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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묵상글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사랑의 운명 공동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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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13 05:43
- 사랑의 운명 공동체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랑의 운명 공동체.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운명이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불가분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아이 사이를 갈라놓거나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우리의 불안 증세 가운데 분리불안증이 있고,
우리의 두려움 가운데는 분리의 두려움도 있는데, 제 생각에
이것이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사이는 갈라놓을 수 없다는 명백한 표시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힘주어 얘기하지요.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와 같은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확신합니까?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는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것에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같은 운명에 처할 각오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같이 사랑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주님과 다를 수 없다고,
다시 말해서 같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같은 박해를 받으리라 각오하라고 하시고,
동시에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주님 사랑에 대한 확신과
같은 운명을 감수하고 감당하려는 우리의 각오가 없다는 표시가 되겠지요?
늦잠을 자 많은 묵상을 못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나눔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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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연히 인터넷에서 여성 크리에이터가 소위 ‘먹방’ 방송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는 양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2미터 피자를 먹지 않나, 장어 3kg을 먹는 영상, 고기 3kg을 먹는 영상, 라면 18개 먹방, 20접시 이상의 짜장면을 먹는 등…. 정말 사람이 많을까 싶었습니다. 이 영상들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프로필을 보니, 그녀의 키는 161.5cm에 몸무게 48kg이었습니다. 영상 속에 나오는 모습은 너무나 호리호리했습니다.
괜히 화가 납니다. 저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것 같은데, 누구는 한 번에 3kg의 고기를 먹어도 체중 변화가 없다니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는 물리학의 절대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요?
과학은 이를 불감증산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몸에서 수증기를 발산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명현상, 신진대사, 물질대사가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는 되지만 불공평한 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누구는 1kg을 빼기 위해 하루 종일 풀만 먹으면서 버티기도 하는데 말이지요.
결론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름으로 인해 불공평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나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달라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저를 향해 “너처럼 살지 못해서 너무 억울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다름을 유일한 ‘나’를 위해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일한 ‘나’면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유일한 ‘나’를 만드셨기에, 남들처럼 사는 ‘나’는 진짜 ‘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없이 주님께서 명령하신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주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증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모른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유일한 ‘나’입니다. 소중한 나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닌, 주님 마음에 드는 ‘나’처럼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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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과거의 은혜를 회상함으로 감사는 태어난다(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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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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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회개하여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경외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사도9,31. 히브12,28). 잠언에는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잠언1,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15,1)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때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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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9년 가을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자치회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자치회장 후보로 나온 동창이 제게 ‘지지 연설’을 부탁했습니다. 자치회장은 신학생의 대표입니다. 동창은 자치회장을 하고 싶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동창을 위해서 지지 연설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제가 택한 성경 말씀이 오늘 독서에 읽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저는 친구를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지지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에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응답과 윤동주의 열정이 통했는지 동창 신학생은 자치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자치회장을 하면서 동창 신학생의 절박함은 신학교 생활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동창 신학생은 사제가 되어,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저를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1998년 대한민국의 IMF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고, 저의 집도 그 수렁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따뜻한 손길을 주었고,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IMF의 수렁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교에는 낙산 중창단이 있었습니다. 후배 신학생이 이사야 예언자의 응답을 모티브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곡의 제목이 ‘Ecce ego mitte me!(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입니다. 멜로디는 경쾌하고, 장엄합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주여 나 보내 주소서/ 주 나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주소서/ 님의 그 말씀 따라/ 나 살고자 하오니/ 추위에 목마른 자 위하여 보내소서 여기있소/ 사랑에 굶주린 자 위하여 보내소서 여기있소/ 당신처럼 나도 살으리니 보내소서 여기있소/ 보내소서 여기있소 여기있소/ 고난받는 내 민족 위하여/ 내 정력 다해 사랑케 하고/ 아픔에 있는 형제를 찾아 당신의 희망을 그에게 주리다 나에게/ 고난받는 민족을 위하여 내 정열 다해 사랑케 하고/ 아픈 내 형제를 찾아서 당신의 위로 그에게 주리다 나에게/ 나 여기 있으니/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주여 나를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 주여” 지금 다시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가사와 멜로디입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유트브에서 한번 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번 주 본기도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내가 마당을 쓸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집니다. 내가 꽃 한 송이 심으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집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면 지구가 온통 아름답고 밝아집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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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기억나십니까?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그 밤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사도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왜 세 번이나 물으셨을가요? 아마도 베드로가 이전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저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이 우리 신앙 생활의 목적이고 이유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걷는 이유는 주님을 만나기 위함이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신앙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이 주님을 만나는 창구입니다. 사람도 그렇게 자연도 그렇게 일도 그렇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저는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도 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라고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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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소풍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모여 출발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고 돌아 도착했습니다.
