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유영익 박사(연세대석좌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우리역사바로보기"(2006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를 바로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영익 박사는 이승만 연구의 제1인자이며 이화장 문서를 통채로 소화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이승만 욕하고 증오하다가 그를 존경하게 된 분입니다.
---------------------------------------
양녕대군의 후손이자만 가난하게 태어나
국민의 대다수는 그가 1960년에 4․19학생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사실 하나만 가지고 그를 ‘독재자'로 기억하고 있다. 이승만을 독재자로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승만이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승만의 호는 우남(雩南), 그는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만3세에 서울로 올라와서 남대문 밖에 살았다. 그가 소년기에 가장 오래 거주한 곳은 남산의 힐튼 호텔 남쪽 언덕바지였다. 그 언덕은 조선시대에 기우(雩)제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 언덕의 남쪽에 살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 호를 ‘우남'이라 지었다. 기우제 마을에 사는 남자라는 뜻인 것이다.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지만 집안에는 오랫동안 벼슬이 끊겨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무척 가난했다. 이승만의 어머니 김씨는 서당 훈장의 따님으로 자식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4대 독자인 이승만이 비상하게 총명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양질의 교육을 베풀기 위해 남편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서울로 이사 온 다음 이승만은 서당을 몇 군데 다녔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다닌 서당은 현재 남산의 힐튼 호텔 근처에 있었던 조동서당(挑洞書堂)이었다. 소년 이승만은 이 서당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공부를 했다. 매년 한 번씩 치르는 도강(都講)이라는 종합시험에서 늘 장원壯元(1등)을 했지만, 서너 차례 치른 과거에 응시에서는 어린 탓이었는지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한다. 그러다가 1894년에 개화당 정부가 추진한 갑오경장이라는 제도개혁으로 과거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
21세에 한학에서 영어와 서양학으로 방향 바꿔
1894년은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진 해다. 이 전쟁에서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국이 일본에 패배하자 이승만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하고 앞으로 영어가 출세의 무기가 될 것을 예상하여,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세운 학교였다.
이승만은 영어과에 입학했다. 그의 영어 학습속도가 빨라 아펜젤러는 그를 입학 후 6개 월 만에 영어 조교사(tutor)로 임명했다. 이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칭송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2년간 공부하고 졸업을 했다. 졸업식에서 그는 전 졸업생을 대표하여 조선정부의 대신과 협판, 외국의 공사․ 영사, 선교사, 그리고 학부형 등 800여명의 청중 앞에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of Korea)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했다. 이승만의 이 연설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이 영어로써 행한 최초의 연설이었다. 이 영어 연설을 계기로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위정자들과 서울에 있는 외국 외교관 및 선교사들이 주목하는 ‘유망한 인재'로 부상했다.
서재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1884년 개화파들고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의사자격증(M.D.)을 취득하고 1895년 말 조국에 돌아왔다. 이승만은 서재필로부터 배운 바가 많았다. 배재학당을 졸업하자 그는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급진적 개혁운동에서 청년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때 그는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모방하여 『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이를 통해 개혁사상을 전파하는 한편 서울에 설립 된 여러 신식 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글 잘쓰고, 연설잘하는 개혁 운동가
그 결과 청년 이승만은 신문논설을 잘 쓰는 언론인 혹은 연설을 잘하는 선동가로 소문이 났다. 이렇게 정치 개혁에 열을 올리던 끝에 그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그 대신 의화군 이강을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를 모셔다가 총리대신으로 삼아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을 모방한 내각중심제 정부를 수립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다.
