)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다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후 삿초 동맹은  

 

토막파대정봉환 요구가 막부에 의해 지지부진 진척이 없자 드디어 토막이 시작됐다.

 

1867년 12월 9일 사쓰마, 도사 등의 번병 중심으로 조정의 어소에서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 정치를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일본은 왕정과 막부의 두 개 정부가 탄생했다. 그 모임에서 토막파들은 대장군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사임과 반납지를 결정하고 막부가 이에 순응할 것을 통고했다.

 

이에 대해 막부는 쿠데타군 토벌을 발표하고 진군을 개시했다.

양군은 교토 부근의 도바 후시미 부근에서 충돌하였으나 토막파가 승리하였다.

 

그 세를 몰아 마침내 막부의 수도 에도를 공략하려 할 때

 

에도막부막신 ④카쓰 가이슈막부의 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고 막부의 대표로서,

 

 왕정토막군①사이고 다카무리담판하여 무혈로 성을 열어줌으로써 250여 년 간의 도쿠가와 정권은 멸망하고 천황 정부가 일본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실현되었다 

 

1867년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편집] 개혁의 내용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 주도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편집] 중앙 행정

막번체제의 붕괴로, 중앙집권국가의 확립을 서둘러야 했던 신정부는, 율령제를 본보기로 한 명칭을 부활시켰다.

 

왕정 복고의 대호령으로 인해, 막부섭정, 간파쿠의 폐지와 일본 천황의 친정이 결정되어, 일본 천황 아래로 총재(?裁), 의정(議定), 산요(??)로 나뉘게 되는 관제가 시행되었지만, 메이지 천황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것을 보좌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거기서, 메이지 원년 4월 21일, 정체서(政?書)가 공포되었고(정체서 체제), 다음 해 율령제의 2관 8성을 본뜬 2관 6성제가 발족한다. 구체적인 행정 기구로써는, 태정관(太政官)과 신기관(神祇官)을 두어, 태정관 아래에 각 성(省)을 두는 율령제가 모사되었지만, 그 후 민부성에서 공부성으로 분리되거나, 형부성으로부터 사법성으로의 개편 등 무수한 개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도가 안정되지 않았다.

 

또한 입법부인 좌원(左院, 후 원로원(元老院)), 우원이나 지방관 회의등도 설치, 폐지가 반복되었다. 메이지 중앙의 개혁은 1885년 내각 제도의 발족으로 간신히 안정된다.

 

또한, 입법부에 관해서 기도 다카요시등이 메이지 초부터 의회개설을 주장하였지만, 의회제도를 발족시키기 위해선, 관제 개혁, 민도(民度), 국민 교육등의 부분에서 미성숙하여 시기 상조였기 때문에,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유사 전제(有司?制)[2]'라고 불리는 사쓰마, 조슈 번의 파벌에 의한 관료를 중심으로 한 개혁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의 고조나, 여러 제도의 정비에 의한 개혁 성숙등도 있어, 1881년에 《국회 개설 조서》가 나와,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등에 의해 의회 제도를 전제로 한 헌법제정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헌법 심의를 위한 추밀원이 설치되었다. 1889년 일본 제국 헌법 공포, 다음 해 제국 의회가 발족하여,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입헌 군주제·의회제 민주주의 국가가 완성되었다.[3]

 

수도에 대해선, 당초 교토에서는 구폐(舊弊)가 많다고 하여, 오사카 천도론,②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주창되었다. 그러나 교토에서 옮기는 것에 대해 반대가 많았고, 에도 성의 개성(開城)도 있어, 에도를 도쿄로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2번 도쿄 행차로 의해 태정관도 도쿄에 옮겨져, 도쿄가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다.

[편집] 지역 행정

메이지 정부의 지방 행정으로, 도쿠가와 가를 슨푸 번으로 이동, 교토, 나가사키, 하코다테를 정부 직할 '부(府)'로 한 것 이외는, 원칙으로서 이전의 번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국강병 목적의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화에 의한 정부의 지방 지배 강화가 필요했다.

 

우선, 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가 자발적으로 판(토지), 적(인민)을 천황에게 반납하여, 다시 지번사(知藩事,지한사)로 임명되어, 번의 영지와 영주의 분리를 도모할 수 있어, 중요 지역이나 옛 막부부 직할지였던 부, 현과 함께 '부번현 체제(府藩??制)'가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진행시켜, 개혁을 전국적으로 망라하려는 데에 있어 번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고, 번 측에서도 재정의 핍박이 계속 되어 자발적으로 폐번을 신청하는 번이 잇따랐다.

 

1871년 8월 29일, 사쓰마, 조슈 번 출신의 지도자에 의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제도 설치(당초에는 3부 302현, 직후 정리되어 3부 72현), 중앙정부로부터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것에 대해선, 령제국의 지명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명이 부현명이 된 곳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쓰마 번시마즈 히사미쓰이외는 눈에 띈 반발은 없었다.[4]

[편집] 여러 제도의 개혁

폐번치현과 태정관 제도의 개혁을 거쳐 중앙집권 체제가 갖추어짐으로써, 간신히 옛 막부 시대의 제도를 개혁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거의 동시에 궁중 개혁도 이루어져, 구래의 궁중직이나 궁녀 폐지, 사족을 중심으로 한 시종등이 메이지 천황을 개혁 군주에 어울리는 천황으로 양육하게 된다.