사실 무슨 프로그램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여기저기 선생님들이 숨겨놓은 쪽지를 찾는 ‘보물찾기’와 반별로 몇 명씩 나와 장기를 보여주는 ‘장기 자랑’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그리고 아주 명료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점심시간입니다.
저마다 싸 온 도시락을 열어 보입니다. 모양과 맛은 다르지만 이름은 모두 같았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소풍의 꽃 ‘김밥’이었습니다.
여기도 김밥, 저기도 김밥.
제 도시락은 달랐습니다. 저는 도시락통이 아닌 검은 비닐봉지를 자리에 내려놓았습니다. 그 안에는 크기를 달걀만 하고 겉은 ‘쿠킹호일’로 감싼 주먹밥이 열 알 정도 들어 있었습니다.
주먹밥을 감싼 호일을 벗기면 밥을 볶아 뭉쳐놓은 볶음밥이 나왔습니다. 이미 간도 되어있어서 바로 베어 물기만 하면 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주먹밥 안에는 메추리알이 하나씩 들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씩 제 주먹밥을 달라며 졸라댔습니다. 김밥은 이제 지쳤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지금도 가끔 그 주먹밥이 생각납니다. 주먹밥 하나로 인기 만점이었던 그 소풍날이 생각납니다.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었던 그날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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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신비 체험의 일상화
“영적 면역력 증진과 더불어 온전한 삶”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조그만 구멍 하나만 뚫렸어도 깨진 항아리가 된다. 큰 예의는 작은 예의를 지키는 데서 완성된다.”<다산>
일상의 작은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크고 작은 예의가 없듯이 크고 작은 죄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오래된 잘못을 말하지 말고 깔보는 표정을 지어서도 안된다. 갑작스레 방문하지 말아야 하며, 갑작스레 떠나서도 안된다.”<예기>
이 또한 삶의 지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깨어 있는 삶이라면 이처럼 일상의 지혜에도 충실할 것입니다. <예기>는 중국 고대 경전인 오경의 하나로, 예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책으로 삶의 지혜를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하늘병원 진료차 방문후 떠나려 할 때 두 젊은 여자 직원이 청해서 고백성사를 줬습니다. 뜻밖의 청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젊은 분들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은 참 갸륵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두분께 각기 기도문과 더불어 준 동일한 보속에 만족했습니다.
“오늘 하루 병원 생활 중 환자들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보속입니다.”
보속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하느님과 이웃을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산다면 참으로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이 추구했던 유일한 목표는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시다가 세상을 떠난 이정우 바오로 수사의 기일 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 팔팔합니다!” 6월29일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날 영명축일을 지내며 건강을 뽑내신 88세 노령의 수사님이었는데 약 2주후 세상을 떠났고 당시는 아무도 선종하시리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생각입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살아계셨다 해도 돌아가신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냥 시간만 연장된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도 많지 않은가? 나이 30에 죽어서 70에 묻힌다는 말도 있지 않나? 하루하루 선물 인생을 생각없이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감 없는 죽은 삶도 비일비재하지 않나?”
어제 수도형제의 사랑의 권유로 함께 인근의 피부병 진료차 <소나무 한의원>에 들렸습니다. 진단은 “면역질환”이란 것이었습니다. 피부가 면역력이 떨어짐으로 인한 것이기에 장기적인 관리와 보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면역력이 좋고 강할 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피부이지만 면역력의 결핍은 만병의 시초라는 것입니다.
