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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할멈과 그냥할멈 & 해적고양이
김용준
네 시다. 때가 되었다. 마당 뒤편에 숨어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본다. 고양이 서너 마리가 담장 아래에서 어슬렁거린다. 좋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뽀글뽀글 흰머리에 꽃무늬가 그려진 헐렁한 바지, 그냥할멈!(다른 애들은 보통 할머니라고 부르지.) 그냥할멈이 사료가 가득한 바가지를 들고 마당으로 나온다. 그냥할멈은 고양이 먹이 줄 때와 술 마실 때만 눈에 생기가 돈다. 바가지에 있는 먹이를 한 움큼씩 바닥에 쌓는다. 고양이들이 다가가 정신없이 먹는다. 하나둘 고양이가 더 모인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풀쩍 뛰어 올라오는 한 마리. 왔다! 저 녀석, 해적고양이. 하얀 털이 난 배, 황토색과 검은색 털이 난 등. 검은색 털이 한쪽 눈까지 내려가서 애꾸눈 해적처럼 보인다. 거기다 칼로 자른 것처럼 한쪽 귀에 각이 져 있는 게 생김새부터 살벌하다. 녀석이 나타나면 다른 고양이들은 먹기를 멈추고 슬슬 뒷걸음질한다. 나도 짧은 머리에 까맣게 타서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제법 무서워하는데…….
어라? 해적고양이가 나타났는데도 비키지 않는 녀석이 있네. 혼자서 계속 사료를 먹는다. 새로 온 놈인가 보군. 해적고양이가 슬슬 다가가 그놈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캬!”, 맞은 놈은 놀라 찍소리 못 내고 물러선다. 해적고양이, 무서운 놈. 역시 만만치 않아. 오늘은 반드시 저 녀석을 잡아서 길들일 거야. 내가 여기 숨어 지켜보는 이유지.
또 다른 이유는 저 녀석이 그냥할멈에게만 다르게 행동한다는 거야. 저것 봐, 먹이를 먹고 나니 그냥할멈의 다리 옆을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비비고 애교를 부리잖아. 꼬리를 살랑살랑. 그냥할멈이 쓰다듬어 주니까 배를 뒤집고 발랑 드러눕네. 내가 가면 사납게 하악거리기만 하는데. 차별하다니, 나를 무시하다니! 이럴 때가 아니야. 내겐 목적이 있었지. 녀석이 드러누워 있는 바로 지금이야!
나는 잽싸게 튀어 나갔어. 녀석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 아깝다, 내 손이 닿기도 전에 녀석이 재빠르게 일어나서 담장 아래로 도망쳐. 다른 고양이들도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췄어. 해적고양이만 담장 위로 올라가 나를 노려 며 “캬!”하고 물려는 듯이 이빨을 드러내. 왜? 넌 왜 안도망가? 내가 그냥할멈을 어떻게 할까 봐? 걱정하지 말라고, 그냥할멈과 나는 뭐랄까, 우호적인 관계니까. 사이가 좋단 말이야. 물론 이따 밤에 캐스터네츠 대신 그냥할멈이 잘 때 빼 둔 틀니로 그냥할멈 발가락에 박자 맞추기를 하겠지만 말이야.
“아야!”
그냥할멈이 내 머리를 쥐어박네.
“아이고, 웅재야. 고양이 놀라게 왜 그러냐!”
그제야 해적고양이는 담을 넘어 사라졌어. 그냥할멈이 나를 때리는 걸 보고는 그냥할멈 서열이 나보다 위라고 생각했나 봐. 동물들은 내가 세네, 네가 세네, 누가 센지 서열을 정하잖아.
“철컹.”
대문이 열려, 큰일 났다! 조금 전에 차 소리가 들리더니, 이 집에서 가장 서열이 높고 무서운 존재가 대문을 열고 들이닥쳐. 짧은 머리에 마르고, 차가워 보이는 눈빛, 마귀할멈!(다른 애들은 엄마라고 부르지.) 마귀할멈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그냥할멈에게 뭐라고 해.
“아이참, 엄마! 고양이 먹이 주지 말라니까!”
“어째 오늘은 빨리 왔냐?”
“거래처 갔다 왔어. 고양이 먹이 주지 마. 마당에 똥 싸 놓는다고!”
“고양이는 땅 파고 볼일 보는디…….”
“시멘트 바닥을 어떻게 파! 급하면 그냥 싸 갈기는 거지. 웅재 넌 거시서 뭐해, 들어가서 숙제해!”
“싫다!”
“뭐, 임마!”
마귀할멈은 아침이면 회사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야 돌아와. 마귀할멈은 집에 고양이가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안됐지만, 오늘은 운이 나빴어. 이렇게 일찍 마귀할멈이 올 줄이야. 마귀할멈은 한바탕 짜증을 내고 먼저 집으로 들어갔어. 난 마당 뒤편으로 피해 있었지.