 

막부 말기에는 병약했던 메이지 천황도, 사족에 의한 양육 때문인지 건강도 회복하여, 서양식 입헌 군주로서의 마음가짐도 배워, '메이지 국가' 원수로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갔다. 특히 헌법 제정 과정에서의 추밀원 심의에 모두 참석하였고, 또 국회 개설 전후 입헌 정치 미성숙기에 수상이 빈번하게 사임, 교대했을 때에도 정국의 조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분 제도에서는, 에도 막부 아래의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무사 계급을 사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구 구게, 다이묘나 일부 승려등을 새롭게 화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성 지배 아래로 두게 되었다.

 

또한, 유신 정부는 서양의 여러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지만, '루스 정부'로 불린 일본에 잔류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등에 의해서, 차례차례로 개혁은 진행되어 갔다.

 

주 개혁으로는 학제(?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단발령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사족이나 농민의 불만을 사서, 후에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라고도 말해진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나  오쿠보가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더욱 더 오쿠보 밑으로 내무성이 설립됨으로써 여러 개혁의 정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메이지'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殖産)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을 도입(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일본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민간 우편 기선 미쓰비시 회사와 국책 회사인 공동 운수 회사의 경합을 거쳐 일본 유센 회사가 되었다.)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명의 선진 제도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오야토이 외국인'이라고 불리는 외국인이, 기술 지도, 교육 분야, 관제, 군제 정비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고용되어 근대국가 건설을 도왔다.

[편집] 종교정책

[편집] 불교

종교적으로는, 고대의 제정일치로 돌아가는 개혁인 점에서, 1867년 음력 1월 17일에 제정된 직제에는 하느님을 7가지 필두에 두어, 음력 3월에는 신불분리령이 내려졌다. 신불분리령의 주 의미는 불교 배척이 아닌, 에도 시대까지의 신불절충에서 불교와 신도의 혼합에서 양자를 분리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복고적 시운은 불교조차도 외래의 종교로서 강하게 배척하는 폐불훼석으로 향했다.

[편집] 기독교

1612년 기독교 금령에 의해 막부의 질서에 반대하는 반국가적 종교로 규정되어 탄압받던 기독교[5] 메이지 정부에 의해서도 계속 금지되어 기독교 지도자 총 140명은 하기(66명), 쓰와노(28명), 후쿠야마(20명)으로 나뉘어 강제로 이주되었다. 그 후, 메이지 2년(1869년) 12월 7일에는, 기독교인 약 3,000명을 가나자와및 10개의 번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하지만 메이지 4년(1871년)11월, 이와쿠라 도모미특명 전권 대사일행이 구미 각국을 방문할 무렵, 기독교 금지령이 각국의 비난을 받아, 조약개정의 교섭에 장애가 된다는 정보에 의해 1872년 이노우에 가오루가 기독교인 사면을 건의하였다.

 

신도 국교화 정책과 관련해서, 기독교 금지를 해제해도 즉시 구미가 조약개정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에 근거한 정부내의 보호파의 반대뿐만 아니라, 종교계나 일반 민중에서도 '사종문(邪宗門)[6]' 금지 해제에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강해 분규(紛糾)하였으나, 1873년 2월 24일 금지 고찰(高札)[7]을 제거, 그 뜻을 각 구니에 통고, 이주된 기독교도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드디어 종결되었다.

[편집] 외교 정책

신정부의, 최대 목표는 구미 열강을 따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구 막부 시대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이와쿠라 사절단서구 여러 제도 조사도 목적이었지만, 조약 개정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교섭도 준비되었지만, 일본을 근대국가라고 보지 않는 구미제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아직 시기 상조였다. 그 때문에, 우선 국내정책의 측면에서 국민들이 가진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만국공법을 수용하였으며 외국인이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8], 유럽화 정책 등여러 정책을 시도했지만, 조약 개정 자체는 반세기에 미치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편집] 개혁의 영향과 비판

  • 주로 구 사쓰마 번, 조슈 번 및 일부 구게에 의한 전제 정치였기 때문에 '번 파벌 정부'라고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중급 관료 이상에 구 신판 번, 구 막부 신하 였던 자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세력이 주도했다고는 하기 어렵다.
  • 메이지 유신의 개혁은 새로운 제도로 인한 모순을 낳기도 했지만, 단기간에 입헌제도 달성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개혁, 독립 운동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다만 대부분이 형태만의 개혁이나 일면만 파악한 '위에서 부터의 개혁'으로 시종하여, 성공한 예는 많지 않다.
  • 전통주의자들은 신성한 천황제가 현대 문명에 양보를 강요당하는 문제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편집] 더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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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江戶(=:현 도쿄)時代(강호시대)]  : 1603년~1867년(264년간)

