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은 대정봉환에 의해 조정이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조신(朝臣)과 반(反)바쿠후의 주동 세력인 사쓰마 한[薩摩藩], 조슈 한[長州藩] 등 서남웅한[西南雄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여, 공의세론(公議世論)의 존중과 개국 진취의 방침을 밝힌 5개조의 서문(五箇條ノ御誓文)을 발표하였다. 신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라고 고쳤다. 또 봉건적인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급속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정부는 문명개화라고 불린 구미(歐美)의 기술·제도의 직수입을 추진하는 한편, 왕을 신격화하고 신토[神道]에 국교적(國敎的)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야시쿠니 신사 건립 사족(士族)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운동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으로 진압하고, 또 번벌(藩閥) 전제정부 타도를 외치는 민권운동이 일어나서, 정부는 프로이센 헌법을 본 뜬 메이지헌법[明治憲法]을 제정하였다. 정부지도 하에 산업의 근대화가 추진되어, 제1차·제2차의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한편 청일(淸日)·러일[露日] 두 전쟁을 일으켜서 타이완[臺灣]·한국·사할린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여 제국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또 영일동맹(英日同盟)에 의해 동(東)아시아에서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큰 이득을 얻어 세계열강과 어깨를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대전 후 구미제국에 일어난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호헌(護憲)·보통선거 등의 운동이 일어났고 평화주의·국제주의의 풍조가 활발해져서 정당내각(政黨內閣)이 탄생하였다. 또 노동운동이 활발해져서 이른바 다이쇼[大正: 明治 다음의 왕(1912~1926) 또는 그 年號] 데모크라시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쇼와[昭和: 大正 다음의 천황(1926∼1989) 또는 그의 연호] 초기에는 세계적 불황(미국 대공황)의 물결에 휩쓸려서 일본의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륙침략을 꾀하였으며, 점차 군국주의·국수주의의 경향이 강해져갔다.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우고 다시 중국과 충돌하여 중·일(中日)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부아시아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영국 등과 대립하여 결국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다이쇼[大正: 明治 다음의 왕(1912~1926) >
(2) 쇼와(昭和)시대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하고, 농지개혁·재벌해체 및 전쟁범죄자의 재판·공직추방을 실시하였다. 또 국민주권 하에 남녀평등 및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의 패전에 의하여 한국이 8·15광복을 맞았고, 만주국이 중국에 복귀하였으며, 사할린·쿠릴 열도와 타이완이 각각 소련과 중국에 반환되는 한편 오키나와[沖繩]를 미국이 분할점령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전후에는 한국의 6·25전쟁에 의한 특수경기(特需景氣)로 경제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뒤, 1951년의 연합국의 대일(對日) 강화조약(소련 불참)과 미일(美日) 안보조약에 의해 주권을 회복하여 자유진영에 가담하였으며, 장기간에 걸친 보수당정권 밑에서 급속히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경제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 국민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공해문제·물가상승 등을 초래하였다. 한편 소련·중국 등과 공산국가와도 국교가 회복되어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높아졌다. 1989년 1월 쇼와왕의 사망으로 1990년 11월 아키히토[明仁]가 왕에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헤이세이[平成]이다.
1955년 이후 38년간 집권한 자민당이 1993년 중의원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정권을 상실했으며, 같은해 8월 7개의 야당연립정부인 호소카와[細川]정권이 탄생하여 전후 정치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94년 6월에는 자민당, 사회당, 신당사키가케 등의 연립정부가 탄생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고, 1998년 7월 자민당 당수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가 일본의 84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4월 5일 재임중 사망한 오부치 게이조의 뒤를 이어 모리 요시로[森喜郞]가 일본의 제85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다. 2001년 4월에는 자유민주당의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 3당의 지지로 제87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제 122대, 메이지 천황(1852~1912)
일본의 역사에서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봉건 정치 체제를 해체하고 일본 사회의 근대화 과업을 성취한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과업은 메이지 유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일본 사회의 근대화, 다시 말하면 메이지 유신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간략하게 요약하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정치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토에 있던 상징적 존재인 천황과 에도(지금의 도쿄)에 자리잡고 있던 실권 정부 막부 그리고 지방의 275개의 봉건 영주인 번주(大名: 흔히 다이묘라고 부른다)가 일본을 삼분해서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실체적 중앙 통치권을 행사한 지배 정부는 막부였다. 이 막부의 우두머리를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라고 부르고, 천황이 이를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나 그 임명에 있어서 천황은 재량권이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통치 체제를 막번 지배 체제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세습제인 도쿠가와 막부의 대장군도 최강의 봉건영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지방 영주보다는 800만 석의 재정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할령과 하타모토 8만기라는 근위 무사를 거느린 막강한 재정적·군사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그 지배 체제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275개 지방 영주라고 하는 다이묘는 각자의 영지와 무사 그리고 독자적인 법체계와 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막부와 독립된 위치에서 통치를 행하였으며, 막부는 원칙적으로 각 지방의 영주에 대해서는 그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었다.
간섭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며 그것도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이 두 중앙(막부)과 지방(번)의 관계는 동맹국간의 관계와 유사하며 단지 막부가 힘이 강하여 일본 통치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 정치의 분할 통치 체제를 타파하고 지금까지 실세를 갖지 못한 상징적 존재인 천황을 실세 천황으로 만들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천황을 앉혀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대정봉환을 실현하였으며 그 결과 막부는 소멸되고 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275개의 번은 폐지됨과 아울러 현제도로 대치되어 그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바치는 판적봉환이 단행되었다. 이 두 가지 혁명적 조치로 일본에는 250여 년 간 지속된 봉건 정치 체제인 막번 체제가 해체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중앙 집권 정부가 확립되었다. 이때가 바로 1868년이며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의 일이다. 또 이때에 추대된 천황이 메이지이며 그는 그 전대인 천황인 고메이 사후 즉위하자마자 토막파정치 세력에 추대되어 메이지 유신을 수행했다. 1868년 3월 14일 교토 어소에서 공경 제후 및 백관의 군신을 이끌고 천지 신명에 서약하는 형태로 유신 정부의 기본 방침을 천명했다. 이것을 일본 역사에서는 5개조의 서문이라고 친하였는데 그것은 첫째, 널리 공의를 일으켜 만기를 공론에 의하여 결정한다. 둘째, 상하가 합심하여 경륜을 지속적으로 펴 나라를 번창하게 한다. 셋째, 관과 무는 물론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는 그 뜻을 수렴하여 언제나 민심을 헤아리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넷째,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여 천하의 공도를 세운다. 다섯째, 지식을 세계에 널리 구하고 황실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이를 번창하게 한다. 이로써 메이지 신정부를 출범시킴에 있어서 천황과 신민이 공동으로 서약한 통치의 기본 방향이 확정된 셈이다. 이때 메이지 천황은 16세이었다. 이 어린 천황이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근대화 과업을 독자적으로 영도력을 발휘하여 수행할 수는 없었다.
단지 유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당시의 선각자적인 유수한 지사들에 의해 당시 형식적인 왕으로 있던 그는 단일 중앙 집권 정부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을 뿐이다.
소위 말하는 일본 천황가의 만세일계의 정통성으로 보아 메이지 이외는 그 당시 추대될 인물이 없었다. 이러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의 일본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구체제가 붕괴되고 새 체제로 변혁되는 데는 반드시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있게 마련이고 또 그 필요성이 있게 마련이다. 또 거기에는 반드시 대외적 필요성과 대내적 당위성이 국민의 공감을 얻어 점차 일반적 공론으로 승화되며 이 공론을 목숨을 걸고 밀고 나가는 주역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있어서도 시대적 상황과 인물 등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250년 간의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는 일부 개항이 있었다고는 하나 원칙적으로 쇄국주의를 일관해 왔다. 그러던 일본에 1850년에 들어서면서 통상 개항을 강요하는 외세의 압력이 밀어닥쳤다. 이러한 압력은 조야를 막론하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태까지 보지도 못했던 외국의 거함(일본에서는 흔히 흑선이라고 했다)을 들이대면서 개항이냐 아니면 싸움이냐는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때는 1853년 7월 8일 아침, 사령관 페리가 이끄는 미국의 동인도 함대가 에도만 입구에 닻을 내리고 일본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필모어(미국의 제13대 대통령)가 일본 천황 앞으로 보낸 친서를 건네면서 통상 개항을 요구했다. 그 친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미국 대통령은 강력한 함대와 함께 페리 제독을 귀국에 파견하여 귀국의 유명한 에도를 방문케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우, 둘째 통상, 셋째 석탄과 식량의 공급, 마지막으로 우리측 난파민의 보호입니다. 페리의 내항을 계기로 일본 조야는 시끄러워졌다.
그것은 1871년 한말의 대원군 섭정 시대에 신미양요를 계기로 조정의 강력한 쇄국양이 정책과 일부 젊은 세대의 개항론으로 국론이 시끄러웠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할 것이다. 페리 제독은 위의 네 가지 요구 조건 중 통상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요구 조건을 관철하고 돌아갔으나 그는 이듬해 1854년 2월 13일 에도 만에 대진용을 이끌고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미일 통상조약 초안을 가지고 왔으나 통상 부문에 대한 일본의 변함 없는 반대 의사를 확인하고 영사 파견에 대한 동의를 얻고 가까운 시일 내에 통상 조약의 교섭을 재개한다는 의사를 안기고 물러갔다. 그러나 페리 제독의 내항과 통상 개항의 요구를 계기로 일본 사회는 긴 잠에서 깨어나 세계의 흐름에 눈을 떴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적 문제에 대한 대응과 전략에 중앙 정부격인 막부의 무능이 드러남에 됨으로써 지난 250여 년 간 쇄국 정책을 일관해온 막부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교토에서 칩거하던 천황도 소리를 내게 되고 지방의 영주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천황 고메이는 강한 양이론에 섰으며 각 지방 영주들은 제각기 양이론과 개항론으로 편이 갈라졌다. 막부는 그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일본 역사에 있어 이때처럼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의 중심이 흐트러져 대외적 대응에 있어 갈팡질팡할 때가 없었다. 이제야 일본 정치에 있어 강력한 정치적 리더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봉건적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강력한 일원적 중앙 집권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 정치 체제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공감하는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인재들은 막부의 고관 현직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 또 지방 봉건 영주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방 봉건 영주에 속해있던 하급무사이거나 중류층 출신의 신진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막부를 타도하는 길만이 일본을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는
토막파의 선봉자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조정(천황)과 막부를 한데 묶어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공무합체파도 생겨났으나 결국은 토막파가 승리하여 메이지유신은 성공을 거두고 일본 사회의 근대화 과업은 완수되었다.
토막파의 주류(=유신의 3걸)는
규슈 남단에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의 하급 무사에 속했던 ①사이고 다카모리와 ②오쿠보 도시미치,
주코쿠 조슈번(야마구치현)의 ⑤기도 다카요시와의 샷쇼동맹을 이끈, 지금의 시코구의 도사번(고치현) 사카모토 료마의 노력과
그리고 토막파의 무혈 개성을 이룩하게 한 도쿠가와 에도막부의 중신 ④카쓰 가이슈를 메이지 유신의 4걸이라고 부른다.
이들이야말로 일본 사회를 근대화로 바꾸어 놓은 핵심 인물이며 메이지 천황은 이 사람들에 의해 추대된 왕이다. 이들 메이지 유신의 4걸 중 ①사이고와 ②오쿠보는 사쓰마번의 하급 무사급의 서민 출신이고 각각 1827년 생과 1830년 생으로 비슷한 연배에 속하는 젊은이들이었다.
③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국내외 정세에 밝은 재사로서 1835년 생이고, ③사카모토 료마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
⑤기도 다카요시는 주코쿠 조슈번(야마구치현), 또 한 사람의 주역인 ⑥이와쿠라 도모미는 넓은 의미의 조슈 출신으로 중류 출신(문사)이었으며 각각 1833년 생과 1825년 생들이었다.
메이지 유신에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인 ④카쓰 가이슈는 토막파인 위 다섯 사람과는 달리 도쿠가와 막부의 막신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막부의 직할 무사단인 하타모토 출신이다. ④카쓰 가이슈는 1923년 에도(도쿄) 출신으로 어릴적에 4년 간 홍복사에서 좌선 수양했고 그 뒤 화란학에 눈을 떠 공부한 후 화란학 학원을 개소, 후진들을 양성하고 대포와 철포의 포대 설계를 하며 일본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 후에 막부의 우두머리 아베에게 천거되어 관운이 트인 재사로서 당시의 정부인 막부 신료 중에서 도미 경험을 갖는 등 세계 정세에 밝고 국제 감각을 가진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위 다섯 사람의 존왕토막파와 중앙 정부격인 막부의 뛰어난 ④카쓰 가이슈의 단수 높은 책략과 묘수가 엮어 낸 정치 예술이었다. 토막파의 대정봉환 요구가 막부에 의해 지지부진 진척이 없자 드디어 토막이 시작됐다. 1867년 12월 9일 사쓰마, 도사 등의 번병 중심으로 조정의 어소에서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 정치를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일본은 왕정과 막부의 두 개 정부가 탄생했다. 그 모임에서 토막파들은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사임과 반납지를 결정하고 막부가 이에 순응할 것을 통고했다.
이에 대해 막부는 쿠데타군 토벌을 발표하고 진군을 개시했다. 양군은 교토 부근의 도바 후시미 부근에서 충돌하였으나 토막파가 승리하였다. 그 세를 몰아 마침내 막부의 수도 에도를 공략하려 할 때
③사카모토 료마의 새 국가 구상론과 정치 철학에 깊숙이 젖어 있던
막신 ④카쓰 가이슈가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고 막부의 대표로서
왕정토막군의 ①사이고 다카무리와 담판하여 무혈로 성을 열어줌으로써 250여 년 간의 도쿠가와 정권은 멸망하고 천황 정부가 일본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실현되었다. 한편 지방 봉건 영주가 지배하고 있던 번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메이지 원년인 1868년부터 2년에 걸쳐 판적봉환(지방 영주들이 그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조치)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진척이 지지부진하자 왕정 복고의 대목적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메이지 유신 주역들인 ①사이고 ,②오쿠보, ⑤기도, ⑥이와쿠라 등이 협의하여 폐번치현(274藩을 폐하고 3부72현으로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명실공히 250여 년 간 존속되어온 막번 통치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전국 통일 중앙 집권 정부가 창건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일본은 근대화 과업을 성취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부국 강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개항 정책) 오늘의 일본이 있게 된 것이다.