순간 연상된 마음의 면역력, 정신의 면역력, 영혼의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의 심각한 결과를 묵상했습니다. 피부 육신의 면역력에 앞서 이런 영적 면역력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다 싶었습니다. 이래서 영적 면역력의 증진을 위한 “신망애信望愛의 삶”, “진선미眞善美의 삶”, “평화와 기쁨”, “찬미와 감사”, “겸손과 섬김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영적 면역력에 대한 참 좋은 처방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 신비 체험입니다. 인간의 본원적 치유는 하느님뿐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온마음을 다해 하느님 이름을 부름으로 웬만한 병은 다 나았다 합니다. 인간의 영육의 전인적 힐링은 물론 영적 면역력의 증진에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인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는 확신입니다. 하느님 신비 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미사은총의 선물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신비 체험의 대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정말 두려워할 바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나는, 하느님과 단절되 영혼의 죽음입니다.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일상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외경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향한 외경의 두려움을 키우는데 흠숭의 기도가 제일입니다. 더불어 잊지 못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매사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아야 함을 절감합니다.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이사야의 소명 체험 처럼 비상한 하느님 신비 체험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소명체험에 앞선 날개 여섯 개 달린 사랖들의 하느님 찬미는 그대로 미사전례에 차용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미사전례중 '거룩하시다' 장면시 꼭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을 연상하시기 바라며 이사야의 체험을 여러분의 체험으로 삼기 바랍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순간 사랖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 잎에 대고 말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성체가 타는 숯을 대신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이사야의 하느님 신비 체험을 그대로 차용한, 영적 면역력을 증진시켜주는 미사전례야말로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새삼 고맙게 깨닫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사야 예언자가 주고 받는 대화는 그대로 미사중 파견 예식을 연상케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하느님 신비 체험후 가야할 복음 선포의 자리는 각자 삶의 제자리입니다. 빛의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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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내게 스미시니>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
믿음이
내게 스미시니
나는 믿음입니다
늘 그렇게
믿음에게도
믿음이요
불신이
부추긴다며
더욱 믿음입니다
희망이
내게 스미시니
나는 희망입니다
늘 그렇게
희망에게도
희망이요
절망이
부추긴다면
더욱 희망입니다
사랑이
내게 스미시니
나는 사랑입니다
늘 그렇게
사랑에게도
사랑이요
미움이
부추긴다면
더욱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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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선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려 주십니다. 그들의 선포가 영광스러운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왔다. 나는 그림자 안에 감춰져 있는 빛이며, 사람 안에 숨어 있고, 겸손 안에 높임올 받은 하느님이다. 이 신비는 오랫동안 감추어져 왔지만, 너희를 통해서 모든 이에게 드러날 것이다. 그 신비가 ’하늘 끝에서 나와 다시 끝으로 돌아가니, 아무것도 그 열기 앞에서 숨을 수 없네‘(시편 19,6).’ 해가 보이지 않고그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알려지지 않고, 그분의 신성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두 부류, 믿는 이들과 변명할 길 없어 처벌받게 될 믿지 않는 이들로 나뉩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깨어남은 (장소 의식이 아니라) 공간 의식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깨어남의 넷째 단계는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서 영원히 다스린다. 우리는 하느님 안으로 녹아 들고, 하느님은 우리 안으로 녹아든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의 깨어남은 안, 곧 우리의 안과 하느님의 안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쏟아 붓는 충만한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깥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한다.
