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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말이다. 아주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혼밥이나, 혼술, 혼영화, 혼여행 같은 것들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사치이며 필수재인지 어떤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알렝 드 보통의 “낭만적 연예와 그 후의 일상”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일화를 기억한다. 커스틴이라는 여주인공의 아버지의 이야기다. 커스틴이 7살일 무렵 커스틴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딸과 아내를 버리고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그가 남긴 유일한 설명은 종잇조각 위에 휘갈겨쓴 ‘미안해’라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다른 여자가 있었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혼자 있고 싶어서 자신의 아내와 딸을 버린 것이다.
만일 다른 여자 때문에 떠났다면, 단지 혼인 서약을 배신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혼자 있고 싶어서, 더욱 오롯이 혼자이고 싶어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아내와 자식을 버린 것은 훨씬 더 심각하고 추상적이고 파괴적인 거부였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중에서
커스틴의 아버지는 딸을 떠난 이후로도 종종 자신의 어린 딸에게 종종 선물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커스틴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아홉 살짜리에게나 맞을 법한 카디건이 소포로 도착한다. 커스틴은 자신을 떠나버린 아빠에게 소포를 돌려보내면서 소포 발송자에게 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바람을 알리는 쪽지를 동봉한다.
이 이야기는 커스틴과 라비의 결혼 후 일상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 사용된 작은 일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알렝 드 보통이 내게 보내는 하나의 경고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지금 네가 혼자 있고 싶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면 머지않은 시점에 네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너에게 이야기할 거야. 아빠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나는 단순히 혼자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혼자 있고 싶다는 욕망은 섹스보다 강렬하다.
내 아이가 세 살 무렵 나는 7살이나 9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선배들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내가 힘든 것은 그냥 내가 키우기 힘든 시기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런 것이냐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수월하게 되는 것이냐고? 나는 물었다. 아이를 셋 키우는 여자 선배는’ 아이 하나 키우는 것은 발로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를 둘 키우는 여자 선배는 ‘미운 4살, 죽이고 싶은 7살이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작은 위로를 받고 싶었던 나에게 이런 말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힘내라고,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괜찮다고,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운 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고, 지금 당장 혼자 있고 싶은 격렬한 마음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괜찮다고. 그리고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5살이 될 무렵부터였다. 작년 11월부터 글을 써서 브런치에 등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집 앞 도서관에서 ‘판의 미로’라는 영화를 온전히 그리고 끊김 없이 보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일상의 일부분을 온전히 혼자 있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맞벌이를 하고, 아이를 키우며, 야근을 상습적으로 하고, 가사도우미나 장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5살이 되어 유치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다르다. 사실 우리 집 아이를 키운 8할은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후 3개월부터였다. 매일 8시에 아이를 맡기고 6시 반에 아이를 찾아왔다. 어린이집은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게 해주었고, 편식을 하는 습관을 많이 바로 잡아주었고, 그 외 응당 부모가 훈육해야 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아이에게 교육시켜주었다. 그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이집의 문제점은 아이의 낮잠시간이다. 어쩔 수 없다. 영유아는 낮잠을 자야 제대로 성장하는 것이니까. 어린이집의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추산키로는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1.5시간에서 2시간 정도 잔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무럭무럭 자랐겠지만 아이가 집에 오면 잠을 자지 않았다. 나는 내 옆의 차장님의 아이가 8시에 자서 다음날 아침 7시에 쨍하고 눈을 뜬다는 이야기가 마치 환상 속의 동화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이가 자는 그 시간 동안 김진명의 소설을 읽거나 아내와 와인을 마신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미치도록 부러웠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아내가 전업주부였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종일반으로 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낮잠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형성된 것이고, 그로 인해 그의 밤은 사치스러울 만큼 여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 아이는 11시 혹은 12시에 잤고 7시 반 정도 되어서야 가까스로 일어나서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울부짖곤 했다. 어쩔 수 없다. 어린이집은 낮잠을 많이 재우기 때문이다. 밤 11시까지 아이에게 유튜브를 켜주거나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서 아이와 놀아주다가 잠들곤 했다. 잠을 재우기가 왜 그리 힘들던지. 맞벌이를 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종일 보내는 부부들은 이 부분을 감수해야 한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다른 가장 커다란 차이는 유치원은 아이들 낮잠을 재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식 어린이집과 다르게 넓은 교실과 놀이터가 딸려있는 유치원에서 아이는 좀 더 많은 운동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유치원생이 된 아이는 집에 와서 밥 먹고 씻은 다음에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러다 9시에 졸리다면서 침대로 올라가서 저 혼자 잠들어 버리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 그것은 얼마든지 주말에 벌충할 수 있다. 아이가 잠들면 나는 총알처럼 샤워를 하고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려 댄다. 아내도 보고 싶은 드라마를 마음껏 본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기적 같은 평화의 밤을 보낸다. 그리고 그렇게 잠을 정시에 충분히 잔 아이는 훨씬 좋은 컨디션으로 아침에 눈을 뜬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울부짖음의 빈도가 극적으로 떨어졌다.