* 유신3걸 삼두마차는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 정부를 수립했다. ③사카모토 료마는 샷쵸동맹 알선 이후 : 1867년 12월 10일 (31세) 암살 당함
1.사쓰마번(가고시마현)의 ①사이고 다카모리 49세 쿠데타 실패 자결1877년 2.사쓰마번(가고시마현)의 ②오쿠보 도시미치, 48세 암살 1878년 3.조슈 번(야마구치현)의 ⑤기도 다카요시 43세 질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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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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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메이지 시대 ? 다이쇼 시대 ? 쇼와 시대 ? 메이지 유신 ? 사쓰마 반란 ? 류큐 합병 ? 청일 전쟁 ? 러일 전쟁 ? 한일 병합 ? 다이쇼 민주주의 ? 제1차 세계 대전 ? 간토 대지진 ? 만주 사변 ? 중일전쟁 ? 태평양 전쟁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 ? 일본의 항복 |
천황 | 메이지 천황 ? 다이쇼 천황 ? 쇼와 천황 ?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 ? 황민화 교육 ? 만세일계 ? 인간선언 |
식민지 | 타이완 ? 조선 ? 만주국 (괴뢰 국가) |
정치 | 일본 제국 헌법 ? 일본 제국의회 ? 메이지 정부 ? 국체 ? 원로 ? 어전회의 ? 특별고등경찰 ? 치안유지법 ? 일본의 정치극단주의 ? 일본의 우익 단체 |
상징 | 일장기 ? 십육변팔중표국문 ? 기미가요 ? 기리몬 |
사상 | 부국강병 ? 국가신도 ? 대동아공영권 ? 팔굉일우 ? 옥쇄 ? 신주불멸 ? 귀축미영 ? 황국사관 ? 창씨개명 ? 내선일체 ? 일선동조론 ? 일류동조론 ? 일만불가분 (오족협화) ? 흑룡회 |
군대 | 일본군 ? 일본제국 육군 ? 일본제국 해군 ? 일본의 전쟁 범죄 ? 가미카제 ? 반자이 돌격 ? 야스쿠니 신사 ? 100인 참수 경쟁 ? 731 부대 ? 난징 대학살 ? 마닐라 대학살 ? 숙칭 대학살 ? 일본군 위안부 ? 천인침 |
민족 | 야마토 민족 ? 류큐 민족 ? 아이누 민족 ? 한민족 (조선민족) ? 한족 ? 만주족 ? 몽골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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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江戶(=:현 도쿄)時代(강호시대)] : 1603년~1867년(264년간)
* 도쿠가와 바쿠후 쇼군
01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1603~1605
02 도쿠가와 히데타다 德川秀忠 1605~1623
03 도쿠가와 이에미쓰 德川家光 1623~1651
04 도쿠가와 이에쓰나 德川家綱 1651~1680
05 도쿠가와 쓰나요시 德川綱吉 1680~1709
06 도쿠가와 이에노부 德川家宣 1709~1712
07 도쿠가와 이에쓰구 德川家繼 1713~1716
08 도쿠가와 요시무네 德川吉宗 1716~1745
09 도쿠가와 이에시게 德川家重 1745~1760
10 도쿠가와 이에하루 德川家治 1760~1786
11 도쿠가와 이에나리 德川家齊 1787~1837
12 도쿠가와 이에요시 德川家慶 1837~1853
13 도쿠가와 이에사다 德川家定 1853~1858
14 도쿠가와 이에모치 德川家茂 1858~1866
15 도쿠가와 요시노부 德川慶喜 1866~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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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시대 천황
107 고요제이 後陽成 1586(1587)~1611
108 고미즈노오 後水尾 1611~29
109 메이쇼 明正(여왕통치) 1629(1630)~43
110 고코묘 後光明 1643~54
111 고사이 後西 1654/55(1656)~63
112 레이겐 靂元 1663~87
113 히가시야마 東山 1687~1709
114 나카미카도 中御門 1709(1710)~35
115 사쿠라마치 町 1735~47
116 모모조노 桃園 1747~62
117 고사쿠라마치 後 町(여왕통치) 1762(1763)~71
118 고모모조노 後桃園 1771~79
119 고카쿠 光格 1780~1817
120 닌코 仁孝 1817~46
121 고메이 孝明 1846(1847)~66
122 메이지 明治(이름 무쓰히토[睦仁], 시대명 메이지) 1867(1868)~1912
123 다이쇼 大正(이름 요시히토[嘉仁], 시대명 다이쇼) 1912(1915)~26
124 히로히토 裕仁(시대명 쇼와[昭和]) 1926(1928)~1989
125 아키히토 明仁(시대명 헤이세이[平成])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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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사이고 다카모리 : 유신 3걸 쿠데타 주역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1828-1877년 정한파, 사쓰마 반란실패 49세 자결 | |
출생 | 1828년 1월 23일(1828-01-23) 일본 사쓰마 국 가고시마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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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7년 9월 24일 (49세) 일본 가고시마 시 |
별칭 | 南洲翁 |
직업 | 무사, 정치가 |
활동 기간 | 막부 말기 |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일본어: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고, 정한론(조선 정벌론)을 주창하기로 유명하였다.
1877년 사쓰마 번 무사들의 반란인 세이난 전쟁의 패배후 자결했다.(50세)
②오쿠보 도시미치 : 유신3걸
사쓰마 번(가고시마), 48세 암살 1830-1878년 | |
출생 | 1830년 9월 26일 일본 가고시마 현 사쓰마노쿠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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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8년 5월 14일 (47세) 일본 도쿄 |
사인 | 암살 |
직업 | 정치인 |
오쿠보 도시미치(일본어:
264년 동안 일본을 통치해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⑤기도 다카요시, ①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유신삼걸로 불린다. 근대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사쓰마 번의 무사 출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뜻을 같이하며 '바쿠후 타도 운동'을 이끄는 개혁파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866년 새 유신 정권이 수립된 뒤에 참의(參議)가 되어 과감한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가 하야한 뒤는 메이지 유신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지조(地祖) 제도 개혁, 식산진흥책 등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의 기틀을 쌓았다.
세이난 전쟁 진압 후인 1878년 도쿄의 기오이자카에서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했다.
[편집] 사쓰마노쿠니 사무라이
가고시마 사쓰마노쿠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정치적 안식을 보여 일본에서 가장 크고 세력있는 봉건 영토이자, 도쿠가와 반대 세력인 사쓰마 번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또한 다른 봉건 영토 조슈 번(=야마구치현)은 사쓰마 번의 도쿠가와 반대 세력을 분배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친밀하지 못한 사이가 되었다.
이 상황은 ②오쿠보와 다른 사쓰마 번 정부의 세력있는 지도자 ①사이고 다카모리가 양쪽의 군대가 힘을 합쳐 도쿠가와 막부를 물리치자고 결심시킨 교정이었다.
[편집] 메이지 유신
1868년 1월 3일,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군대가 교토 고쇼를 공략하였으며,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선언하였다.
메이지 유신 정부의 구성원이 된 ②오쿠보는 ⑥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⑤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⑥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둘러보았다. 귀국 후에 오쿠보는 일본의 빠른 경제 발전을 납득시켰다. 이를 끝으로 기술 학교들의 설립, 국채의 승인, 개인적 사업의 임시세, 정부에 의한 공장들의 건설과 경영을 후원하였다.
유신3걸 :①사이고,②오쿠보, ⑤기도의 삼두마차는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
1873년 동료 ①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자 이에 ②오쿠보는 일본 국내의 개혁과 성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 정부가 ②오쿠보의 편을 들어 1894년까지 정한론을 고수하던 ①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 사쓰마로 되돌아가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일으킨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주도하였으나 반란은 곧 진압되고 ①사이고는 자결했다.
그러나 ②오쿠보 도시미치 역시 1878년 5월 14일 도쿄에서 불만을 품은 이시카와 현의 사족 시마다 이치로등 6명에게 암살당했다.(기오이자카의 변)
일본의 역대 내무경·내무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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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경 | 오쿠보 도시미치 - 기도 다카요시 - 오쿠보 도시미치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보 도시미치 - 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야마다 아키요시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내무대신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사이고 쓰구미치 - 시나가와 야지로 - 소에지마 다네오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고노 도가마 - 이노우에 가오루 - 노무라 야스시 - 요시카와 아키마사 - 이타가키 다이스케 - 가바야마 스케노리 - 요시카와 아키마사 - 이타가키 다이스케 - 사이고 쓰구미치 - 스에마쓰 겐조 - 오쿠마 시게노부 - 우쓰미 다다카쓰 - 고다마 겐타로 - 가쓰라 다로 - 요시카와 아키마사 - 기요우라 게이고 - 하라 다카시 - 히라타 도스케 - 하라 다카시 - 오우라 가네타케 - 하라 다카시 - 오쿠마 시게노부 - 오우라 가네타케 - 오쿠마 시게노부 - 이치키 기토쿠로 - 고토 신페이 - 미즈노 렌타로 - 도코나미 다케지로 - 미즈노 렌타로 - 고토 신페이 - 미즈노 렌타로 - 와카쓰키 레이지로 - 하마구치 오사치 - 스즈키 기사부로 - 다나카 기이치 - 모치즈키 게이스케 - 아다치 겐조 - 나카하시 도쿠고로 - 이누카이 쓰요시 - 스즈키 기사부로 - 야마모토 다쓰오 - 고토 후미오 - 우시오 시게노스케 - 가와라다 가키치 - 바바 에이이치 - 스에쓰구 노부마사 - 기도 고이치 - 오하라 나오시 - 고다마 히데오- 야스이 에이지 - 히라누마 기이치로 - 다나베 하루미치 - 도조 히데키 - 유자와 미치오 - 안도 기사부로 - 오다치 시게오 - 아베 겐키 - 야마자키 이와오 - 호리키리 젠지로 - 미쓰치 주조 - 오무라 세이이치 - 우에하라 에쓰지로 - 가타야마 데쓰 - 기무라 고자에몬 -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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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기도 다카요시: 유신3걸
주코쿠 조슈번
(야마구치현)
43세 질병사망
출생
1833년 8월 11일
일본 조슈 번
사망
1877년 5월 26일 (43세)
일본 교토
직업
정치인
기도 다카요시 (木? 孝允, 1833년 8월 11일 ~ 1877년 5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며,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중의 하나이다.
[편집] 생애
그는 지금의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의 하기 시에서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요시다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존왕양이의 사상을 배웠다. 학생 시절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운동을 이끈 조슈 번의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편집] 조슈 번의 지도자
1862년 조슈 번의 최고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나가사키와 시모다에서 서양식 함선의 건조를 참관한 후 조슈에 돌아와 조슈 번의 첫 번째 전함의 건설을 감독하였다. 그곳의 급진파들의 영향이 번영하자, 1865년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 번에 대항하는 가혹적 원정을 이끌었다.
기도는 지도자 직을 박탈당하고, 보수적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급진파들이 자신들의 군사를 성립하였고 도쿠가와 군대가 철수하자, 2차 도쿠가와의 원정을 성공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조슈 번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사쓰마 번의 급진파 사무라이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와 ②오쿠보 도시미치, ①사이고 다카모리는 함께 쇼군을 무너뜨리고 천황을 권력에 복직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지도한 유신 삼걸로 알려졌다.
[편집]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의 가장 권력있는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어, 제국의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기는 책임을 지던 기도는 국가를 현들로 재분배하여, 중앙 정부에 의하여 임명된 지사들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1871년 ②오쿠보, ⑦이토와 함께 ⑥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를 여행하였다. 이후에 그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으며 귀국 후에 ①사이고의 정한론에 반대하여 조선출병을 막았다.
1874년 대만 정벌에 반대하다가 실각하였다.
주코쿠 조슈번 (야마구치현) 43세 질병사망 | |
출생 | 1833년 8월 11일 일본 조슈 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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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7년 5월 26일 (43세) 일본 교토 |
직업 | 정치인 |
기도 다카요시 (木? 孝允, 1833년 8월 11일 ~ 1877년 5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며,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중의 하나이다.
[편집] 생애
그는 지금의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의 하기 시에서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요시다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존왕양이의 사상을 배웠다. 학생 시절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운동을 이끈 조슈 번의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편집] 조슈 번의 지도자
1862년 조슈 번의 최고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나가사키와 시모다에서 서양식 함선의 건조를 참관한 후 조슈에 돌아와 조슈 번의 첫 번째 전함의 건설을 감독하였다. 그곳의 급진파들의 영향이 번영하자, 1865년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 번에 대항하는 가혹적 원정을 이끌었다.
기도는 지도자 직을 박탈당하고, 보수적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급진파들이 자신들의 군사를 성립하였고 도쿠가와 군대가 철수하자, 2차 도쿠가와의 원정을 성공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조슈 번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사쓰마 번의 급진파 사무라이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와 ②오쿠보 도시미치, ①사이고 다카모리는 함께 쇼군을 무너뜨리고 천황을 권력에 복직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지도한 유신 삼걸로 알려졌다.
[편집]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의 가장 권력있는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어, 제국의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기는 책임을 지던 기도는 국가를 현들로 재분배하여, 중앙 정부에 의하여 임명된 지사들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1871년 ②오쿠보, ⑦이토와 함께 ⑥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를 여행하였다. 이후에 그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으며 귀국 후에 ①사이고의 정한론에 반대하여 조선출병을 막았다.
1874년 대만 정벌에 반대하다가 실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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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이와쿠라 도모미
公家는 일본의 조정에서 봉직하는 귀족과 관리의 총칭이다.
원래는 천황이나 그를 모시는 조정을 가리켜 「고우케(こうけ)」또는「오오야케(おおやけ)」라고 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력으로 조정에 봉사하는 막부측의 사람을 부게(일본어: 武家 무가[*])로 칭하게 되면서 이에 대응하여 조정의 일반 공무를 맡아하는 문신귀족과 관리를 구게라고 부르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말기부터 귀족이면서 공경에 오르는 집안이 한정되고 후지와라 가문에 의한 섭관정치 확립에 따라 가문의 서열이 고정되어 가마쿠라 시대 전기까지 구게 사회가 형성되었다. 여기서는 가문의 서열에 의해서 승진할 수 있는 관직이 한정되었다.
가마쿠라 시대를 거치면서 주로 군사 경찰권과 동부 지방의 통치를 담당하는 무가 정권(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일반업무와 서쪽 지방의 지배를 관장하는 문신 정권(조정)이 서로 협조, 제휴하면서 정무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점점 권한이 약해져서 유명무실하게 된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구게 사회는 막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지만, 천황과 구게를 규제하는 법도가 확립되어 이를 바탕으로 에도시대의 공무관계가 규정되었다.
문신 사회는 에도 막부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때 해체되어 구게의 대부분이 화족에 흡수되었다.
[편집] 가문의 서열
헤이안 시대말기부터 구게 가문의 서열이 정해지기 시작하여 가마쿠라 시대에 이르면 출신가문에 따라 승진 범위가 한정되었다. 그 서열은 아래와 같다.
원래는 천황이나 그를 모시는 조정을 가리켜 「고우케(こうけ)」또는「오오야케(おおやけ)」라고 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력으로 조정에 봉사하는 막부측의 사람을 부게(일본어:
헤이안 시대말기부터 귀족이면서 공경에 오르는 집안이 한정되고 후지와라 가문에 의한 섭관정치 확립에 따라 가문의 서열이 고정되어 가마쿠라 시대 전기까지 구게 사회가 형성되었다. 여기서는 가문의 서열에 의해서 승진할 수 있는 관직이 한정되었다.
가마쿠라 시대를 거치면서 주로 군사 경찰권과 동부 지방의 통치를 담당하는 무가 정권(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일반업무와 서쪽 지방의 지배를 관장하는 문신 정권(조정)이 서로 협조, 제휴하면서 정무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점점 권한이 약해져서 유명무실하게 된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구게 사회는 막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지만, 천황과 구게를 규제하는 법도가 확립되어 이를 바탕으로 에도시대의 공무관계가 규정되었다.
문신 사회는 에도 막부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때 해체되어 구게의 대부분이 화족에 흡수되었다.
[편집] 가문의 서열
헤이안 시대말기부터 구게 가문의 서열이 정해지기 시작하여 가마쿠라 시대에 이르면 출신가문에 따라 승진 범위가 한정되었다. 그 서열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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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셋케(五攝家)
고셋케(五攝家)는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후지와라 씨의 혈통을 이은 다섯 가문이다.
고노에(近衛), 구조(九?), 니조(二?), 이치조(一?), 다카쓰카사(鷹司)로 구성된다.
다이나곤(大納言), 우다이진(右大臣), 사다이진(左大臣) 등을 거쳐 간파쿠(?白),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 등으로 승진할 수 있었으며 특히 간파쿠나 셋칸은 셋케 출신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노에 가문의 조카가 되는 조건으로 간파쿠가 되었다.
흔히 셋칸케(??家), 싯베이케(執柄家)라고도 한다.
[편집] 셋케의 성립 과정 및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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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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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자네 (고노에 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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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후사 (마쓰도노 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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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자네 (구조 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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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미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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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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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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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자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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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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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쓰네 (고노에 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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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히라 (다카쓰카사 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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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자네 (구조 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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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네쓰네 (이치조 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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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자네 (니조 家) | |||||||||||||||||||||||||||||
후지와라 북가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처음 셋칸(?政)이 된 이래로 셋칸과 간파쿠의 지위가 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계승되었으나, 후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적통 자손인 미도류(御堂流)가 이를 독점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의 적장자인 후지와라노 모토자네(基?)가 급사하면서 모토자네의 후계자인 모토미치(基通)가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인 모토후사(基房)가 셋칸의 지위를 이으면서 셋칸 가문은 고노에 가문과 마쓰도노(松殿) 가문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이후 헤이안 말기의 전란 통에 모토후사, 모토미치가 모두 실각하면서 모토후사의 또 다른 동생인 가네자네(兼?)가 간파쿠가 되면서 구조 가문을 열었다.
이 3개 분가 중 마쓰도노 가문은 마쓰도노 모로이에(松殿師家)가 셋칸이 된 이후에는 셋칸이나 간파쿠가 나오지 못하고 여러 번 단절을 반복하면서 몰락하여 사실상 셋케에서 제외되었다.
반면 장손 계통인 고노에 가문은 덴카와타리령[1](殿下渡領) 이외의 셋칸케령(??家領) 대부분을 장악한 것으로, 구조 가문은 천황가와의 지속적인 혼인으로 외척의 신분을 유지함과 동시에 가마쿠라 막부와의 관계를 양호하게 유지한 것으로서 셋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후, 고노에 가문은 적통인 가네쓰네(兼?)의 고노에 본가와 가네히라(兼平)의 다카쓰카사 가문으로 분리되었다.
구조 가문 또한 적통인 노리자네(??)의 구조 본가와 사네쓰네(??)의 이치조 가문, 요시자네(良?)의 니조 가문으로 각각 분리되었다.
[편집] 고셋케 출신 이외의 셋칸, 간파쿠 취임
고셋케 5가문이 성립된 이후, 셋칸과 간파쿠는 오직 이 다섯 가문이 독점하였다. 따라서 간파쿠 취임을 목표로 하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 다이라노 아손(平朝臣)을 자처하였으나 덴쇼 13년(1585년)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조카가 되어 후지와라노 아손 히데요시(藤原朝臣秀吉, 또는 고노에 히데요시近衛秀吉)라는 이름으로 간파쿠가 되었다.