다른 곳에서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기울이는 철저한 사랑을 되풀이하는데, 이 주제야말로 그의 전 영성과 우리 깨달음의 뿌리가 된다.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무엇이 하느님의 사랑일까요? 그분의 본성과 그분의 존재,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치는 사람은 그분의 본질을 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존재는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그분의 사랑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 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하느님은 자신의 전 존재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존재는 사랑에 의존합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됨이 마치 사랑에 의존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가지 사랑만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외아들을 사랑한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20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에서 '성전'은 없다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실펴보는 이 장을 미감하기 전에, 우리는 이슬람교의 지하드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 및 아랍국가 사이에 그치지 않는 전쟁과 살육, 자살 폭탄과 테러 등이 놀랍게도 종교적 이데을로기인 ‘거룩한 전쟁'(지하드)이라는 신념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전쟁' 이라는 개념에는 인류의 전쟁사 속에서 적들과의 대치속에 있는 어느 부족, 민족, 국가, 국가 연맹체가 자신들의 전쟁 목적이 정의롭고 정당하다는 것과, 그러므로 신은 당연히 자신들을 도와 자신들 편에 서서 싸울 것이며, 따라서 신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영광스런 일이라는 신념이 들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시대에 고대 사회에서나 있음직한 성전(聖戰)이란, 한갓 정치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포징지에 써서 위장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리 없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경전인 <토라>와 <꾸란> 속에는 ‘거룩한 전쟁'에 관한 놀랄만한 사상이 담겨 있는 만큼, 오늘날처럼 전쟁 수단과 무기가 발달한 상황에서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용납하게 된다면, 적대 관계에 있는 아랍인과 유대인은 함께 망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으며, 지구상에는 종교로 인한 전쟁의 광기가 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지녔던 ‘거룩한 전쟁' 신앙과 이슬람 발생 초기의 ‘지하드' 신앙의 그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바로 밝힌다면, 초강대국들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쉽사리 변질되는 ‘성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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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10,26.28.31)
사실 제 머리의 탈모는 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까지 하느님도 제 머리카락 숫자를 분명히 세어 두셨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제 머리카락 숫자는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스트레스로(=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강했지만...) 더 이상 셀 수 없을 만큼 빠지기 시작했고 이젠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저야 이젠 신경도 쓰지 않은데 설마 무척 분주하실 하느님께서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두시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마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쏟고 계신다면, 요즘 말로 대박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두려워하지 마라.”(10,26.28.31)는 구절이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예고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마라, 고 권고하십니다. 이는 분명 제자들이 나갈 세상의 현실을 진단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제자들의 내적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고 당부하시면서 위로와 용기를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무엇을 말할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약속한 성령이 오면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상황에 적절하게 말씀하시고 이끌어 줄 것이다.”(10,19.20참조)라고 확약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1베3,14)라고 말합니다. 결국 베드로 사도는 사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8) 또한 시편에는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27,1)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짙게 내재해 있다가, 현실 상황과 사건, 사람에 의한 자극에 의해서 두려움이 우리 의식으로 솟구쳐 오른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숱한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이며 이런 한계상황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기라”는 성 아오스딩의 표현에서 위안과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10,28)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곧 지혜의 시작이며 그 지혜는 우리를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롭게 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이 지혜의 빛으로 비춤으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고, 상대적으로 인간 존재에 비해 하찮은 참새마저 지켜 주고 돌보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억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 단적인 실례가 창세기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갖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인지 모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49,19.20)라고 말하는 저변엔 진정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다시 일깨웁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시8,5) 두려움은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겨울 눈이 따뜻한 봄 햇살에 의해서 녹듯이 사라지리라 봅니다. 『온갖 두려움과 모든 근심 저 멀리에 던져 버리오며 주님 아름다움 생각할 때 내 마음엔 큰 기쁨이 넘치네.』 (가톨릭성가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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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부름 받았기에 두려움은 떨치기로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099302&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40712. 21:16 ㅣNo.174150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운 사명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게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파견하시는 그분께서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 두실만큼 우리를 소중히 여기신다. 그리고 우리 부족분을 시도 때도 없이 어디서나 늘 당신 힘으로 다 채워 주신다. 따라서 비록 죄인일지라도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 정의를 외치는 게 일차 우리 모두의 마음가짐이리라.
아버지는 자식이 아무리 짜증내고 불평해도 마음속을 뚫어 보신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단지 일개 어린이일 따름이다. 그래서 다들 두려워만 한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적 빈곤을 염려한다. 돈 없는 미래가 될까 봐 시간만 나면 전전긍긍이다. 이런 사실과 달리 하느님 자녀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어 어떤 위험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를 얻었다고 믿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정말 그렇게 사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지?
사실 예수님은 미래에 염려하고 바장이는 이런 우리를 두고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신다. 하찮은 참새도 당신 허락으로 땅에 떨어진단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워만 한다. 막연한 두려움에 열정을 빼앗긴다. 대부분은 몰라도 되는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일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단다. 그만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거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일 게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에. 그러하지만 실상은 다소 두렵단다.
위협받는 생명에 목숨 빼기는 일이 자주 이어진다. 예전보다 지금은 만나는 게 더 무서운 세상이란다. 왜 이렇게까지 안타까운 지경이 되었을까? 생명의 존엄성은 무시된다. 이렇듯 주어진 생명일지라도 실상은 우리 게 아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좌우하시는 하느님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진다. 그래서 내 모든 걸 아시는 주님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 과장되고 왜곡된 내가 아닌 비천하고 죄스러운 그대로의 만남이, 주님께는 더 아름다울 게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하늘나라가 완성될 때에 믿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게다. 그렇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장차 이루어질 약속에 대한 희망을 향해가는 그 여정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닥칠 시련을 예고하신다. 그러기에 막강한 국가 권력을 쥔 통치자들은 물론, 얼굴조차 모르는 이웃의 박해가 따를지라도 미리미리 그것에 걱정일랑 하지를 말라신다.
