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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9월26일 월요일 [(녹)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수도회] 허세를 버리고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는 행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욥 1,6-22
† 복음 루카 9,46-50
◈ 오늘의 묵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에 버릴 수 없는 것, 모든 사람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력 욕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어린이의 단순함이 그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는
지상의 가치와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권력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곳에 있습니다. 가난과 겸손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늘 나라의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작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의 전형은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욥 성인의 위대함은 자신의 재산과 자녀들, 곧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단순함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욥
성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되,
하느님만이 자신을 알아주고 그분이 준비하여 놓은 천상의 상급을
얻으려 살아가는 순박함과 겸손함을 간직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우리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천상 지혜가 넘치게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람에 대한 사랑의 관심을 갖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016년 다해 9월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욥기의 말씀입니다. 1,6-22
복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6-50
어제는 정말로 바쁜 하루였습니다. 오전에는 교구에서 주최하는
순교자성월 기념 특강을 했고, 오후에는 전부터 알고 있었던 청년의
혼배미사 주례를 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지로 돌아오는데
피곤함이 밀려옵니다. 하긴 특강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서 새벽
2시에 일어났었거든요. 따라서 피곤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거죠.
졸음을 꾹 참고서 겨우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특강을 나가면서 창고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고, 계속해서 정리를 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옷을 갈아입고서 함께 했습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모두
창고에 보관하다 보니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고 그냥 창고 안에
묵혀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과감하게 버리자고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좋은 물건들이 많은 것입니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도 단지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로
이동된 것 같습니다. 이 물건을 처음 구입할 때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분명히 잘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구입을
했었고 기분 좋게 사용했겠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사용빈도가
줄게 되었고, 결국은 창고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것이지요.
즉, 낡고 보잘 것 없어서 버려진 것이 아니라, 버려져서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관심을 갖지 않아 버려지는 것이 꼭 물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 인간관계 안에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휴대전화 주소록을 한 번 보십시오. 주소록에 남겨졌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친분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이름
중에서 몇 년 동안 연락하지 않게 되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관심을 갖지 않다보니 점점 잊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당시에 어린이는 그리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설익은
과일처럼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방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가장
낮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려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버려져서 결국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되는 물건처럼, 사람도
내 관심에서 사라질 때 보잘 것 없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관심을 늘 갖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힘을 모으면 더
위대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성화.
짧은 기억력의 힘
기억력이 좋은 것이 좋을까요? 기억력이 나쁜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기억력이 좋다면 생활하는데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기억력 좋은 모습을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 골프 세계
4대 대회를 모두 석권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3번이나 달성하여
골프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잭니클라우스는 자신의 성공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한 샷은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나쁜 샷을 오래 기억하면 경기를 망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미식축구에서 선수시절에는 패스의 달인으로 불렸고, 나중에는
명감독으로 자리를 매겼던 오토 그레이엄 역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지요.
“아주 짧은 기억력입니다. 실수를 잊고 빨리 다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신체 조건이나 재능보다 중요합니다.”
좋은 기억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나쁜
것은 기억하지 않고 지금에 충실하게 집중할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례를 섰던 인천의 주안1동성당. 미사 전에 찍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허세를 버리고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는 행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루카 9,46-50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허세를 버리고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는 행복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수난을 예고하시고(9,44-45) 예루살렘을
향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에 대해 논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선 제자들이지만 아직은
영(靈)의 눈을 지니지 못한 소경이요, 세상과 육의 정신으로부터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십니다(9,48ㄱ)
그렇게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받아들여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서로 사이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때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9,48ㄷ). 이런 가르침은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도록 재촉합니다. 요즈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은 경향이 강해져, 심지어 ‘있어빌리티’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있어빌리티'란 '있어'와 능력이라는 영어의
‘어빌리티’(ability)를 합성한 말입니다.
