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의 한국문화, 다른 것이 아름답다(2022.2.17)
한국문화연구원 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1999)
편집자 서문
새 세기와 새 천년을 동시에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한국 문화는 적어도 두 가지 가설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한국 역사의 반만 년보다 지난 50년 동안에 한국문화의 세계적 활동이 더 왕성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인류 역사에서 지난 백년의 변화가 지난 천년의 그것보다 더 깊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은 앞으로 더 심화되리라는 전망이 가능할 것이고,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은 새 천년의 한국 문화, 다른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의 편집의 까닭을 여기에서 찾고자 한다.
한국문화연구원은 1998년 3월에서 1999년 6월까지 한국의 몇몇 석학들을 초청하여 특강과 토론의 마당을 마련하였다. 주제와 내용의 풍성함에 따라 활발한 논의들이 있었고, 지면관계로 특강 전체와 토론의 일부 만이 여기에 소개된다. 이러한 주제의 연속 강좌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장상 총장은 새 천년의 한국 문화의 기조 발제에서 새 천년을 여성이 주역이 되는 시대, 한국 문화가 지구촌의 문화가 되는 시대라고 전망한다. 노동 환경의 변화와 정보화 그리고 인권의 신장은 점차 여성의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새 시대를 창조하는 작업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참여하는 통합적인 문명 창출의 시대가 될 것이고, 또한 새 천년의 문화는 지구촌의 문화이자 참여의 문화라는 점에서 우리의 문화를 보편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한국 여성의 삶을 새 천년 한국 문화 연구의 창조적이고 가치 있는 대상으로 다루어 줄 것도 제안하고 있다.
이어령 교수는 새천년 한국문화를 위한 서장에서 성장의 신화가 끝나는 새 천년에 우리 문화의 다섯 가치-원 융합 잡초 보자기 장구의 원리-가 잠재력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한다. 순환과 조화를 나타내는 원의 아이콘은 상호 연결된 세계 경제에 대응하며, 선택 대신 병합을 모색하는 융합의 원리는 정보 시대에 적합하다. 또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만나 경쟁하는 잡초의 원리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사물의 다기능성에 주목하는 보자기의 원리는 멀티미디어적 환경에 유리하며, 이질적인 재질과 크기로 대칭을 이루는 장구의 원리는 의사 소통과 상호 작용적이다. 한국 문화의 이러한 가치들은 21세기의 새로운 환경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김영호 교수는 민주적 시장 경제론과 아시아적 가치의 특강에서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 동시에 통합될 수 있는 대안으로 계란 모델을 제안한다. 병아리의 탄생은 안에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작업만으로는 부족하며 어미닭이 밖에서 계란 껍질을 깨는 작업을 도와 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데에 착안한 것이다. 즉 병아리의 역할을 개발 독재 체제 안에서 형성 발전해 온 중산층이 체제를 깨고 나오는 작업에 어미닭의 역할을 개발 독재 체제 밖에 이루어지는 민주 세력의 반체제 노력에 대응시켜 양자가 통합되어야만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유종근 지사는 민주적 시장론과 한국 사회의 재구성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 위기에 대하여 책임 경영의 관행을 정착시킨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국가나 기업의 책임 경영을 제대로 시해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국민들이 아직 농경 사회의 의식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역 이기주의나 가족 중심 이기주의 등 잘못된 관습을 버리고 전통 가치로부터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동시에 세계화 속에서 경쟁력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도 책임 경영, 구조 조정 등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한완상 전 통일원 부총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문제: 새로운 발상을 촉구하며라는 제안에서 남북간의 적대적 공생 관계가 냉전적 적대 관계를 더욱 강화한 냉전 벨트를 형성했다고 보고, 냉전벨트의 해제를 위해 남측이 먼저 일관된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장한다. 