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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 ~ 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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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단연코 유금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장군에게 필요한 여러 자질을 두루 가진 고려 초기 최고의 명장이었다.
후삼국 통일의 최고 공신 유금필
유금필(庾黔弼, ?~941)은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군) 출신으로, 궁예가 세운 태봉(泰封, 901~918)에서 마군(馬軍) 장군이었다가 고려 태조 왕건을 섬긴 인물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935년에 스스로 자신이 이미 늙었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이때 장군으로써 늙은 나이인 50살이 넘었다고 본다면 그는 880년대에 태어났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918년 고려 개국 당시에는 30대 후반~40대 초반 정도로 상당한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고려 건국 당시에는 마군 장군 홍유(洪儒, ?~936)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920년 골암진(鶻岩鎭)에 쳐들어온 북적(北狄)들을 제압하면서부터였다.
북방 야인들을 굴복시킨 유금필
골암진의 위치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안변군(安邊郡)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발해(渤海, 668~926)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발해 남부지역에 거주하던 부락민들이 – 추장의 통솔 하에 부락단위로 사는 자들로, 고려에서는 이들을 북적(北狄), 여진(女眞) 등으로 불렀다.- 고려의 변경을 침략했던 것이다. 이들을 제압하는 일을 맡게 된 유금필은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골암에 도착했다. 그는 이들의 추장 300여인을 불러 모아 술과 음식을 차려 성대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추장들을 모조리 잡고서 위협을 하여 복종시켰다. 또 사람들을 여러 부락에 보내,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고 하자, 여러 부락에서 귀순한 자가 1,500명, 또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3천여 명이 되돌아 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금필은 고려에 투항해오는 북쪽의 부락민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병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거듭된 승전과 견제
골암진 문제를 해결한 유금필은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925년 연산진(連山鎭- 논산시)을 공격해 후백제 장군 길환을 죽이고, 이어 임존군(任存郡- 예산군)으로 진격해 3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 조물성(曹物城- 상주 혹은 안동으로 추정됨)에서 후백제의 두 왕자인 양검과 금강이 거느린 군대와 맞서 지켜내었다.
928년 탕정군(湯井郡- 온양군)에서 성을 쌓고 주둔하고있던 유금필은 후백제가 3천명을 동원해 청주(淸州)를 공격하자, 즉시 군사를 이끌고 청주로 가서 적군을 격파하고 300여 명을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승리를 이뤄냈다. 또한 929년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가를 만한 전투인 고창(古昌- 안동군)전투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유금필이 나서서 먼저 공격할 것을 건의하여 적진으로 돌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왕건은 고창 전투의 승리를 유금필의 공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유금필은 거듭된 전투에서 승리를 올리며 기세를 키워갔다. 그러자 그를 견제하고자 하는 세력이 거짓 모함(讒訴)을 하여 931년 곡도(鵠島- 백령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유금필은 그곳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이듬해 후백제가 고려의 후방인 대우도(大牛島)를 침략하자, 유금필은 섬의 젊은이들을 모아 자발적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왕건은 그를 귀양 보낸 결정을 후회하고, 유금필의 충성심을 인정해 다시 불러들였다.
운주 전투에서 공을 세우다
고창 전투에 이어 그가 큰 공을 세운 것은 운주 전투였다. 934년 1월 태조 왕건이 운주(運州- 충남 홍성군)를 정벌하고자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하자, 후백제 견훤이 소식을 듣고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왕건에게 화친을 하며 각자의 영토를 지키자고 하였다. 이에 태조가 장군들과 함께 이 문제를 의논하자, 유금필은 지금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라고 말하고, 곧장 수천의 강한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군을 향해 돌격했다. 후백제군이 아직 대오(隊伍)를 정비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유금필의 기습 작전은 성공하여 적군 3천여 명을 베고, 여러 장수들을 포로로 잡을 수가 있었다. 운주 전투의 승리로 인해 웅진(공주) 이북 30여 성이 자진해서 고려에 항복해왔다.
나주 지역을 재탈환하다
유금필의 활약은 육상에서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이루어졌다. 고창전투, 운주전투에서 고려에 패전한 후백제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935년 3월 견훤의 장남 신검(神劍)이 4남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둔 뒤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내부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혼란상을 틈타 태조는 장군들에게 명령했다.
