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西周) 영지(灵池)의 기초에서 확대건설한 인공호수 곤명지(昆明池)는 서안시 서쪽의 풍수(沣水)와 휼수(潏水) 사이에 위치하여있고 옛 한(汉)나라 상림원(上林苑)의 일부분이었습니다. 한나라때 상림원(上林苑)은 장안성밖 호수가 가장 밀집된 지역이고 곤명지를 포함한 적지(滴池), 서피지(西陂池), 동피지(东陂池) 등 10개의 늪지가 있었습니다.
곤명지호수 이름의 유래는 전지(滇池.중국 운남성에서 가장 큰 호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나라때 한무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천축국(지금의 인도)과 대나무제품의 무역통로를 개척하려고 하였는데 천축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해 있는 곤명국(昆明国)에 의해 가로막히자 곤명국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곤명국에는 전지가 있어서 현지인들은 수전(水战)에 능하였고 이를 대응하기위해 한무제는 기원전 117년에 전지와 비슷한 곤명지를 건설하여 장병들이 수전에 익숙할수있도록 훈련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한무제가 곤명지를 만든 목적은 수군을 훈련시켜 서남쪽의 여러나라를 정벌하기 위한것이었지만 아름다운 상림원내에 위치하여있기에 자연스레 사람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로도 자리잡았습니다. 한무제는 호수중에 예장대(豫章台)를 세웠고 그위에 궁실을 지었으며 길이가 3장(三丈)되는 석경(鲸鱼.돌을 조각한 고래.현재 섬서성역사박물관에 보관중)과 용수대선(龙首大船)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궁녀들을 시켜 호수에서 배를 띄우게 하는 등 곤명지는 명부상실의 중요한 황실휴양장소가 되었고 곤명지에게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기위해 또 곤명지북쪽의 호수구(镐水口)에 견우와 직녀 석상도 세웠습니다.
서한(西汉)에서 곤명지의 또 다른 용도는 물고기를 기르는것입니다. 역사기재에 의하면 곤명지에는 다양한 품종의 어류가 양식되었고 일부는 황가의 제릉에 제사용으로 사용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시장에 내놓아 장안성의 물고기가격이 하락될만큼 그 생산량이 엄청 많았다고 합니다.
곤명지는 한.당(汉.唐)때 도성 장안성 급수시스템의 중요한 구성요소였습니다. 서한의 장안성은 이미 규모가 방대(고대 로마성의 3배)하고 인구도 매우 많아서 도시의 물 공급이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서한의 통치자는 장안성을 건설할때부터 이미 주위 자연하천의 이용을 충분히 고려하였고 인공호수와 늪을 만들어 수로, 하천과 연결시켜서 온전하고 유기적인 급수시스템을 만들었고 풍하(沣河), 도하(渡河), 청하(청하), 노하(泸河), 파하(灞河)를 서로 연결하여 장안성의 정상적인 수원공급을 보장하였습니다. 장안성의 급수시스템중에서 곤명지는 용량이 매우 클뿐만 아니라 수질이 맑고 깨끗하기로도 유명하였습니다.
곤명지는 또 항운의 이점을 갖추고있습니다. 곤명지가 건설됨에 따라 장안성의 수로항운노선이 삼하구(三河口)를 거쳐 황하와 직접 연결이 되었고 장안성 부근의 식량, 연료, 철기 및 기타 물자의 수송과 무역이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이후 관중지역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궁실축조로 인한 풍하(沣河), 휼하(潏河), 호하(滈河) 상류지역에서의 계속되는 수목의 벌채로 하천의 진흙과 모래의 양이 크게 증가되었고 게다가 정비도 제대로 따라가지못하여 곤명호는 결국 당나라말기부터 점차 말라져갔고 차츰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천여년후의 2015년, 서안시는 곤명지옛터에 두문(斗门)저수지의 건설을 시작하는 등 곤명지복원에 나섰습니다. 2017년 2월 8일 곤명지 1기시험단지의 수문이 열렸고 1,100여년동안 말라있던 곤명지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년 9월28일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인용하여 사랑의 주제와 대량의 칠석(七夕)원소를 융합하여 만든 곤명지칠석공원(昆明池七夕公园)도 개원하였고 지금은 서안시의 새로운 문화관광명함이 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