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초두, 미합중국이 붕괴되었다―’
20세기 SF에 혁명을 일으킨 거인,
밸러드가 그려 낸 강렬한 초전위적 아메리칸드림
20세기 후반 세계문학사에서 전대미문의 독창적이고 예언적인 목소리로 여겨지는 밸러드는 1960년대 SF 뉴웨이브 운동을 견인하며 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함으로써 현대문학을 재정의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고도의 상징성과 시각 이미지를 다용한, 디스토피아적인 예지로 가득 찬 전인미답의 전위적인 작품들은 ‘현대’에 대한 세계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통산 스물다섯 번째 단행본인 『헬로 아메리카』에서 그는 22세기 콜럼버스들의 두 번째 신대륙 발견 여정을 따라가면서 디스토피아 렌즈를 통해 미국 문화의 최악과 최고를 특유의 환각적인 내러티브로 보여 준다. 이 책에는 미국 작가 벤 마커스의 「해제」와 영국 작가 트래비스 엘버러의 「전기적 약력」, 잡지에 게재된 단편소설을 비롯해 밸러드의 저작을 총망라한 「작품 목록」을 실어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1990년대 초반의 에너지 위기가 초래한 미합중국의 붕괴 이후, 몇십 년에 걸쳐 인구 대부분은 그 200년 전 있었던 서쪽을 향한 이주의 물결과는 반대로 저마다 선조들의 땅으로 되돌아간다. 그즈음 유럽에서는 환경 친화적 사회주의 정부가 낮은 수준의 산업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급증한 인구로 인한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세계 정부는 대규모 기후 제어를 시도하는데, 베링 해협에 댐을 건설한 것이 원인이 되어 아메리카 대륙의 기후는 격변한다. 과거 미국이었던 곳의 동부 연안은 사막에 집어삼켜지고 서부 도시들은 수장되면서,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강대한 국가는 기록과 기억에서만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헬로 아메리카』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2114년, 유럽과 아시아와 나머지 세계의 주민들은 이미 오래전에 흥미를 잃은 땅으로 출발한 원정대에서 시작한다. 원정의 주목적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감지된 대기 중 방사능 수치 증가의 원인을 찾는 것. 원정대의 주축이 될 탐사대원들은 미국 난민의 후손들로 꾸려졌는데, 이들에게는 자신만의 꿈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아메리카 대륙이 몰락했다는 명확한 사실이 아닌, 검증되지 않고 부풀려진 환상의 미국이 들어차 있다. 그리고 그들 속으로 난입한 청년 웨인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웨인은 더블린 출신의 유복자로, 부친이 20년 전 행방불명된 원정대의 컴퓨터공학과 교수라고 믿고 있다. 자신의 뿌리가 미국에 있으리라는 막연한 예감, 친부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뒤범벅된 기이한 집착에 지배받으면서 원정선에 밀항한 그는 아메리카 대륙이 가까워질수록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해 자신이 새로운 통치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하는 제45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예기치 못하게 혹은 누군가의 의도대로 맨해튼 해안에 좌초한 원정대는 텅 빈 도시를 몇 차례 약탈한 끝에 대륙 횡단길에 오른다. 아무도 살지 않으리라 여겼던 땅에서 해체된 문화의 기괴한 유물들과 마주치고, 이를 숭배하는 원주민 열두 부족―‘교수 부족’ ‘경영진 부족’ ‘관료 부족’ ‘갱단 부족’ 등―과 접촉하게 된다. 과거의 유령들이 사방에서 닥쳐오는 가운데 자의 혹은 타의로 탐사대는 와해되기 시작하는데, 무리에서 이탈해 서부극 테마파크 같은 사막에서 홀로 남은 웨인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할리우드 배우의 거대한 신기루를 목도한다. 죽음의 고비 앞에서 웨인은 살아남은 탐사대에 구조되어 무성한 열대우림의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지만, 도박의 성지는 전성기 때처럼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디너쇼가 펼쳐지고 있다. 이윽고 그들은 10대 멕시코인 민병대에 의해 호텔 스위트룸 밀폐실에서 보호받고 있는 제45대 미합중국 대통령,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하기 위해 핵무기 룰렛을 만지작거리는 미치광이 노인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 『헬로 아메리카』 전반부의 이야기이다. 탐사대는 신대륙 발견과 개척 시대로부터 할리우드, 도박, 핵무기, 상징으로 졸아들어 버린 역대 대통령 등 미국의 역사 혹은 신화를 단시간에 더듬어 가는데, 그 중심에는 작중 미국의 현실보다 오래 살아남은 아메리칸드림이 도사리고 있다.