조선의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영국 내지 일본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조국의 근대화를 앞당기려는 과격한 정치음모였던 것이다. 이 쿠데타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자 그는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 투옥되었다. 그의 나이 24세, 이 때부터 5년8개월간 영어생활을 했다. 투옥된 직후 이승만 생애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종교(유교 ․불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다닐 때 이미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었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니(1833-l896)의 영향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한계상황에서 그는 어느 날 미국 선교사가 차입해준 『신약성서』를 읽고 크게 깨우쳐 무릎을 꿇고 “주여 내 영혼과 내 민족을 구해주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6년 감옥생활 하면서도 계몽활동
기독교에 입신한 그는 한성감옥서에 갇혀 있는 동료 정치범들과 더불어 성경반을 조직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옥중 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4년 출옥할 때까지 그는 양반출신 정치범들을 포함한 40여명의 죄수와 간수들을 개종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옥중에서 개종시킨 정치범 가운데에는 나중에 독립운동에서 발군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이상재를 비롯하여 이원긍 ․ 유성준 ․ 김정식․ 김린 ․ 안국선 등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포함된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감옥 안에 학교를 설립하여 글을 모르는 죄수나 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는 또 선교사들이 차입해준 책과 신문․잡지들을 모아서 옥중 도서실을 마련하고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많은 독서를 했다. 특히 그는 영문으로 된 책과 신문․ 잡지들을 탐독했다. 영어 문장 가운데 잘 된 것을 골라 암기하면서 영어를 ‘마스터'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영한사전 편찬작업을 시도했다.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만들고 있던 1904년 2월 갑자기 러일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한가롭게 사전을 만들 때 가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사전 편찬을 중단하고 그 대신 『독립정신』이라는 국민계몽서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6개월 만에 탈고했다. 이승만은 타고난 재주가 워낙 비상한데다 애국심과 신앙심이 남달리 강했기 때문에 감옥생활을 이처럼 알차게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29세에 출소하여 곧바로 비밀특사가 되어 미국행
한성감옥에서 출옥한 이승만, 1904년 11월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갑자기 도미한 것은 러일전쟁이 조만간 끝날 것을 예상한 대한제국 정부의 민영환․ 한규설 등 친미파 고관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이승만의 역할이 필요해서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T.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러-일 회담을 주선했다. 이 회감은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열릴 예정에 있었다. 조선의 친미파 대신들은 영어 잘하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거중조정(good offices)을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이승만은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개최되기 직전 1905년 8월 4일에 배재학당의 선배인 윤병구목사와 함께 T. 루즈벨트 대통령을 뉴욕 근처에 있는 그의 별장(‘여름 백악관')으로 찾아가 면담하는데 성공했다. 이승만이 정식 외교관이 아닌 일개 평민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는 것은 한국 외교사상 특기할만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역사적 회견에서 이승만은 T. 루즈벨트에게 “언제든지 기회 있는 대로 1882년에 체결한 한미약조를 돌아보아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주기 바란다."고 간청했다.
이에 대해 T. 루즈벨트는 사안이 워낙 중대함으로 정식 외교 채널을 통해서 청원서를 제출하면 자기는 그것을 강화회의 석상에 내놓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루스벨트가 요구한 대로 워싱턴 D.C.로 직행하여 그곳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을 찾아가 임시 대리공사 김윤정을 붙들고 청원서를 빨리 작성하여 미국무성을 통해 T. 루즈벨트에게 제출하자고 졸랐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어린 이승만의 힘으로 못 막아
그러나 김윤정은 고종황제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는 구실로 청원서 제출에 극구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과 윤병구는 청원서 제출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윤정은 그 때 이미 일본 외무성에 매수되어 있었다. 그리고 T. 루즈벨트는 이승만․ 윤병구를 만나기 5일전에 일본 도쿄에서 자기의 심복인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가 일본의 총리대신 가츠라(桂太郞)를 만나 대한 제국에 절대 불리한 ‘태프트-가츠라 밀약(The Taft-Katsura Agreement')을 체결하는 것을 밀어 주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승만의 사행(使行)은 애당초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었다.
외교 사행에 실패하여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없게 된 이승만은 미국에 눌러 앉아서 오랫동안 꿈꾸었던 미국 유학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그는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대학교에 3학년 학생으로 입학했다. 배재대학'에서 2년간 공부한 것이 고려되어 3학년 편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역사, 경제학, 정치학, 신학 등 과목을 택하여 2년간 공부한 끝에 학사학위(B.A)를 취득했다.
이승만의 천재적 학업
그 다음 그는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하바드(Harvard)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버드대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을 때 그는 대학원 입학 담당직원에게, 자기는 다년간 동양학문을 연마한 경력이 있고 한국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귀국을 학수고대하기 때문에 2년 이내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겠느냐고 편지로 문의했다. 이에 대해 하바드 측에서는 선례가 없는 이 같은 조건부 입학은 곤란하니 일단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년간 공부해본 다음에 거취를 정하라고 답했다.
