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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여자 축구 국가대표의 목숨 건 탈출기
탈레반, 여성이 유니폼 입고 축구하면 ‘율법 배반’ 간주
대표팀 선수들, 탈레반 총탄 피해 공항서 48시간 사투
아프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이자 주장인 파티가 상대 팀의 슛을 막아내고 있다. 여자 축구 선수들은 지난해 8월 말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의 주요 제거 대상이었다. 사진 출처 아프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트위터
지난해 8월 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던 마지막 48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수도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을 피해 카불공항으로 몰려든 탈출 인파 중에 아프간 여자축구대표 선수들이 있었다. 10대 후반인 이 여자선수들은 탈레반의 주요 표적이었다.
탈레반의 눈에 유니폼 차림으로 축구하는 여성은 코란과 율법을 배반한 반동분자였다. 히잡을 쓰고, 긴 소매 상의에 바지를 입더라도 남성이 여성의 몸매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축구 소녀’들을 매춘부라고 불렀다. 가족에 불명예를 안긴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아버지와 남자형제들을 겁박하기도 했다.
골키퍼인 파티(19)는 여자 축구대표팀 주장이다. 파티는 카불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집 뒤뜰에 60cm 깊이로 땅을 팠다. 그 안에 국가대표 유니폼 4벌과 골키퍼 장갑 모양의 황금색 트로피 5개를 묻었다. 그녀는 구덩이를 파면서 자기 무덤을 파는 듯한 참담함이 들었다. 평소에 파티는 트로피를 집어 들며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이게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이에요.”
파티네 가족은 아프간에서도 핍박받는 소수 민족인 하자라족이다. 탈레반에게 이 종족은 ‘인종 청소’ 대상이다. 파티는 축구장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다. 늘 전쟁 중인 조국, 여성, 소수민족 같은 족쇄가 그곳엔 없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지금,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의 흔적을 지우는 게 살 길이었다.
● 유니폼과 트로피를 땅에 묻었다
지난해 8월 말 탈레반이 아프간 수도 카불을 장악하자 시민들은 무작정 카불공항으로 몰려들었다. 필사적인 탈출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 남성이 신생아를 철조망 너머 미군에게 건네고 있다. 트위터
카불공항은 어떻게든 비행기를 얻어 타고 고국을 탈출하려는 수만 명의 군중들로 가득했다. 탈레반 병사들은 하늘로 계속 총을 쏘아댔다. 출국 게이트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겐 채찍으로 내리쳤다. 곳곳에 화약 냄새와 땀 냄새가 진동했다.
파티는 1차 접선지인 공항 밖 주유소 앞에서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에게 여권을 나눠줬다. 며칠 전 여자축구협회 사무실에 있던 선수 명부, 얼굴 사진 등 탈레반이 찾을 수 있는 증거들을 모두 불태우면서 여권만은 챙겨 놨다. 살해 위협 탓에 아프간에선 경기를 못하고 인도, 우즈베키스탄 등을 떠돌며 경기를 해왔기 때문에 선수들에겐 여권이 있었다. 파티는 자기를 둘러싼 선수 10여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약속 하자. 우리 중 한 명이라도 탈출에 성공하면 그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꼭 구해주기.”
파티의 팔뚝에는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있었다. 휴대전화를 도난당하거나 압수당할 경우에 대비해 적어둔 것이었다. 3년 전까지 아프간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카터의 번호였다. 당시 카터는 미국 텍사스에 살고 있었다. 해병대 여군 장교 출신인 그는 이라크전 파병 경력이 있었다. 이 때 경험을 살려 아프간 내 미군과 정보를 공유하며 선수들을 군용기에 태우려 했다.
카터에게 함께 구출작전을 펴자고 설득한 사람이 있었다. 전 아프간 여자축구대표팀 주장 포팔이다. 2007년 여자대표팀 창단 멤버인 포팔은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 2011년 덴마크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프간의 후배 선수들을 구해달라며 미국, 호주 정부와 인권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카터와 포팔은 파티에게 어디로 움직일지 전화와 채팅 앱으로 실시간 지시를 했다. 파티는 선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았다.
● 탈레반 병사가 나에게 걸어왔다
수백 명의 사람이 아프가니스탄 카불 국제공항 밖에 모여 있다. AP뉴시스
“북쪽 게이트로 가. 사람이 나와 있을 거야.”
