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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복음서를 펼칠 때 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를 해드릴까요?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도 똑같습니다.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속이 많이 상하지? 내가 네 고통, 네 눈물 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 힘들 때 내가 바로 옆에 있음을 잊지 말거라. 내밀고 있는 내 손을 잡거라. 일어서거라.”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위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 한 말씀을 또 던지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애지중지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복음이 기쁘면 회개한 것이다
페니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급기야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있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찬송가였습니다.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재기에 성공하여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풀이 죽어서 그곳에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 등장하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한 사람들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시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을 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회개의 의미를 모른 채 복음을 믿으려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맙니다.
회개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보이면 회개 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를 죽이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참으로 고통임을 알아 나 대신 살아줄 예수님이 필요하면 그때 회개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무리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회개 없이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에 열심한 신자인 프랑케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부엌방엔 6년간 세 들어 살고 있는 서른여덟 살의 케테도 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온통비극이었습니다.
전화교환원인 남편은 가출했으며 남겨진 것은
가난에 중독된 창백한 세 자녀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케테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케테는 한 달에 한 번씩 지저분한 여관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가난과 고생으로 부쩍 늙어있었습니다.
참다못한 케테는 남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은 왜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아니에요, 지금 우리 곁에 있어요.”
“ ... ”
이 내용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벨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일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이 눈앞에 계셔도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에겐 도움을 청할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그것이 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낼 참 기쁜 소식이 됩니까?
그러면 회개한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디서 정보를 얻습니까? 아마 요즘 사람들은 거의 스마트폰을 열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정보를 얻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질문하면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 심지어 초등학생도 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었습니다.
이곳에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야단스러운 소음과 수만 가지의 관심사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 조그만 스마트폰 하나에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리도 많은 소리가 있는데 과연 주님의 말씀을 침묵 속에서 듣고 또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쉬울 수 있을까요? 너무나 많은 소리 속에서 주님께 대한 친미와 사랑 가득한 대화만 쏙 빼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동창 신부가 어느 순간 아침마다 일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나면 습관적으로 뉴스를 계속 검색해서 보는데, 아침이나 저녁이나 새로운 뉴스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똑같은 뉴스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음에 큰 반성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을 들어야 할까요?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서만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레위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큰 잔치를 벌이지요.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제자들에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요?”(루카 5,3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리를 커다란 죄인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매국노이고, 또한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를 만지는 우상 숭배자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아무런 죄가 없다고, 영적으로 건강하다면서 자기들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많은 말들. 영적 교만으로 가득한 생각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과 전혀 다름을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라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세상 안의 기준을 따르면서 세상의 말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깊은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밤이 있으면 낮이 있게 마련이고, 일 년 중 밤의 길이는 낮의 길이와 같다. 어느 정도 어두움이 있어야 행복한 삶도 존재한다(카를 구스타프 융).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5,28)
우리도 레위처럼
자신의 허물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자신의 욕망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서야 하리.
생의 한 가운데에서
영혼의 의사를 만난 이들이
그랬듯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분을 따르면
영혼의 의사는
치유된 그와 함께 머무르며
그의 기쁨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우리는 죄인이기 이전에 자녀입니다.
죄인보다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 우선입니다.
어떤 죄도, 어떤 어둠도, 어떤 그림자도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저는 매번 다락방 피정에서
사랑하는 교우들의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드리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속울음을 삼키시는 분들을 보며
저도 울컥하며
가슴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저에게는 그 시간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관상하는 시간입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처럼 너무 크고 흘러넘쳐서
타인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하루이기를...
흙탕물인 그 사람을
맑고 투명한 사람이 될 때까지
맑은 물을 줄 수 있는 샘물이
제 안에 있기를 청해봅니다.
오늘도 병든 이들과 죄인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목자로 살아야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3.08.토."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 32)
사람들의
잔치와
하느님의
잔치는
다릅니다.
우리를
회개의 잔치로
이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타인의 잔치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들의
잔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무나 많은
판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행복입니다.
단순한 행복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죄인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길에서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합니다.
회개는
사랑의 바보가
되는 단순한
기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이
너무나
똑똑한 척
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하는
죄인들의
잔치입니다.
우리의
셈법으로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느님의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회개로
회개는 잔치로
우리를 이끕니다.
죄인을
불러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감사
드립니다.
전혀 다른
바보들의
행복입니다.
관점이
바뀌는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