결국 이승만은 하바드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1년 동안 공부한 다음 2년 이내 박사학위 취득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는지 그는 1908년에 프린스턴(Princeton)대 대학원으로 전학했다. 프린스턴대 대학원으로 전학할 때 그는 대학원 원장 웨스트(Andrew F. West)박사로부터 2년 이내에 박사학위 취득이 가능하도록 돕겠다는 보장을 받았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역사, 국제정치학, 국제법, 철학사 및 신학 과목을 이수한 다음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 ․제출하여 1910년 7월에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졸업식에서 그는 나중(1913)에 미국 대통령이 된 윌슨(woodrowwilson) 총장으로부터 직접 박사학위 증서를 수여 받았다. 이렇게 이승만은 자기가 원했던 대로 2년 내에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학위논문은 비교적 우수했기 때문에 1912년에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출판이 되었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이승만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했는데 이것은 비단 동양 교육사상 초유의 일일 뿐 아니라 미국 교육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쾌거였다.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35세의 이승만에게는 편안한 여생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락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탈고할 무렵(1910.4.13) 그는 서울에 있는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국제적 기독교 전도사가 된 이승만
자기는 몇 달 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인데 그 후 한국에 돌아가 언더우드 목사가 설립하려고 서두르는 기독교 대학 즉 1913년에 설립된 연희전문학교(연세대)에서 서양사, 국제정치, 국제법 그리고 성경 등을 가르치고 싶은데, 만약 일제 통감부가 자기의 교육활동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아예 교수가 되는 꿈을 접고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기독교 부흥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승만이 이처럼 기독교 교육 내지 전도에 큰 관심을 보인 까닭은, 그가 대한제국이 멸망한 근본원인이 한국의 지도층이 정신적, 도덕적으로 너무 부패했기 때문이며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새 나라를 건설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 백성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 생애의 목표를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두었으며 따라서 조지 워싱턴대와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할 때 늘 신학과목을 청강하였다.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이승만은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서울 YMCA(황성기독교청년회)의 ‘한국인 총무'로 발탁되어 1910년 10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YMCA는 뉴욕에 본부를 둔 YMCA 국제위원회에 의해 1903년에 창립된 기구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YMCA 국제위원회로부터 봉급을 받았다.
그의 임무는 청년들에게 성경과 구미역사 그리고 국제법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인들간에 ‘YMCA 학감(Principal)로 알려졌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의 강의는 뜻있는 청년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약1년 반 동안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던 임병직, ․허정, 이원순, 정구영등 유명인사들이 포함된다.
이승만은 서울 YMC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만족하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에 YMCA지부를 설립하여 전국 청년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베풀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1911년 여름에 2개월간 서울 YMCA의 미국인 협동총무 브록크맨(Frank M. Brockman)과 함께 전국의 주요도시를 순방하면서 지방 사립학교들안에 기독교 청년회를 조직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승만의 이러한 운동은 곧 일제 총독부 당국의 촉각을 건드려 일제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는 음모를 유발시켰다. 1911년 11월,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라는 핑계로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The Christian Conspiracy Trial)은 따지고 보면 이승만의 전국 YMCA 조직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이 때 이승만은 검거 대상 제1호였으나 다행히 YMCA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ohn R. Mott)박사의 개입으 로 체포를 면하고 37세였던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와이로 간 이승만
두 번째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미국 미네소타주의 미네애폴리스(Minneapolis)에서 열린 ‘미국기독교 감리회 4년총회’(The Quadrennial General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 다음 그 당시 뉴져지(New Jersey)주 지사(知事)로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 중이던 프린스턴 시절의 은사 윌슨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감옥에 갇힌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석방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윌슨 지사는 이승만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은 자기의 옥중동지 박용만과 상의한 끝에 하와이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그 당시 하와이 군도에는 1903~1905년간 그곳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노동자로 이민간 5,000여명의 한국인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한국인은 겨우 1,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이들을 규합하여 하와이에서 장기적 안목의 독립운동을 펼칠 계획이었다. 1913년 2월에 오아후(Oahu)섬의 호놀루루(Honolulu)항에 도착한 그는 1939년 3월에 워싱턴 D.C.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26년간 그곳을 망명 본거지로 삼아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은 호놀루루에서 ①이민자들에게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태평양잡지』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고, ②이민 2세들에게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초등교육을 실시하고, ③이민자들 위주의 기독교 교회를 설립 ․운영하였다.