‘부자형’ 있어빌리티는 고가의 물품을 SNS 속 사진에 살짝
드러냄으로써 우회적으로 재력을 과시합니다. '인맥형'
있어빌리티는 SNS상의 프로필 작성과 구구성원의 면모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과시합니다. '센스형'은 자신만의 장소나 음식을
올림으로써 독특한 취향을 알리려 합니다. 그러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SNS의 그런 모습을 진짜로 보는 의견은 6.4%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 허세라는 말이지요.
제자들의 경우도 하느님도 예수님도 아닌 자신들이 지닌 것들을
내세워 서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허세를 부린 것입니다.
우리도 속물근성이 발동하면 그런 처신을 하곤 하지요. 그렇다면
참으로 실속 있고 ‘큰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려는 태도를
버려야겠지요. 내 삶의 기준이 하느님과 예수님으로 삼는다면 삶의
방향이 뚜렷해집니다. 시작도 선택도, 관계맺음이나 일의 실행도,
궁극적인 내 인생의 목표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착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기준인 이타적 사랑을
지니지 않은 채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하여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비교하려거든 하느님과 비교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작아지시고
비우신 예수님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할 줄 아는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있어빌리티'의 허세를 철저히 버리고, 다른 이에게 드러나는 선을
시기하지 않으며,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이들 아래 자신을
둘 줄 아는 겸손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 높아만 가는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님을
향한 그리움을 키워가고, 허세를 버리고 겸손하게 일상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견뎌내며,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음으로써 진정 '있어
보이는'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욥기 1,21)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내가 가진 모든 소중한 재산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황당하게 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럴 때조차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하느님의 뜻이라고 순명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우리는 원망하여 울고불고 야단을 떨다가
결국엔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고 말겠지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구요.
오늘 하느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말씀하시네요.
"만일에, 만일에 말이다.
내가 너에게 준 것 하나 둘씩 다 거두어 간다면 너는 어쩌겠니?"
원래 제 것이라고는 아무것 없었던 걸요.
하느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통해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살 수 있도록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머물 곳도 마련해 주셨지요.
그리고 함께 의지하며 험한 세상 살아가라고
좋은 사람들을 보내 주셨지요.
때가 되면 하나 둘씩 떠나가게 마련이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을 돌아가는 인생 당연하지 않겠어요.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 거져 받은 것들을
하나씩 다 돌려 드리고나서야
우리의 본향인 천국에 이를 수 있답니다.
오늘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잘 쓰고 깨끗하게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함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2016년 다해 9월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독서: 욥기 1,6-22
제가 주님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 가르침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성경말씀을 쏟아내고 있을 때
이런 충고를 들었습니다.
“넌 너무 맞는 말만 해.”
맞는 말을 하는데 왜 충고를 받았을까요? 그건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 깨져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확신하고 있을 때가 가장 불안한 상태인 것을.
그래서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혹은 아직도
제가 그런 확신 속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무서운 생각까지 듭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전부일까요?
자신이 옳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옳은 모습일지라도 주님은 어떤
의도로 그 옳은 모습을 완전히 깨버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참으로 옳은 모습으로 살았지만 항상 죄를 지을
불안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다면 전과 같은 모습이 되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를 죄에 떨어지게도
하시고 견디기 힘든 고통도 주시는 것입니다. 금도 단련을 받듯이
성인도 단련을 받습니다.
욥기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욥은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데도 사탄의 말을 듣고는 욥을 사탄의 손에
넘겨버리십니다. 사탄에게 욥의 의로움을 증명한다고 사탄이
돌아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고통이
아니면 단련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시련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세력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죄에 떨어뜨리고 고통을 주기 위해 안달이 난 세력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그 사탄의 손에 넘기셔서 그를 단련시키십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 재난 영화 ‘월드워 Z(World War Z)’에는
위기관리에 대한 여러 가지 국가 모델이 등장합니다. 그중
이스라엘은 ‘고문 10명 중 9명이 같은 주장을 펼쳐도 나머지 1명은
어떠한 이유를 찾아서라도 그 의견이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는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로 묘사됐습니다.
