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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사랑이다
□ 본문 : 갈라디아서 2장 20절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마디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지난주에 ‘쉬지 말고 기도하는 축복’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립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기도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힘들다 어렵다’ 말하기 전에,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 말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기도시간이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어느 때는 피곤하고 지쳐서 기도를 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육신의 편안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기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쉬고 싶을 때에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요즘은 성도님들과 함께 새벽을 깨우는 것이 더욱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교회에 함께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성경을 교독하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더욱 깨달아지니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1.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네
2.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귀하다
저 광야 같은 세상을 끝없이 방황하면서
위태한 길로 나갈 때 주께서 나를 이끌어
그 보좌 앞에 나아가 큰 은혜 받게 하시네 (찬송가 364)
기도가 즐겁다고 말하지는 않을 지라도 기도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기도는 의무이고 부담이고 무거운 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의무나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보다 하나님 그 분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장 귀하게, 가장 중요하게 여기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나누었던 고넬료의 삶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군인의 일에 충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말 그대로 백 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사람입니다. 백부장 위에 천부장이 있습니다. 계급은 당연히 천부장이 높습니다. 그런데 로마군인들은 천부장보다 백부장을 더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천부장은 위에서 임명하는데, 백부장은 군인들이 직접 뽑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백부장으로 뽑겠습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충성할만한 사람을 뽑습니다. 백부장은 오직 인격과 실력으로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보다 백부장을 더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기도의 사람 고넬료는 기도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군인들에게 인정받는 인격과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넬료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항상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늘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택하십니다. 마가복음 3장 14,15절 말씀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신 첫 번째 이유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언제서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자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전도도 하고, 귀신도 내쫓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먼저입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고 열두 제자를 택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먹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자고 함께 사시려고, 언제 언제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말입니다.
‘기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할 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얼핏 보면 기도와 별 상관이 없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신앙의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의 자아가 죽었고, 예수님이 주인 되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수도 없이 묵상했고 암송하고 있는 말씀이지만, 오늘 설교를 위해 다시 묵상하면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천국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고난과 죄의 유혹을 이기고, 진리를 가장한 거짓의 공격을 이기고 천국 길을 갈 수 있는지 성경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혼자서는 넘어지기 쉬우니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구원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를 말입니다. 은혜입니다.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 요즘 일본에 많은 단기선교팀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부흥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선교팀이 올 때마다 항상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본을 품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일본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밟는 땅마다 축복하고, 만나는 영혼들마다 축복하는 것입니다. 축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이 땅을 묶고 있는 어둠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곳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어둠의 권세는 떠나갑니다. 이렇게 일본 땅에 예배하는 자들이 세워지고 세워지면 이 땅에 반드시 부흥이 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팀이 일본에 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사랑스럽습니다. 때로는 선교팀을 섬기는 것이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부담이 될 때도 있습니다. 사실 저보다 선교팀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준비하고 섬기시는 여선교회 회원들이 더 그럴 것입니다.
선교팀이 동경을 나갑니다. 요즘은 구글맵이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나 길을 찾아가는 것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선교팀이 저보다 더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통해서 선교팀이 방문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금방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팀이 저에게 물어볼 때 정확하지 않은 것은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세요,’ 합니다. 게다가 핸드폰으로 통역까지 되니 굳이 제가 함께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허락하는 한 선교팀과 함께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일본 을 사랑해서 자신의 마음과 몸과 힘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일본 땅을 찾아온 선교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선교팀 스스로도 충분히 갈 수 있지만 사랑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요 대화라는 것을 여러 번 들으셨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고, 기독교 전통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하시고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을 ‘기도는 사랑이다’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예수님을 하루에 얼마나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을 수 있습니다.
동행일기를 쓰는 분들이 처음에 깜짝 놀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신은 나름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막상 동행일기를 쓰려고 하루를 돌아보면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나 적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한 것은 둘째 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던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재로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주님과 더 친밀해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집니다.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더 기도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 나의 죽음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성도 안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의 뿌리는 자아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의 시간, 자신의 몸, 자신의 일, 자신의 사람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만은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에 사로잡혀 있던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의 뜻입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던 자아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서도 마귀의 종노릇하던 본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고집대로 내 감정대로 내 생각대로 살려고 합니다. 여전히 예수님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하며 자신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려고 하는 자아를 향한 믿음의 선포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한 시간에도 수십 번 자아가 고개를 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은 진리가 아닙니다. 거듭난 우리의 영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분은 바로 주님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계속해서 우리를 속입니다. 너를 위해 살라고, 너의 마음대로 하라고, 너의 감정대로 하라고, 너는 의롭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싸우라고, 너의 유익을 위해 살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계속해서 이 기도를 드리면 자아를 격동시키던 것들이 힘을 잃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순간에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62:5,6)
2. 예수님이 사심을 고백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하는 것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십니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탐심이, 정욕이, 분노가 불같이 일어날 때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십시다. 예수님의 나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왕입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불에 물을 끼얹는 것처럼 탐심이 정욕이 분노가 힘을 잃습니다. 불길이 너무나 거세어 한 두 번의 기도로 꺼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기도해 보십시오.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십시다. 예수님의 나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왕입니다.’ 반드시 자아는 힘을 잃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평안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엄습할 때, 영적으로 짓눌릴 때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해 보십시오.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십시다. 예수님의 나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왕입니다.’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왕 되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이 믿어지고 실재가 됩니다.
※ 올 2월에 선교팀과 치바역에서 노방전도 할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전도한다고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양하고 전도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복음에 무관심한 일본의 영적 상태가 커다란 벽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이지요. 그때 찬양을 인도하던 청년이 ‘주님만이 왕이십니다.’ 라는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 × 4
내 삶에(이곳에, 온 땅에) × 4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 왕의 왕 예수께 엎드려 경배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 왕의 왕 예수께 손들고 경배해
경배해 × 4
하늘을 바라보며 이 찬양을 부르는데, 주님만이 우리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전도하는 이 땅의 왕이심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치바의 왕이심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일본의 왕이심을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온 땅의 왕이심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내 안에 있던 의심이 떠나가고, 이 땅에 일어날 부흥을 갈망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내 안에 충만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입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자아가 힘을 잃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이 임합니다. 우리의 주인 되시고 왕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강하고 담대합니다.
3.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인생의 결론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리고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물로 더러워진 우물물을 퍼내고 퍼내면, 우물 깊은 곳에서 맑은 물이 솟아납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고 자아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의 더러운 물을 퍼내고 퍼내면,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하고 뜨겁고 간절했던 사랑이 말입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사랑해서 주님을 향한 사랑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고 깨뜨리면 반드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 마음의 더러운 물을 퍼낼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계속 고백하고 또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을 믿는 자에게 이 고백은 거짓이 아닙니다. 비록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졌다 할지라도, 그래서 처음에는 입술만의 고백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진심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처음에는 ‘주님, 주님 보다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마음이 주님 아닌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 저 어떻게 합니까?’ 탄식과 같은 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고백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주님, 주님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순수하고 뜨거웠던 사랑으로 주님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고백해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주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했던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눈물은 어느새 사랑의 눈물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뜨겁게 기도합니다. 항상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쉬지 말고 기도합니다. 기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