1913년에 창간된 『태평양잡지」는 1930년 이후 『태평양주보』라는 이름의 주간지로 바뀌어 1970년까지 속간되었다. 이승만은 호놀루루에 도착 직후 미국 감리회 선교부가 설립한 한인기숙학교(The Korean Compound School)의 교장직을 맡아 이 학교의 이름을 한인중앙학원(The Korean Central Institute)으로 바꾸어 운영하다가, 1918년 9월에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이라는 남녀공학제 소학교를 창설했다.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은 1928년까지 15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1928년 이후 하와이령의 공립학교제도가 발달하면서 고아 기숙사로 전락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해방 후 1952년에 그 부지와 재산을 전부 팔아 인천 인하대학교의 설립기금(15만 달러)으로 기부하였다. 이로써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은 국내의 인하대학교로 그 명맥이 이어진 것이다
이승만이 1913년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그를 하와이 감리교 지방회의 교육분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한인감리교회 업무에 관여시켰다. 그러나 그는 1915년 6월 감리교 지방회 교육 분과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있는 동포 신앙인들의 호응을 얻어 1918년 12월 23일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를 설립했다.
한인기독교회는 어느 기성교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치교회로서 평신도 위주의 민주주의적 원칙을 따른 점에 특색이 있었다. 장로와 집사가 없이 운영되는 이 교회의 운영은 ‘창립자이자 선교부장인' 이승만이 이끄는 이사원(理事院)이 담당하였다. 한인기독교회의 예배당은 호놀루루 이외에 와히아와(Wahiawa) 및 힐로(Hilo)섬에도 세워졌고 1936년에는 미주 본토의 로스앤젤리스에도 설립되었다. 1938년 현재 호놀루루 한인기독교회의 세례교인 수는 1,263명이었다. 한인기독교회는 1938년 4월에 릴리하가(Liliha street)에 서울의 광화문을 본 딴 건평 4,250평방척의 멋진 건물을 낙성시켰다.
요약하면 이승만은 1913년에 하와이로 망명한 이후 그곳에서 주로 잡지 편집 ․발행인, 학교 교장, 그리고 교회 창립자로서 은인자중하는 생활을 하면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낭중지추,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솟아난 이승만
이승만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다음해 봄에 한국에서 3․1운동이 벌어지자 한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그의 위상이 이같이 달라진 것은 북미주의 최대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에서 그를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할 한국 대표로 선정한 1918년 11월부터였다.
그는 대한인국민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의 워싱턴 D.C.에 도착, 미국 정부로부터 파리 행에 필요한 여행증을 취득하려고 노력했지만 윌슨 대통령 행정부의 냉대로 여행증을 얻는데 실패했다. 파리행 여행증을 얻지 못하여 좌절감에 빠져있을 때 그는 1919년 3월 3일 궁여지책으로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당분간 한국을 새로 창설될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위임통치하에 놓아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윌슨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이 청원서는 나중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승만을 비판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한 시점은 그가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 6일 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은 3월 9일에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때부터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4월l1~13일간에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의장으로 모시고 제1차 한인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여 미국 내 한국인들의 단합을 과시함과 동시에 장차 세워질 신대한(新大韓)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회의 도중에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수립된 노령 임시 정부에서 자기를 ‘국무경'으로 추대한 사실을 전해 들었고, 4월 15일에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국무총리'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통보받았다. 그 후 5월 말에 그는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4.23)에서 자기를 ‘집정관총재(執政官摠裁)로 추대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조직된 여러 임시정부에서 국무경, 국무총리, 집정관총재 등 임시정부의 최고 요직에 추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여러 임시정부 중에서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그 임시정부가 자기에게 부여한 ‘집정관총재'라는 직함을 택하여 그것을 영어로 ’President(대통령)'이라고 번역해서 썼다. 즉, 1919년 6월부터 미국에서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임을 자처하면서 한민족을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7월17일에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가 8월 25일에 이름을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n and Europe)로 바꾸었다. 이승만이 이렇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하니까 상해임시정부에서는 9월 6일 뒤늦게 내각책임제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로 바꾸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해줌으로써 그의 대통령 직함 사용을 추인하였다. 