  
* 도쿠가와 바쿠후  쇼군

01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1603~1605
02 도쿠가와 히데타다 德川秀忠 1605~1623
03 도쿠가와 이에미쓰 德川家光 1623~1651
04 도쿠가와 이에쓰나 德川家綱 1651~1680
05 도쿠가와 쓰나요시 德川綱吉 1680~1709
06 도쿠가와 이에노부 德川家宣 1709~1712
07 도쿠가와 이에쓰구 德川家繼 1713~1716
08 도쿠가와 요시무네 德川吉宗 1716~1745
09 도쿠가와 이에시게 德川家重 1745~1760
10 도쿠가와 이에하루 德川家治 1760~1786
11 도쿠가와 이에나리 德川家齊 1787~1837
12 도쿠가와 이에요시 德川家慶 1837~1853
13 도쿠가와 이에사다 德川家定 1853~1858
14 도쿠가와 이에모치 德川家茂 1858~1866
15 도쿠가와 요시노부 德川慶喜 1866~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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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시대 천황

 

107 고요제이 後陽成 1586(1587)~1611
108 고미즈노오 後水尾 1611~29
109 메이쇼 明正(여왕통치) 1629(1630)~43
110 고코묘 後光明 1643~54
111 고사이 後西 1654/55(1656)~63
112 레이겐 靂元 1663~87
113 히가시야마 東山 1687~1709
114 나카미카도 中御門 1709(1710)~35
115 사쿠라마치 町 1735~47
116 모모조노 桃園 1747~62
117 고사쿠라마치 後 町(여왕통치) 1762(1763)~71
118 고모모조노 後桃園 1771~79
119 고카쿠 光格 1780~1817
120 닌코 仁孝 1817~46
121 고메이 孝明 1846(1847)~66
122 메이지 明治(이름 무쓰히토[睦仁], 시대명 메이지) 1867(1868)~1912
123 다이쇼 大正(이름 요시히토[嘉仁], 시대명 다이쇼) 1912(1915)~26
124 히로히토 裕仁(시대명 쇼와[昭和]) 1926(1928)~1989
125 아키히토 明仁(시대명 헤이세이[平成])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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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 : 유신 3걸 쿠데타 주역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1828-1877년

정한파, 사쓰마 반란실패 49세 자결

출생 1828년 1월 23일(1828-01-23)
 일본 사쓰마 국 가고시마 시
사망 1877년 9월 24일 (49)
 일본 가고시마 시
별칭 南洲翁
직업 무사, 정치가
활동 기간 막부 말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일본어: 西?隆盛 (さいごうたかもり) 서향융성[*], 1828년 1월 23일~1877년 9월 24일)는 일본의 에도 시대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정치가이자 무사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고, 정한론(조선 정벌론)을 주창하기로 유명하였다.

1877년 사쓰마 번 무사들의 반란인 세이난 전쟁의 패배후 자결했다.(50세)

 

 

 

오쿠보 도시미치 : 유신3걸

사쓰마 번(가고시마), 48세 암살 1830-1878년
출생 1830년 9월 26일
 일본 가고시마 현 사쓰마노쿠니
사망 1878년 5월 14일 (47)
 일본 도쿄
사인 암살
직업 정치인
 

 

오쿠보 도시미(일본어: 大久保利通 (おおくぼとしみち) 대구보이통[*], 1830년 9월 26일 ~ 1878년 5월 14일)은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에 활약했던 일본 사쓰마노쿠니 출신의 정치가였다.

 

264년 동안 일본을 통치해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유신삼걸로 불린다. 근대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사쓰마 번의 무사 출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뜻을 같이하며 '바쿠후 타도 운동'을 이끄는 개혁파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866년 새 유신 정권이 수립된 뒤에 참의(參議)가 되어 과감한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가 하야한 뒤는 메이지 유신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지조(地祖) 제도 개혁, 식산진흥책 등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의 기틀을 쌓았다.

 

세이난 전쟁 진압 후인 1878년 도쿄기오이자카에서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했다.

[편집] 사쓰마노쿠니 사무라이

가고시마 사쓰마노쿠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정치적 안식을 보여 일본에서 가장 크고 세력있는 봉건 영토이자, 도쿠가와 반대 세력인 사쓰마 번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또한 다른 봉건 영토 조슈 번(=야마구치현)사쓰마 번의 도쿠가와 반대 세력을 분배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친밀하지 못한 사이가 되었다.

 

이 상황은 오쿠보와 다른 사쓰마 번 정부의 세력있는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가 양쪽의 군대가 힘을 합쳐 도쿠가와 막부를 물리치자고 결심시킨 교정이었다.

[편집] 메이지 유신

1868년 1월 3일, 사쓰마 번조슈 번의 군대가 교토 고쇼를 공략하였으며,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선언하였다.

 

메이지 유신 정부의 구성원이 된 오쿠보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둘러보았다. 귀국 후에 오쿠보는 일본의 빠른 경제 발전을 납득시켰다. 이를 끝으로 기술 학교들의 설립, 국채의 승인, 개인적 사업의 임시세, 정부에 의한 공장들의 건설과 경영을 후원하였다.