이듬해 히데요시는 도요토미(豊臣)로 성을 바꾸어 도요토미노 아손 히데요시(豊臣朝臣秀吉)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간파쿠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가문을 새로운 셋칸케의 일원으로 하여 자신의 간파쿠 지위를 조카이자 후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었으나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는 여전히 고셋케가 셋칸의 지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편집] 에도 막부와 셋케
[편집] 메이지 시대 이후의 셋케
메이지 유신 이후 각 다섯 가문의 당주는 공작 작위를 받았다. 또한 메이지 신정부가 태정관제, 이후 내각제를 도입하면서 셋케에서 셋칸 또는 간파쿠가 임명되는 일은 사라졌다.
패전 이전의 구(舊) 황실 전범에 따르면 황족 남성의 결혼 상대는 '황족과 화족'으로 한정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황실의 직계 정실(즉 황후 및 황태자비)는 황족 또는 옛 고셋케 출신의 화족 여성으로 사실상 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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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도모미(岩倉 具視)
1825년 -메이지 16년 1883년 일본의 구게, 정치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 具視, 분세이 8년 음력 9월 15일 (1825년 10월 26일) ~ 메이지 16년 (1883년) 7월 20일) 는 일본의 구게, 정치가이다. 미나모토 미치치카의 자손이며, 아명은 가네마루(周丸)보직, 위계, 훈장 등급은 태정대신, 쇼이치이, 훈장 등급 깃카쇼.
[편집] 유소년기
구교 호리카와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난다. 아명은 가네마루였지만, 용모나 언동이 구게같지 않고 이채(異彩)를 발하여 구게의 자녀들 사이에서는 '岩吉' 라고 불렸다.
조정 유학자 후세하라 노부하루한테 입문. 후세하라는 이와쿠라를 '큰 인물' 이라고 알아차려 이와쿠라 가에게 양자결연을 추천하였다고 한다.
덴포9년(1838년)8월 8일, 이와쿠라 모토야스의 양자가 되어 후세하라에 의해 도모미라는 이름을 얻는다. 10월 28일 작위를 수여받아, 12월 11일에 관례를 올려 궁중 정전(正殿)에 올라가게 된다.[1] 다음해부터 조정에 출사하여 100섬의 수당을 받게 되었다.
이와쿠라가는 무라카미겐지 고가 가의 분가이며, 신케라 불리는 하급의 구게였다. 대대로 전해지는 가업도 특별히 없었기 때문에, 가계는 대다수의 구게처럼 유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2]
[편집] 청년기
가에이6년(1853년)1월에 간파쿠 다카쓰카사 마사미치의 가도의 유파에 들어가지만 이것이 하급구게인 이와쿠라가 조정 수뇌에 발언하는 큰 전환기가 된다.
조정개혁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적립금을 가쿠슈인의 확대, 개혁에 사용, 인재육성과 실력주의에 의한 등용을 주장하였다. 구게사회는 신분이사회가 엄격하여 가문별로 관위의 승진까지 고정되어있었다. 대다수의 하급구게는 조의(朝議)에 출석할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했다.
청취한 다카쓰카사(鷹司)는 의견서에 수긍하였지만 즉답은 회피하였다고 한다.(『岩倉公?記』)
[편집] 88공경 사건
안세이5년 (1858년)1월 로주 홋타 마사요시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칙허를 얻기 위해 상경한다. 간파쿠 구조 히사타다는 칙허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것에 대해 많은 공경, 구게에게서 비판을 받는다.
이와쿠라도 조약조인에는 반대입장이었으며, 오하라 시게토미와 같이 반 구조파의 구게들을 결집하여 3월 12일에는 공경 88명이 입궐하여 항의하였다. 구조 간파쿠는 병이라는 이유로 입궐을 사퇴하였다.
하지만 이와쿠라는 구조 저택을 방문하여 면회를 신청하였고, 가신들은 병을 이유로 거절하였지만, 면회할 수 있을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와쿠라에 대해 간파쿠는 내일 회답할 뜻을 이와쿠라에게 전해졌다. 이와쿠라가 구조 저택에서 물러간 것은 오후 10 넘어서라고 한다.(「조정 신하 88 공경 열참 사건」)
3월 20일, 홋타는 고고쇼(小御所)에 불려 고메이 천황을 배알하였지만 그때 천황은 ‘후환이 알수 없다고 많은 신하가 주장하고 있어 산케, 여러 다이묘와 재차 중론한 후에 말하도록’이라고 전한다. 많은 신하는 이와쿠라 등 반대파 공경에 대한 것으로 이와쿠라 등의 반대에 의해 칙허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와쿠라에 의한 첫 정치운동이며, 승리한 것이었다.
2일 후인 3월 14일, 정치 의견서『神州万?堅策』를 고메이 천황에게 제출한다.
그 내용은
- 미일화친조약에는 반대(개항장소는 한군데로 하며, 개항장소 10리 이내의 자유이동, 크리스트 교 포교는 허가하지 않았다.)
- 조약을 거절하는 것으로 인해 미일전쟁이 될 때의 방위정책, 전시 재정 정책
등이 적혀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단순 양이는 부정하여
- 상대국의 형성 풍습 산물을 알기 위해 구미 각국에 사절 파견을 주장한다.
- 미국은 장래에 동맹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 국내 일치 방어가 필요하니 도쿠가와가에는 가이에키(改易)하지 않을 것을 전하고, 그 뜻에 따를 것.등,
이를 위해 다테나 시마즈등의 도자마 유력 번 처럼 막부와 대결하는 상태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시점에서는 사쓰마 번의 시대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점을 알 수 있다.
[편집] 안세이 대옥
안세이 5년 (1858년)6월 19일, 로주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 27일 이것을 안 고메이 천황은 격노. 이이는 계속하여 네덜란드,러시아, 영국 과 차례로 불평등조약을 체결한다.
또한 항의한 전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나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가쿠등을 7월 5일에 근신 처분을 내렸다. 고메이 천황은 8월 8일에 미토 번에 대해 이이 나오스케를 규탄하도록 칙서를 내렸다.(무오년의 밀칙)
이로 인해, 10월 18일에 미토 번 무사 우가이 기치자에몬을 타수(打首)로 정하는 등, 존황양이파나 히토쓰바시 파에 대하는 대 탄압 안세이 대옥을 발동하였다.
이와쿠라는 대옥이 황실이나 구게까지 확대되어, 조정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3] 그로 인해 교토 쇼다이 사카이 다다아키나 후시미 부교 나이토 마사쓰나등과 회담하여, 그들에게 천황의 뜻을 전하여, 조정과 막부의 대립은 국가의 큰 과실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이 후, 이와쿠라와 사카이는 의기투합하여 친해졌고 이와쿠라 자신은 막부측에 가까운 자세를 취했다.
[편집] 가즈노미야 결혼
안세이 7년 (1860년)3월 3일에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인해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뒤, 안세이 대옥을 수습하여 공무합체파가 막부 내에서 다시 일어났다. 4월 12일에는 네 로주 연서에서 황족의 누이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쇼군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결혼을 희망하는 서한이 교토 쇼시다이(所司代)에서 구조에게 제출되었다.
고메이 천황은 이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시집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거절하여, 가즈노미야 자신도 조약파기를 은밀히 구하는 대답을 하였다.
이와쿠라의 의견서 중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가즈노미야 혼인에 관한 상신서(上申書)』는 이때 천황에게 제출되었다. 내용은 천황이 이와쿠라를 불러 자문할 때에 대답한 것이다.[3]
이 중에서 이와쿠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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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혼인을 막부에서 꺼내온 이유는 막부의 권위가 땅으로 떨어져 인심이 멀어진 것을 인식하고 있어, 조정의 위력으로 권위를 겉으로라도 얻으려는 속셈이다. 라고 분석하였다.
- 황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조정의 아래로 인심을 되돌려 여론 공론을 기반으로 한 정치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서두르면 안 된다. 서두르면 내란이 된다.
- 지금은 ‘공무일화(公武一和)’ 를 천하에 나타내야한다.
- 정치적 결정은 조정이 그 집행은 막부가 하는 체제를 구축해야한다.
- 조정의 결정사항으로 ‘구조가 되돌리는(통상조약의 파기)’것이 있다. 이번 결연은, 막부가 그것을 실행시키면 특별히 용서하는 결론을 내린다.
고메이 천황은 6월 20일에 조약파기와 양이를 조건으로 가즈노미야 혼인을 인정하는 뜻을 구조 간파쿠를 통해 교토 쇼시다이에게 전했다.
막부로써는 이미 가즈노미야와의 혼인밖에 타개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리인 걸 알면서도 7월 4일, 네 로주 연서에 의해 ‘7년에서 10년 이내에 외교교섭, 경우에 따라선 무력을 가지고 파약 양이를 결행한다.’라고 확약하기에 이른다.
분큐원년(1861년)10월 20일 가즈노미야가 가쓰라고쇼(桂御所)에서 나와 에도로 내려갔다. 이와쿠라도 이 일에 수행하게 되었다.
히가시쿠제 미치토미의 회고록에 의하면 가즈노미야가 내려갈 준비를 이와쿠라가 전부 하였다고 한다. 또한 출발 전 고메이 천황이 수행하는 이와쿠라와 지쿠사 아리부미를 작은 방에 불러내어 칙서를 주고, 로주에게 이 서신을 물은 뒤에 내놓도록 명하였다. 즉 이와쿠라는 단순한 수행원이 아닌 칙사로써 에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하급구게인 이와쿠라가 로주와 대등하게 의논할 수 있도록 천황이 배려하였다고 한다.
11월 26일 이와쿠라는 에도 성에 구제 히로치카나 안도 노부마사와 면회하였다. 여기서 이와쿠라는 고메이 천황의 칙서의 질문은 물론, 막부가 가즈노미야를 이용하여 폐제(廢帝)를 획책하고 있다고 하는 에도 시중의 소문의 진위를 물었다. 로주들은 백성의 날조라고 회답하였지만, 그런 소문이 시중에 돌은 것 자체 부덕으로 사과, 로주 연서의 서신에 두 번다시 없다고 맹세할 것을 답했다. 하지만 이와쿠라는 물러서지 않고 맹서를 하려면 쇼군 이에모치의 친필로 제출하라고 명했다.
이에야스 이래 쇼군이 맹서를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로주들은 그 자리에서 즉답을 피했지만, 결국 3일 후 쇼군 이에모치가 맹서를 쓴 것이 이와쿠라에게 전해졌다. 물론 이와쿠라로써도 의미도 없는 것을 받은 것은 조정권력의 고양을 위해서였다.
12월 14일 이와쿠라는 의기 양양하게 에도를 나와, 24일 교토로 돌아왔다. 하지만 전날 11일에 친어머니가 사망하여, 상(喪)으로 인해 입궐을 사양하여, 쇼군 맹서는 대신 지쿠사 아리부미가 12월 25일에 고메이 천황에게 제출하였다. 고메이 천황은 이것에 매우 기뻐하며 이와쿠라의 복귀 후인 2월 11일에 이와쿠라를 불러 그 공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편집] 실각
분큐 원년(1861년)에는 조슈 번주 모리 다카치카가 기소(議奏)인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를 통해 『항해원략책』를 고메이 천황에게 건의하였다. 조정 주도의 공무합체, 현실적 개국, 장래 양이를 주창한 이 서는 천황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아, 천황은 조슈 번에게 이 서를 막부에게도 전해 공무 주선하도록 명하였다. 막부에 있어서도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에 12월 30일에는 모리 다카치카가 에도로 와 조슈 번에 공무주선역을 맡게 된다.
그리고 분큐2년(1862년)4월 7일에는 고메이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먼저 막부 로주가 연서로 제출한 10년 후의 양이 결행을 행할 맹서를 공표, 만약 약속의 기일이 와도 막부가 행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천황 자신이 구게와 다이묘를 이끌고 친정(親征)을 실시하여 파약, 양이를 행한다 라고 선언한다.
4월 10일 조슈 번에게로의 공무 주선 임명에 위기감을 느낀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가 가즈노미야 혼인과 안세이 대옥의 탄압으로 인해 천조(天朝)의 위기가 임박하다며 교토로 들어왔다.
히사미쓰는 천황에게서 교토 수호를 명받아, 교토 쇼시다이는 완전히 유명무실화 되었다. 그 후 천황은 안세이 대옥에서 처분 받은 사람들의 복귀를 막부에게 명하였고 막부는 이것을 받아들여 7월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 마쓰다이라 ?가쿠를 정사총재직으로 부득이 복귀시켰다.
7월 6일에는 조슈 번 교토 저택에 대해 모리 다다치카가 고메이 천황의 비원 파약 양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힘을 다해 주선한다는 양이의 입장을 명확하게 번론(藩論)으로 정하자고 가신들에게 선고하였다.
이렇게 어지러운 정세 중 존황양이운동은 각지에서 고조되었다. 이와쿠라는 조정 권위의 고양에 힘썼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즈노미야 혼인에 찬성과 교토 쇼시다이의 사카이와 친한 점에서 존황양이파의 지사들로부터 사바쿠파로 보이게 된다.
결국 존황파는 이와쿠라를 배척하도록 조정에 압력을 넣게 된다. 공경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는, 이와쿠라에게 먼저 고메이 천황의 근시(近習)를 그만두도록 권고, 이와쿠라는 이에 따라 7월 24일에 근시직을 물러난다.
하지만 이와쿠라 배척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8월 16일 산조 사네토미, 아네가코지 긴토모등 13명의 공경이 연명하여 이와쿠라 도모미, 고가 다케미치, 지쿠사 아리부미, 도미노코지 히로나오, 이마키 시게코, 호리카와 노리코 6명을 막부에 아첨하는 ‘4간2빈(四奸二嬪)’의 탄핵문서를 간파쿠 고노에 다다히로에게 제출한다. 드디어 고메이 천황까지 친막(親幕)파라고 의심하여, 8월 20일에 칩거처분, 관직 사퇴와 출가를 자청하기를 명한다. 이와쿠라는 거역하지 않고 사퇴하여 출가. 조정을 떠났다.
[편집] 칩거시대
하지만 도사 번무사 다케치 한페이타등 양이 강행론자는 이와쿠라의 처단이 무르다고 주장하여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더 이와쿠라는 교토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머리를 시조 강가에 효수하겠다 라는 천벌의 예고문까지 받는다. 그로 인해 저택에서 칩거할 수 없게 되어, 먼저 니시가모(西賀茂)의 레이겐지[4]에 몸을 숨겼다.
이와쿠라는 중의 모습이 되어 레이겐지로 숨은 9월 13일 일기에는 ‘무념 절치(切?)가 끊이질 않는다’라고 적혀있다. 다음날 일기에도 ‘무념이 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 실제로 꿈인지 현실인지 어렵고, 어떤 숙연(宿緣)의 결과인지 조금도 납득할수 없다.’라고 분함이 계속 쓰이고 있다. 9월 15일 아버지 도모야스의 조카가 주지로 있는 교토 서쪽의 사이호 사로 옮긴다.
9월 26일 간파쿠 고노에 다다히로는 구조, 고가, 이와쿠라 등을 교토 안에서 살면 안된다는 추방령을 발령. 이와쿠라가 이주로 인해 곤란할 때, 10월 4일에 장남 도모쓰나가 교토 북쪽의 이와쿠라 마을에 주거를 허락받아 그곳으로 옮겼다. 이후, 교토 안으로 돌아오는 게 허락된 게이오3년(1867년)11월까지 이 지역에서 5년간 칩거생활을 보내게 된다.
겐지원년(1864년)7월 19일 금문의 변이 발생, 교토의 양이 강행론자가 일소되어 이와쿠라의 무고죄가 증명되었지만, 사면(赦免)하지 않고 계속 이와쿠라 마을에서 살았다.
하지만 사쓰마 번이나 조정 내의 동지들이 다시 이와쿠라에게 방문하여, 게이오 원년(1865년)의 가을 즈음부터 이와쿠라도『叢裡鳴?』을 시작으로 정치의견서를 다시 쓰게 되어 조정이나 사쓰마 번의 동지에게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되었다.[5] 또한, 이 사이에 사쓰마 번의 동향에 호응하는 형태로 종래의 공무합체파 였던 입장을 도막파로 변경하였다.
게이오 2년(1866년)6월 7일부터 시작된 제2차 조슈 정벌은 조슈 군의 결사 반공(反攻)으로 막부군의 고전이 계속되던 중, 7월 18일에는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나가미치, 오카야마 번주이케다 모치마사, 도쿠시마 번주 하치스카 나리히로 등 도자마 여러 번이 고메이 천황에게 정벌군 해체의 건백서(建白書)를 제출. 20일에는 사쓰마 번에서도 건백서가 나왔다. 더욱 더 같은 날에는 정벌군 대장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서거하였다. 하지만 고메이 천황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니조 나리유키등 조정 수뇌는 여전히 정벌군의 속행을 주장하였다.