“나주(羅州) 지방 40여 군은 우리의 땅이었으나, 백제에게 약탈당해 6년간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나를 위해 그곳에 가겠는가?”
그러자 신하들이 유금필이 적임자라고 추천했고, 왕건 역시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해 4월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에 임명된 유금필은 배를 타고 나주로 가서 그곳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왕건이 예성강까지 나가 그를 맞이할 정도로, 나주 정벌의 의미는 컸다. 고려가 나주 일대를 탈환하자, 그 해 6월 아들 신검에게 배반당하여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로 귀순할 수 있었다.
일이천 전투에 참전하다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자, 신라 경순왕이 그해 10월 고려에 투항의사를 밝혔고, 11월에 나라를 들어 고려에 투항했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로 순천(順州- 전남 순천) 지역을 장악한 박영규가 고려에 투항을 요청했다. 이렇게 되자 후백제의 영토는 크게 줄고, 고려의 우세는 더욱 확실해졌다. 결국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대군을 동원한 총공격을 준비했다.
936년 9월 왕건의 총지휘 하에 고려군 87,500명이 일선군(一善郡- 경북 구미시)으로 진격하자, 후백제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막음으로써 일이천(一利川)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유금필은 북방의 여러 부족 -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勒) - 출신 기병 9,500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는데, 이때 그의 활약상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일정한 공을 세웠음은 분명하다. 고려군은 일이천 전투에서 후백제 장군과 포로 3,200명을 잡고, 5,700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 고려군은 계속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그 해 9월 황산군(黃山郡- 충남 논산)에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어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全州)에 입성함으로써, 고려는 후삼국 통일을 이룬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장군
유금필은 고창, 운주, 나주전투 등에서 거듭 승리를 거둬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장군으로서 대단히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다. 고창, 운주전투에서는 과단성을 발휘해 용감하게 적진으로 쳐들어가 진영이 덜 정비된 적을 쳐서 승리를 거둔 바 있다. 933년 신라가 후백제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을 때,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은 80명의 부하들과 함께 신라를 구원하러 갔었다. 이때 그는 부하들에게 적을 만나면 죽을 수도 있으니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라고 하였다. 하지만 부하들은 그와 함께 죽기로 맹세를 하였다. 부하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기에, 그의 군대는 사기가 충전한 정예병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적은 병력으로도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라인들의 큰 환대를 받았다. 이처럼 뛰어난 결단력과 용감함, 그리고 부하들에게 신뢰를 받는 자질을 갖춘 그는 이종족(異種族)을 포용하고 활용할 줄 아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골암진에서 여러 부족장들을 제압할 때 보여준 것처럼 지혜마저 갖춘 인물이었다.
유금필에 대한 평가
숭의전(崇義殿)은 1397년, 고려 태조를 비롯한 고려 7명의 임금과 유금필, 정몽주 등 15인의 공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조선에서 세운 사당이다. 사적 제223호.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소재. | 숭의전에 딸린 배신청(陪臣廳)에 모셔진 15명의 공신들 가운데, 유금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왼쪽으로부터 네번째) |
유금필은 개인적인 일보다는 나라의 일을 앞세운 충성심 강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왕건은 다른 장수들보다 그를 더 크게 신뢰했다. 유금필은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고, 그의 딸은 왕건의 9번째 부인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 되었다. 941년에 죽은 그는 고려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또한 1456년 조선에서 세운 무성묘(武成廟)에 배향된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의 18명 장군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이처럼 유금필은 그가 살던 시대는 물론, 후손들에게도 고려를 대표하는 장군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유금필과 같은 뛰어난 장수를 거느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금필은 후삼국의 역사를 바꾼 고려 초기 최고의 명장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유영철, <일이천전투와 후백제의 멸망>, [대구사학] 53집, 2001; 김갑동, 〈고려태조왕건과 유금필장군>, [인문과학논문집] 46집, 대전대학교, 2009; 이정신, 〈고려태조의 건국이념의 형성과 국내외정세〉, [한국사연구] 118집,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