 

유신3걸 :사이고,오쿠보,  기도의 삼두마차는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

 

1873년 동료 사이고 다카모리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자 이에 오쿠보는 일본 국내의 개혁과 성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 정부가 오쿠보의 편을 들어 1894년까지 정한론을 고수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 사쓰마로 되돌아가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일으킨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주도하였으나 반란은 곧 진압되고 사이고는 자결했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 역시 1878년 5월 14일 도쿄에서 불만을 품은 이시카와 현의 사족 시마다 이치로6명에게 암살당했다.(기오이자카의 변)

 

 

사카모토 료마: 샷쵸동맹 알선 : 1836-1867년 12월 10일 (31) 암살 당함

시코쿠 도사 번(고치현)
본명 나오카게(直陰), 나오나리(直柔)
출생 1836년 1월 3일(1836-01-03)
 일본 시코쿠 도사 번(고치현)
사망 1867년 12월 10일 (31)
 일본 교토 시
사인 암살
국적  일본
별칭 사이다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郞)
지넨도(自然堂)
직업 무사, 정치가
활동 기간 막부 말기
소속 가이엔타이
배우자 나라자키 료(楢崎龍)

 

사카모토 료마(일본어: 坂本 (さかもと りょうま), 1836년 1월 3일 ~ 1867년 12월 10일)는 일본의 무사 겸 사업가이다.

도사 번(현재 고치현) 향사로 탈번하여 지사(志士)로서 활동하였고, 무역회사와 정치조직을 겸한 가메야마 조합(훗날 가이엔타이)을 결성하였다. 삿초 동맹의 알선, 대정봉환의 성립에 노력하여 에도 막부 타도 및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주었다.

 

대정봉환의 1개월 후, 교토의 여관 오미야에서 암살되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후, 지명도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에도 막부 말기의 풍운아로서 일본 국민의 인기를 얻는다.

 

 

[편집] 생애

[편집] 유년 시절

료마덴포 6년(1835년) 11월 15일(음력), 도사 (오늘날의 고치 현 고치) 하급 무사인 고시(鄕士) 계급의 사카모토 가문에서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坂本直足)와 어머니 사카모토 코우(坂本幸)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과 3명의 누나가 있었다.

 

사카모토 가문은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영위하는 호상 사이다니야(才谷屋)의 분가로, 고조부 나오마스(直益)의 장남 나오미(直海)가 번으로부터 고시(?士) 어용인(御用人)으로 등용되어 사카모토 가문을 일으켰다.

 

도사 번의 무사 계급은 상사(上士)와 하사(下士)로 나뉘어 양자 간에는 차별이 존재하여, 하사는 오랫동안 여러 면에서 억압되어 왔다. 상인 출신의 사카모토 가문은 하사(下士)였지만, 분가 당시에 사이타니야로부터 많은 재산을 분여받아 매우 유복하였다.

 

료마가 열두 살이 되는 해인 1846년, 어머니 코우가 향년 49세에 병사했다.[1]

아버지 나오타리는 쉰 살이었는데 후처인 이요를 맞이한다.

 

료마는 그 뒤 새어머니 이요의 손에서 자랐는데, 료마의 교육에 매우 엄격했다. 사카모토 가를 방문한 사람의 목격담에 따르면 "예절이 밝지 못하다는 이유로 료마에게 반성을 요구하며 객실에 무릎을 꿇어 앉혀놓은 채 끼니도 굶길 정도로 엄격했다"라고 한다.

이렇게 교육은 엄격했지만 료마는 새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2]

 

료마는 열네 살 때부터 히네노 벤지(日根野弁治)가 가르치는 히네노 도장에 다녔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이었던 1853년 3월, 료마는 히네노에게서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小栗流和兵法事目?)》을 하사받았다.[3]

[편집] 에도 유학

병법사 목록을 받자 료마는 더욱 심도있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1853년에도유학하여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사귀었다.[4]

 

그 해 페리 제독이 내항했고, 무사계급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해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같은해 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숙에서 공부했고,[5]

 

 1854년 6월 23일 료마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히네노는 료마에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 12개조와 25개조》를 하사했다. 료마가 처음 받았던 병법사 목록은 초급자의 면허임에 반해, 12개조와 25개조는 중급자의 면허로서 이는 료마가 에도에서 수련하여 솜씨가 늘었다고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6]

 

이 해 겨울, 료마는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로부터 서양에 대해 배웠다.

 

료마는 쇼료에게서 외국 배를 구입해 동지를 모아 운송업을 하며 배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고 항해 기술을 터득하라는 충고를 들었고, 이는 훗날 료마가 걷게 될 해운의 길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7]

 

료마는 1856년 다시 에도로 가 지바 도장에서 2년간 수련을 했다. [4]

[편집] 도사근왕당

료마는 1861년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이 주도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 도사출신의 하급무사들이 천황을 지키고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자 모인 모임)의 《도사근왕당 혈맹자 성명 사본》에 아홉 번째로 서명함으로써 도사근왕당에 가입했다.

