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죽음]]은 소설가 겸 시인으로서, 영화 비평가 겸 시나리오라이터로서, 르포라이터 겸 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미국 문화계에 굵직굵직한 흔적을 새겨온 제임스 에이지의 유작이다. 에이지는 수 년 동안 이 책을 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1955년 4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고 말았다. 따라서 이 책 또한 영영 묻혀버릴지도 모를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그의 친구이자 편집자인 데이비드 맥도웰이 유고를 모아 편집하여 1957년에 출간하였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출판 이듬해인 1958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
아버지의 빈자리를 가족은 어떻게 견뎌내는가
[[가족의 죽음]]은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이다. 에이지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은 이 책은 한 가족에게 찾아 온 예기치 않은 비극을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그려 낸 작품이다.
가족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제이 폴레트는 산업화에 소외된 녹스빌 북부 산악지방 출신이다. 그는 도시 녹스빌에서 어떤 어려움도 회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며 안락한 중산층의 삶을 이뤄낸다. 하지만 달라진 현실에 혼곤히 취하지만은 않는다. 여전히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고, 여전히 선술집을 좋아하며, 여전히 자신의 고향을 동경한다. 흑인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변함없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녹스빌의 산업화로 침식되어가는 가치를 안타까워한다. 아이들과 아내의 눈에는 이러한 그가 무척이나 강인한 존재로 비쳐진다
그런데 그토록 강인하다고 굳게 믿었던 그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화의 상징인 포드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하며 홀연히 가족 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은 이 ‘가족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내 메리는 믿음으로 충만한 자신에게 왜 이런 아픔이 찾아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고, 죽음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는 네 살배기 어린 딸 캐서린은 이 상황이 그저 이상할 뿐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아버지와 둘만의 소중한 비밀을 만들어 온 여섯 살 난 외톨이 소년 루퍼스 역시 우상과도 같은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주 먼 꿈결 속의 이야기처럼 막연하게만 들릴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호기심을 품은 또래 아이들이 자신을 주목한다는 것에 잠시나마 우쭐대기도 하지만, 의자에 배인 아버지의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그를 향한 그리움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가족 소설’ ‘종교 소설’ 혹은 ‘성장 소설’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쌓은 에이지는, 이 모든 과정을 그만이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문체로 담담하고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중심이 되는 가족 외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남편을 잃어버린 딸을 제대로 위로해 줄 수 없는 외할머니의 자괴감, 두 아이에게 아빠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아빠의 장례를 지켜보게끔 배려해 주는 흑인 월터의 자상함 등 이 책에 나오는 인물 하나하나에 혼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각도에서 읽힌다. 죽음이 남겨 놓은 빈자리를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봉합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가족 소설’이라 읽히고, 스토아적 신자와 맹목적인 신자, 교회에 분노하는 자와 교회에는 분노하지만 영적 충동은 인정하는 자가 저마다의 관점에서 죽음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종교 소설’로 읽힐 수 있을 터이다. 또한 순진하면서도 지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른” 아이 루퍼스에게 아버지의 부재란 어떤 것인지를 잔잔하게 서술했다는 점에서는 ‘성장 소설’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타임] 선정 100대 영문 소설
영화와 연극으로도 각색
그러나 어떻게 읽혀지든 간에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2005년에 [타임]이 선정한 100대 영문 소설에 포함된 데 이어 미국 문학의 고전만을 엄선하여 펴내는 비영리출판사인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도 출판되는 등 미국 지성인들이 꼭 읽어야 하는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집으로 가는 길All the Way Home]이라는 제목으로 연극과 영화로 각색되어 무대와 스크린에 올려지기도 했다.
제임스 에이지의 문학의 정수
짧은 생애와 많지 않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에이지의 글은 하버드대 문학 강의 텍스트로 채택되는 등 오늘날까지 미국 문화예술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은 또한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번역되며 60년 가까이 변함없이 전 세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아빠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이 바위에 앉으면 그 어느 때보다도 고향이 더 그리워지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아빠가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잠시 집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봐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아빠의 행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았다.”
--- p.20
“아빠가 같이 아침을 먹지 않으니까 재미도 없고 모든 게 아주 이상했다. 이제 조금 있다가 아빠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씩 웃어줄 수는 없을까? 캐서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 “잘 잤니, 메리 선샤인”이라고 말하며 허리를 숙여 구레나룻으로 뺨을 비벼줄 수는 없을까? 그러고는 아빠 자리에 앉아 아침을 아주 많이 먹을 수는 없을까? 그러면 모든 게 다시 재미있어질 텐데. 창문 밖으로 아빠가 출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빠가 멀리 사라지기 직전에 돌아보면 손을 흔들어 줄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아빠는 지금 여기 캐서린이 원하는 곳에 없고, 어째서 집에 오지 않는 걸까?
--- p.245
루퍼스는 계속 의자를 보았다. 아주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으로 결국 의자 쪽으로 가서 그 옆에 섰다. 잠시 후 주의 깊게 귀 기울여 근처에 아무도 없는지 살피고는 의자의 구석구석, 움푹 들어간 자리, 팔걸이, 등받이의 냄새를 가만히 맡아보았다. 흐릿한 담배 냄새, 그리고 등받이 높은 곳에서 희미한 머리카락 냄새만 날 뿐이었다. 팔걸이에 가죽 띠로 매달아놓은 재떨이가 불현듯 생각났다. 속이 비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재떨이 안쪽을 쓸어 보았다. 옅은 담뱃재 얼룩만 남아 있었다. 주머니에 챙기거나 종이로 말기에는 담뱃재의 양이 너무 적었다. 루퍼스는 손가락을 잠시 들여다보다 입으로 핥아 보았다. 혀에서 어둠의 맛이 났다.
--- p.277
이제 베일을 쓰고, 남편과 함께 살던 이 방에서 아니 이 집에서 나가 남편이 죽은 뒤 처음으로 남편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승에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남편을 묻어야 할 시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메리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 p.308
기적. 장엄. 루퍼스는 그런 말이 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루퍼스에게도 커다란 나비가 똑똑히 보였다. 나비가 알록달록한 빛깔의 날개로 아주 조용하고 웅장하게 날갯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홀연히 하늘로 날아올라 햇빛을 받아 화려하고 다채롭게 빛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장엄’이 무슨 뜻인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기적’은 뭘까. 아직 나비가 보이고 나비가 다시 거기 앉아서 커다란 날개를 퍼덕였다. 어쩌면 ‘기적’이란 나비의 날개에 그려진 온갖 빛깔의 줄무늬와 점박이 무늬를 말하는 건지도, 아니면 나비가 홀연히 날아오를 때 형형색색의 화려한 무늬가 햇빛 속에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모습을 말하는 건지도 몰랐다. 기적. 장엄.
--- p.346-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