마귀할멈은 그냥할멈을 아주 싫어하는 게 분명해. 이것도 그냥할멈 탓, 저것도 그냥할멈 탓, 아빠가 집을 나간 것도 그냥할멈 탓, 내가 망나니 같은 것도, 자기가 대학을 못 다닌 것도 그냥할멈 탓이라고 하거든. 마귀할멈은 이모를 공부시키느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돈을 벌었대. 내 생각에는 마귀할멈이 공부를 못 해서 대학에 못 간 것 같은데 말이야. 엄마가, 아니 마귀할멈이 공부를 잘했으면 아들인 나도 공부를 잘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긴 마귀할멈은 나를 보면 늘 저런 게 어디서 나왔느냐고 투덜대지.
이모는 마귀할멈의 동생이자 그냥할멈의 딸이지만,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어. 학교 다닐 때는 만날 1등만 했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머리가 길고 옷도 예쁘게 입는 이모는 마음마저 착한 천사라고 할 수 있어. 작년 겨울에 그냥할멈이 다리가 아파서 수술하고 두 달 정도 누워 있었는데, 이모가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어. 그냥할멈의 다리랑 궁둥이를 이어 주는 뼈가 썩었다고 했어. 그때 난 사람이 늙으면 썩는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내 이가 시커멓게 썩은 걸 보고는 몸이 썩는 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냥할멈이 썩은 뼈를 바꿔 끼울 때도, 내가 이를 뽑을 때에도 이모가 병원에 데리고 갔어. 이모는 의사인데 큰 병원에서 몇 년 동안 일해 줘야 한 대. 지금은 병원 옆에서 혼자 살고 있지. 그래도 나랑 결혼하면 같이 살 테니 걱정 없어.
졸린 눈을 비비며 대문을 나섰어. 등교 시간이 5분밖에 안 남았네. 뭐 걱정할 건 없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5분이면 가니까. 아주 가깝지!
가깝진 하지만 학교에 가는 게 즐겁진 않아. 맘에 안 드는 녀석이 하나 있거든. 두 달 전 4학년이 되면서 처음 같은 반이 된 철규라는 애야. 녀석은 늘 인상을 쓰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키가 크고 힘도 세서 반 아이들은 찍소리도 못 하지. 눈도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게 아주 사나워 보여.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갔는데 항상 뒷자리에 있던 녀석이 안 보여!
“걔, 농구부 입단 시험 보러 가서 오늘 안 와.”
아싸! 녀석 키가 크긴 큰가 보군. 그럼 오늘 이 교실에서는 내가 왕인가. 고양이들이 해적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반 아이들이 나를 무서워했으면 좋겠어.
어라, 무서워하는 건 둘째치고 아이들이 내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반장 옆에만 몰려 있는걸? 기분이 좋지 않군. 반잔 녀석이 게임기를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잇어. 재밌겠는데? 난 반장에게 다가갔어.
“야, 줘 봐. 나도 좀 하자.”
“뭐냐, 넌?”
반장이 의자에 앉아서 허연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 봐. 이 녀석 아빠는 일본으로 출장 갔다 올 때마다 선물을 사다 줘. 그럼 반장은 매번 그걸 학교에 가져와서 자랑하지. 이번 건 아직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게임기. 최신형 게임기가 부러워서가 아니야. 그냥 녀석이 나에게 건방졌기 때문이지. 해적고양이가 맘에 안 드는 녀석을 때리는 거 봤지? 나도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쳤어. 근데 눈깔을 정통으로 때린 것 같아.
“아야!”
녀석이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면 항상 그냥할멈만 있어. 마귀할멈은 저녁에 오니까. 그냥할멈은 수술한 게 낫지 않았는지 다리를 조금씩 절어. 어차피 학교가 멀지 않아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선생님이 보모님을 모셔오라고 했거든. 왜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냐고? 혹시라도 내가 ‘담탱이’라고 불렀던 게 담탱이 귀에 들어갔다간 또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할 테니까. 어쨌든 학교에는 맨날 그냥할멈이 가니까 선생님도 그것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아.
반장이 맞은 곳도 괜찮고, 반장 엄마가 게임기를 왜 학교에 가져갔느냐고 오히려 반장을 호내는 바람에(감사하게도!) 그냥할멈과 난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었지.
마귀할멈이었다면 빗자루로 나를 반쯤 죽도록 때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냥할멈은 나 때문에 학교에 불려 가도 화내지 않아. 돌아가는 길에 나한테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줬어. 그거 알아? 그냥할멈은 내가 사 달라고 하는 건 다 사줘. 그냥할멈이 돈 좀 모아 두면 나중에 게임기 사 내라고 하려고. 그래서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게 많지만 참는 중이지. 조만간 게임기를 갖게 되리라! 난 게임기 파는 가게에서 구경 좀 하려고 그냥할멈에게 먼저 가라고 했어.