『헬로 아메리카』가 그리는 근미래 미국의 모습은 ‘독자가 바라보는 디스토피아가 된 미국’과 ‘디스토피아가 된 미국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왜곡된 시선’을 동시에 목격한다는 측면에서 거울에 비친 환상처럼 이중적이다. 소형 증기자동차와 구릿빛 가루만 존재하는 작중의 미국에, 웨인과 탐사대는 육중한 캐딜락과 사금의 환상을 덧씌운다. 미국 땅의 새로운 주민들을 마주한 웨인은 그들을 처음에는 개척 시대 미국 원주민으로, 다음에는 20세기의 미국인으로 간주하려 애쓴다. 탐사대가 마침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순간 현실과 환상이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곳 또한 다른 종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내 드러난다.
이러한 거울에 비친 환상 속에서, 독자들은 밸러드가 반복하여 사용해 온 수많은 소재들이 사탕 세공 껍데기 안의 내용물처럼 들어차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막. 정글. 협곡. 자동차. 대통령. 유리 비행기. 추락한 조종사. 우주 비행의 꿈. 과거의 미국을 구성하던 요소들은 제각기 뒤틀리고 파괴되어 껍데기만 남은 다음, 밸러드의 손에 의해 새로운 알맹이를 부여받는다. 그가 그리는 미국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라, 과거의 환상이 새로운 집착을 부여받는 장소이다.
[…] 그는 미래를 다루는 역사소설을 써냈다. 『헬로 아메리카』는 미국을 두 번째로 발견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이번에 위업을 이룩하는 이는 정신 나간 광인들이다. 파괴적이며 텅 비고 무가치한 땅을, 오로지 자신의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정복하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버려진 미국이야말로 그의 열정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들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미국이 위대한 가공의 땅일 뿐이라면, 밸러드의 인물들은 상상의 삶을 드러내는 완벽한 횃불잡이라 할 수 있다. 밸러드는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지더라도 환상 속에서는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음을, 어쩌면 현실에서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_ 376~377쪽, 「벤 마커스 해제」에서
밸러드는 작품에서 다가올 미래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자신은 ‘SF에서 선호하는 만들어진 미래가 아니라, 다가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진짜 미래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라고, 미래 발전을 예측한 게 아니라 그 주변의 세계에 대하여 썼다고 주장하면서 판단을 거부했지만, 『헬로 아메리카』가 쓰인 것이 1973년과 1979년의 석유파동에서 미국이 회생하던 시기인 1981년임을 감안하면 작중의 미치광이 대통령과 현재 미국 대통령이 똑같은 제45대 대통령이라는 점, 두 인물의 구호가 공히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점은 무척 공교롭게 다가온다. 밸러드의 이 초현실적인 소설은 리들리 스콧이 이끄는 스콧프리에서 영상화를 준비 중이며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가디언》에서 이야기한 대로, ‘그 남자는 떠났지만, 그의 이상한 세계는 남아 있다.’
『콜린스 영어사전』에 따르면 ‘밸러드풍’은 ‘J. G. 밸러드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서 묘사된 환경―특별히 디스토피아적인 현대성, 암울한 인공 경관, 기술적이고 사회적 혹은 환경적 발전의 심리적인 효과―과 유사하거나 연상시키는’이다. 『영국인명사전』 항목에는 밸러드의 작품에 대해 ‘에로스, 타나토스, 대중매체와 신기술’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