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담긴 과학
예레 14,17ㄴ-22; 마태 13,36-43 /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2026.7.28.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는 영성만이 아니라 과학적 이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이치는 바로, 가득 차는 것(盈)을 경계(戒)하는 술잔(杯) 즉 계영배(戒盈杯)의 과학에서 나옵니다.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고 절제하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술잔은 잔의 70~80% 정도만 채우면 마실 수 있지만, 그 이상 욕심을 내어 가득 채우면 밑으로 술이 모두 새어 나가도록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해 과학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계영배는 사실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습니다. 어느 높이 이상으로 액체를 그 안에 담으면 사이펀 효과로 인하여 액체가 잔 바닥으로 모두 새어 나가게 고안된 잔입니다. 계영배는 보통의 잔과 겉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잔의 중심에 구멍이 뚫려 있는 작은 기둥이 거꾸로 된 U자 형태로 세워져 있습니다. 이 구멍은 잔의 바닥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형태의 잔을 처음 고안해 낸 사람은 피타고라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도 이 원리가 알려져 있어서 잔이나 그릇을 만들어서는 지나친 욕심을 피하기 위한 거울로 삼았다고 합니다. 특히 공자는 계영그릇을 의자의 오른쪽에 두고 반성의 거울로 삼았는데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 ‘좌우명(座右銘)’입니다. 여기서 ‘좌우’가 왼쪽과 오른쪽을 뜻하는 ‘좌우’가 아니라 앉는 의자를 뜻하는 좌(座)자를 써서 의자의 오른쪽에 둔 계영그릇을 뜻하고, 그래서 ‘좌우명’은 그 계영그릇 자체나 또는 임상옥이 그러했듯이 그 계영그릇의 옆이나 바닥에 새겨 놓은 경구를 뜻합니다.
계영배나 계영그릇을 액체로 채우면 채워진 액체가 기둥뿌리의 구멍으로 들어가게 되어 중앙 기둥 꼭대기 내부의 구멍 공간도 채우게 됩니다. 채워진 액체의 높이가 이 공간의 높이보다 낮으면 잔이나 그릇은 정상적으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높이 액체가 채워지게 되면 액체가 기둥뿌리의 구멍과 기둥 속 공간을 거쳐 잔이나 그릇 다리의 구멍으로 흘러 나가게 됩니다. 일단 액체가 흘러 나가기 시작하면 중력이 작용하여 중앙 기둥 내부에 사이펀(Siphon)을 형성하게 되고 모든 액체가 기둥뿌리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원리입니다.
사이펀이란 높은 곳에 있는 액체를 기압차와 중력을 이용해 낮은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연통관을 말합니다. 사이펀 안이 액체로 가득 찬 상태라면 사이펀의 원리에 의해 액체가 빨려 나가며, 이러한 현상을 사이펀 작용이라고 합니다. 화장실에 설치된 좌변기의 물이 이런 원리로 내려갑니다. 과학자들은 이 사이펀의 원리가 유체의 속력이 증가하면 압력이 감소한다는 베르누이(Daniel Bernoulli, 1700~1782)의 원리에 따라 작동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액체를 구부러진 관을 따라서 이동시키면 관 내부의 이동하는 액체의 압력이 대기압 보다 감소해서, 대기압이 높은 곳의 통의 수면을 누르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비행기가 이륙하는 원리도 이런 원리로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이펀 작용을 가능하게 한 베르누이의 원리를 비롯하여 과학자들이 자연현상에서 발견해낸 모든 원리들은 눈에 보이는 질서를 잘 관찰하여 그 속에 들어있는 규칙적인 질서를 알아냄으로써 인류의 문명에 보편적으로 응용될 수 있도록 창의성을 발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자연현상 속에서 알아낸 진리만이 진리가 아니고, 인간현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신 내용이 또한 그런 진리입니다. 이미 일전에도 묵상했던 밀과 가라지의 비유인데, 이 단순해 보이는 비유 속에 보편적으로 인간현상에서 발견되고 또 유념해야 할 원칙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가라지의 숨은 역할입니다. 가라지는 그 자체로 밀의 성장을 방해하는 훼방꾼이기는 하지만, 밀은 가라지의 뿌리와 땅 속의 수분을 흡수하려는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야 하고, 이 경쟁을 통해서 뿌리가 튼튼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가라지들은 우리 마음의 선함이 진정으로 선한지를 검증해 주는 사이펀 효과를 냅니다. 선한 지향을 가지고 하던 일일지라도 감당할 정도를 넘어서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일 자체가 모두 무너지게 됨으로써 더 이상 과욕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카리옷 유다를 제자단의 회계와 섭외 업무를 맡길 정도로 신임해 주셨습니다만, 어느 날 악마가 유다에게 배신의 마음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걸 아시게 된 예수님께서는 매우 마음이 힘드셨을 테지만 내색하지 않고 지켜 보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 때에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가서 네가 할 일을 하여라.” 비록 유다의 밀고로 촉발된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의 살인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빌라도까지 끼어들어 당신의 죽음이 결정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인성으로야 예수님께서도 차마 피하고 싶은 십자가요 고난의 잔이셨을 것이기에 게세마니 동산에서 밤새 그렇게 힘든 기도를 바치신 것이겠지만 신성으로서는 달랐습니다. 유다가 수난 시기를 더 앞당겼을 수는 있지만, 이미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는 이래저래 진행되어 오던 일이었기 때문이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는 메시아로 파견되신 당신의 희생이 불가피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밀고로 인한 적당들의 계략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을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십자가 수난으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즉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 과업이 잠시 멈추더라도,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오히려 본격화될 수 있도록 결단을 내리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남 유다 왕국에서 왕과 종교 엘리트들이 우상숭배를 일삼은 끝에 나라의 공동선이 피폐하게 되자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은 동족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한탄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저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예레 14,21) 하고 하느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간절히 올렸습니다. 이런 상황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그분은 아예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제자들과 함께 세우셨습니다. 유다의 배신이 미처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전이었고, 당신 최후의 운명을 예감하신 후였습니다. 그 계약은 수난으로 인한 부활을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그들에게 사도로서의 확신을 심어 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성령을 보내주시어 사도들이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드러난 신앙의 신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부활 신앙입니다. 밀밭에서 자라는 가라지들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면 가라지들을 불태워버려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야 수확한 밀을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계영배에 들어 있는 과학적 이치 만큼이나 밀과 가라지 비유에도 심리적이고 영성적인 이유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 이것이 과학적으로 생각해 본 십자가의 영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