즉 냉전 벨트를 해체하려면 분단을 고착화시켜야만 대내적으로 권위주의 통제를 더 쉽게 할 수 있다고 보고 남북한의 불신과 증오를 증폭시켜 왔던 권력 주체들이 나서야 하는데, 지금 북한은 총체적으로 약화된 상황이므로 남에서 먼저 평화의 기선을 잡고 분단으로 인한 고비용 저효율의 구조를 혁파할 때 비로소 평화 인권 번영을 동시에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우환 선생은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이라는 담론에서 우리 문화가 진정한 한국적이나 우리것이기 위해서는 중층적이고 다양한 타자성을 띠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한국인들은 동질성 순수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폐쇄적 집착이 강하지만 문화란 현실적으로 타자와의 상호 연관과 만남 속에서 발전하고 형성되는 것이므로 이제 한국 문화의 의미는 이중성 내지 양의성, 즉 잡것이 섞이고 익어서 다양한 역동성을 띠는 열려진 문화라는 관점에서 재조명, 재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현 교수는 새 천년 한국문화를 위한 신문법에서 닫힌 문화에서 열린 문화로 이행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에 기초하여 문화의 중층성, 의사소통, 차이에 대한 존중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구성한다. 즉 새로운 문화 중층론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이원론을 거부함으로써 다양한 층위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의사소통은 나 이외의 세계를 인정한 가운데 리얼리즘과 신뢰성을 전제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것은 무조건 배제하려는 시각에서 벗어나 차이를 존중하는 사유에서 새로운 엮임을 통하여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문법의 사유를 통한 다양한 노력 속에서만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영한 교수는 과학 시대의 인문정신의 강좌에서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인문학적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보고, 인문 정신의 부활이 새로운 문명에 요구되는 덕목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즉 인문학이 과학과 대중, 전문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능한 학문으로 전락함으로써 인문학의 위기가 닥친 것은 인정하지만, 새로운 문명창출에 요구되는 덕목들-유형적 지식을 뛰어넘는 통찰력과 통합적 학문추구의 태도, 생태 친화적 사유 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문학의 부활을 위해서는 물론 과학과 인문학 간의 협조의 필요성이 전제되어 있다.
이상화 교수는 새천년: 여성적 가치의 시대정신에서 21세기에 절실히 요구되는 대안적 세계관으로서 여성적 가치의 재고를 제안한다. 여성적 가치란 여성이 신체와 관련된 생물학적이고 본질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위계적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현재의 맥락에서 구성된 경험적 주체로서의 여성성을 지시한다. 따라서 여성적 가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제안은 곧 발전과 경쟁의 논리속에서 여성적이라는 라벨을 붙여 경시해 온 감성, 돌봄, 타자에의 배려, 생명 중시 등을 다시 활성함으로써 위계 질서 자체의 해체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가족 있다.
차하순 교수는 새 천년의 전망과 지구촌 속의 한국에서 21세기 한국의 미래와 관련된 주요 사안으로 세계 문명의 보편적 문제-자연 개발, 정보 팽창, 기본권의 보편적 보장, 문화적 다원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한 세계화, 민족 통합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적 패러다임은 어디에 기반을 둘 것이며, 국민 국가 형성기를 생략한 채 민주주의 체재로 들어서게 된 한국 정치문화의 낙후선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해결할 때에만 세계화에 대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민족 통합을 완수한 후 풍요로운 경제력을 지닌 세계 세력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문제는 물론 의식 구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여 스스로 의식 전환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치수 교수는 정보적 문화시대를 위한 지구촌적 패러다임에서 신세대 문학에 나타나는 포르노그라피 담론이 이 시대 사회적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정보 사회 영상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금기의 해제라는 점에서 영상 문화와 시청각 문화는 정신의 세속화를 초래하지만 그럼에도 신세대문학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면 영상적 요소, 즉 감정 이입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삶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정보화와 영상 언어가 인문학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할 필요가 있으며, 인문학의 위기 조건에서 탈출하기 위한 대안으로 소극적 인문학, 즉 이해의 인문학으로부터 적극적 인문학 즉 표현의 인문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조형 교수는 통일 한국의 새천년 문화: 대안적 통일 문화를 위하여의 특강에서 통일 한국의 문화가 문화 제국주의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서, 통일 과정을 선도할 대안적 통일 문화를 기획할 것을 제안한다. 