이렇게 이승만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제 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승만은 44세였던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5년 7개월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직을 맡아 그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이 기간에 그가 실제로 상해에 부임하여 일한 기간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6개월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 기간에는 주로 워싱턴 D.C.에 머물면서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외교․홍보활동을 벌이거나 독립운동자금을 거두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 때 그가 워싱턴에서 벌인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워싱턴 군비축소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회의의 주최국인 미국과 일본 정부 대표들은 이승만의 회의참석권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은 이 외교활동에서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승만이 워싱턴 군비축소회의에서 외교성과를 거두는데 실패하자 상해 임시정부 내에서 그의 인기는 급락하고 상해와 북경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간에 그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그 결과 그는 드디어 1925년 3월에 자기의 비판세력이 장악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 ․면직을 당했다. 이 때 상해 임정은 구미위원부 폐쇄령도 함께 내렸다. 다시 말하자면, 이승만은 한국역사상 최초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대통령직에서 최초로 탄핵 ․면직을 당한 비운의 정치가였던 것이다.
맨몸으로 도전하는 이승만
상해 임정이 자신을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하고 또 구미위원부 폐쇄령을 내렸을 때 이승만은 자기의 망명본거지인 하와이에 돌아가 있었다. 그는 상해 임정이 자기에게 취한 두 가지 조치에 대해 묵살하는 태도를 일관했다. 자기는 원래 한성임시정부가 임명한 집정관총재(대통령)라고 우기면서 여전히 대통령 행세를 계속하며 구미위원부도 폐쇄하지 않고 종전대로 유지했다.
그는 장차 미 ․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확신하고 그때를 기다리면서 1921년에 하와이에서 조직한 동지회를 확장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한국인들의 경제적 실력을 배양하는 운동에 몰두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1925년에 그는 호놀루루에 동지식산회사(同志殖産會社)를 설립하여 이 회사를 통해 재미동포들의 경제력을 키움으로써 독립자금을 마련하려 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자기의 옥중동지 신흥우로 하여금 국내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토록 하여 이 단체와 동지식산회사가 서로 협력토록 했다. 또한 그는 뉴욕과 로스앤젤러스 등 미국의 주요 도시와 상해에 동지회 지회를 조직하여 동지회의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불행하게도 이승만이 시도한 이러한 일련의 실력양성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1929년에 미국을 휩쓴 대공황의 여파로 1931년에 동지식산회사가 파산하였고 서울의 흥업구락부 역시 1938년에 일제 경찰에게 발각됨으로써 와해되었다.
뉴욕․ 로스앤젤리스 등지에서 추진하고 있던 동지회 확장운동은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과의 세력경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렇듯 1920년대 후반에 줄곧 역경을 맞고 있던 이승만에게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침략은 다시 한번 그로 하여금 국제무대에 서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1932년 말 그는 백범 김구가 이끄는 상해 임정으로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할 대한민국임시정부 전권대사로 임명받아 유럽으로 갔다.
그는 1933년 2월에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회의를 참관하면서 그곳에 모여든 열강 대표들을 상대로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단신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그는 이 외교에서도 기대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7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정부의 외무성과 일제를 상대로 한․러 ․중 3국간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돌연한 태도 변경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만에 모스크바에서 축출당하는 창피를 당했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1933년의 유럽방문을 통해 외교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 대신 제네바에 체류할 때(2.21) 우연히 미래의 반려자인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양을 만나 이듬해(1934.10.8)에 그녀와 결혼하는 행운을 건졌다. 59세였다.
프란체스카와 함께 워싱턴D.C로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동남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승만은 이때부터 고대했던 미 ․일간의 전쟁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비한 운동을 벌이기 위해 1939년 봄 하와이를 떠나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워싱턴 D.C.로 이사를 했다.
워싱턴에 정착한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영문저서를 집필하는데 몰두하여 1941년 여름에 이 책을 출판했다. 66세였다.
