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미래 여행
유영석
봄 햇살이 초록 잎새에 앉아 반짝이던 2022년 5월 어느 날 휴대폰이 울렸다. 마음속의 알림도 함께 울렸다. 딸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20년 만에 캐나다에서 귀국한 초등학교 동창 석진이었다. 봄바람에 실려 온 친구의 목소리는 반갑고 따스했다. 통화하면서 머릿속에는 옛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한 컷 한 컷 스쳤다. 추억은 시공간을 이어주는 이음매다. 그 이음매를 딛고 하나둘 오르면 지난날의 풍경들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석진이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며 서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석진이가 어릴 적 삼총사인 학순이와 함께 홍제동 문화촌 시간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했다. 그곳은 서로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음속에 온갖 추억을 간직한 동심의 세계다. 이국땅에서 살았던 석진이나 나는 한동안 정든 그곳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셋은 설레는 마음으로 소년 시절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마음에 품고 있는 작은 보물 지도를 펼쳐 들고서.
서울 서대문구에 자리한 홍제동은 동쪽으로는 인왕산, 남쪽으로는 안산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시대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예복을 갈아입고 입궐 준비를 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여관인 홍제원(弘濟院)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려서부터 25살 때까지의 숱한 흔적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곳이다. 그동안 ‘생존’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몸부림치고 허둥대느라 둥지를 찾지 않았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굴로 돌린다는데 나도 살날이 줄어드니 마음이 고향 쪽으로 향하는지도 모른다.
홍제역 앞거리를 걸으니 봄의 꽃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홍제동은 신구(新舊)가 조화를 이루며 나름의 전통적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곳이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곳은 유진상가다. 일부 리모델링으로 겉은 조금 바뀌었지만, 정겨운 느낌은 예전 그대로다. 위를 올려다보니 내부순환로가 청명한 하늘을 가리고 있다. 하늘을 잃고 길을 얻었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 상점에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삶의 생기를 느꼈다. 힘든 시절의 풍경은 세월의 지우개로 대부분 지워졌지만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하루를 건너고 있었다.
세검정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어린 시절 구슬치기를 하며 놀던 홍제초등학교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는가 보다. 마치 첫사랑과 마주친 소년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교정으로 들어가 운동장에 발을 내딛자 아름다운 추억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해맑은 어린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어린 시절의 내가 비쳤다. 학교를 뒤로하고 발길이 닿은 문화촌은 추억만 남긴 채 옛 흔적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운동장처럼 그곳을 누빈 우리는 지도 없이도 구석구석이 훤하다. 달동네 골목길은 아파트와 빌라로 온통 뒤덮였다.
아버지는 1・4 후퇴 때 남한으로 혈혈단신 내려오신 목사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60여 년 전 어린 시절 문화촌에 정착하면서 우리 집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유소년부터 청년 시절까지 이곳에서 보냈다. 판잣집에서 살기도 하고 달동네 전세, 월세 등 단칸방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 집 없는 설움이 사무쳤다. 양동이 물지게를 지기도 하고, 이사할 때마다 풀을 쑤어서 신문지로 방을 도배하곤 했다. 아버지는 리어카 찐빵 장사와 버스회사 경비원으로, 어머니는 종로구 보건소 일과 식모살이로 생계를 꾸렸지만, 쌀독은 늘 비어 있었다.
내 추억의 필름에는 ‘가난’이라는 두 글자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소년은 초등학교 때 소풍도 못 가고 마냥 즐거워하는 친구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아버지는 먹고사는 게 힘들어 청와대에 쌀 지원을 읍소하는 가장의 눈물 편지도 썼다. 하지만 빵을 팔고 난 뒤 리어카를 끌며 집에 오던 그날 밤, 꼭 잡아준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달빛도 우리 가족의 앞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삶이 남루해도 아버지는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그 웃음은 절망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긍정의 몸짓’이자 ‘희망의 메시지’였다. 아니, 어쩌면 웃지 않고는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빵 파는 리어카 옆에서 미소 짓는 아버지의 사진은 그 무엇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귀중한 자산이다.
홍제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은 판잣집>이라는 동시로 소년조선일보에 입선했다. 판잣집의 애환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불꽃을 피우는 나를 누군가가 알아주는 듯해 뛸 듯이 기뻤다.
우리 집은 판잣집, 기와집만 있는 동네 판잣집은 하나뿐,
빗방울 떨어지면 아버지는 망치 드시고 지붕 위로 올라가시고
바람 불면 어머니는 꼬깃꼬깃 종이로 바람구멍 막으셨지요
추운 새벽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이불 덮어 주시고
조용한 밤, 잠드신 어머니 허리 위에 책 펴 놓고 공부하지요
어머니 몸 움직이면 책은 방바닥에 굴러떨어지고요
학교에서 돌아오는 골목길 성적표 불끈 쥐고 마구 뛰어갔어요
가난으로 날개가 꺾인 나는 선생님이 되고픈 꿈을 일단 접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장학금을 받는 나름 모범생이었고, 1974년 7월에 당시 삼성그룹의 제일모직 관리과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버지는 회사 첫 출근 날에 기뻐하시며 대문 앞에서 사진까지 찍어 주셨다.
자존과 긍정이 부족하면 내가 나를 부정하고 현실과 쉽게 타협한다. 소년은 어둠 속에서도 긍정과 자존을 잃지 않으며 지금껏 평생학습을 실천했다. 비 온 뒤의 무지개를 믿었고, 거친 비바람에도 꿈을 꺾지 않았다. 현재 대학교에서 청춘의 삶에 디딤돌을 놓아주는 위치에 섰으니 속 빈 강정은 아니리라 자신을 위로한다.
추억의 시간 여행을 하면서 잊고 산 귀한 것들을 새삼 발견했다. 그것은 외형보다 내면이 중요하고 고난 속에서는 어둠보다 빛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소년은 개천에서도 바다를 꿈꿨다. 우물 안 개구리는 벽을 타고 세상으로 나와 강가에 이르렀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어느새 인생 중턱을 훌쩍 넘었다. 개구리는 어두운 벽을 타고 오르면서 깨달았다. 용도 꿈이 없으면 한낱 미꾸라지일 뿐이고, 미꾸라지도 꿈을 꾸면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을.
과거에서 돌아온 소년은 이제 ‘미래 여행’을 준비 중이다. 오랜 세월 축적된 ‘긍정의 힘’을 품고 더 넓고 더 푸른 바다로 나아가는 꿈을 꾼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창창하니 소년의 미래 여행기에는 싱그러운 이야기들이 듬뿍 담기리라. 남은 여정에 힘찬 박수를 보내며 사유의 날갯짓으로 글쓰기를 향한 불꽃도 더 활활 타오르기를 소망한다.
《 한국산문 2024년 8월, 제218회 수필 공모 당선작
- 서울 출생
- 한국산문 2024.8 <소년의 미래 여행>으로 등단
-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 한국디지털문인협회 회원
- 전북 장수군 주최 제2회 정인승 선생 정신 선양 전국 글짓기대회 금상
- 저서 《바다를 꿈꾸는 개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