이와쿠라도 사쓰마 번과 마찬가지로 병사 해체 및 조슈 번과의 화해에 찬성하여 일찍이 근왕의 공적을 존중하여 금문의 변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리길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정수뇌부, 특히 나카가와노미야를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천하의 대세를 보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와쿠라는 조정의 악집정을 고치기 위해 다시 획책. 이 의견에 나카미카도 쓰네유키가 찬동하여, 사쓰마 번의 이노우에 이시미와 후지이 료세쓰 등이 공작에 참여하였다. [6]
8월 30일 조정개혁(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 등 간신 추방, 반 막부파 고노에 다다히로의 간파쿠 재임, 다카쓰카사(鷹司)를 시작으로 유폐상태의 공경들을 사면하여 조의(朝議)에 복귀하는 등)을 내걸고 나카미카도 쓰네유키를 시작으로 22명의 공경이 차례로 입궐하였다.(이와쿠라는 입궐 금지중)이것을 보고 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는 사퇴하였다. 천황은 갑자기 신하를 한번에 두사람을 잃은 것에 격노하여, 나카미카도 등 참가한 공경들에게 집에서 근신할 것을 명하였다.(조정 22공경 열참 사건)
또한 조슈와의 전쟁 자체는, 8월 1일에 막부군이 고쿠라에서의 전투에서 패전, 8월 16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입궐하여 전황보고, 이미 온갖 수단을 다해도 이길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조정수뇌부에 보고하여 어쩔 수 없이 병사를 풀고, 8월 20일에 이에모치 서거가 공표되어 9월 2일 조슈 번과 막부가 휴전협정을 맺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천연두에 의해 붕어(崩御). 정치혼란기에서 돌연 붕어로 인해 이 붕어에는 이전부터 독살설이 있어, 이와쿠라가 용의자로 의심되었지만,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7]
게이오 3년(1867년)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15세에 즉위. 섭정에는 니조 나리유키가 취임하였고 다시 나카미카도와의 2두 체제가 되었다. 새로운 황제 즉위에 따라 대사(大赦)에 의해 1월 15일과 25일에 분큐 3년(1863년)의 정변, 금문에 변에 관련된 자가 사면되었고 간파쿠 구조 히사타다는 이때 사면되었지만, 이와쿠라, 고가, 지쿠사, 도미노코지 등 열참(列?)관계 공경은 사면되지 않고 11월에 사면되었다. 또한 이 사이, 10월 14일에 니조 성에 대정봉환이 행해져, 다음날 15일에는 니조 나리유키로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해 봉환의 칙허가 주어져, 공식으로는 조정에 정권이 반환되었다.
[편집] 왕정복고
조정 수뇌부, 도쿠가와 가의 영지를 배경으로 실질적 권력을 잡게 된 요시노부에게서 실권을 빼앗기 위해 이와쿠라는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 도사의 고토 쇼지로, 공경인 나카미카도, 나카야마 다다야스,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등과 같이 요시노부에게 관직, 영지를 반납시키는 계획에 참가한다.
게이오 3년(1867년)12월 8일부터 다음 날 9일에 걸쳐 나카가와노미야, 니조 나리유키 등 조정 수뇌부, 아리스가와라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등 황족과, 시마즈 다다요시, 야마우치 요도, 마쓰다이라 ?가쿠, 도쿠가와 요시카쓰, 아사노 나가코토등 다이묘와 같이 조의가 행해졌다.(사전에 이와쿠라 일행의 계획을 파악한 요시노부는 병이라는 이유로 결석.)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이와쿠라 일행은 입궐하여, 신정부 인사와 요시노부의 처분을 구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안을 아뢴다. 왕정복고 자체는 이미 결정된 것이지만, 신정부의 인사안을 둘러싸고 마쓰다이라 ?가쿠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논쟁을 벌였다.
최종적으로는 아리스가와라노미야를 정부수반의 총재(?裁)로, 마쓰다이라 ?가쿠, 야마우치 요도를 의정(議定), 이와쿠라, 오쿠보를 산요(??)로 하는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요시노부의 처우에 대해서도 요도나 ?가쿠에게서 의견이 나와 고고쇼에서 이와쿠라나 오쿠보와 다시 격론을 펼쳤다. 하지만 최후에는 이와쿠라가 ?가쿠, 요도를 논파(論破)하여 요시노부에게 관직, 영지 반납을 명하는 것이 결정된다.(고고쇼 회의)
?가쿠와 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사자로써 요시노부에게 파견되어, 신정부의 결정을 요시노부에게 통고했다. 통고를 받은 요시노부는 관직과 영지의 반납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부하가 진정할 때 까지는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보냈다. 실제 이 통고를 받고 ‘막부’의 하타모토나 아이즈 번의 과격세력이 폭주할 듯이 되어, 요시노부는 그들에게 경거망동을 조심하도록 명하여 13일에는 정부에 순순히 복종할 의사를 나타내기 위해 교토의 니조 성을 나와 오사카 성으로 퇴거하였다.
?가쿠는 이것을 보고 ‘천지에 맹세하여’ 요시노부는 반납을 실행하려한다는 의견을 총재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오사카 성에 들어간 뒤에도 요시노부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다.
23일과 24일에 걸쳐 정부에서 이 건에 대해 회의가 이뤄졌다. 산요(??)인 오쿠보는 요시노부의 배신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하여 즉시 ‘영지 반납’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가쿠는 구 막부 내부의 과격세력이 요시노부의 방해를 하고 있다고 짐작하여, 지금은 ‘도쿠가와 가의 영지를 조사하여, 정부에서 회의를 가진 뒤 확정한다’라고 하는 애매한 명령에 그쳤다.
이와쿠라도 ?가쿠의 생각에 찬성하여, 다른 정부 멤버도 이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여 이 명령으로 결정되었다. 이 명령을 받은 요시노부는 승낙한다는 맹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또한 28일에는 이와쿠라가 산요에서 의정(議定)으로 승진. 조정수뇌부의 한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메이지원년(1868년), 요시노부가 돌연 사쓰마정벌을 명목으로 사실상 교토 점령을 목적으로 한 출병을 개시했다.(도바 후시미 전투)신정부는 긴장하여 1월 3일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산요인 오쿠보는 구 막부군이 교토로 들어오는 것은 신정부군의 붕괴이며, 천황의 깃발과 도쿠가와 정벌의 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의정인 ?가쿠는 사쓰마 번과 구 막부세력의 사투(私?)이며 정부는 무관계하다고 여겨 반대를 주장하였다. 회의는 분규(紛糾)하였지만, 이제 막 의정이 된 이와쿠라가 도쿠가와 정벌에 찬성한 것으로 회의의 대세는 정해졌다.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토벌군의 대장군에 요시아키 친왕을 임명하고, 친왕은 천황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도사에 진군. 여기를 도쿠가와 추토(追討)의 본진으로 정하였다. 깃발의 등장에 각 번이 차례로 정부에 원조를 파견하여, 구 막부군은 이에야스부터 ‘국가에 큰 일이 생길 시, 다카토라를 선두로 하여라.’까지 말한 도쿠가와 가의 우방(友邦) 쓰 번의 도도(藤堂) 가에서도 배반당해 포격을 받아 패주하였다.
6일 저녁,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패배를 깨닫고, 측근 몇 명과 함께 몰래 에도에서 도망쳤다. 도쿠가와 정벌에 반대한 ?가쿠의 정부 내에서의 발언력은 약해졌으며, 찬성한 이와쿠라는 발언력이 커지고 증가하게 되었다.
1월 7일, 교토에 있는 여러 다이묘가 고고쇼에 모여, 이와쿠라 도모미는 그 장소에서 다이묘들에게 ‘자신의 구니로 돌아가고 싶은 자는 돌아가라. 오사카에 가고싶은 자는 가라. 근왕의 의사가 있는 자는 그 뜻을 내일까지 맹서로 남겨라.’라고 일갈하였고, 여러 다이묘들은 이와쿠라의 박력에 떨며, 전원이 맹서를 제출하였다.
1월 10일 애매했던 도쿠가와 영지 문제는, 이번 반역에 의해 몰수로 명확히 선언되어, 그 전부가 천조(天朝)의 토지가 되는 것으로 포고된다.
더욱더 1월 17일, 정부의 수뇌부가 분담방식의 내각제가 되어, 총재를 수반으로 하여 내국사무, 외국사무, 육해군사무, 회계사무, 형벌사무, 제도사무, 사찰사무인 7개의 각료가 두어지게 되었다.
이와쿠라는 육해군사무와 회계사무인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게 된다. 명목상의 행정의 책임자는 총재이지만, 그 지위에 있는 다루히토 친왕은 스스로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의정이나 산요들의 회의에 의해 결정된 것을 거의 허가하였다. 이로 인해 이 인사 구성으로 일본에서는 실질적으로 이와쿠라를 수반으로 하는 정권이 탄생하였다.
[편집] 일본정부 수뇌로
4월 21일은 정부기구의 개편이 행해져, 미국의 정치제도를 참고로 하여 행정부, 입헌부, 사법부로 나뉜 권력 분립형 정부로 이행하였다.
이와쿠라는 이때 행정관 중의 보상(輔相)이라고 하는 국내행정 전반과 궁중의 서무를 감독하는 역할로 취임. 산조 사네토미와 같이 2인체재로 취임하였지만, 산조는 도쿠가와 가의 처분의 전권을 맡아 사이고 다카모리를 거느리고 에도로 나와있었기 때문에 이와쿠라가 실질적인 수반이 되었다.
이와쿠라가 취임 하자마자 한 궁중 개혁으로 구게에게 학문의 시간을 주고, 구게의 숙직(고쇼에서의 24시간 근무)의 제도를 폐지, 또한 고쇼 내의 서무 관련의 사람도 대폭 감소시켰다. 이것이 구 구게층의 비난을 받았지만, 메이지 유신을 위해 꼭 해야 한다는 의지가 에도에 있는 산조에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우에노 전쟁후, 에도가 평정되면 에도 시민으로부터 천황 에도 행차의 시기가 고조되어 8월에 메이지 천황이 도쿄(당시 개명)를 행차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와쿠라 및, 나카야마 다다야스(의정), 기도 다카요시(산요), 다테 무네나리(의정)등 정부 각료 멤버도 천황을 수행하였다.
10월 13일 도쿄 성(구 에도 성)에 천황이 입성, 여기가 새로운 고쿄로 정해졌다. 하지만 교토 시민의 감정을 배려하여 메이지 2년(1869년)1월 메이지천황은 교토에 환궁한다. 이와쿠라도 교토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후 갑자기 병을 이유로 보상(補相)의 사직을 요구한다. 오쿠보나 기도는 만류하였지만, 1월 17일에 사퇴하고 만다.
[편집] 판정봉환과 폐번치현
이와쿠라의 사임 후, 정부에선 판적봉환을 검토하게 되었다. 이와쿠라는 판정봉환에 관해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에는 "번주들은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행정관(지사)이어야 하며 이들은 당분간 지사가 영지를 관리하게 한다. 하지만 번주들은 중앙 정부에 지배 실태를 확실하게 전하여 지사 개인에게 토지와 인민은 사유물이 아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여 번의 통치와 가정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등이 쓰여 있었다.[3]
같은 해 6월 판적 봉환된 이후, 다시 행정조직의 개편되어 고대의 관제(官制) ‘성(省)’을 본뜬 체재가 되었다. 즉 정부 수반을 좌우대신, 다이나곤, 산기(?議)로 구성하여, 그 아래의 행정조직으로 민부성, 대장성, 병무성, 형부성, 궁내성, 외무성의 6성이 두어졌다. 산조 사네토미가 행정 책임자인 우다이진이 되어, 이와쿠라는 그 보좌역인 다이나곤에 취임하였다. 산기에는 오쿠보 도시미치, 마에바라 잇세이, 소에지마 다네오미등 구 무사계급이 취임하였다. 정치가인 구 구게와 관료인 구 무사층이 더욱 더 일체화 되어, 판적봉환에 대응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기도한 체제였다.
메이지 3년(1870년) 이와쿠라는 의견서 『건국책 (建?策)』를 썼다. 거기에는
- 국가경론(?論)의 근본을 정할 것
- 정부의 세입, 세출을 명확히 하여 그것을 국민에게 알릴 것
- 군현의 체제를 성공시키기 위해 잠시 동안 그 방침을 표시할 것
- 토족 및 병졸에게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권유할 것
- 번 지사들을 아래(도쿄)에 거주시킬 것
- 천하의 민치(民治)의 규칙을 정하여 민부성의 총괄로 돌릴 것, 천하의 재원(財源)을 정하여 대장성의 총괄로 돌릴 것
- 천하의 병제를 정하여 병부성의 총괄로 돌릴 것
- 천하의 형벌 및 인민소송의 법을 정하여 형부성의 총괄로 돌릴 것
- 천하에 중, 소학교를 설치하여 대학에 이르게 할 것
등의 항목을 내세우며 이것이 봉건주의가 아닌 근대 국가의 원칙이며, 즉 민정, 재원, 병제, 소송법, 교육의 전국통일화를 주장하였다.
메이지 4년(1871년)2월, 산조 저택에 이와쿠라, 오쿠보, 사이고, 기도, 이타가키등 정부 수뇌가 모여 폐번치현에 대비하여 번의 지휘권에 속하지 않는 천황 직속의 고신베이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의견에 일치. 사쓰마, 조슈, 도사의 세 번에 병사를 두도록 명하여, 8000명의 병사가 급히 조직되었다.
7월 14일 메이지 천황이 전 지사를 고쿄로 불러내어, 폐번치현을 선고하였다.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모든 지사가 찬동하여 염려하였던 저항이나 반항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이 날로 '번'은 하나도 남지 않고 일본에서 소멸되었다. 영지를 잃은 ‘다이묘’들은 전원 도쿄로 소집되어, 화족으로써의 책무를 다한 것이 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하나의 국가, 한사람의 원수의 아래에 근대통일국가로써 시작하게 되었다.
[편집]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 혹은 암창 사절단은
1871년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 과도정부가 파견한 해외 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덱이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으로 보낸 대사절단에 착안하여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메이지 유신 전에 도쿠가와 쇼군에서도 미국에 한 차례(1860년), 유럽에 두 차례(1862년과 1863년) 사절단을 보낸 바 있었다.
특명전권대사인⑥ 이와쿠라 토모미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 사절단이라고 부른다.
[편집] 일행
부대사는 ②오쿠보 도시미치, ⑤기도 다카요시, ⑦이토 히로부미로 당시 정권의 장관들이었다. 이와 행정가들과 학자들도 대동하였는데 그 총수는 48명이었다.
그리고 60명의 유학생들을 함께 데려갔는데 그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일본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편집] 여정
그들은 1871년 12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다. 그 곳에서 워싱턴 디시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였다. 1873년 10월 13일 귀국하여 거의 2년 동안 여행하였다.
[편집] 임무
그들의 첫째 임무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의 여러나라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에 대하여 재협상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둘째 임무는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 구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첫째 임무는 대단히 수행하기가 어려서 상대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늘어났지만,
둘째 임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편집] 사절단의 느낌
이 여행 중에 ⑥이와쿠라는 각국에서 격렬한 쇼크를 받았다.
미국의 근대국가의 모습은 이와쿠라의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산조에게 전한 서신에도 ‘은부(殷富)를 진흥시키는 사상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 라고 적혀있다.
그 원인은 철도에 있고, 일본의 번영은 철도에 걸려있어 일본의 동서를 잇는 철도 설치가 급선무가 되었다.
이와쿠라가 귀국 후 일본 철도 회사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영국에서는 일본에서 생각할 수 없는 공업기술에 압도되었다.
이미 사절단은 조약 개정이 아닌 각국에서의 유학이 주요목적이 되었다.
덧붙여 ⑥이와쿠라는 여태까지 상투는 일본인의 혼이라고 생각하여, 자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 때문에 미국을 방문할 시에도 일본식 상투를 하였지만,
미국에 유학을 간 자식인 이와쿠라 도모사다에게 설득되어, 시카고에서 잘랐다고 한다.
[편집] 정한론 논쟁
1873년 8월, 이와쿠라가 부재한 루스 정부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여전히 쇄국정책에 의해 개국을 거절하는 조선에 군을 파견하여 개국하도록 주장, 이것에 산조가 각의(閣議) 결정하였다. 산조가 각의 결정을 메이지 천황에 아뢰려고 하였지만, 천황은 이와쿠라의 귀국을 기다려 더 충분히 논의한 후에 결정하도록 명하였다.