 

료마는 평소 다케치와 친분이 있었지만 이런 정치적 결집은 몹시 기끼워했다.[8]

그 후 료마는 검술수행을 하러 마루가메 번(丸?藩)의 도장에 간다는 명목으로 여행 허가를 얻어 출발했다. 이러한 여행 도중 료마다케치를 포함, 존왕양이를 대표했던 인물 중 하나인 구사카 겐즈이를 만나 번을 초월한 일본의 통합을 호소하며 대화를 나누었다.[9]

[편집] 탈번

1862년 2월 말, 료마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도사근왕당은 번의 중신 요시다 도요(吉田東洋)를 암살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10]

 

하지만 료마는 암살에 가담하지 않고 3월 24일 같은 도사근왕당 소속인 사와무라 소노죠(?村?之丞)와 함께 탈번하여 낭인(浪人: 소속이 없는 사무라이)으로서 에도로 향했다.[5]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다. 료마가 왜 탈번했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은데,

이러한 도사근왕당의 과격한 정세를 싫어한것도 탈번한 이유중 하나였다.

 

 

[편집] 해군훈련소 설립

료마가 탈번한 해 1862년, 료마는 개화파 막부 관리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나고 그의 견식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된다.[5]

 

가쓰료마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에게 소개해주었다.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운 사카모토 료마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듬해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훈련소(神戶海軍訓練所) 설립에 힘썼다.[11]

[편집] 가메야마 조합

이후 가쓰가 물러나고 훈련소가 문을 닫자, 

 사카모토가메야마 조합(龜山社中)(훗날 가이엔타이가 됨)이라는 무역회사를 세웠다.

 

가메야마 조합사쓰마 번의 이름으로 조슈 번을 위해 무기와 군함을 구매하여 삿초동맹의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항해술을 습득하고 자신들의 사업으로 활동 자금을 획득하는 등 그들 자신의 시각에 기초하여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 배를 활용하여 홋카이도 개척도 계획했다.

 

그리고 당시 외국인이 많이 모이던 나가사키에서 외국인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사카모토 료마영어와 네덜란드어 공부를 시작했다.[12]

[편집] 삿초 동맹

 

도막의 중심사쓰마 번(가고시마 현)조슈 번(야마구치 현)이었다.

 

사쓰마 번은 조정과 손을 잡아 막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중도파였음에 반해, 조슈 번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급진파로서 두 번은 대립하며 사이가 매우 나빴다.[13]

 

사카모토 료마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14][15]

* 1863년 조선은 대원군 분위 섭정 시작

 

삿초 동맹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 료마를 포함한 지사들이 모여있던 데라다야 여관

료마 일행을 암살하려는 사건(데라다야 사건)이 발생한다.

 

암살범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삿초 동맹에 위협을 느낀 막부의 소행이라는 설[13]이 있다.

 

료마자신에게 귀띔해주었던 나라자키 료(楢崎龍) 덕분에 목숨을 구해, 료와 집안을 따지지 않고 결혼하였다.[12]

[편집] 가이엔타이

1867년 4월, 료마는 2번째 탈번했던 죄를 용서받고 가메야마 조합의 대장이 되어 도사 번 부속 외곽기관으로써 가메야마 조합의 이름을 가이엔타이(海援隊)로 개칭한다.

 

가이엔타이 창립 후, 료마는 이로하마루(いろは丸)호 라는 전함을 직접 이끌고 항해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기슈 번(紀州藩)의 메이코마루(明光丸)호와 충돌하여 이로하마루 호는 바다속으로 가라앉는다.(이로하마루 사건)

 

이 사건의 배상 교섭에 나선 료마고토 쇼지로(後藤象二?)는 기슈 번 대표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것을 담보로 사용하면 당장이라도 거대한 함선을 구입하여 무역에 나설 수 있었지만, 료마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고토 쇼지로의 의견에 따라 도사 번의 배로 고토와 함께 상경하여 대정봉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된다.[16] [16]


[편집] 선중팔책과 대정봉환

 

1867년 교토로 가는 배에서 사카모토대정봉환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했다.[14][15] (이 선중팔책은 훗날 신 정부 강령을 위한 여덟가지 방법(新政府綱領八策) 이라는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이 된다.)

 

대정봉환의 구상은 사카모토가 속했던 도사 번 번주야마우치 도요시게(山內豊信)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이후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로 대정봉환이 이뤄졌고,

정권은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갔다.

[편집] 암살

1867년 12월 10일   대정봉환 한달 후 사카모토는 나카오카와 함께 교토에 머물다가 음력 11월 15일인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고 피살됐다.(오미야 사건)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막부측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한 가운데, 신센구미, 아군인 사쓰마 번 음모설 등 여러 설이 있다. 사카모토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죽어갔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같이 습격당했던 나카오카가 중태인 가운데서도 3일간 생존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상히 전해 질 수 있었다.

 

미마와리구미 소행설은 근거 자료가 있다.