사실 주님은 잘나고 죄 없다는 나를 사랑하시는 게 아닌, 죄인임을 고백하는 나를 더 사랑하시리라.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만나면 두려움은 자연 저 멀리로 사라질 수밖에. 사실 하느님을 증언하면 때로는 미움을 받을 수도.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할게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을 증언하라신다. 그리하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숨겨져 있던 구원을 직접 보게 될 터이니까.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그러기에 고통스럽고 당혹한 상황에 직면하여 당황하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늘 되새기자. 물론 절망의 한계를 절감하는 그 순간도, 그분의 도구로 선택된 우리는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다짐하자.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우리를 닥칠지라도, 두려움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고 다시 또 다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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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두려워하다”는 오늘 복음에서 되풀이되는 표현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생각을 가두고 행동을 막으며 영향을 줄 때, 보통 우리는 그 대상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여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나에 대한 그들의 평가, 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 돋보이고 싶은 마음 등 말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보다 이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그분을 정말로 두려워한다면 판공성사 표가 나올 때만 고해성사를 보는 일은 벌써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그분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일도, 기도가 사라진 삶도,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기적인 마음도 이미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하느님을 만난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죄와 죄악을 없애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앞에서 나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실 정도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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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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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인간의 두려움은
무엇을 빼앗길 것 같은 마음에서 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목숨이라고 생각할 때
그 두려움의 끝은
내 생명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생명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클수록
즉 죽고 싶지 않을수록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영혼도 육신도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또한 상황이나 다른 조건들 때문에도
사람은 죽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산이 무너진다던지
갑자기 병이 찾아와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클수록
주위 사람들, 주위 환경이 모두
나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여
불안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려움의 끝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생각의 바탕은
이 세상의 삶으로 우리의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육체적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삶으로 옮아가는 것이기에
죽음으로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두려움은
무엇을 빼앗길 것 같은 마음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나의 존재가 없어질 것에 대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만약 우리가 목숨을 잃을 상황이 와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그 생명을 다시 주실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육체의 죽음을 맞이해도
그것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나의 탄생으로 시작한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한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그것을 원합니다.
두려움이 올라올 때
불안할 때
그 마음을 무시하기보다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불안한 마음 속에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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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 생각만 해도 연민의 정이 북받쳐 오르는 사람.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온 그, 그 오랜 기간 나와 일심동체이던 그,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그.
매일 먹이고 씻기고, 달래고 재우던 그, 어찌 보면 나의 분신이요 나와 하나이던 그, 그가 힘들면 나도 힘들고,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던 그.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우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지닌 그런 주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아 11,4, 8)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나 연인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각자를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얼마나 총애하시는지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럭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29-31)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기억하시겠답니다.
더 은혜로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의 사랑과는 격이 다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처럼 작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거나 편협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한없이 큰 사랑, 한결같이 일관된 사랑, 지극히 이타적이고 영원불멸하는 참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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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2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제자들은 자신을 스승이나 주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요한 15,15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이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나오는 “어두운 곳, 밝은 곳, 귓속말, 지붕 위(27절)라는 말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둠이고 밤이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곳에서 선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 육체적으로는 죽일 수 있지만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이시다. 이 멸망은 묵시록에서 “두 번째 죽음”(20,6)이라고 하며 이 죽음은 지옥에서 겪게 될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새는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 참새조차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미물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알고 계시겠는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로 돌보신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참새의 생명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도 아무 소용없다. 고백의 뿌리는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은 믿음의 열매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뿌리는 가지나 잎을 만들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사도 바오로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하였다. 마음의 믿음이 없다면 입으로 고백할 수 없으며, 마음의 믿음도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여 입으로 늘 고백의 씨앗을 뿌리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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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은 지금 속한 세상을 찢을 용기를 준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한다면 영혼까지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덜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을 조금 더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면 큰 차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사랑이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도 이기게 만드는 이유는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사랑만 받으며 삽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정이라는 세상으로 나아오면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지금 있는 세상에 갇히게 되고 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세상을 극복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힘은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애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내본 뒤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어머니, 아버지를 버릴 용기가 없다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세상에 머무르도록 딸과 아들을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어머니가 나쁜 사람입니다.