이와쿠라는 9월 요코하마에 도착, 이 논쟁을 듣고 바로 내무우선을 주장하여 정한론에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조선을 적으로 돌리면 청과도 적으로 돌리게 되어, 지금의 일본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해군성의 가쓰 가이슈도 ‘일본에는 여전히 군함도 수송을 위한 선박도 불충분하여 해전은 할 수 없다.’라고 견해를 표시했다. 또한 대장성의 오쿠보 도시미치도 ‘만약 이겼다 해도 군비에 걸맞는 국가에 이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각의는 주석인 산조의 애매한 태도에 논의는 분규(紛糾)하였다. 사이고도 이와쿠라도 부결 될 때에는 사퇴를 신청할 모습을 보이자, 산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10월 19일에 착란상태가 되어 병이 나고 만다.
다음날, 우다이진인 이와쿠라가 다이조다이진 대신의 대리가 되어, 10월 22일 그 권한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의견을 거절, 정한론을 중지시켰다. 불복한 사이고는 산기(?議), 근위감독을 사퇴하여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사이고 파인 이타가키 다이스케, 엔도 신페이, 고토 쇼지로등도 사퇴하였다.
이 이후 정한론을 지지하는 불평 토족에게서 정부에의 불만이 분출하여 1874년 1월 14일 밤 8시 즈음에 아카사카 고쿄에서 퇴출하던 이와쿠라가 불평 토족의 폭한, 다케치 구마키치(고치 현토족)에게 습격받는 사건이 발생한다.(구이치가이의 변)이 사건으로 이와쿠라는 부상을 입었다. 더욱 더 2월 1일에는 사가에서 엔도 신페이를 선두로 불평 토족의 반란(사가의 난)이 발생한다.
그리고 1877년에는 사이고를 선두로 한 세이난 전쟁이 발발한다.
[편집] 화족 문제
1876년 4월 19일 이와쿠라는 화족 회관의 관장이 된다. 하지만 메이지 초기 화족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 명확하지 않아, 후와 비교하면 독립성이 강했고 특히 다이묘 출신자와 구게출신자 사이에서 번번이 충돌을 일으킬 듯한 상태 였다. 하지만 이와쿠라가 생각한 화족은 유럽, 미국형의 귀족이었으며 즉 그 사명은 황실을 받치는 자들이어야 했다. 옛날의 틀에 의한 시시한 대립은 쓸데없다는 것을 전 화족에게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서 이와쿠라는 강렬한 화족 통제 정책을 채택하기 이른다. 먼저 회관에 부장국(部長局)을 설치하여, 전 화족을 그 아래에 편입시켜 출신별로 6부로 나누고 각각 부장을 두어 조직화를 짜 화족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화족징계령을 정하여 화족의 품위를 더럽힌 자는 처벌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 법령에 의해 처벌대상은 범죄는 물론, 스캔들이나 가산(家産) 낭비도 대상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 1877년에는 화족의 금녹(金?)공채를 자본금으로 하여 화족은행이라고 불린 제15국립은행을 창설하여 화족의 재산의 보호에도 힘썼다. 창설 이유가 화족에게 연대감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결과는 이 은행의 보호를 빈번히 받은 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구 구게 화족이며, 또한 관장인 이와쿠라 자신도 전 구게라는 경력이 있어 구게의 중심인 정책이라고 무가출신의 화족에게서 불만이 속출하였고, 메이지 10년 7월에는, 마쓰다이라 ?가쿠, 다테 무네나리, 모리 모토노리, 시마즈 다다요시등 유력 무가 화족이 연서로 부장국(즉 이와쿠라)에 의한 화족통제의 폐지를 요청하는 요망서(要望書)가 제출된다.
이와쿠라는 거스르지 않고 요구대로 11월 15일에 부장국을 폐지. 12월 4일에는 관장도 사퇴한다. 하지만 넘어져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 이와쿠라는 이 때에 궁내성 중에 화족국을 설치, 이곳에 화족의 통제를 양도하였다. 즉, 화족은 이와쿠라 개인의 관할 하에서 정부 궁내성의 관할로 이동시킨 것이 된다. 이후 정부를 통한 화족통제에 힘써 최종적으로는 일본 제국의회의 귀족원이 생긴 것으로 인해 자연히 화족의 역할도 명확해져 구 무가, 구 구게가 동질화되었고, 화족 간의 대립은 해소되었다.
[편집] 입헌 문제
1875년 4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점차 국가 입헌의 정체를 세운다.’라는 조서를 낸다. (입헌정체의 조서)이 건은 산조 사네토미나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기도의 추천으로 다시 정부에 복귀하였다.)가 아뢰었고, 이와쿠라는 이것에 대해 국체일변의 우려가 있다고 하여 이 조서에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조서가 나온 것에 대해 항의 의사를 표시하여,
4월 21일 산조에게 사의(辭意)를 제출. 이에 산조가 각하하면, 이와쿠라는 병이라 하여 정부 출석을 거절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여러번에 걸쳐 나와 달라고 부탁하여, 10월부터 정부에 출석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입헌에는 반대하였다.
하지만 1880년 즈음부터 자유민권운동이 고조되었고, 헌법 제정 논의가 가속화되어 더욱더 1881년 6월 하순에는 법무관 동료 이노우에 고와시로부터 보고받아 이와쿠라도 드디어 생각을 바꾸어, 헌법제정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되었다. 문제는 누구에게 헌법제정을 맡겨야 하는 가였다.
이에 앞서 1878년 내무대신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불평 토족의 폭한에게 습격당해 사망하였다.(기오이자카의 변)이후 오쿠보를 대신하여 이와쿠라를 받든 건,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마 시게노부였기 때문에 두 사람 중 어느 쪽인지 생각하게 된다.
급진파인 오쿠마는 영국식의 의원내각제의 헌법을 주장. 이에 대해 점진파인 의 이토는 독일헌법을 모범으로 한 의원내각제를 취하면서 군주 대권을 보존하는 헌법을 주장하였다. 최종적으로 이와쿠라가 헌법제정을 맡긴 사람은 이토였다.
이 뒤, 이토는 홋카이도 개척 사관 유물 불하 문제가 일어나자, 민권운동과 오쿠마 시게노부를 연관지어 해임을 계획하려 한다. 이 사이, 이와쿠라는 휴양으로 아리마 온천에 있었지만, 도쿄에 돌아온 다음날인 1880년 10월 7일,이토가 이와쿠라 저택에 방문하여 오쿠마의 해임과 국회 개설의 칙유의 승낙을 구한다. 이와쿠라는 이것을 승낙하여 12일, 오쿠마를 파면한다.(메이지 14년의 정변)
1882년 3월 14일 이토가 헌법조사를 위해 유럽 각국에 파견가게 된다.
[편집] 사망
하지만 이와쿠라 자신은, 이토 히로부미의 귀국, 그리고 그 성과인 일본 제국 헌법의 제정을 보지 못했다.
1883년초 인두암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쿠라는 5월 25일, 교토 고쇼 보존계획을 위해 교토로 향했지만 여기서 점점 증상이 악화되었다. 이것을 들은 메이지 천황은 칙명을 내려 도쿄 대학 의학부 교수인 어빈 폰 발츠 의사를 교토로 파견하였다. 이와쿠라는 배로 도쿄에 돌아왔지만, 발츠로부터 암 선고를 받았다. (이와쿠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암 선고를 받은 일본인이다.)
여러번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위문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였고, 천황의 마지막으로 위문한 다음날인 7월 20일 입헌정체수립을 눈앞에 두고 사망했다. 59세. 7월 25일에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이와쿠라는 일본정부에 의한 최초의 국장자이다. 묘소는 도쿄 도 시나가와 구의 가이안 사이다.
[편집] 이와쿠라 도모미 유서(幽棲)지
교토 북쪽 짓소원근처(현재 교토 시사쿄 구 이와쿠라 아구라 정)에 있지만, 지금은 주택이나 병원에 둘러싸여 있다. 38세에 사퇴, 삭발한 이와쿠라 도모미는 고장에 옛 집을 물려받아 분큐 2년(1862년)9월부터 게이오 3년(1867년)11월까지 5년 남짓 살았다. 유서(幽棲)중이라고는 하지만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계속한 도모미는 여기서도 낭인 무사들에게 미행당한다.
건물은 검소한 단층집 양식에 2동으로, 남쪽(정면)의 1동은 이주 후인 겐지 원년(1864년)에 증가하는 손님에 대응하기 위해 증축한 것이다. 도모미 사망 후인 1902년에, 이주 초부터 세워져 있던 북측 동의 지붕의 일부가 개축 되었어도 대부분이 당시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1932년에 나라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재단법인 이와쿠라 공 옛 사적 보존회’의 손에 관리되고 있으며, 유료로 공개되고 있다. 부지 내에는 ‘?岳文庫’라고 이름 붙여진 작은 박물관도 있어 유품 등 간직된 물건이 일부 진열되어 있다. 이 간직품 중, 1011점은 2000년에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옛 집의 거실을 견학하는 것도 가능하다.
[편집] 500엔 지폐
1951년 발행 개시된 일본 은행권 B500엔 권, 및 1969년 발행 개시된 C500엔 권에 이와쿠라의 초상이 채용되었다. C500엔 권은 500엔 동전이 등장한(1982년)후에도, 1985년까지 제조되었다.
[편집] 주석
- ↑ 5품이상, 6품 일부만 가능하다.
- ↑ 하지만 녹봉은 이와쿠라가와 같은 정도의 가문은 대다수였고, 그 이하의 녹봉을 받는 가문도 많이 있었다.
- ↑ 가 나 다 岩倉公?記
- ↑ 이와쿠라 가의 시조 이와쿠라 도모다카의 자식이 세운 절
- ↑ 이 시기, 이와쿠라의 조정 및 구게사회의 현상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이즈음 쓰여진 ‘極密語’의 눈에 띄는 문장은 천하혼란의 최대의 원인은 고메이 천황에게 있으며, 천황은 천하에 사죄한 후에 스스로 정치를 쇄신해야 한다. 논하고 있다.(『이와쿠라 도모미 문서』1권 P264)또한,『?叢裡鳴?』중에 공경들은 무위(武威)에 의해 정견(定見)이 없고,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부화뇌동(付和雷同)하여 서로를 비방할 뿐인 경박한 존재이며, 안세이 5년 이후에 진심으로 국사에 힘 쓴 공경은 자신 이외에는 나카야마 다다야스,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 오하라 시게토미뿐이다 라고 단언하고 있다.(『이와쿠라 도모미 문서』1권 P179?180)
- ↑ 하지만 협력하던 번의 무사가 적었다고 하며 사쓰마 번이 협력한지는 불명. 적어도 사쓰마 번 수뇌의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 계획을 회의적으로 보았다.
- ↑ 하라구치 기요시의 『고메이 천황은 독살되었는가』에 의하면 고메이 천황의 사인이 천연두인 것은 병리학적으로도 명백하여 독살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이 저술이 등장 이후, 많은 역사자가 이것을 지지하게 되어, 현재는 부정설이 통설이 되었다.
[편집] 외부 링크
- 이와쿠라 도모미의 초상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
- 와세다 대학 - 대외에 관련된 인물들 - 이와쿠라 도모미
일본 제국의 제1대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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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
전임: -
후임: 구로다 기요타카(제2대)
| |
일본 제국의 제5대 내각총리대신 | |
임기 | 1892년 8월 8일~1896년 8월 31일 |
전임: 마쓰카타 마사요시(제4대)
후임: 마쓰카타 마사요시(제6대)
| |
일본 제국의 제7대 내각총리대신 | |
임기 | 1898년 1월 12일~1898년 6월 30일 |
전임: 마쓰카타 마사요시(제6대)
후임: 오쿠마 시게노부(제8대)
| |
일본 제국의 제10대 내각총리대신 | |
임기 | 1900년 10월 19일~1901년 5월 10일 |
전임: 야마가타 아리토모(제9대)
후임: 가쓰라 다로(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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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제1대 조선통감 | |
임기 | 1906년 3월 3일~1909년 6월 14일 |
전임: -
후임: 소네 아라스케(2대)
| |
출생일 | 1841년 10월 16일 |
출생지 | 일본 스오 국 구마게 군 (현 :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 |
사망일 | 1909년 10월 26일 |
사망지 | 청나라 지린 성 하얼빈 |
별명 | 도시스케(利助), ?스케(俊輔, 春輔, 舜輔), ‘?보’(春畝, 춘무), ‘창랑각주인’(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보 공’(春畝公), 충정군(忠貞君), 대한제국 시호 문충(文忠) |
종교 | 유교(성리학)→신토 |
배우자 | 이토 우메코 |
자녀 | 이토 부미요시, 이토 히로쿠니, 이토 분키치, 이토 신이치, 이토 사다코, 이토 이쿠코, 이토 아사코 |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아명은 토시스케(利助)로, 후에는 ?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보’(春畝, 춘무)나 ‘창랑각주인’(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한일 병합과 관련해 일본 제국에 의한 아시아 진출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이며,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安重根)에게 사살되었다.
사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제후국인 스오 국 구마게 군(지금의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林十藏)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아버지가 조슈 번의 주겐(中間)계급인 이토 다케베에(伊藤武兵衛)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이토(伊藤)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할아버지의 성을 따서 이토 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에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편집]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木?孝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과 교제하게 된다.
[편집] 청년기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1]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準士雇)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1863년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에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파견 되었다가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討幕) 정책을 수행하였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정계 입문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 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쟁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참의 겸 공부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편집] 1차 총리 취임과 퇴임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 3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 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편집] 두 번째 총리직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三浦梧?)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편집] 외교 활동
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다.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이 대학 철학과 교수인 죠지 디 럿트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In Korea With Marquis Ito)'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럿트는 1906년 일본에 놀러 와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한국 사회의 정정을 관찰한 후 '한국문제의 해결' 등의 글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일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편집] 생애 후반
[편집]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러일강화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조약에 불만을 품은 원태우(元泰祐) 의사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2][3]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 조약에 공을 세운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朴泳孝)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법무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 등으로 구성되었다.[4]
[편집] 퇴직과 사망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桂太?)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 합병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1907년 한국을 합병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이후 평소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한국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5]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6월에 이토는 통감직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었다.
1909년 10월 26일에 러시아의 코코프체프 재무상과의 회담을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제국의 의병 참모 중장 안중근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909년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일본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대한제국 황제가 그에게 내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6]
[편집] 사망에 이르는 과정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7] 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코코프체프 재무상과의 회담을 위해 만철 열차를 타고 뤼순과 하얼빈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입수,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처분에 자원하였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둥칭 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차이쟈거우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8]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차이쟈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이등박문이 하얼빈 역에 도착하는 날 하얼빈 역의 전 역인 채가구 역에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 역에는 안중근이 그날 새벽부터 잠입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9]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7]
[편집] 사후
[편집] 시신 운구 작업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 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대련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세 군데 총탄에 뚫린 곳에는 반창고(絆創膏)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제국 군함 추진주(秋津洲)로 운구되었다. 추진주는 3천7백톤 급으로 청일전쟁 중 서해에서 대활약을 했다는 배이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門司) 사이의 관문해협(關門海峽)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橫須賀) 부두에 입항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이 도착하기 전에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서 운구가 원활하지 못했다. 그 날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들 틈을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신바시 역으로 출발, 11월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에서는 출영 나온 자가 2천 명 정도였고, 역 광장은 인파로 꽉 찼다. 그의 시신은 아카사카 구(赤坂區) 영남판(靈南坂) 추밀원 의장 관저로 향했다. 11월 2일 오후 2시 40분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활용되었다.
[편집] 국장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이 열렸고, 관은 당일 오전 9시 관저를 출발했으며, 노제 빈소는 히비야 공원에 차려졌다. 식은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다.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고, 장례식은 유럽식으로 거행되었으며 영국인, 미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되었다. 조선 왕실이 보낸 대표 사절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국장이 진행되는 동안 50년 친구라는 이노우에 가오루 후작이 친구를 대표해서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일본 천황은 이토가 '왕정 복고, 유신에 공헌, 헌법 초창, 한국 지도 등에 공헌'한 결과로 충정군(忠貞君)의 작위에 추봉하였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 도 임원군(荏原郡) 대정정자 곡수분영(大井町字 谷垂墳塋,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品川區) 곡수묘지(谷垂墓地))에 안장되었다. 그가 묻힌 곡수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부미요시(伊藤文吉)가 앞장섰다. 오후 2시 30분 시신은 묘지에 도착했다.
식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에서 가까운 오오모리(大森)의 은사관(恩賜館)으로 향했다. 1906년 천황이 이토에게 준 집이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光友俱樂部)가 되어 있다(소유; 일본광학공업).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伊藤道路)’라고 불리고 있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伊藤博文公)>은 1909년 11월 10일 발행되었다. 그의 죽음과 장례가 끝나자 마자 나온 것이다.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나와 있다.
[편집] 조선의 반응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순종은 민병석(閔丙奭)과 조중응(趙重應)을 조문사절로 파견, 이들은 11월 4일 도쿄 도 임원군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식에 참석했다. 민병석은 궁내부 대신 자격으로, 조중응은 한국인 대표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순종은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편집] 가족 관계
이토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부미요시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부미요시의 배 다른 형제이자 다른 아들 이토 히로구니(伊藤博邦)는 공작의 작위에 이르렀다.