이 새로운 공동체 문화 모형은 보편적인 세계 시민, 민족의 분단 극복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다. 즉 세계 시민은 21세기가 요구하는 지성과 감성을 갖춘 생활인으로서 근대적 가치와 문화의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사고를 한다. 그리고 미래 지향적 개방적 민족주의가 지니는 민족적 정체성은 통일에 유용하며, 분단의 상흔을 씻고 평화주의적 사고와 실천이 일상화될 수 있다면 정치 경제적 통일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안 문화로서 기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김우창 교수는 능률 사회와 좋은 사회에서 시장 경제 원리가 궁극적으로 좋은 삶, 좋은 사회를 가능하게 해야 함에도 현실적으로 단기적 이윤의 전망에 지배되어 장기적인 전망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정치, 경제, 도덕 문화의 세 영역이 고르게 발전하는 좋은 삶,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장 경제의 능률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보람 있는 삶에 대한 비전, 즉 세계 시장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방책, 우리 공동체, 문화 가치, 개체적인 삶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여러 방책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위와 같은 연속 강좌는 여러 석학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말하여졌고 모두 새 천년의 한국 문화의 전망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그 방향성은 13개 특강을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할 때 더욱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첫째는 현재의 한국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 사회는 빈곤 속에서도 자유를 원하고 분단 속에서도 세계화를 추구하는 데서 갈등적인 구조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의 특수한 문제에 세계의 보편적 문제가 겹쳐져 있는 것이다.(차하순) 경제 발전 세력과 민주발전 세력은 통합되어야 하고(김영호), 농경사회의 의식 환경에서 벗어나 새 시대에 맞는 책임 경영의 사회 구조에 진입하여야 하는가하면(유종근), 냉전 벨트를 해체하기 위해 남북이 협력 관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한완상).
둘째 주제에 대안적 문화의 모색이다. 기존의 문화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억압적인 요소들을 안고 있어 왔다. 수월성을 추구하는 경쟁의 구조에서 억압이 있었고, 자국민의 이익이라는 통치자의 의무감 속에서 식민주의가 펼쳐져 왔다. 그러나 이제는 차이가 아름답다라는 새로운 문법을 이 시대에 도입하여야 할 것이다.(이명현) 동질성의 문화 모델은 중층성의 다원문화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이우환). 한국 사회는 그러한 다원주의 미래 사회에 대하여 상호작용적 융합의 원효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이어령). 이러한 대안이 새 세기에 전망 될 수 있는 까닭으로 새 세기는 여성의 시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장상). 그리하여 여성적 가치는 심화되고 설득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이상화). 그러한 덕목은 어떠한 민족에게도 개방성을 요구할 것이고 세계 시민 정신으로 나타날 것이며 나라의 통일 세계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조형).
셋째 주제는 새 시대, 새 문화의 내용이다.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어떤 삶이 추구할 만한 것인가? 인간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역사는 시대마다 그러한 물음이 요구되는 유토피아를 제시해 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새로운 천년을 앞둔 이 시점에서 새로운 유토피아론은 그리 흔하지 않다. 적어도 대학 사회가 경청할 만한 심각한 유토피아론은 목소리가 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가치 있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정치 경제 도덕 무노하의 세 영역이 고르게 발전하는 인간 존엄의 공동체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김우창). 그리고 과거의 문화가 과거의 인문학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문학의 기능성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인문학이 인간 중심적이고 환경 배재적이었다면 새로운 인문학은 생태 친화적 인문학이라야 할 것이다(김영한). 과거의 인문학이 고전 읽기를 통한 소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이해 인문학이었다면, 모두가 표현하여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의 표현 인문학은 새로운 문화의 내용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김치수).
1999년11월1일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원장 정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