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이정환의 시조 이야기
석야 신웅순
덫에 채인
짐승 한 마리
목이 조이어 막 숨이 꺼져 갈 무렵
어딘가
한 송이 꽃이
벼랑 끝에 피고 있다
- 이정환이 「묵시록 3」
필자가 인용 시조를 찾다 발견한, 필자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왠지 범접할 수 없는 외경심이 느껴지는 시조로, 선(禪)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생각나게 했던 작품이다.
남송우 교수는 이 시조를 이렇게 말했다.
한 송이 꽃핌이나 시 한편의 완성이 그렇게 단순하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어쩌면 한 송이의 꽃핌은 바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그런데 한 세계의 열림 혹은 펼침 은 다른 한 세계의 닫힘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 성과 소멸 현상을 시인은 꽃의 피어남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죠.그것을 다시 묵시록에서 만 날 수가 있습니다.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다. 이백은 ‘천지는 만물이 머무는 여관이요, 시간은 영원한 나그네’라 했고 백발을 두고 어디서 된서리를 맞고 왔는가하고 말하지 않았는가. 봄과 여름을 어찌 경계 지을 수가 있는가. 사람이 경계를 지운 것이지 시간이 경계를 지운 것은 아니다. 겨울이 있어 봄이 있고 여름이 있어 가을이 있다. 한쪽은 소멸이요 한쪽은 생성인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생성과 소멸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삶과 죽음은 수유간으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옆에 있다. 위 시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무래도 이 시는 선시로 풀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울음이
저토록 깊이 녹아내려
천애에 닿는 것은, 천길 벼랑 내려서는 것을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에워쌀 저 도도한 울음
- 이정환이 「징」
두 번째 놀란 시조이다. 울음이 녹아내려야 천애에 닿고 그 벼랑을 내려서는 것이다. 그리고는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도도한 울음으로 모든 것을 에워싸는 것이다. 민족의 한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은 없으리라. 이 작품을 보며 왜 우리 시가인「가시리」가 생각날까. 가는 길 잡지 말라,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겠는가, 멀리 갔다 되돌아오는 것이니. 바로 우리의 정서, 징소리가 바로 그런 소리가 아닐까.
조윤제는 한국 사람 생활의 특질을 은근과 끈기라고 말했다. 징소리를 들어보라. 이 말 밖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들을 수가 없다면 시인의 시조「징」을 읽어보라.
시인은 오래 전에 시조집『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를 필자에게 부쳐왔다. 읽어보려고 했던 것이 10년도 훌쩍 넘겨버렸다. 시집한테 참으로 미안한다. 학문에 몰입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정년을 앞두고 그나마도 여유를 만든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시인은 1978년 시조문학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1981년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한국시조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시조집으로 『불의 흔적』,『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등이 있다.
서러움이 모이면 푸른 불빛 되는가
산 시오 리 길 돌아
문득 맞닥뜨린 사람
그 사람
손에 들려서
아득히 흔들리던 것
- 이정환의 「남폿불」
세 번째 말을 잃은 시조이다. 어쩌면 지난날 우리의 정서를 이리 잘 복원해낼 수 있을까. 남폿불은 그래도 잘 사는 집에나 있었지 가난한 집은 등잔불로 불을 밝히며 살았다. 그도 석유가 단다고 일찍 끄고 잠을 자라 부모님은 성화대셨다. 아버지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언제나 등잔 초롱을 들고 들녘 멀리 마중 나가곤했다. 한 밤 중 모르는 누군가와도 맞닥뜨리기도 했었고 이웃집 사람과도 맞닥뜨리기도 했었다.
아득히 흔들리던 아버지의 불빛이었다. 눈물 날 것 같은 멀리 마중 가던 그 불빛이었다. 서러움이 모여서 푸른 불빛이 된다고 했으니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정서이다.
대추나무 위에서 까치가 ‘깍깍깍깍’ 운다. 저 산 밑에서도 한 까치가 ‘깍깍깍깍’ 화답하고 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새는 혼자 울지 않는다. 무슨 사연인지는 잘 모르나 울음에 화답해주는 새들이 대부분이다. 금새 창가에서 울던 그 까치가 홀연 날아가 버렸다. 산에서 울던 그 까치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 간에 분명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나 보다.
옛날에는 성종과 유호인, 추사와 황산, 정철과 진옥, 임제와 한우 등과 같은 군신간, 친구간, 남녀 간에 시조나 한시 혹은 그림에서 화답시들이 심심찮게 있어왔다. 이것이 풍류였으며 여유였다. 현대에 와 이런 것들이 사라졌다. 얼마나 각박하게 살아왔으며 그리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
오종문 시인과의 아름다운 우정의 화답 시조가 있다.
배흘림기둥 끌어안고 가만 울어나 보렴
참으로 눈물 날 일
하고 많은 이 세상에
참으로
눈물 날 일이지
저물 녘 서녘 하늘
이곳까지 와서
그대 껴안고 울다니
소백 연봉이 하냥 저물고 있어서 그런가
마침내
뜬 돌 돼버린
붉은 바람 탓인가?
이정환 시집 『가구가 운다,나무가 운다』에 ‘다음 시조는 이종문 시인의 화답시이다. 아직 지면에 발표된 일이 없으나, 우의를 새기며 옮긴다’로 되어 있다. 이정환의 시조에 대한 이종문 시조의 화답 시조이다. 시조에 아직도 이런 멋이 살아있으니 시조의 맛은 이런 것인 아니겠는가. 시조의 예술성이 어떻더니, 심오한 뜻이 어떻더니하는 것도 중하지만 사람 사이의 우의를 생각케하는 시조야말로 더욱 중하고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눈물 날 일 이 세상에 하고 많아
배흘림기둥을 안고
가만히 울고 있는
울다가
저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나 이제 크게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아
눈물이 나지 않는 그것이 너무 슬퍼
비로소
흐느껴 운다
배흘림 기둥 안고
필자는 붓을 놓지 않았다. 40년이 훌쩍 넘었다.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쓸 수 있을까에만 집중했었지 시인처럼 붓에 대한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다. 시인의 말대로 붓은 하고 싶은 말을 죄다 적셔주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까지 젖은 채로 있는 것이 붓이다. 이 시조는 내게 와서 하나의 죽비가 되었다. 깨달음이란 이렇게 뒤늦게 찾아오는 것인가.
휘호로 고마움을 표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놓이는, 필자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고 싶은 말 죄다 적셔주지 않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몇 획으로 놓이는 의미
생애의 마지막까지
젖은 채로 있을지니
- 이정환의 「붓」
석야 신웅순 작 ‘이정환의 붓에 대한 화답 휘호’
서예문인화,7월호,90-93쪽.
[출처] 이정환의 시조 이야기-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첫댓글 덫에 걸린 목숨
벼랑에 피는 꽃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