[편집] 학위
-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화학학사
- 예일 대학교 명예박사 학위
[편집] 기타
1963년 11월 1일부터 발행된 세 번째 천엔권의 도안으로 이토의 초상이 이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도안이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초상으로 바뀔 때까지 유통되었다.
[편집] 안중근과 이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으로 규정하고, 근거로 총 15개 조를 제시하였다. 재판이나 신문 조서 등에서 밝힌 내용은 모두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음과 같다.[10]
-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 철도·광산·산림·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 군대를 해산시킨 죄
- 교육을 방해한 죄
-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 한국인은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이러한 안중근의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이러한 지적이 수차례 안중근이 밝힌 것과 크게 차이가 없음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오랜 기간 준비된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편집] 일화
이토 히로부미는 도쿄에서 대한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궁들에게 시계, 목걸이 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11] 또 이때 선물한 초콜릿이 한국 최초의 초콜릿이란 설도 있다.[12]
[편집] 가족 관계
- (10대조 할아버지)"하야시 미치오키"(林通起)
- (9대조 할아버지)"하야시 미치시게"(林通重)
- (8대조 할아버지)"하야시 노부카쓰"(林信勝)
- (7대조 할아버지)"하야시 노부요시"(林信吉)
- (6대조 할아버지)"하야시 노부아키"(林信顯)
- 일본의 총리
- 요시다 쇼인
- 사쿠마 쇼잔
- 안중근
- 우덕순
- 하얼빈
- 제2차 한일 협약
-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 박문사
- 제1차 이토 내각
- 제2차 이토 내각
- 제3차 이토 내각
- 제4차 이토 내각
전 임 (초대) |
제1대 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
후 임 구로다 기요타카 |
전 임 마쓰카타 마사요시 |
제5대 일본제국 내각 총리대신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
후 임 마쓰카타 마사요시 |
전 임 마쓰카타 마사요시 |
제7대 일본제국 내각 총리대신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
후 임 오쿠마 시게노부 |
전 임 야마가타 아리토모 |
제10대 일본제국 내각 총리대신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
후 임 가쓰라 다로 |
전 임 (초대) |
제1대 한국통감부 통감 1906년 ~ 1909년 |
후 임 소네 아라스케 |
전 임 이노우에 가오루 |
일본제국 외무대신 1887년 ~ 1888년 (겸임) |
후 임 오쿠마 시게노부 |
전 임 야마가타 아리토모 |
일본제국 사법부대신 1893년 (임시 대리) |
후 임 요시카와 아키마사 |
전 임 (초대) |
일본제국 궁내성대신 1885년 ~ 1887년 |
후 임 히지카타 히사모토 |
전 임 도쿠다이지 사네쓰네 |
일본제국 궁내부경 1884년 ~ 1885년 |
후 임 (폐지) |
전 임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보 도시미치 |
일본제국 내무성경 1874년 1878년 ~ 1880년 |
후 임 오쿠보 도시미치 마쓰카타 마사요시 |
전 임 (초대) |
일본제국 공부성경 1873년 ~ 1878년 |
후 임 이노우에 가오루 |
일본의 역대 내무경·내무대신 | |
---|---|
내무경 | 오쿠보 도시미치 - 기도 다카요시 - 오쿠보 도시미치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보 도시미치 - 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야마다 아키요시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내무대신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사이고 쓰구미치 - 시나가와 야지로 - 소에지마 다네오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고노 도가마 - 이노우에 가오루 - 노무라 야스시 - 요시카와 아키마사 - 이타가키 다이스케 - 가바야마 스케노리 - 요시카와 아키마사 - 이타가키 다이스케 - 사이고 쓰구미치 - 스에마쓰 겐조 - 오쿠마 시게노부 - 우쓰미 다다카쓰 - 고다마 겐타로 - 가쓰라 다로 - 요시카와 아키마사 - 기요우라 게이고 - 하라 다카시 - 히라타 도스케 - 하라 다카시 - 오우라 가네타케 - 하라 다카시 - 오쿠마 시게노부 - 오우라 가네타케 - 오쿠마 시게노부 - 이치키 기토쿠로 - 고토 신페이 - 미즈노 렌타로 - 도코나미 다케지로 - 미즈노 렌타로 - 고토 신페이 - 미즈노 렌타로 - 와카쓰키 레이지로 - 하마구치 오사치 - 스즈키 기사부로 - 다나카 기이치 - 모치즈키 게이스케 - 아다치 겐조 - 나카하시 도쿠고로 - 이누카이 쓰요시 - 스즈키 기사부로 - 야마모토 다쓰오 - 고토 후미오 - 우시오 시게노스케 - 가와라다 가키치 - 바바 에이이치 - 스에쓰구 노부마사 - 기도 고이치 - 오하라 나오시 - 고다마 히데오- 야스이 에이지 - 히라누마 기이치로 - 다나베 하루미치 - 도조 히데키 - 유자와 미치오 - 안도 기사부로 - 오다치 시게오 - 아베 겐키 - 야마자키 이와오 - 호리키리 젠지로 - 미쓰치 주조 - 오무라 세이이치 - 우에하라 에쓰지로 - 가타야마 데쓰 - 기무라 고자에몬 - <폐지> |
...................
명치유신, 정한론에서 한일합방까지
1853년 7월 8일 오후 5시경. 미국의 매슈 겔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3500t급 黑船을 비롯해 네 척의 검은 증기선을 이끌고 일본의 에도(江戶·현재의 東京)만 우라가(浦賀) 항에 나타난 이후 큰 충격에 휩싸인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이듬해인 1854년 미국측 요구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1860년 막부와 조정이 연합한다는 내용의 공무합체론公武合體論)이 막부로부터 제시됐지만 조정이 수용하지 않았으며, 결국 1867년 정권을 조정에 완전히 반납한다는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대정봉환(大政奉還)’ 발표로 264년간 이어지던 막부 통치는 마감하게 되었다.
1868년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성공으로 일본은 점차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당시 내각을 주도하던 명치유신 3걸의 우두머리격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1873년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다.
그가 정한론을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일본내 무사계급의 어려운 상황이 깔려 있었다.
18세기 초부터 농민이 납부하는 연공(年貢)의 감소로 막부재정이 악화되면서 무사들이 빈궁해진 데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부유 상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무사들이 상인들로부터 차입하는 자금규모가 급격하게 증가함으로써 무사계급은 급속하게 몰락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 자신 무사계급의 수장으로서 대륙 진출을 통해 이 난국을 헤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정한론은 관철되지 않았다.
같은 명치유신 3걸의 한사람이자 사쓰마 출신의 죽마고우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비롯하여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상당수의 개방파들이 당시 일본의 국정 과제는 대외 확장보다는 내치의 충실이 더 시급하다고 동조하지 않았고 결국 명치천황의 결정으로 정한론은 채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정한론은 한동안 잠잠해지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했을 뿐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낙향한 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스마(薩摩) 지역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고 이른바 세이난 센소(西南戰爭)에 참가하여 정부군과 대결을 벌였으나 구마모토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퇴각하다 1877년 50세의 나이에 가고시마의 시로야마 동굴에서 자결을 하고 만다.
그러나 정한론은 조슈번(長洲藩- 야마구치현) 하기(萩)를 본거지로 한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1830~1859)에 의해 주도돼 하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실행에 옮겨진다.
요시다 쇼인은 1859년에 처형되었으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그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
-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有朋)와 그들의 뒤를 이은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2대 조선 총독) 등이 정한론을 실천하여 한일합방을 하기에 이른다.
야먀구치현 하기(萩)는 제국 일본의 힘을 탄생시킨 모태다.
메이지정권의 최고 설계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성장했다.
일본의 군사제도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도 여기다.
야마가타로부터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다케로 이어지는 근대 초기 육군의 실세가
모두 동향이다.
이토, 야마가타, 가쓰라, 데라우치는 차례로 총리를 지냈다.
한국인에게는 병탄의 원흉들이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 국가 건설의 공신들이다.
참고로 이 야마구치현에서는 일본의 총리를 모두 9명이나 배출했는데, 그 중 3명이
하기 출신이다.
지금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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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의 사설 학교인 쇼카손주쿠. |
이토와 야마가타의 관계가 각별하다.
그들은 한국 병합의 공식라인을 대표한다.
경쟁적으로 일본 근대화와 조선 침략을 이끌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리더가
그들을 키웠다.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둘은 함께
공부했다. 동지이자 라이벌이다.
이토는 문관으로서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다.
야마가타는 징병제를 비롯해 근대적 군대를 육성했다.
이토가 문관을 대표한다면, 야마가타는 무관을 대표한다.
둘 다 유럽에 유학했고, 그 경험을 일본 근대화에 활용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정권을 다투는 경쟁관계이기도 했지만 대외 팽창적 국익 앞에선 콤비를 이뤘다.
이토는 45세이던 1885년 초대 총리에 오르며 내각책임제를 확립한다.
이토에 이어 1890년 총리에 취임한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을 발표하면서 “이익선(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임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일본의 이익선은 한국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시베리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그리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확대됐다.
1894∼95년은 한·중·일 3국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야마가타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이 이익선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내부적으로 다져온 힘을 외부로 돌린 첫 시도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을 주도한 인물은 이토였다.
야마가타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토가 수습하며 일본의 국익을 챙기는 호흡이 절묘하다.
청나라의 리훙장을 야마구치현으로 불러들여 조약을 체결했다.
이토는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표현을 썼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얽혔던 시절, 조선의 독립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1873년 정한론 대두로부터 시작된 조선 침략 프로젝트의 1단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1885~95년 총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선 침탈의 밑그림을 완성해갔다.
그러나 그 10년간 조선은 일본과 정반대로 개화와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다.
당시 조선의 리더들도 전통적 유학 지식에 새로 습득한 서양 지식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몇몇 주도자가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변화를 주도할 힘을 전반적으로 상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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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유신 해설:
1.1854년3월3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막부(德川家康幕府)가 페리제독의 4척의 흑철선에 굴복하여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여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2.1858년7월29일 도쿠가와막부의 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는 불평등 船上 미일수호통상조약(헤리스협정)을 체결하여 에도와 고베,나가사키,니카타,요코하마 등 5개항을 추가 개항하고,
3.살마번(薩摩藩:사쓰마한)은 1862년 나마무라사건으로 막부는 10만파운드를 배상하고,1864년 8월15~17일 영국 큐퍼 제독의 7척의 함대와 가고시마灣에서 살영전쟁(薩英??)으로 패배하여 막부로부터 2만5천파운드를 차용하여 배상하고 범인처벌은 도망중이라고 미루었다.
4.조슈藩은 1864년9월6일~7일 시모노세키(下關)해협에서 4대국(영,프,네,미)함대의 보복포격으로 항복하여 서양과 맞서는것은 무모하다는것을 깨닫고 조슈,사쓰마 두 번이 양이(攘夷:서양배척)에서 친이(親夷:친서양:개화)로 선회하여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혼슈(본주) 서남쪽 서양상선의 길목에서 외국문물을 먼저 접한 조그만 두 번.사쓰마蕃과 조슈蕃이 도막(막부타도)수단으로 존왕양이를 내걸고 서양함대에 포격을 가하여 맹렬히 싸웠으나 서양의 앞선 군사경제력에 굴복하지 않을수없었다.
일본인의 한자혼용교육으로 1% 문맹률을 달성하여 높은 의식수준에다,700년의 막부 사무라이전통보수정신을 정신밑바탕으로 하여,섬나라 단결정신으로 뭉쳐져서 명치유신으로 급성장하여 그로부터 88년후에는 대동아 공영권의 기치를 내걸고 진주만을 공격했다.
명치유신에서 서양에 대한 일본인의 굴종적 저자세는 서양의 앞선 군사경제력을 이기기 위해서 일단 굴복하고 친절하게 아양을 떨고 접근하여 상대의 가슴을 움직여 알아내고, 모방하고 배워 앞지르는 지혜는 일본인만이 해낼수있었다.
이러한 현명한 수순을 밟을줄알았던 애국정신은 막부의 부하 번(藩)세력이 명치유신으로 주도하였으나 실은 막부에서부터 태동한것이다. 이러한 막부의 현명한 지혜는 사무라이 정신과 한자혼용으로 유교적 정신을 기반한 높은 의식수준에서 기인하였다.
이 높은 의식수준은 칼싸움에서 진쪽이 상대의 장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피나는 훈련으로 다음 경기에 상대를 이겨야겠다는 투혼의 정신인데 이 정신은 무사도(사무라이)정신에서 기인한다. 상대의 칼솜씨를 제압하려면 상대보다 피나는 훈련을 해야하는 것이 무사도 정신임에 틀림없습니다.
[상대의 우수함을 인정치 않을수없다.자기 과거 태만이었다. "역부족의 강한 상대를 이기려면 강한 상대에게 일단 굴복하고, 인정하며, 친절하게 밀착접촉하여 상대의 가슴까지를 알아내고 상대의 장점을 내것으로 흡수 소화하여 자기체질화로 개발하고,그 다음에 상대를 신속히 앞질러야 한다." 이것이 명치유신]이었다.
*四色黨爭과 明治維新의 비교 요약
<이씨조선 조정은 선비정신으로 유교정신을 바탕으로 義롭고 忠,孝,仁으로 내부지향적 문신통치를 하였다.사색당쟁은 인문성리학에 심취하여 훈구 사림간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혼돈의 세월이 길었으며, 빗장을 걸어잠그는 일에는 철저하여, 과학화의 미래발전적 행보를 박차고 나아가는 길에는 더뎠다>
<일본막부도 사무라이가 유교사상과 결합하면서 義롭고 忠,孝,仁으로(여기까지는 韓日이 같음) 외부지향적 문호개방으로 무신통치를 하였다(이 대목에서 韓日이 다름).
막부말기 권력쟁탈전의 유치함은 여느나라와 마찬가지였다.
도쿠가와막부의 265년집권을 종식시키고자 하급번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슬로건을 내걸고 主君幕府를 몰아내었으나(일종의 쿠데타)藩 自身들은 이내 권력쟁탈수단의 유치함과 미안함을 깨달을 줄을 알았다.옛主君幕府의 은혜갚음의 정성으로 고이 팔을 걷어 나라발전에 임했다.
천왕도 막부말기에는 잠시나마 서양을 배척하는 뜻을 비쳐 반막부파에게 막부타도의 힘을 실어준 결과가 되어 유신정부를 수립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곧바로 천왕도 신진집권무신들의 급선회 문호개방 親夷(친서구)정책을 따르게되니,사무라이 세계에서 사람만이 바뀌고 입헌군주제를 채택, 중앙집권으로 서구쪽으로 눈을 돌려 강력한 親夷轉還政策으로 문호를 대대적으로 개방하였다.
사쓰마,조슈藩主밑에 일개 하급사무라이 출신들이 維新主役이 되어 서구를 재빨리 모방 자기체질화하고 자기개발하여 오히려 서구를 앞지르는 능력을 발휘했다는것이 朝靑과의 놀라운 차이점이다.
결국 실권은 사무라이 무신조정이 가지게되고 최후승낙은 겨우 왕이하는 체제로 되돌아갔다.물론 천황을 국가 구심점으로 신을 섬기듯 섬기는 마음은 전통적으로 막부시절부터 계승되어왔다.
유신주역 하급무사들은 현명하게도 막강한 상대인 서구경제 군사력을 인정 할줄알았고(조선의 빚장 잠그기식 쇄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름)남의 장점을 본받아 재빨리 자기것으로 소화하여 자기체질화와 과학개발선진화 속도를 눈부시게 낼줄 알았다는것은 일본발전의 근본 힘이었다.
이러한 발전속도는 사무라이출신들의 義로운 전투정신에서 나온것이다>
*四色黨爭
예나 지금이나 정치분쟁은 왜 끊임없이 계속되고있는가? 고려 광종때 부터 조선조까지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오직 과거급제를 통한 벼슬길만이 입신양명의 길이었다.
영조때 실학자 이익(李瀷)은<곽우록(藿憂錄)>의 <붕당론(朋黨論)>에서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곧 2개의 당(黨)을 이루고,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4개의 당(黨)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렇게 농경시대에는 직업이 소수 한정되었지만 현대사회는 직업이 다양해 졌으므로 정치영역도 이제 변화가 와야 할것입니다.
조선 말기에 조정은 사색당쟁(四色黨爭)에 집착하여 중상주의(重商主義) 열강함대(列强艦隊)의 문호개방(門戶開放)요구를 배척하고, 개화를 늦춤으로써 일본에 한발늦어 치욕의 일제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四色黨爭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고 지금은 몸싸움으로까지 격화되고 있다.