카터는 파티에게 암호와 비밀번호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라고 했다. 암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 영웅인 존 바실론, 비밀번호는 해병대 창설일인 1775년 11월 10일에 특수문자를 결합한 것이었다.
북쪽 게이트 앞에는 마침 미군 병사가 서 있었다. 파티는 그에게 다가가 카터가 일러준 암호와 메시지를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병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누구야? 무슨 국가대표?” 그는 미국 여권이 있는 사람만 통과시킨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장면을 근처의 탈레반 병사들이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파티가 상황을 알리려 카터와 포팔에게 다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그 때 파티는 바로 옆에서 거대한 총성을 들었다. 순간 귀와 눈이 멍해졌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파티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발길질에 쓰러졌다. 공항에 함께 왔던 파티의 오빠(23)가 급히 달려왔다. 오빠는 몸으로 발길질을 막아내며 생수통을 꺼내 실신한 동생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정신을 차린 파티는 답장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부터 살폈다.
‘너무 당황하지 마. 남쪽 게이트 호주 군인들한테 상황을 알릴게.’(카터)
‘포기해선 안 돼. 계속 싸우면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포팔)
파티와 선수들은 남쪽 게이트로 방향을 바꿨다. 그곳까지는 탈레반 병사들이 지키는 검문소 두 곳을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검문소 앞은 빽빽한 인파로 한 걸음 내딛기 것조차 어려웠다. 서로를 주스 쥐어짜듯 밀치며 절박하게 나아갔다. 6, 7살쯤 보이는 소녀들이 어른들 틈에 짓눌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밀지 마세요. 저희도 살고 싶어요.” 파티는 4살 막내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리쳤다. “어린 애들이잖아요. 숨 좀 쉬게 해주세요.” 오빠는 소녀 중 한 명을 들어올려 어깨에 태웠다.
옴짝달싹 못하는 군중들을 상대로 탈레반은 전기 채찍을 휘둘렀다. 일부 선수들은 단톡방에 “너무 아파. 더 이상 못 가겠어”라고 올렸다. 여자국가대표 선배인 포팔이 단톡방에 연이어 메시지를 올렸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인 것처럼 움직여.’
‘레드카드만 받지 말고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팔꿈치를 사용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뚫고 가야 돼.’
파티와 선수들은 가까스로 두 번째 검문소 앞에 닿았다. 차량과 인파가 수백m 줄지어 있었다. 경비는 더욱 삼엄했다. 총을 든 탈레반 병사들이 한 명 씩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때 군중 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봐요. 여자 축구선수예요!”
한 탈레반 병사가 파티에게 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겁에 질린 그녀 앞으로 군중 수백 명이 에워싸듯 몰려들었다. 병사는 총구를 그들에게 돌렸지만 순식간에 밀려드는 인파에 휩쓸려 넘어졌다. 파티는 무조건 앞으로 내달렸다. 흙먼지 속에 짓밟힌 채 피범벅이 된 탈레반 병사의 앳된 얼굴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다른 탈레반 병사들은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 “넌 나처럼 노예로 살면 안 돼”
미군 수송기에 자리 잡은 사람들. 탑승인원이 수용한도를 넘어서는 640명에 달했다. AP뉴시스
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파티는 경기 중 날아오는 공을 다이빙해서 막아 내거나, 상대편 쪽으로 공을 뻥 차올려 포물선으로 날아갈 때 통쾌함을 느꼈다. 주변의 집요한 반대와 위협에도 파티의 엄마만큼은 축구선수인 딸은 지지했다. 엄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13세에 결혼해 5남매를 낳았다. 엄마는 파티에게 “너는 나처럼 되면 안 된다. 집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부엌 너머의 삶을 찾아가라”고 자주 말했다.
파티와 동료 선수들은 ‘너희들을 죽여서 축구 골대에 매달겠다’는 위협을 수시로 받았다. 극단주의자들에게 납치되거나 집단 구타를 당한 선수들도 있다. 그럼에도 축구를 향한 열망을 계속 타올랐다. 그들은 수많은 숨죽인 여성들의 희망이었다.
파티는 탈레반의 총알을 피해 간신히 두 번째 검문소를 통과했다. 이제 남쪽 게이트가 눈앞에 있었다. 동료들의 안전을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니 10여m 앞에 오빠가 넘어져 있었다. 탈레반 병사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오빠의 머리와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땅바닥에 고꾸라진 오빠는 고개를 쳐들며 부르짖었다.
