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놓아두고 목자가 어떻게 도피하느냐. 한사람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겠다"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며 한국교회는 숱한 순교자를 배출했다. 교회의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낸 '믿음의 투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외의 절대신이 있을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이 가운데 해방후 행방불명 돼 순교한 김길수목사(金吉洙 1905-1949)는 복음전파 뿐 아니라 민족 운동과 청년 운동, 교육 사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고 또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적인 삶을 살다간 목회자였다.
김목사의 신앙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었고 주일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 공산정권과 맞선 것이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남 용강국 양곡면 남동리, 유복한 유교가정에서 출생한 김길수는 소학교를 마친뒤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 대학 중학부를 마쳤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부틴의 별세로 교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랫만에 본 조국의 모습은 일본과 비교해 너무 피폐했다. "지금 우리 민족에 필요한 것은 민족정신이며 청년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설 수 있다. 공부보다 민족, 청년운동이 더 절실하다"
20대 초반의 청년 김길수는 고향에서 남동(南桐)학교를 개교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바른 사고를 깨치는 일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조만식선생과 이상재선생 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들의 사고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뒤 스스로 기독교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
김길수의 개종은 집안에 큰 파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오히려 평양고등성경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함으로 기독교에 더 몰입한다. 진남포 비석리교회, 평양남문밖교회 등의 전도사를 거쳐 42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부임한 곳이 평양 신암교회였다.
당시 일제는 41년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모두 강제 출국시킨 뒤 조선 기독교 통리직을 만들었다. 교단적 특징을 없애고 하나의 교회로 만들어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