남의 약점을 캐 내기에 혈안이 되어 앞서가는 사람을 존경하지않고 끓어내려 자기이익을 도모하고 상대당에 협조할생각은 아예 제쳐두고 사사건건 트집잡아 정쟁의 도구로 일삼아 정권을 장악하는데에 시간을 소비하다보니 선진외국에 뒤질수밖에 없는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없다"는 속담처럼 약점 캐내기에 명수인 자는 남의 약점하나 캐내었다고 개선장군이나 된것처럼 세상에 폭로하여 자랑스러워하고, 이 약점하나를 무슨 횡재라도 안은것처럼 상대당을 깎아내려 헐뜯고 입씨름만으로 아까운 나날을 보내는것이 소위 黨爭이라는것이다.
임금은 자신을 옹립시켜준 공로에 따라 공훈을 내리지 않을수 없고, 그리하여 훈신(勳臣)과 척신(戚臣)은 훈구(勳舊)세력으로서 중앙 귀족이되어 주군(主君)을 모시고 왕조유지를 위해서 넓은 농지기반으로 권력을 확장하지않을수 없었다.
한편 은퇴한 貴族地主는 書院에서 자연스레 문하생과 스승제자간 인맥이 형성되어 지역적 기반이되고 과거급제를 통해 성리학(性理學, 一名 朱子學)을 기반한 높은 덕망으로 정계에 다시 진출하게 되니 勳舊와 士林의 양대세력은 한정된 벼슬자리를 두고 항상 대립하지 않을수없었다.
士林의 선비들은 性理學의 특성인 청렴결백주의와 엄숙주의로 유교적인 이상이 강열하여 명분론을 내세워 남의 부정을 가려내는데에 준엄하여 포용과 융합의 기가 부족하고 화합의 영역이 좁으며 발전의 장을 펼치는데에 큰 지장을 가져왔다.
보수훈구귀족(保守勳舊貴族)들은 집권기간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을 해야하는데 士林의 상소가 빗발치게 올라오므로 어쩔수없이 왕권을 이용하여 신진사류인 士林派를 배척하지 않을수없었다.
士禍는 이들 사림세력의 도전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압박이었다. 그러나 사림세력은 거듭되는 士禍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중종말엽 書院을 건립하여 성리학을 기반한 사회적· 정치적 입지를 넓혀 나갔고, 이를 배경으로 宣祖初年에는 士林系列의 人士들이 조정에 대폭 진출할 수 있었다.
高麗와 달리 朝鮮은 초기부터 쇄국정치(鎖國政治)를 하여 중국이외에는 교역을 금하였고, 勳舊와 士林은 性理學을 기반으로 한 정치를 하여 정권장악에만 몰입이되어 門戶開放을 통한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할수가 없었으며, 조선말기에는 더더욱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서양의 과학문명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만 갔다
.
*명치유신의 태동:
일본은 일찌기,
1543년 일본 최남단 섬인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인에 의해 조총을 최초로 입수하게 된다.도주(島主)가 금화로 조총을 사들인 뒤 1년만에 600정이 만들어졌으며 임진왜란때 3만정 사용,유효사거리100~200m.
1548년(명종3)에 포르투갈과 통상.
1609년(광해군1)에 네덜란드와 통상,
1613년(광해군5)에 영국과 통상을 하고,
1853년(철종4)에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제독이 3500t급 黑船을 비롯해 대포를 장착한 4척의 검은 증기선을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만 우라가(浦賀)항에 국서를 가지고 발포금지령을 받고 왔다.
1854년(철종5)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德川家康幕府)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1858년(철종9)에 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하여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고,
1859년(철종10)에 가나가와(神奈川),나가사끼(長崎),하꼬다떼(函館)을 개항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진통을 겪었다.註1.
1863년(철종14)8월15일~1863년8월17일
=> 살영전쟁(薩英??:사쓰에이 센소: 영국과 살마번( 薩摩藩:사쓰마한)의 전투:
1.원인: 1862년 사쓰마藩 일행의 행열앞에 영국상인 일행 (男3명,女1명)이 말탄채 나타나
'물러나라! 엎드려라!'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통 과하므로 무례하다고하여 1명사망,2명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나니 '나마무라사건'이라 한다.
이에 격노한 영국측은 幕府에 대해 공식사과와 배상금을, 사쓰마藩에 대해서는 범인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하여 幕府는 10만파운드를 지불하고, 사쓰마藩은 잘못이 영국상인들에게 있다하여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측은 사쓰마번에 큐퍼제독이 이끄는 함대7척을 가고시마만에 출동하였다.
2.무기
- 사쓰마藩: 10개의 포대에 83문의 포.
사정거리 1km 구식포를 양 연안에 배치,
외국으로부터 구입한 3척의 기선.
- 영 국: 7척의 군함에 101문의 포.
이중 22문은 사정거리 4km 최신식 암스트롱포.
3.경과:
영국측은 7월 2일 사쿠라섬에 정박중이던 사쓰마藩 기선 3척을 나포하여 교섭을 시도했으나 사쓰마藩의 지휘관 오쿠보 도시미치는 각 포대에 일제 사격을 명령하였다.
악천후속에서 사쓰마藩의 선제공격으로 함대 두척에 경미한 피해를 본 영국 측은 전열을 가다듬고 날씨가 회복됨에 따라 집성관 공장과 포대를 공격했다.
이 포격전 중 사쓰마藩은 사정거리에 들어온 영국함대의 기함을 집중 공격하여 함장을 포함한 63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이 오직 사쓰마藩의 전과였다.
7월2일 나포된 기선3척이 불타버리고 포대 8할이 파괴되었으며, 집성관과 시가지 1할이 불타버렸다.
7월3일에도 양측간의 포 공격이 있은 뒤 7월4일 영국함대는 선체 수리, 석탄,탄약,식량의 보급을 위해 가고시마만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가고시마만에서의 전투는 끝이 난다.
영국함대가 철수한지 4개월 후인 11월 양측은 강화를 맺어 사쓰마번은 배상금을 2만5천 파운드를 지불하고 범인색출을 약속하게 된다.
4.결과:
이 전쟁으로 영국측은 사쓰마藩의 실력을 평가하게 되고, 사쓰마藩은 군비의 근대화를 통감하게 되어 오히려 양측은 우호관계가 깊어지게 되었으며, 이 전쟁이후 사쓰마藩內 하급무사 세력이 대두하
여 막부타도운동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또 이 전쟁으로 사쓰마藩 무사들에게 해군력의 중요함을 통감케하여
명치유신후 일본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약케 하는 등 막부말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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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고종1)9월6일~7일에 4국함대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시모노세키(下關)포격:
'존왕양이' 사상이 주목받는것은 천황 본인이 '외국인은 싫다' 는 뜻을 분명히 하였으며 이는 천황이 잠시나마 국정에 영향을 끼쳤음을 암시한다.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한 세력은 과거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억압받은 옛 패군(서군)들의 세력이었으며 특히 모리(조슈) 세력은 존왕사상이 남달라 정기적으로 천황의 측근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있기도 해서 더욱 양이운동(運動)에 열을 올렸다.
천황의 총애를 받은 .사쓰마 藩과 조슈藩의 尊王攘夷反幕府派들은 이 교전을 통해 서양의 압도적인 함대의 무력을 인정하고, 맞서는것은 무모하다는것을 느끼고 문호개방 통상을 허락하고 親夷(친서양)로 선회하니 조슈藩과 사쓰마藩이 주축이되어 명치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조슈藩은 일본 총 경제력을 반영하는 고쿠다카[石高]가 265藩 중에서 공식적으로는 9위, 실제로 4, 5위에 해당하고 1만1천명의 武士를 지닌 큰 藩이었으며 강력한 내부단결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남부 규슈(九州)의 사쓰마번(薩摩藩)과 함께 막부에 조심스럽지만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1861년에 이르러 여러 번과 막부 사이의 조정자로서 중앙정치에 등장한 이래 사쓰마번과 경쟁하면서 尊王運動을 영도하였다.
한때 사쓰마번과 아이즈번(會津藩)의 연합세력에 의해 교토(京都)에서 병력이 축출되었으며,
1864 ~1865년에는 두 차례 막부의 원정(遠征)을 받기도 했지만 물리쳤다.
1866년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비밀협약을 맺은후 그들과의 연합군을 동원하여1868년 궁중을 장악하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수행하였다.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는 이 藩에서 영국에 유학시켜 길러낸 인물이다.
도쿠가와 막부도 실제적인 일본의 경영은 막부가 담당하지만, 그 위에 '천황'이 있음을 분명히했다.그러나 서양세력이 접근하고 막부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며 개혁 여론이 높아지자 1867년 서남 지역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이 바쿠후 타도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다.
도사번(土佐藩)은 이를 견제하여 신정권을 수립하고자 에도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국가통치권을 돌려줄것을 권고하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도쿠가와는 국가 통치권을 봉환하여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권을 행사할수있다고 생각하고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신청하였고 그 다음날 천황이 이를 허가 하였는데 이를 대정봉환 즉, 왕정복고라 한다.
이에 따라 교토(京都)에서 제후 회의를 열기로 하였으나 무산되었고, 그 사이에 바쿠후를 타도하려고 동맹을 맺은 세력들은 왕정복고와 함께 바쿠후 폐지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가마쿠라 바쿠후 이래 675년 동안 계속되어오던 일본의 봉건제도는 끝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막부는 그 후 아무런 힘을 쓸수없어 불만이 있던 터에,
1868년(고종5)에 대정봉환의 王政復古로 성립한 메이지 천황의 메이지정권(明治政權)이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게 권력의 반환을 요구하자 범(汎) 친(親) 에도 막부(江戶幕府)세력(에조 공화국, 도쿠가와막부,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이에 불복하였다. 그 결과로,
1868년1월~1869년5월(고종5~6)에 일본 전국토에서 무진전쟁(戊辰??:보신센소)이 발발하여 江戶幕府(에도 바쿠후)가 패하니 264년의 부케정권(武家政權)은 종말을 고하고,정치적 단합을 이루어 明治天皇의 明治維新(메이지 이싱)이 시작된다.
1877년(고종14)에 西南戰爭(세이난센소):
메이지유신이 진행됨에 따라 무사들의 특권들이 사라졌으며, 무사는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버려 정치적, 경제적 손해를 보게 되었다. 게다가 무사들이 세운 사학교가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혐의를 쓰게되자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자)를 중심으로 한 무사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최신식 화기로 무장한 관군에 의해 무사파는 패배하게 되니 일본의 마지막 내전이 되었다. 이로써 구일본의 사족계급은 확실하게 몰락하였다.
1868년(고종5)~1889년(고종26)에 明治維新(메이지이싱):
메이지 정부가 學制,徵兵令,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아래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官 主導의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강성 정책을 폈다.이 명치유신으로 일본은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고,자본주의와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하여 국력이 급신장하여, 국제적으로도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하게되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것은 국가발전에 가장 핵심인 學制를 1872년(고종9)에 개편하여 백년대계로 '모든 마을에 不學의 가정이 없고, 모든 가정에 불학의 인간이 없도록 기한다”라고하는 소위 문맹율 0%를 선언하고, 초등학교에서 중등교육까지의 신식 교육을 미국식으로 채택했다.
미국 교육학자 데이비드 머레이(David Murray)를 불러와 과학교육의 기틀을 다졌던 것이다.
다만, 國語敎育만은 정체성을 지켜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전수받은 漢字를 幕府시절부터 公立으로 번교(藩校:한꼬: 전국 3만여개, 朝鮮의 鄕校에 해당)와 私立으로 사자옥[寺子屋:데라코야: 전국 2만여개, 오늘날 경응대학(慶應大學)의 전신인 경응의숙(慶應義塾:게이오기주쿠): 朝鮮의 書堂에 해당)]이 시행해온 漢字混用敎育을 維新政府에서 이어받아 초등학교 1학년서부터漢字를 가르치니 '漢字를 모르면 살아갈수없는 사회'의 틀이 다져지고, 이때부터 전국민의 높은 의식수준, 높은 국민문화가 형성되어, 서양근대국가를 모델로 과학화,자본주의화, 군국주의화의 틀을 불과 25년동안에 급속히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1900년(고종37)에는 여섯 살부터 4년 동안의 의무교육 제도를 시행했고, 1907년에는 이를 다시 2년 더 늘렸다. 일본이 오늘날처럼 중학교 3학년까지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시작한것은 1947년부터이다.
明治維新政策으로 대대적인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제1단계인 이와쿠라 歐美사절단으로 유학생 60명에다 메이지 정부의 각료 3명(전체 각료는 7명), 그리고 각료급 실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함한 108명은 1년10개월동안 서양 문물을 연수유학했다. 이사절단은 귀국후 메이지유신건설에 박차를 가했는데 특히 독일식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우수한 관료 양성책을 따르게되어 신식교육에 신경을 써서 위의 학제개편을 단행했다고 보면 될것이다.
해외 유학생 파견과는 별도로 수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국내로 불러들여 스승으로 삼았던 것도 외부를 받아드리는 자세가 청과 조선과는 차이가 있다. 그 영역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온갖 분야가 다 망라되었다.
외국인 초빙 전문가가 만여명으로,영국인 6천여명,미국인 3천여명, 독일인 9백여명,프랑스인 6백여명,이탈리아인 40여명이었다.당시의 일본 인구는 약 3천5백만명이었다. 군대육성을 위해 해군은 영국군, 육군은 독일군에게 교육을 맡겼다. 높은 의식수준의 교육, 외부 인정수용, 자기개발의 민첩성이 눈부신 국력발전을 이루었다.
1873년 명치유신3걸의 우두머리격인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다.
그의 정한론은 같은 명치유신 3걸의 한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비롯한 상당수의 개방파들이 당시 일본의 국정 과제는 대외 확장보다는 내치의 충실이 더 시급하다고하여 관철되지 못하여 정한론은 한동안 잠잠해지는것 같았으나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을 뿐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낙향한 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쓰마(薩摩) 지역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고 이른바 (註2.의 解設)세이난센소(西南戰爭)에 참가하여 정부군과 대결을 벌였으나 구마모토성 전투에서 패배한후 퇴각하다 1877년 50세의 나이에 가고시마의 동굴에서 자결을 하고 만다.
그러나 정한론은 조슈번(長洲藩- 야마구치현) 하기(萩)를 본거지로 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에 의해 주도돼 하기(萩) 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실행에 옮겨진다.
요시다 쇼인은 1859년에 안세이의 大獄으로 막부의 이이 나오스케에게 처형되었으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그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 -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有朋)와 그들의 뒤를 이은 가쓰라 다로,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2대 조선 총독) 등이 정한론을 실천하여 한일합방을 하기에 이른다.
야먀구치현 하기(萩)는 제국 일본의 힘을 탄생시킨 모태다. 메이지정권의 최고 설계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성장했다. 일본의 군사제도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도 여기다. 야마가타로부터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다케로 이어지는 근대 초기 육군의 실세가 모두 동향이다. 이토, 야마가타, 가쓰라, 데라우치는 차례로 총리를 지냈다.
한국인에게는 병탄의 원흉들이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 국가 건설의 공신들이다. 참고로 이 야마구치현에서는 일본의 총리를 모두 9명이나 배출했는데, 그 중 3명이 하기 출신이다.지금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일본 근대화와 조선 침략을 이끌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리더가 그들을 키웠다.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둘은 함께 공부했다.
요시다 쇼인이 세운 사설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 : 조선의 書院에 해당)
이토는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다. 야마가타는 징병제를 비롯해 근대적 군대를 육성했다. 둘 다 유럽에 유학했고, 이토는 45세이던 1885년 초대 총리에 오르며 내각책임제를 확립한다. 이토에 이어 1890년 총리에 취임한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을 발표하면서 “이익선(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임을 분명히 했다.
사쓰마藩은 규슈(九州)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일대를 領地로 삼은 藩이었고, 조슈藩은 혼슈(本州)의 서쪽 끝 시모노세키(下關) 일대(지금의 야마구치縣)를 領地로 삼은 藩이었다. 그러니까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藩이 메이지 유신의 진원지였다. 더구나 메이지 유신을 추동(推動)한 핵심세력은 藩主(번주)나 上級무사가 아니라 사쓰마藩과 조슈藩의 下級무사들이었다.
이런 하급무사 출신 중에서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維新3傑'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쓰마藩 출신이고, 기도 다카요시는 조슈藩 출신이다.변두리 藩의 下級 사무라이로서 출신성분이 열악한 그들이 일본 역사상 가장 빛나는 국가발전의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천황과 정부주도의 명치유신으로 국력이 팽창하니 1894년 청일전쟁을,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10년 조선합방,1931년 만주사변,1937년 중일전쟁,1941년12월7일 일요일 새벽 진주만을 공격했다.