 

보신 전쟁이 끝나고 체포된 전 미마와리구미의 대원 이마이 노부오가 사카모토 료마 암살은 자신들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며 당시의 세세한 정보를 모두 말한 것이 교부쇼(강무소) 공술서에 기록이 돼있다. 아직까지도 이를 뒤집을 만한 사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신센구미의 소행설은 다음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건 발생 7일전(3일전이라고도 한다), 전 신센구미의 참모이자 능위사인 이토 가시타로가 사카모토에게 찾아갔다. 그가 말하길, "나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지금 신센구미가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모쪼록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당시 사카모토는 신센구미를 배신해 사쓰마 번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토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고, 그의 충고도 흘려들었다. 게다가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날, 현장에서 칼집과 나막신이 발견됐는데, 이때 기다렸다는듯이 달려온 이토가 "이 칼집은 10번대 하라다 대장의 것인 듯하다"라고 증언했고, 그 나막신 역시 신센구미가 자주 드나드는 후쿠베 정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증언을 한 3일 뒤, 11월 18일에 이토 일행은 아부라코지에서 신센구미에 의해 암살됐다. 이 일련의 사건이 신센구미의 사카모토 료마 암살설을 더욱 굳혔던 것이다. 하지만 암살을 하러가는 자객이 쿵쿵 소리나고 움직이기도 어려운 나막신을 신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사카모토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은 당시로선 엄청나게 자랑하고 떠들고 다닐 일이었지 숨길 일은 아니었으므로 신센구미 측이 당시 극구 부정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편집] 연표

연호(서기)
료마의 동향 전국의 동향
덴포 6년(1835년) 1 (11월 15일) 료마 출생.
고카 3년(1846년) 12 (이 해) 쿠스야마 사숙에서 공부하다가, 곧 그만둠.
(이 해) 어머니 사카모토 코우 사망.
가에이 원년(1848년) 14 (이 해) 히네노 벤지의 도장에 입문해 오구리 류(小栗流) 검술을 배움.
가에이 6년(1853년) 19 (4월) 에도로 유학,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 입문.
(6월~9월) 페리 제독 내항 당시, 도사 번의 임시 시나가와(品川) 해안 경비대로 복무.
(12월)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 입문.
(6월 3일)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타고 우라가(浦賀) 해안에 내항.
안세이 원년(1854년) 20 (6월 23일) 검술 수행이 끝나 도사에 돌아옴.
(이 해 겨울) 가와다 쇼료의 사숙에 들어가 서양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해 배우고 계몽됨.
안세이 2년(1855년) 21 (12월 4일)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 사망. (3월 31일) 미일 화친 조약 체결.
안세이 3년(1856년) 22 (이 해) 다시 임시 해안 경비대로 에도에 옴.
(이 해) 다시 지바 도장에서 유학.
안세이 5년(1858년) 24
만엔 원년(1860년) 26 (3월 24일)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발발.
분큐 원년(1861년) 27 (9월) 도사근왕당에 9번째로 가입.
(10월 11일)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의 밀서를 가지고, 조슈로 향함.
분큐 2년(1862년) 28 (1월 14일) 조슈의 하기(萩)에서 구사이 겐즈이(久坂玄瑞)와 면담.
(3월 24일) 사와무라 소노죠(澤村?之丞)와 함께 탈번.
(10월 경) 가쓰 가이슈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제자로 들어감.
(1월 15일) 사카시타 문 밖의 변(坂下門外의變) 발발.
(4월 8일) 도사 번의 중신 요시다 도요 암살.
분큐 3년(1863년) 29

(2월 25일) 가쓰 가이슈의 중재로 탈번의 죄를 용서받음.
(4월 2일) 오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와 면담, 대정봉환론을 배움.
(5월) 고베 해군훈련소 설립을 위해 가쓰 가이슈의 사자로

에치젠 후쿠이(越前福井)에게 찾아가 천냥을 빌림.[17]


(10월) 고베 해군훈련소 책임자가 됨.
(12월) 도사 번으로부터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수행하지 않고 다시 탈번.

(5월 10일)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에서 양이 결행.
(8월 18일) 8월 18일의 정변 발발.
(9월 21일) 다케치 즈이잔과 도사근왕당 주요 당원 투옥.
겐지 원년(1864년) 30 (2월 10일)외국의 조슈 번 공격의 중재자로서, 가이엔타이가 나가사키에 파견되어 료마 일행도 참석.
(2월 14일) 가츠의 사자로서 구마모토에 있는 요코이 쇼난(橫井小楠)을 방문.
(1월) 참여회의(參與會議)가 시작됨.
게이오 원년(1865년) 31
게이오 2년(1866년) 32
게이오 3년(1867년) 33

 

 

* 신센구미(
新選組)

미부사(壬生寺)에 있는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의 동상

신센구미(일본어: 新選組 しんせんぐみ, 신선조)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인 1863년에 조직된 무사 조직이다.