전 세계가 좀비의 공격을 당할 때 고문 9명은 좀비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나 ‘10번째 남자’ 1명만은 좀비에 대한 방어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좀비로부터 안전한 독보적인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건강한 나라는 모두가 나라 편을
드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단련시켜 줄 반대
세력도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반드시 반대하고 어려움을 주는 사탄의 역할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가톨릭교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톨릭 시성
조사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칩니다. 그 과정 안에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변호사라는 역할을
두는데, 그는 사사건건 시성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은 의무적으로 '악마'의
관점에서 사사건건 의혹을 제기하고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자칫 조사위원들이 성인 후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로 기울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추대되는 것처럼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맡겨져 자녀, 재산, 건강, 명예 등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잃고 나서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참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하고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도 아직 욥과 같은 시련을 겪어보지는 않았으니 너무 자신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은 연옥과 같은 시련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단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시민 중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완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9월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루카 9,46-50
지난 목요일 ‘은경축’ 미사가 있었습니다. 저와 동창들이
추기경님께서 주례하시는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은경축을
축하하는 작은 안내책자가 있었습니다. 책자에는 신부님들의
사진과 그동안 거쳐 온 사목의 자리들이 있었고, 서품 성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희들의 은경축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부족한 저희들이 25년을 사제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들의 서품 성구를 보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서품 성구와 신부님들의 지난 25년을 돌아보니,
대부분 서품 성구의 말씀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고, 어떤 쌍날칼 보다 예리한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을 듣고, 안내책자에 있는 신부님들의 사진과
서품 성구를 보았습니다. 정말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자신들이
선택한 서품 성구의 말씀처럼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15년을 ‘빈민사목’을 하고 있는 동창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서품 성구를 정했습니다. 13년을 ‘교정사목’을 한 동창도
묶인 이를 풀어주겠다는 서품 성구를 정했습니다. 12년 동안
‘장애인’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 동창 역시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는 서품 성구를 정했습니다. 다들 자신들이
정한 서품 성구를 삶으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많은
결실을 맺도록 은총을 주셨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25년을 생각하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서품을 받고 첫
본당에 갔는데 곧 ‘열병’에 걸렸습니다. 보름동안 입원을 했었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엄한 신부님으로부터
사제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웠고, 사랑이 넘치시는
신부님으로부터 사제직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사목국에서 교육 담당을 하기도 했고, 청소년국에서 수련장 업무를
하기도 했고, 지금은 성소국에서 사제 양성을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기회가 있었고, 복음화 학교를
담당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주님의 은총입니다.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잘 모를 때입니다. 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의심을 통해서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합니다. 과학자들에게 의심과 회의는
필요한 연구 자세입니다. ‘왜’ 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과학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계속되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던
적이 있으면 지금은 바람을 피우지 않더라도, 늘 의심을 하게
됩니다. 도박도 비슷합니다. 한번 잘못한 적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던 ‘보호감호’가 이와 비슷합니다. 잘못을 했던 사람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범죄자의
‘전자발찌’ 부착도 이와 비슷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인들에게도 자주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사업에 실패를 하는 경우, 봉사를 많이 했는데
어느 날 건강이 나빠진 경우,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는데
대학 입학에서 떨어진 경우 등이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21년 전쯤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목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저에 대해서 주교님께 말을 하였고,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주의를 받았습니다. 주교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의심을 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은 나와 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돌아와서 성경책을 보았는데,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간다 해도 감사
할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욥은 가진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잃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누구를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저는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고,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계속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분노하면서 지냈다면
저는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제게 다가온 위기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욥 성인의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겸손한 마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9월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루카 9,46-50
겸손한 마음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 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십니다.“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가9,48).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하든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뜨는 신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신자 한 분이 매번 자리를 뜨니 그 이유를 좀 알아봐
주세요.’하고 회장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아니나 다를까
강론을 시작 하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기다리던 회장님이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어떤
사정이라도? 그랬더니 신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예. 저는
화장실에 갑니다. 무슨 특별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잠자기
전에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이 있거든요. 뭐 잘못됐습니까?”
@@@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해도 안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되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한다[글/허준혁].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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