註1의 解設 : 당시 조정은 대정봉환,왕정복고로 양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가 천왕의 칙허를 얻기에는 실패할수밖에 없었다. 영국 프랑스가 일본에게 보다 불리한 포괄적인 조약을 요구해올것이라고 내다본 이이나오스케 다이로(井伊直弼大老)는 거기에다 미국과의 조약체결이 늦으면 늦을수록 일본은 양보를 많이 해야할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는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가 조약체결로서 문호를 개방하여 과학발전으로 바쿠후의 전통적인 정치권력을 다시한번 강화하고자 1858년(철종9) 협상대표들에게 칙허를 기다리지말고 서명하라는 권한을 부여했으므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존왕파(조슈,사스마등 신진 유력 다이묘)는 불평등조약에 반발하고,
여기에 쇼군 가문의 후계자 선정 문제가 겹치게 되는데 1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원체 병약했고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와 도쿠가와 요시토미 두 사람이 물망에 오르게 된다.
사쓰마번 등 신진 유력 다이묘들은 요시토미가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요시노부를 지지했고 막부 내의 보수파는 요시토미를 지지한다.
그러던 차에 1858년 쇼군 이에사다가 죽자 같은 해 4월 다이로에 취임한 보수파의 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는 요시토미를 쇼군 후계자로 삼는다.
이에 존왕파(신진 유력 다이묘)가 반발하자 막부의 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는 사쓰마,조슈의 존왕파인 요시다쇼인등 100여명의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다.(1858~1859년,안세이의 大獄)
그로 인해 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는 조약반대파의 추종세력들에게 보복기습공격을 당해 목이 베어 죽임을 당했다(1860년 사쿠라다몬가이의 변).
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그는 다이로(大老) (註3.)로서의 그의 단호한 지도력으로 잠시 도쿠가와 바쿠후체제를 안정시키고 존속 시켰지만 반대세력인 존왕양이파의 쇄국정책을 과감히 타파한 일본근대화의 최초 개국 공로자가 되었다.
註3.의解設: 다이로(大老);위기상황에 대처하기위해 부정기적으로 임명되는 바쿠후최고인 쇼군 다음으로 높은 관직임.
韓中日 三國의 文戶開放방식의 차이점.
1.靑은 日本보다 먼저 西洋과 通商을 하였으나 아편전쟁으로 인한 상처로 성리학의 유교사상에 기반한 척화사상이 강열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드리는데에는 일본보다 늦추어졌다.
靑은 通商을 통해서 외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양에 실망을 느껴 배척일변도로 일관하여 태평천국운동(청조와 서양배척),의화단운동(서태후중심으로 서양배척)등으로 자국발전을 실현하지 못했다.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근대공업발전이 있었으나 중앙권력으로 전국적 차원에서 통일된 계획 아래 추진되지 못하였다.
공친왕은 서태후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1884년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탄핵을 받아 사임하였다. 그리고 양무파 관료들은 개인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지방 세력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들이 추진한 양무 정책은 지역적으로 편중되었고 효율성도 떨어졌다.
열강의 잇따른 침략도 청의 자강을 어렵게 하였다. 청은 양무운동 기간 중에 나타난 대만사건(1874), 청프전쟁(1884-1885), 청일전쟁(1894)에서 모두 일본과 프랑스에게 패배해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 베트남, 조선의 종주권을 잃었다. 이들 전쟁에서의 패배는 자강을 일차적 목표로 한 양무운동의 실패로 여겨졌고, 양무운동은 산업과 기술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제도의 근본적 개혁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에 자리를 내주었다.
2.한국은 대원군의 양이척화(攘夷斥和)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요구를 배격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척화양이전 비교.
-1- 한국의 척화양이전
*병인양요(丙寅洋擾) : 강화도에서 조선수비군과 프랑스함대의 전투.
조선- 6명 사망, 부상30여명.
양화진 통과 서울근교 西江까지 진입.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까지 미쳤다.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은금괴(銀金塊:당시화폐로 3만 8000달러)와 대량의 서적,무기,보물,식량을 약탈.
프랑스-27명 사상.
*신미양요(辛未洋擾) :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미군의전투.
조선- 250명 전사, 100명 익사, 도합 350명 사망. 부상10명.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함락.
미국- 3명 사망. 10명 부상.
-2- 일본의 척화양이전 :
*사쓰에이센소 : 사쓰마번과 영국함대의 1일 포격전.
영국군-모함함장및 부함장 사망포함 63명 사상.
사쓰마번-비전투요원 5명사상.
나포된 기선3척 소실.
포대 8할이 파괴되었으며,
집성관과 시가지 1할이 불타버렸다.
*시모노세키센소 : 조슈번과 영/네/프/미의 4국 연합함대 포격전.
연합군- 62명 사상.
조슈번- 47명 사상.
일본중앙정부인 에도 막부가 긴 세월 동안 쇄국 정책을 실제로 쓰긴 했지만 막부와 直交한다는 조건 하에 제한적으로 네덜란드와는 통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배의 선장은 막부쇼군을 알현할 기회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난학(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지식을 연구하는 학문)이 유행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은 무조건 안된다는 빗장잠그기식 쇄국정책으로서, 이것은 어쩌면 중앙정부의 훈구세력이 이권개입에 대한 사림의 비판의 소리자체를 없앰을 뜻할수도 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없다는 성리학의 청렴결백주의가 고상하긴 하지만 국가 발전에는 더디게 함을 뜻한다.
3. 韓國과 靑은 결정권이 文臣에게 있고, 일본은 사무라이 출신막부(幕府)와 번(藩)의 武臣(軍部)에게 있다는것도 국책방향 신속설정에 크나큰 차이를 볼수있다.
武臣은 전쟁경험자요 文臣은 전쟁 미경험자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는 더군다나 군사열강의 시대이다.
도쿠가와막부 하급무사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처음에는 존왕양이슬로건으로 두번의 전쟁에서 지고나서 서양의 군사 경제력에 굴복하여 이번에는 양이를 버리고 존왕을 들고나와 보신센소, 세이난센소로 권력을 장악한 명치유신세력은 왕정복고로 입헌군주제의 중앙집권체제로 친서양분위기로 급선회하여 자본주의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무사출신 유신주역들은 선진 서양문물을 日本人自己體質에 맞게 연구하여 상대를 앞지르는 행동(액션)이 武臣氣質답게 軍隊처럼 迅速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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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선진국은 상품소비를 위해 外交通商을 하지않을수없어 일찌기 通商이 발달하였다. 交易通商의 商品에는 消費材와 生産材가 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技術이 베어있다. 이 기술을 흡수이용할줄 아는 예리한 통찰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단계를 무시하고, 자국민의 영세성보호에만 매달려 외국의 값싼 상품을 배척하여 국제정세를 거슬러 상대불인정,상대기술(SW,HW) 불수용정책을 펴면 현대화 분위기에 역행하는것입니다.
通商이란 균형있는 수출입 육성정책으로 받아드리는 자세에 따라서 利,不利가 결정됩니다. 오늘날 FTA가 바로 그런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조선조도 성리학에 몰두하지않고 일찌기 학제(서양식 학교)를 개편하여 서양과 문호개방의 제1단계로 통상을 신속하게 하여 과학화 자본주의화로 부국강병책을 썼더라면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것이다. 그것은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에 일본을 앞선것을 봐도 충분히 가능한것이었다.과거제도의 성리학의 서원과 서양식 학교와는 근대화에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개혁이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룰수는 없는것이기에 훈구파(勳舊派)는 保守的 성격이므로 점진적개혁(漸進的改革)을 했으면 좋으련만 士林派의 도전을 무마하는데에 시간과 힘을 빼았겨 중요한 점진적 개혁을 할 시간과 힘을 빼았긴것이니, 오늘날 국론분열로 국책사업이 지지부진하고, 정부가 힘을 잃고 나라가 진취적 발전을 하지못하는 같은 이치인것이다.
훈구세력은 지금의 여당이요, 사림세력은 야당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여야의 정치적 대결이 심각한 우려의 단계에 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어느 정권이고 여야가 한 마음으로 사이좋게 일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상대당은 다 옳지않은것이고 자기당은 다 옳다는것 뿐입니다. 협조라는것은 아예 찾아볼수가 없고 발목잡기 일수입니다. 심지어'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웃지못할 기막힌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정치만 나아지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 일약 도약할수있는 국민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정치영역만은 아직도 허구한날 당쟁만을 일삼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요?
16∼17세기 조선시대 정치는 중소지주 출신의 士林들이 성리학적 이념 실현을 목표로 붕당에 참여하여 학연 지연을 바탕으로 공론을 형성하고 정의를 실현한데 대해서는 긍정적 측면은 있었으나, 붕당간의 대립이 너무나 배타적이고,복상(服喪), 세자책봉 문제 등 민생과는 관련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정권쟁탈전에만 매달려 국력을 약화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이러한 훈신(勳臣) 척신(戚臣)의 훈구세력과 사림세력간의 대립된 붕당정치의 결론은 이 당쟁이 너무나 긴 세월동안 치열하고 격화되어 수많은 士禍를 일으켰고 보복에 보복의 악순환으로 개화를 늦추어 서양의 과학문물을 접할 기회가 없었고, 일본 명치유신에 한발 늦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는것이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연합국 힘으로 일본지배에서 벗어나 얄타회담으로 미소에 의한 남북분단이 왔고, 6.25 남침으로 이어져 남북대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것입니다.
20세기 중상주의 식민시대의 피지배국은 2차 대전후 오늘날 이미 다 독립을 했는데 한반도만 유일하게 분단으로 남아있습니다.
일본에 의한 피지배의 설음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입니다.
3.1운동 직후 일본의 어느 국회의원이 조선에 자치권을 주자고 했는데 그 내용인즉 조선인은 자치권을 주드라도 4분 5열 할터이니 하나도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勝者의 역사기록자는 敗者를 경멸합니다. 백제시대에 우리가 일본에게 문물을 전해주고 가르쳐주었던 우리 문화민족이 어찌하여 이렇게 됐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계속하고있는 당쟁, 지역이기주의, 일 적게하고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노동운동, 전교조, 전공노에 몰입해있는 사람들은 하루속히 과대망상증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런 활동들은 부국강병,국력배양,국가발전이라는 민족의 대명제, 민족의 대동 단결행로에 결코 도움이 되지않습니다. 사회혼란은 패자(敗者)가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지름길 일뿐입니다.거듭되는 사회혼란으로 中國一個城化(동북공정), 제2의1592년 임진왜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지 말란법도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조선 후기 근세사에서 보듯이 국가우선주의와 국력배양만이 外侵을 막는다는 간단한 이치를 등한시하고 당쟁에만 몰입했던 결과가 오늘날 얼마나 비참한가를 느껴야 할것입니다.
우리민족은'동방예의지국,동방의 군자나라'라고 했는데 얼마든지 3공시절의 도약처럼 부지런하고, 지금의 10위권 무역대국처럼 능력있는 국민입니다.
이조 사색당쟁 요약.
선조때 영상 이준경이 죽을때 선조에게 "요즘 사람이 모두 큰 소리로 붕당을 맺고 있으니 이것이 후세에 반드시 나라의 큰 고질이 될것입니다"하였는데 이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이는 "조정이 맑고 밝은데 무슨 붕당이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죽을때에는 말이 착하다는데 이제 이준경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악하군요"하였다.
삼사에서도 이준경의 벼슬을 추거하자고 했으나 유성룡만이 "대군이 죽을때 올린 말에 옳지 못한것이 있으면 그것을 물리치는것은 모르지만 죄를 주는것은 너무 과하지 않는가? 하였다.
또 좌상 홍유도 "이준경이 생전에 공덕이 있었으니 죄 주는것은 옳지못하다" 하여 삼사의 주장을 반대하여 조정은 일시 잠잠해 졌다.
이로부터 3년후 이준경의 말과 같은 현상이 여지없이 나타나니 바로 東人과 西人으로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을 두고 선조의 외척(척신)이었던 기성세력인 심의겸에 대해서 진보적인 선비(士林)들이 정치적 공세를 시작하면서 붕당이 시작되었다.
吏曹銓郞職은그 직위는 정5품으로 낮으나 관원을 천거.전형하는 인사 행정을 전담하는 직책으로, 전랑의 임명은 부서장인 이조 판서(判書)가 할수없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여 임금이 임명하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다.
김효원이 젊은시절 윤원형에게 처가살이하는 이율민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이부자리를 들고가서 자기도 했다.어느날 심의겸이 공적인 일로 윤원형집에 갔다가 이런광경을 보았는데 전임 전랑 오건이 김효원을 천거하자 "효원이란 별사람이 아니고 원형집 내객인데 그 사람을 천거하다니"하고 반대했다.
옆에 있던 명종조 대사헌 김계휘가 손을 내두르면서 "그런 말은 아예 입밖에 내지마시오.그거야 소년시절 일 아니오"했다.윤원형은 중종제2계비 문정왕후의 동생이고,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둘째남동생의 아들이니 둘다 외척이다.
심의겸의 반대에도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발탁되었고 1년후에는 심의겸아우 심충겸이 역시 이조전랑 후임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보복이라도 하듯이"전랑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수는 없지요"하고 반대하니 집이 동쪽인 김효원이 東人, 집이 서쪽인 심의겸은 西人이라한다.
조선시대 四色黨派란 네개의 붕당(朋黨)을 가리키는 뜻으로서 처음에는 東人,西人,南人,北人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西人이 老論과 少論으로 나뉘어진 뒤에는 老論,少論,南人.北人(小北)의 四大黨派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575년(선조8)에 東西分黨을 계기로 東人이 南人과 北人으로 나누어 지고, 北人은 다시 大北과 小北으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西人을 중심으로 해서 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光海君때의 집권세력이었던 大北은 거의 전멸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朋黨에서 四色이라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조 효종 연간에 西人에서 파생된 老論과 少論, 그리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南人과 小北을 가리킨다고 할수있다.
간단히 인명별 ,
東人: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 건천동에 있어서.허엽이 영수임.퇴계와 남명의 영남학파임.
1589년(선조22)에 벌어진 기축옥사(정여립 반역 의혹 사건) 당시 정여립과 친했던 많은 동인계 인사들을 처벌한 서인의 주요인물인 송강 정철의 행동에 대해서 동인에서는 맞대응해야한다는 쪽과, 정여립이 모반한 것은 사실이니 그냥 자숙하자는 의견이 대립했다.
정철은 2년 후(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진언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강화도로 유배당하는데 정철의 처벌강도를 둘러싸고 동인이 두 패로 갈려서 대립함으로서 東人은 1591년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
北人은 광해군 폐세자론을 둘러싸고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대북은 처형되고, 소북은 자연 소멸되었다.
西人: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어서. 박순이 영수임.
1623년(광해군13.인조1)능양군(陵陽君:仁祖)을 왕으로 옹립한 仁祖反正을 일으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율곡과 성혼의 기호학파임.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이 실권을 잡게 된다.
이발 이산해등이 중심. 남이공(南以恭)이 정권 잡음.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大北과 小北으로 갈라지는데,선조 말년에는 서자인 광해군의 세자자리를 빼앗고 이를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물려주려던 소북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북이 대립했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永昌大君을 모함·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陵陽君:仁祖)을 왕으로 옹립한 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퇴계학파가 주류임.
서인은 1683년(숙종9) 노론(송시열)과 소론(남구만)으로 분당되었다.노론은 서인에 대한 강경파이고 소론은 온건파임.
南人: 우성전이 남산 아래 살아서.서인에대한 온건파임.우성전 유성룡이 중심임.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이 入相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宋時烈派)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顯宗)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禮學論議)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비화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이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淸南)·탁남(濁南)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專橫)이 심하여 집권한지 몇 년만에 경신환국(庚申換局:1680년.숙종6)으로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 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老論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少論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숙종 15)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 등용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신장되어 이가환·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 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사학일소(邪學一掃)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 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오게되었다. 특히 시·벽파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西學徒) 내지는 실학자(實學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廢族怨國 :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음)의 무리가 되어 과거(科擧)를 위한 유학(儒學)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남명학파가 주류임.
大北: 이산해, 홍여순 등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라서.
서인이 仁祖反正을 일으켜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100명이 유배되었다.
남인은 인조반정 당시 서인의 파트너로서 정권에 참여하여 서인과는 공존하기도 했고, 숙종 이후로는 서인과 피비린내나게 싸웠다.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려 이들을 청남(淸南)·탁남(濁南)이라 불렀는데 청남이 주도권을 쥐었다.
小北: 남이공, 김신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라서.
老論: 西人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라서.
小論: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라서.
벽파(僻派): 사도세자 음해파.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가 중심임.
1721~1722년(경종1~2)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臺諫)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言路는 모든 시비와 공격의 명분이 억제되어,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功利主義)·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영조 38) 임오사건(壬午事件), 즉,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영조가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時派와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 중심의 벽파(僻派)간의 대립이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벽파로 분파되었다. 이 시·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카톨릭을 믿는 신서교파(信西敎派)와 믿지 않는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시파(時派): 사도세자 옹호파. 영조가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
출처: 내마음의 보석상자(上善若水/木鷄之德) 원문보기 글쓴이: 대륙철도횡단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