 

원래는 교토로 가는 쇼군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이후 교토의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과 싸웠다. 이후 막부 체제가 붕괴하자 막부군의 일원으로 정부군에 저항하는 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

 

원래 에도에서 조직될 당시에는 '浪士組'(로시구미)라고 칭하였으나 이후 신센구미로 바꾸었다. 한자로는 '新撰組'라고 표기된 자료도 있으나 국장인 곤도 이사미도 '選'과 '撰'을 모두 썼다.

 

엄한 규율 유지를 위해 도입한 국중법도로 숙청을 하거나, '誠' 한 글자로 만든 깃발, 소매 부분에 톱니모양의 무늬를 넣은 독특한 하오리(羽織 - 일본옷 위에 입는 짧은 겉옷)복장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유명하게 된 계기로는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을 들 수 있다.

 

 

[편집] 조직

‘誠’ 깃발

 

1862년 에도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교토 상경때에 경호를 목적으로 주인 없는 무사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때 결성된 낭인 집단 로시구미기요카와 하치로의 인솔 하에 분큐 3년(1863년) 2월 교토로 향하였으나, 기요카와와 로시구미 일행은 곧 에도로 귀환하고 만다.

 

그 중 세리자와 가모, 곤도 이사미 등 24명의 무사들은 쇼군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교토에 잔류하여, 미부 로시구미를 조직하였다.

 

8월 18일의 정변 이후 이들 무사집단은 인정을 받게 되고, 세리자와 일파가 숙청된 뒤에는 새로운 이름인 '신센구미'로 개칭하게 된다.

 

유신지사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것과 극악무도 하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극도로 엄격한 내부규율로 인해 할복이나 처형에 의해 희생된 단원들도 전체 사망자에서 반을 차지했다.

 

하지만 딱히 할 일이 없는 로닌들은 대부분 높은 급료를 위해 마다 않고 참가하였다.

또한 탈퇴는 허용되지 않았다.

[편집] 역대 국장

  • 세리자와 가모 - 곤도계파에 의해 암살.
  • 니이미 니시키 - 할복했다고 하나 오키타에게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음. 세리자와의 심복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 콘도 이사미 - 가장 대표적인 국장/신센구미를 이끌어간 사람.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항복 후 사형

[편집] 국장 보좌

  •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곤도의 옆에서 신센구미를 최강의 집단으로 성장시킨 인물. 보신 전쟁때 에조공화국 국방장관. 하코다테 전투 중 사망
  •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 - 총장이었으나 어느날 신센구미를 탈영한 이유로 할복
  • 참모: 이토 카시타로 - 신센구미 탈영 후 개국론자로 변함. 후에 아부라코지에서 신센구미에게 암살. 북진일도류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편집] 부장 보좌

  • 1번대: 오키타 소지 - 신센구미의 제일 가는 검객이었다고 일컬어진다. 천연이심류의 달인/폐결핵으로 사망
  • 2번대: 나가쿠라 신파치 - 신센구미내에서 얼마안되는 천수를 누렸던 사람들중 한 명/오키타, 사이토와 함께 검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신도무념류의 달인
  • 3번대: 사이토 하지메 - 암살에서는 신센구미 으뜸이었다고 한다.자신만의 독자적인 검술인 일도류를 사용. 이토 가시타로의 탈영 때 히지카타의 명을 받고 이토 가시타로를 감시. 유신 후 천수를 누린다.
  • 4번대: 마츠하라 츄지 - 후에 할복. 자세한 자료는 없다. 상냥한 성격이라고 한다.
  • 5번대: 다케다 간류사이 - 사쓰마(사츠마)번과 내통하여 사이토 하지메에게 암살당함
  • 6번대: 이노우에 겐자부로 - 곤도,히지카타,오키타와 함께 천연이심류를 배운 대 선배이다. 후에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사망
  • 7번대: 다니 산주로 - 호조인류 창술의 달인으로 부대의 창술 사범. 후에 사이토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 8번대: 토도 헤이스케 - 초기 시위관 고참대원이었으나 후에 이토계파와 가담하여 아부라코우지에서 사망. 별명은 돌격선생,이토계에 들어간 이유는 자신이 신센구미에 이토 카시타로를 불러들인 죄책감때문이다.
  • 9번대: 스즈키 미키사부로 - 참모 이토 카시타로의 동생. 아부라코우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오쿠보 도시미치에서 사실을 알린다.
  • 10번대: 하라다 사노스케 - 창술이 대단했다고 일컬어진다. 배에는 할복의 상처가 있었다고 함.
  • 감찰: 야마자키 스스무 - 곤도가 아꼈다는 사람 중 하나. 조사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곤도이사미와 히지카타 토시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 감찰: 시노하라 다이노신 - 유술사범도 겸함. 이토계파였으나 아부라코우지에서 살아남는다. 후에 곤도를 저격함.
  • 감찰: 시마다 카이 - 나가쿠라의 친구였다고 한다. 천수를 누림. 후에 다케다 간류사이가 암살 당하자 5번대 대장이 됨.
  • 제사취조역 및 감찰: 요시무라 간이치로 - 모리오카 번 출신 호쿠신잇토류, 카고시마 신토류 출신. 아사다 지로의 소설 '칼에 지다'의 주인공.

