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들의 교만, 하느님의 대책
예레 13,1-11; 마태 13,31-35 /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2026.7.27.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우상숭배로 교만에 빠진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우상숭배에 물든 유다교 종교를 개혁하시는 예수님의 실천을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시는 하느님의 대책을 전합니다. 여기서 겨자씨와 누룩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시작되어 자라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 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과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고발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은 임금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이에 영향받은 백성이 하느님의 길을 벗어나서 우상을 숭배하는 행태로 나타났습니다. 신정일치 사회였던 그 당시에 우상을 숭배하는 이러한 종교인들의 교만은 사회의 불공정과 불의를 초래했습니다. 그러자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 등 당시 사회에서 힘없고 가난한 이웃들은 인권을 유린당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인간 존중을 실천 원리로 하는 하느님 흠숭을 드러내 놓고 외면하는 죄악이 벌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죄악스런 사회 구조는 예수님 당시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암울한 정세 속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고 희망과 전망을 제시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안에서도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도처에 만연되어 있었으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앓는 이들이 많았는가 하면 심지어 면역력이 극도로 약화된 이들은 마귀 들림 증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시 유다교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두가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충실하게 봉행하는 일을 중시했고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일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일이라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숨 막히는 이런 분위기에서 그분은 겨자씨가 누룩처럼 아주 초라하고 조용하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였고, 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이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모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열두 사람을 골라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 열두 제자단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겨자씨요 누룩이었습니다. 이 제자단을 위한 가르침에 당시 유다교의 주류가 자행하는 우상숭배적 행태를 개혁하는 단초들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새로움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우상숭배라 함은 점을 보고 사주팔자에 따라 미래를 판단하려는 무속 행위에 국한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고 천주교 신자들 중에도 슬금슬금 이 미신에 빠져드는 이들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을 따라 가르치신 바에 따르면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흠숭이므로 인권을 유린하고 사람을 차별하는 모든 행위가 다 우상숭배에 속합니다. “만유 위에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제1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인간을 사랑하는 일을 똑같이 으뜸가는 계명(마태 22,37-40)으로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인간 존중에로 하느님 흠숭을 방향 짓는 전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고 그분의 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 또한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드러내야 하고, 특히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방향 전환의 구체적 실천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를 명하는 제3계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주일을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지낼 수 있는지를 지시하는 가르침입니다. 그저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제1계명과 제2계명을 힘 없는 이웃들에게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는 날이라야 하는 것이지요.
종교인들이 인구의 절반 넘게 차지하고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무려 천만 명을 넘는다는 한국 사회에서도 그 종교적 실천에 관해서는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은 실천이 요청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이런 실천이 조용하고도 꾸준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실천을 하고 있는 선의의 시민들은 그 선행의 뿌리가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실천은 구조화되고 지속화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희망적인 징표는 이것입니다. 하느님 흠숭을 드러내 놓고 하지 않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시민들이 이미 종교인들 못지 않게 선행을 실천하며 우리 사회를 폭발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문화, 정치와 경제, 과학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 민족의 에너지를 분출시키고 있습니다. 이 에너지가 세계 도처에서 한류를 퍼뜨려 폭넒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그 중심에 한글과 한국어가 있습니다. 70년 넘게 분단되어 전쟁, 독재, 가난, 외환 위기, 환경 재앙, 국정 농단 등 숱한 위기 속에서 살아왔고 그 위기가 닥칠 때마다 놀랍게 기회로 바꾸어 온 우리 겨레가 반쪽의 국토에서도 단군 이래 최고조로 국운을 상승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 기점이 서울 올림픽과 한일 축구 월드컵 경기에서 나타났던 엄청난 응원 열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기운이 지난 백 년의 고난을 극복하고 민족 화합과 통일을 준비하는 또 다른 백 년의 미래를 준비할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고 보면 종교인들의 직무 유기에 가까운 교만을 경고한 이천 오백 년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 말씀이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희망과 전망을 가르치신 이천 년 전의 예수님 말씀이 그 시대 간격을 뛰어 넘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적중하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인간 존중을 통해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고 있는 일부 종교인들의 교만은 오늘날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대책을 믿고 실천하는 선의의 사람들을 통해 마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종교인들이 민족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현실에 대한 희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이끄실 미래에 대한 실현 가능한 전망을 지금부터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미 우리 사회 안에 퍼지고 있는 선한 한류의 분출 현상에 주목하고 함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새로운 현실을 준비하고 계실까요? 그분께서 이끄실 미래에 대한 징표는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백 년을 넘기고 있는 민족의 고난을 넘어 새로운 백 년으로 넘어가는 이즈음, 오늘 미사의 말씀을 통해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