나뿐인 사람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버리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딸은 어머니와 동생을 버릴 용기를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 살아봐야 자신의 인생은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그렇게 해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까요? 어리석은 삶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붙잡아놓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방법으로 위협을 합니다. 돈을 덜 준다던가 빼앗는다던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여러 위협을 견뎌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은 어쨌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갈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집착하여 두려움 속에 당신을 증언하지 못하고 당신을 믿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셔서 순교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천국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분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용하려고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잡아두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 또 성체조배도 하며 결국엔 사제의 길로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했을 때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고 여자들의 반대도 있었으며 다니던 학교도 지금까지 공부 잘해놓고 왜 그러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을 극복할 힘은 더 큰 사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사람들을 더 구원하고 싶은 사랑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저를 붙잡는 힘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성소자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위 40대 노처녀는 어머니와 동생이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해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끊을 힘도 줍니다.
따라서 사랑을 많이 성장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꾸준하게 해나가야 하는 일은 ‘사랑을 성장시켜’ 언제라도 이 세상을 찢고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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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4-31).”
1)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제자가 스승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뒤만 잘 따라가면 된다는 뜻인데,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죽음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졌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고,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죽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인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2)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자들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육신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섭지 않으니까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죽는 것은 무서운 일이긴 한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그 무서움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만’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영혼이 멸망당하는 것을 무서워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즉 공포심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우리는 ‘무서움’과 ‘경외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에는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고, 그 생활은
아무 의미 없는 강제노동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내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3)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까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아주 세심하게 보살피시고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작가는 그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4).”
<‘어둠의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인데,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시련들을 가리킵니다.
넓은 뜻으로, 지상에서의 인생살이를 뜻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둠의 골짜기’ 자체를 없애 주시는 분이라고 찬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그곳이 ‘어둠의 골짜기’ 라고 해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만 강조하셨고, 박해 자체를 없애 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활과 승천으로 직행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수난과 죽음을 거치셔야만 했는가?”, 또는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4)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너희를 더 아끼시고 사랑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박해자들은 참새들보다 못한 ‘하찮은’ 존재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박해자들보다 더 귀하다.”,
또는 “너희는 로마 황제보다 더 귀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으면서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자들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참새보다 더 하찮은, 또는 먼지보다 더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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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 속에서 몰아내야 할 ‘거짓 두려움’과 우리가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된 두려움’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기게 된 이유는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죄를 저지른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을 피해 숨은 이유는 그들이 ‘알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죄를 지어 마음 속에 ‘죄책감’이 생겼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피해 숨은 겁니다. 그렇게 자기들이 지은 죄로 인해 그들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왜곡되어 버립니다. 더 이상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 아낌 없이 베푸시는 분,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벌 주시는 분, 빼앗아가시는 분, 속박하시는 분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라는 촉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카락 개수까지 다 헤아려 알고 계실 정도로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악과 멸망으로부터 지키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악인들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물질적 피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고 심할 경우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도 하지만 그들의 한계는 ‘거기까지’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어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잃게될까 전전긍긍하는 ‘거짓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느님 뜻을 거스르면 어쩌나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면 어쩌나를 걱정하는 ‘참된 두려움’만 마음에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외심’이라고 부르지요. 벌 받을까 두려워 마지못해 하느님 뜻을 따르는게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그분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기에 기꺼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보면, 그런 마음가짐이 나를 구원으로 인도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가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만, 고통이나 불행을 겪지 않아야만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시지 않고 광야로 보내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고 고통을 그분께서 주시는 벌이라고 잘못 믿으며 두려움에 빠지면 ‘내가 믿는 그대로’ 됩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어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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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
예언자들 중에 이사야의 성소 장면은 특이합니다. 하느님께서 성전에서
당신의 엄위한 모습을 예언자 앞에서 드러내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구약의 통념에서 하느님을 직접 보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칩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그러나 사랍들 중에 하나가 대답대신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예언자의
입에 대닙니다.