[편집] 검술 사범

  • 오키타 소지
  • 나가쿠라 신파치
  • 사이토 하지메
  • 토도 헤이스케

[편집] 창술 사범

  • 다니 산주로
  • 하라다 사노스케

[편집] 포술 사범

  • 아베 주로

[편집] 신센구미와 대중문화

막부말기의 혼란상과 사무라이 문화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신센구미는 대중에게 인기 높은 역사적 소재이다. 많은 소설, 만화,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2004년에는 NHK 대하드라마로 <신센구미>가 방영되었으며, 인기그룹 SMAP의 멤버 카토리 싱고가 주인공 곤도 이사미 역을 맡았다. 만화 '은혼'에는 이 신센구미를 패러디한 신센구미(眞選組, 한자가 다른 동음이의어)가 등장하며,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조금씩 변형한 이름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 신센구미의 곤도 이사미 => 신센구미의 곤도 이사오) 바람의 빛 이라는 순정만화에서 신선조와 상상의 인물 세이자부로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고 있다. 2011.7 월까지 30편까지 나와 있있다

 


가쓰 가이슈 : 무혈입성 

 

에도(도쿄) 막부 출신 1823년-1899년

 

가쓰 가이슈(일본어: 海舟 (かつ かいしゅう), 1823년-1899년) 또는 가쓰 야스요시(일본어: 安芳 (かつ やすよし))는 에도 시대메이지 시대의 고위관리이다. 관위는 종1위 백작.

 

야마오카 뎃슈, 다카하시 데이슈와 함께 「에도막부 말기의 3슈」라고 불린다.

 

본명은 가쓰 요시쿠니(勝 義邦)이며 메이지 유신 후에는 가쓰 야스요시(勝 安芳)로 개명했다.

 가이슈사쿠마 쇼잔에게서 받은 전각「海舟書屋」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편집] 유·소년기

고향은 스미다 구(墨田?) 혼조(本所)로서, 하타모토 가문 출신으로 아명은 린타로(麟太?)였다.

난학[蘭學]에 심취하였고, 사쿠마 쇼잔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1850년 아카사카[赤坂]에 사설학교를 세워 서양 병학을 가르치다가

1854년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전습생 감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인 교관들과 접촉하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된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막부말기의 정치 활동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한 사절로 함림환(咸臨丸 , 간린마루 : 일본 최초의 증기범선)을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귀국 후에는 일본 해군의 근대화 및 해안방어체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과 막부의 사이에서 중개역을 맡아 정부군이 에도 성무혈입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편집] 메이지 시대

모든 재산을 메이지 정부에 압류당해 가신에게 봉급을 줄 수 없던 도쿠가와가당시 슨푸(시즈오카 현)로 이동하여, 그의 주도 아래 마키노하라 차밭을 일궈 부족한 재정을 메웠다.

[편집] 가계

그의 스승인 사쿠마 쇼잔은 그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남매부간이 되었다.

[편집] 같이 보기

 

기도 다카요시: 유신3걸

주코쿠 조슈번

(야마구치현)

43세 질병사망

출생 1833년 8월 11일
 일본 조슈 번
사망 1877년 5월 26일 (43)
 일본 교토
직업 정치인
 

 

기도 다카요시 (木? 孝允, 1833년 8월 11일 ~ 1877년 5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며,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중의 하나이다.

 

[편집] 생애

그는 지금의 야마구치 현조슈 번하기에서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요시다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존왕양이의 사상을 배웠다. 학생 시절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운동을 이끈 조슈 번의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편집] 조슈 번의 지도자

1862년 조슈 번의 최고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나가사키시모다에서 서양식 함선의 건조를 참관한 후 조슈에 돌아와 조슈 번의 첫 번째 전함의 건설을 감독하였다. 그곳의 급진파들의 영향이 번영하자, 1865년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 번에 대항하는 가혹적 원정을 이끌었다.

기도지도자 직을 박탈당하고, 보수적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급진파들이 자신들의 군사를 성립하였고 도쿠가와 군대가 철수하자, 2차 도쿠가와의 원정을 성공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조슈 번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사쓰마 번의 급진파 사무라이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와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는 함께 쇼군을 무너뜨리고 천황을 권력에 복직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지도한 유신 삼걸로 알려졌다.

[편집]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의 가장 권력있는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어, 제국의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기는 책임을 지던 기도는 국가를 현들로 재분배하여, 중앙 정부에 의하여 임명된 지사들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1871년 오쿠보,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를 여행하였다. 이후에 그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으며 귀국 후에 사이고정한론에 반대하여 조선출병을 막았다.

 

1874년 대만 정벌에 반대하다가 실각하였다.

 

1875년 오사카 회담 이후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고, 서양식 헌법의 수립을 위한 일을 시작하였다.

사쓰마 반란이 일어난 후인 1877년 5월 26일, 43살의 나이로 옛부터 갖고 있던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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