두 번째로 상황이 개선된 이유는 아이가 크면서 사교성이 늘었다는 것이다. 3살 무렵 처음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에 갔을 때 나는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2시간 동안 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져 신나게 놀다(하도 놀아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다) 내게 와서 구슬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곤 했다. 2시간의 온전한 휴식을 내게 선사해준 아이에게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슬아이스크림을 사주곤 했다. 참 좋았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이가 키즈카페에 식상함을 느끼면서 이제 아이를 키즈카페에 데리고 가도 아이가 혼자서 노는 시간은 20분이 채 넘지를 않는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내게 와서 함께 놀자고 졸라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체로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키즈카페를 가곤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휴식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서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즐겨가는 키즈카페에 갔다. 라푼젤 옷과 가발을 씌워주자 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3시간이 되도록 나타나지를 않는다. 유치원에서 함께 놀던 친구를 만나서 실컷 놀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이런 행운이 좀체 없었다. 그동안 나는 파산에 관한 글을 신나게 휘갈겨댔다. 이런 행운이 가능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유치원은 어린이집보다 인원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동네 키즈카페에 가면 일단 얼굴을 아는 유치원 언니, 오빠, 친구를 만날 확률이 어린이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일단 안면을 아는 유치원 친구들과 아이는 꽤 잘 논다. 두 번째는 아이가 유치원에 가서 잘 모르는 언니 오빠 친구들과 노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받았다는 것이다. 같은 유치원 친구가 아니더라도 그냥 비슷한 또래가 있다면 꽤나 자연스럽게 가서 같이 어울린다. 전에는 구경만 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아이가 말이다. 바로 지금도 그렇다. 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아이는 지금 처음 본 언니와 함께 미끄럼틀에서 1시간째 놀고 있는 중이다. 봄이다. 미세먼지도 없다. 나는 아이가 자란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모든 것이 충족된 느낌이다.
그리고 상황이 개선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바로 아이와 나의 관계다. 아이의 인격이 형성되고 그것을 표출하는 수단이 훨씬 세련되었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 자신이 포기해야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나 또한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때때로 아이가 인지하지도 못한 시점에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다투고 협상하지만 대체로 서로가 만족할만한 타협점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와 아이가 서로에 대해 조금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가 원하는 것은 아래의 세 가지다. 아래의 조건만 충족되면 아이는 천사처럼 혼자서도 잘 논다.
1. 배고프지 않을 것
2. 졸리지 않을 것
3. 활동량이 충족될 것
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아이는 레고나 색연필을 가지고 혼자서도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대체로 아이가 혼자 제대로 놀지 못했던 것은 앞의 세 조건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색연필이나 레고를 던져주면서 이거 가지고 좀 놀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이는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면 나는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아이패드의 유튜브 키즈를 실행시켜 아이에게 주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시간을 벌었지만 아이에게는 못할 짓을 했었다. 이런 날은 유예된 처벌이라고 할까? 아이는 그런 날 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다음날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울부짖었다.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다.
어제는 밥도 잘 먹였고, 전날 잠도 충분히 재웠다. 활동량이라면 운동장을 5바퀴 정도 달렸고, 술래잡기를 5번 정도 했다. 30분 정도 소요된다. 경험상 이 정도면 아이가 100% 방전된다. 그렇게 한번 방전시키고 밥 먹이고 샤워를 시키면 아이는 얌전해진다. 갑자기 레고와 색칠공부, 책 읽기에 고분고분하게 흥미를 느끼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어제 아이는 유니콘 색칠을 했고(이건 내가 좀 거들어줬다), 레고로 동물원을 만들었다(이건 아이가 혼자 했다). 나는 레고를 하는 아이 옆에 앉아 조조 모예스의 ‘Me before You’를 읽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읽어보는 핑크색 제목의 책자인지 모르겠다. 책이 달았다.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은 엄마, 아빠들이여. 조금만 참으시라. 언젠가 그대들도 홀로 레고를 조물딱 거리는 아이의 옆에 앉아 조조 모예스를 읽을 수 있는 평화의 날이 찾아올 것이다. 머지않아 말이다.
첫댓글 인내의 삶이군요.언젠가는 혼자의 몸^^
다른 사람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내 핏줄은 오죽하겠어요
어른들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것처럼 아이들도 혼자 놀게 하는게 아주 중요한데 요즘은 너무 모든것을 모든 시간을 다 통제하려고해서 문제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