태평양 전쟁 예언한 점쟁이 이승만
이 책에서 이승만은 일본이 머지않아 태평양에서 미국과 전쟁을 개시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미국정부와 국민이 이에 대해 시의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의 예측대로 과연 1941년 12월에 ‘진주만(Pearl Harbor)사건'이 터지면서 미 ․일간에 태평양 전쟁이 개시되자 미국의 일부 지식인은 이승만을 예언자라고 칭송했다.
이승만은 태평양전쟁 발발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외교활동을 끈질기게 전개했다. 특히 그는 미국 대통령 F. 루즈 벨트(Flanklin D. Roosevelt)와 그의 부인 엘리노(Eleanor)여사, 그리고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 등 미국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편지나 전보로 이러한 요구를 거듭하되 미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당장 승인하지 않으면 일본 패망 후 한반도에는 소련이 훈련시킨 한국인들로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워싱턴의 국무성을 ‘귀찮아 할 정도로' 드나들면서 헐(Cordell Hull)장관이나 그루(Joseph C. Grew)차관 및 정치고문 혼백(Stanley Hornbeck)박사 등에게 임정 승인을 요구했다. 미국 백악관과 국무성이 그의 요구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미 국방성의 스팀슨(Henry L. Stimson)육군 장관과 국방성 산하의 육군전략사무처(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굳펠로(M. Preston Goodfellow) 부처장(대령) 등에게 접근하여 미국이 한인들로써 구성된 항일게릴라를 중국 내에 조직하여 대일전쟁에 투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미국을 향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함께 항일 게릴라 부대의 조직을 요청했지만 미국정부는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미국 대통령 F. 루즈벨트는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수상 및 중국의 장졔스(蔣介石)총통과 함께 ‘카이로 선언'을 통해 적절한 시기를 거친 다음에 한국을 독립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또 1945년에 미육군의 OSS는 북중국의 시안(西安)에 있는 광복군 지대에 게릴라 훈련을 개시하여 대일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러한 일들은 이승만의 외교노력이 미흡하게나마 주효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세간에는 그에 대한 두드러진 약점들이 회자됐다. 이승만은 능력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남이 보기에는 유아독존적이요 독선적으로 보였다. 하와이에서는 박용만과 불화를 빚고, 미주 본토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및 흥사단계 인사들과 융화하지 못한 결과 미주 한인사회 일각에서 ‘분열주의자'라는 욕을 듣기도 했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직을 탄핵 ․면직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강점을 구비했던 출중한 ‘카리스마적(Charismatic) 정치지도자요 독립 운동가였다.
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 행한 영어 연설의 제목이었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애국․ 애족의 화신이었다. 그는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영달을 위해 민족적 이익을 소홀히 한 일이 없다. 그리고 그는 청년기에 정부 개혁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여 약 6년간이나 옥고를 치른 개혁투사였다.
2. 이승만은 미국의 일류대학 (죠지 워싱턴대, 하바드대, 프린스턴대)에서 수학하여 5년 이내에 학사․석사․박사학위를 취득한 ‘천재'로서 국문과 영문으로 많은 저술을 남긴 탁월한 ‘문민' 정치가였다.
3. 이승만은 조선의 양반 지식인 가운데 최초로 기독교에 개종한 인물로서 서울과 하와이에서 장기간 기독교 교육 및 선교에 종사하였던 기독교 교육자 ․ 전도자였다.
4. 이승만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한성임시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집정관총재)직을 맡아 임시정부를 5년 이상통치한 경력이 있으며 하와이 교포사회의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로서 26년간 교포사회를 거느린 정치가․행정가였다.
5. 이승만은 T. 루즈벨트 대통령을 위시하여 윌슨 대통령, F. 루즈벨트 대통령 및 트루먼 대통령 등 미국의 최고 지도자와 미 국무성 ․국방성의 주요 책임자들과 한국 독립문제로 빈번히 교섭한 경력이 있는 미국통 외교의 베테랑이었다.
6.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회의(1921~1922),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1933) 및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1945) 등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참관하여 열강 대표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국제적으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한국인이었다.
7. 전체적으로, 이승만은 해방 후 남한 정계에 대두한 여러 ‘영웅'들 중에 여러모로 실력이 가장 출중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