“빨리 가, 어서 도망가, 넌 잡히면 안 돼”.
파티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 했다. 공항에 함께 왔던 파티의 가족들은 48시간 동안 탈출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공항 앞에서 4살 여동생을 가슴에 끌어 앉은 채 탈레반의 전기 채찍을 맞고 주저앉았다. 10대인 두 동생은 공항 어딘가에서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평소에 파티가 축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보디가드’ 역할을 해줬던 오빠마저 눈앞에 무너졌다.
파티가 절친인 동료 선수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다. 아프간여자축구팀 트위터
파티는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꼈다. 대표팀 동료인 친한 친구였다. 그녀는 파티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동료 선수들의 눈길이 모두 파티를 향해 있었다. 머리와 옷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 10대 여성들은 시커멓게 된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파티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돌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주장이다.’
남쪽 게이트 앞에는 호주 군인들이 있었다. 선수들은 여권을 흔들며 ‘국가대표 선수’ ‘축구’ 같은 영어 단어를 미친 듯이 외쳤다. 군인들은 오라고 손짓을 보냈지만 중간에 있던 탈레반 병사들이 또 다시 막아섰다. 파티와 선수들 10여 명은 서로 팔짱을 꽉 끼어 ‘인간 사슬’을 만들었다. 하도 꽉 끼어서 양팔에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듯 했다. 한 몸이 된 채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선수들을 향해 탈레반은 차마 총을 쏘지 못했다.
군 수송기(C-130) 안은 하수구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코가 시큼했다. 탑승자 중 일부는 공항 하수구를 통해 게이트에 접근한 뒤 탈레반의 총탄과 채찍질을 뚫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기내를 가득 채웠다. 화물칸 구석에 동료 선수들과 앉아있던 파티 역시 이제 아프간으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잘 가, 나의 국가대표 유니폼과 트로피들. 이제 땅속에서 안전할거야. 나의 어린 시절도 안녕.’
● 호주에서 보낸 힘겨웠던 1년
아프간 여자축구대표 선수들이 축구 연습을 한 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투지를 다지고 있다. 아프간여자축구팀 트위터
아프간 여자 축구대표 선수들은 두바이 등을 거쳐 지난해 9월 초 호주에 도착했다. 사지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낯선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이 1년 째 이어지고 있다.
파티는 카불공항에서 잃어버린 초등생인 두 동생을 두바이공항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기쁨도 잠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는 다른 가족들을 아프간에 두고 왔다는 죄책감에서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생들은 탈출 몇 시간 뒤 카불공항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벌어져 자신들을 하수구 밖으로 꺼내준 미군 병사를 포함해 130명이 희생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간 여자선수들은 축구 때문에 고향에서 도망쳐 와야 했지만 축구는 그들을 자유롭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파티와 선수들은 호주 멜버른의 한 여자 프로축구팀에 소속돼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
이들의 유니폼 뒷면에는 이름 없이 등번호만 있었다. 선수들 신원이 알려지면 아프간의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 수 있어서다. 파티는 유니폼 뒤에 조그맣게 재봉된 아프간 국기를 발견했을 때 손으로 국기를 매만지며 고국을 대표한다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새삼 떠올렸다.
파티는 망명 중인 선수단을 국가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국제축구연맹(FIFA)을 상대로 아프간 국가대표팀으로 인정해달라는 투쟁도 시작했다.
아프간 탈출 8개월 만인 올 4월 호주에서 한 여자프로팀과 첫 경기를 치른 아프간 여자대표팀 선수들. 골을 넣고 기뻐했지만 곧 오프사이드 판정이 나 무효가 됐다. 경기는 0대0으로 비겼다. 아프간여자축구팀 트위터
파티는 호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축구를 하면서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제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저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축구는 절대 포기 못해요. 축구를 통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싶어요.”
아프간을 떠난 지 8개월 만인 4월 말, 선수들은 한 여자 프로팀과 처음으로 경기를 치렀다. 0대0 무승부였다. 아프간 팀이 한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에 걸려 무효가 된 것을 선수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아프간 여성들은 원래 축구 할 운명이 아니어서 팀이 형편없다’는 악평을 하도 많이 들어서 선수들은 한 번의 승리가 늘 간절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파티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우리 슬픈 얼굴 하지 말자. 여기 이렇게 살아서 공을 차고 있잖아.”
신광영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