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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더 이상 슬퍼하고 통곡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구약 시대를 종결짓는 동시에 신약시대를 활짝 여신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이 풍기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강렬한 투사의 이미지입니다. 그는 사악하고 구린 유다 고위층 위선자들과 죄인들의 악행을 강력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신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회개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은 예수님을 꼭 빼닮았습니다. 적대자들의 위협 앞에서도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칭찬이나 격려의 말이 아니라 듣기 싫은 쓴소리를 거침없이 퍼붓는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무고한 죽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서막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례자 요한의 삶은 참으로 씁쓸하고 고독하고 팍팍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느라고 그는 일찌감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라고는 전무한 황량한 장소였습니다. 그저 하늘과 구름, 흙과 먼지만이 전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조용하고 고독한 광야에서 하루 온종일 기도하고 수행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그의 특기는 단식이었습니다. 그의 취미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필살기는 고행이었습니다. 메뚜기나 들 꿀 같은 최소한의 음식과 보기가 민망할 정도의 낙타 털옷을 입고 그야말로 자연인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재미라고는 단1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쇠락과 더불어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나신 메시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가시는 곳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그분은 잔치 초대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얼마나 자주 초대받으셨던지, 설교 말씀 중에 비유를 드실 때, 자주 잔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그분의 삶은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잔치를 좋아하시고 축제를 즐기셨던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는 끝났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고 통곡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대대적인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내내 함께 하시기에 당연히 우리들의 이 세상 여정 역시 지속되는 축제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니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태오 9,14-15
단식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떠나는’ 방법
아지즈 ‘지즈’ 샤베르시안은 인터넷·SNS 시대에 가장 유명해진 ‘피트니스 인플루언서’ 중 하나로, 호주 출신의 러시아계 젊은 보디빌더였습니다.
자신을 “신이 빚은 몸”이라고 칭하며 SNS에 끊임없이 사진과 영상을 올려 수많은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파티, 근육, 셀카”의 결합으로 2010년대 초중반 젊은 층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근육만 좋다면 삶의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퍼뜨리며 ‘지즈’를 하나의 밈이자 문화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불과 22살의 나이에 태국 여행 중 사우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사후 스테로이드 등 약물 사용이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고, 가족 역시 심장 관련 질환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무리한 몸집 키우기와 스테로이드가 청년을 얼마나 위험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운동은 단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몸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지즈는 운동을 해서 자기 몸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사람들의 시선과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단식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와 따지는 이들이었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단식의 목적이 당신이어야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단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빼앗기면 그분께 다가가기 위해 단식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합당하기 위해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행위입니다.
‘마크 월버그’는 197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도체스터에서 태어났습니다.
빈곤과 범죄가 공존하던 이웃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일찍부터 폭력과 마약, 도둑질 등에 노출되었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그는 10대 후반 이미 여러 범죄를 저질러 법정에 서게 되었고, 실제로 교도소 생활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 시절 그는 폭력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도 비판받았는데,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폭행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신앙에 눈뜨게 된 계기는, 교도소 생활 도중 자아를 성찰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이대로 가다가는 내 미래가 정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교도소 안에서 가톨릭 사제와 대화를 나누며 점차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마크는 출소 후 “지금이야말로 인생을 완전히 바꿔야 할 때”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지역 본당 신부님과 꾸준히 만나 상담하고 고해성사를 보며, 세례성사 때 했던 서약을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신앙은 내게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는 닻(anchor)과 같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마크 월버그의 하루 루틴은 ‘절제와 규칙성, 그리고 신앙’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매우 이른 새벽(대개 오전 2~3시경)에 기상해 첫 번째로 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운동으로 몸을 깨운 뒤, 가족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며, 이후 촬영 일정이 있을 경우 그 스케줄에 맞춰 움직입니다.
마크는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든,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라고 직접 밝혔습니다.
가정에 대한 책임도 매우 중요시하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를 위해서는 피트니스나 식단 관리도 철저히 계획합니다.
“기도와 운동,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나를 지켜준다.”라는 그의 말처럼, 마크는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가꾸는 데에 균형 있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마크 월버그가 “절제의 삶이 기쁨이 된다”고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방탕의 끝자락에 서 봤고 거기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누렸던 부와 명성은 결국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했다.
마음속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아아인맨의 로버트 나우니 주니어는 치즈버거의 맛을 느끼지 못해 마약을 끊었습니다.
마약을 끊는 일이 단식인데, 잃어버린 치즈버거의 맛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크 월버그에게 있어서 단식은 하느님과 가족을 만나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습니다.
내가 단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달라고 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단식의 본래 의미를 잃습니다.
단식은 내 육체의 욕망 때문에 만나고 있지 못한 누군가를 만나러 떠나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시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지난주에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녹화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평화방송이 서울 명동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통 체증으로 운전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하철 타고 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덜 걸릴 것 같아서 직접 운전을 해서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성당에서 방송국까지 1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1시간 넘게 촬영하고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켜니 1시간 40분을 예상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운전하는데, 안내하는 길이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저의 경험상 분명히 막히는 길인데, 그쪽으로만 안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2~3분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하고 난 뒤라서 너무 피곤했는데, 막히는 길로 안내하니 더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고, 제가 아는 길로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알던 길이 더 막히는 길이었습니다. 분명히 더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2시간 30분 동안 운전해서야 집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연예인이 말했던 이런 우스갯소리가 생각납니다.
“남자가 꼭 따라야 할 여자가 둘이 있다. 내비게이션과 아내 말은 잘 들어야 한다. 목적지까지 가야 하니까.”
자기 판단이 맞을 때도 있지만, 그 판단이 오히려 자기를 힘들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들을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현재의 가톨릭 신자들은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만 단식합니다. 그러나 당시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에 두 번 단식했었습니다. 단식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정화시키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며,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목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단식이 남에게 보이려는 형식적인 행위, 자기 과시의 한 방편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단식 행위가 옳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올바르다고 판단했겠지만, 주님이 제외된 단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단식할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에 동참하는 단식,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단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된 판단보다,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들이 내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모든 것을, 나는 해냈다(메이 웨더).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하느님의 시각과 인간의 관점,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사고방식은
극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상상이나 사고 구조를
완전히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계산 방식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사고 구조를 훌쩍 뛰어넘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믿음을 가졌다 하여도
누군가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반면 영적인 삶을 지향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미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심취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 속에 살 때
세상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도 다르게 보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 웃을 수 있는 겁니다.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나는 무엇을 향해 이 순간
하늘나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청하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