그리고 누구를 사람들에게 파견하셔야 하는 줄을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의논하십니다.
예 언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판관들은 주님께 불림을 받으면 다 핑계를 대고
뒤로 빠지려고 하는데 이사야만 용기를 갖고 나서는 것입니다.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부족함을 한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변명, 합리화, 이것저것을 대는 핑계라는
모습을 훌훌 털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용기를 갖고 또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얼마나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인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반대를 받더라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병든이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쫒아 내시는 주님께 한켠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마귀의 두목인 베엘제벨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 낸다는 억울한 소리를 들으시지만
주님께서는 당당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27)
주님께서 곁들어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까지도 주시고 거두시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새에서부터 자연의 모든 이치를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의지하며 현실적으로 겪는
아픔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도 말씀해 주십니다.
한문에서 세상에 속한 속인에서 ‘속(俗)’자를 잘 들여다 보면 사람 인(人)변에
골자기 곡(谷)자를 씁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다시 말해 속인(俗人)은 앞을 막는
계곡에 갇혀 그것만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선(神仙)이라는 말을 보면 재미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선이란 참다운 신앙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에서는 도(道)가 통한 사람인데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仙)을 보면 사람 인(人)변에 ‘묏산(山)’를 씁니다.
이것을 풀어 보면 산에 오른 사람이라 할 수 있지요. 그것은 산 위에서는
자신이 걸어 온 계곡이며 길 그리고 세상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가려 있는 권력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도 이 말씀을 받아 ‘눈에 보이는 것을 희망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 세상의 조건들 앞에서 힘겨울 때가 있고 주눅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족하고 세상의 힘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부족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당신의 제자로 당당하게 세상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하게 깨달으면서도 하느님 앞에 용기를 갖고
나설 수 있었듯이 우리도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지만 주님을 믿고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오늘도 기쁘게 살도록 초대하십시다.
“저를 보내십시오.”라는 예언자의 모범을 따라 오늘도 우리 모두가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날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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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순종하는 삶
<2024.7.13>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2:1~15절)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순종하는 삶❞
❚ 어떠한 환난이 앞을 막아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믿음의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라도 겸손히 순종하는 삶입니다(1~5절).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1절)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기 1년 전으로 바벨론 군대의 의해 포위된 상태에 있던 때입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궁중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2절). 예레미야가 옥에 갇힌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이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이 싫어하는 소리였지만 예레미야는 이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예언을 가감하지 않고 충실히 전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3~5절).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시드기야가 할 수 있었던 최상의 반응은 참된 회개였지만, 죄의 노예가 된 그는 끝내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일반적인 선지자라면 위기의 순간에서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침략을 대비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선지자의 본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대로 예언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과 불이익이 앞을 막아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믿음의 정도를 걷는 사역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역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신기록을 세우며 결승점을 통과했다 할지라도 경기의 규칙을 어긴 선수에게 내려지는 것은 실격 판정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세상 모든 사람이 틀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명 걸고 그 뜻을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예측할 수 없이 혼란스러워도 끝까지 순종하는 삶입니다(6~12절).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사촌 하나멜이 그에게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요구할 것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그 이유는 그의 밭에 대한 기업 무를 권리가 예레미야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멜이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실제로 확인되자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고,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고 증서를 써서 그 밭을 사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소유권과 상속권을 보증하기 위해 적법한 매매절차에 따라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의 세워 값을 치르고 매매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봉인한 것과 봉인하지 않은 매매증서를 바룩에게 전달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자라면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환난과 고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 고난 뒤에 감추어진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와 오묘한 섭리를 확신하며 인내로써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모든 것을 상실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흐름에 민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 자신이 처한 환경이 비록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이 혼란스러워도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공감할 수 없는 현실속에서도 철저히 순종하는 삶입니다(13~15절).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바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봉인한 증서와 봉인하지 않은 증서를 모두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라고 명령하십니다(13~14절). 이는 이스라엘의 긴 포로생활에 대한 암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밭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5절). 이것은 70년 포로생활 후에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고 정착하게 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판단과 선택의 기준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습니다. 그는 결코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겪지만 그는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만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길 때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을 환난과 위기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공감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며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세상 모든 사람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 상황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명을 걸고 그 뜻을 감당해 나아갈 뿐만 아니라 현재 처한 환경이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이 혼란스럽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32:1~1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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