한참 동안 게임기랑 새로 나온 게임을 구경했어. 전시된 게임기로 내가 혼자 너무 오래하니까 가게 주인아저씨가 눈치를 줘. 옜다! 다른 애에게 조종기를 던져 줬어.
가게에서 집으로 가려면 학교 옆을 지나가야 해. 학교 옆, 풀숲 사이에 난 길로 들어섰어. 혼자 터덜터덜 걷는데 어디선가……
“위야옹!”
뭐지? 수풀로 조금 들어가 보니 내 허리만큼 높은 돌 턱위에 해적고양이가 있어. 맞은편에는 덩치가 크고 온몸이 시커먼 고양이가 있어. 두 녀석 모두 허리를 활처럼 구부리고 꼬리를 세웠어.
“위야아옹!”
“우어어어옹!”
두 놈 다 정전기라도 일어났는지 털이 바짝 섰어. 내가 옆에 온 것도 모른 채 두 녀석은 서로 노려보기만 해. 해적고양이 뒤에는 작고 하얀 고양이가 있어. 저 고양이 때문에 싸우나?
“캬! 캬!”하던 해적고양이가 순간 덩치 큰 검은 고양이에게 달려들었어!
“위야아앙!”
두 고양이가 엉켰어. 서로 상대방을 앞발로 할퀴는 것 같은데 너무 빨라서 안 보여! 둥그렇게 말린 게, 꼭 큰 공 같아. 사방에 털이 날리고 엉켜 있던 두 녀석이 돌 턱 아래로 떨어져. 그제야 녀석들은 갈라섰어.
보기만 하는데도 손에 땀이 난다. 검은 고양이가 도망쳐! 해적고양이는 끝장을 보려는지 도망치는 녀서을 쫓아가. 역시 무서운 녀석이야. 검은 고양이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해적고양이는 돌아왔어. 그제야 내가 있는 걸 알았는지 나를 보고 하악 소리를 내. 해적고양이는 물러서지 안항. 오늘은 안 건드리는 게 좋겠어. 내가 슬슬 걸어서 피하자 해적고양이는 기다리고 있던 다른 고양이와 같이 풀숲으로 들어갔어.
집에 와서 그냥할멈에게 해적고양이가 얼마나 사나운지 이야기했어. 그냥할멈은 착하고 예쁜 녀석이 그럴 리 없대.
밤이 되어 난 이불을 깔고 누웠어. 그냥할멈은 막걸리 한 병과 김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을 들고 왔어. 그냥할멈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불러. 가사를 모르는 부분은 그냥 흥얼거리는데 듣기 싫지 않아. 기분이 편해지지. 막 눈이 감기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어. 마귀할멈이야!
“엄마, 술 마시지 말라니까!”
“아따, 딱 한 잔 하는디.”
그냥할멈은 한 병을 한 잔이라고 해. 그건 그렇고 마귀할멈은 그냥할멈이 기분 좋은 꼴을 못 봐. 그냥할멈을 뼛속 깊이 싫어하는 것 같아. 그냥할멈이 요즘 잘 못 걷는 것 같은데 좀 잘해 주면 덧나나. 선생님이 또 부모님 모셔오라고 하면 그냥할멈이 같이 가야 하는데, 빨리 나으면 좋겠다.
반장 녀석 아빠는 왜 그리 출장을 자주 가는지 모르겠어. 오늘은 플라스틱 총알이 지나는 장난감 권총을 가져왔어. 진짜 총처럼 생겼어. 반장이 책상에 사이펜 뚜껑을 올려놓고 멀리서 쐈는데 한 방에 쓰러진다. 만져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오늘은 철규가 있으니 잠자코 있어야지. 녀석 공구부에는 못 들어가게 된 것 같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눈에 안 뛰는 게 최선이야. 철규가 일어나서 반장한테 간다. 반장은 두말하지 않고 철규가 총을 만져 볼 수 있게 해 주네. 나를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군.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고 운동장으로 나갔어. 저학년 애들이 축구라도 하고 있으면 공 뺏어서 놀려고. 그런데 축구하는 애들은 없고 멀리 운동장 가장자리 화단 옆에 우리 반 애들이 보여. 반장이랑 철규도 있다. 철규가 학교 화단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어. 뭐하지? 재밌겠다.
가까이 가서 보니 화단 뒤 수풀 속에 그 녀석! 해적고양이가 있어. 녀석이 철규를 향해서 “캬! 캬!”하고 있어. 그게 가뜩이나 기분 안 좋은 철규를 더 화나게 했나 봐. 해적고양이가 오늘은 철규에게 혼 좀 나겠군.
난 아이들과 좀 떨어진 뒤쪽으로 갔어. 나를 차별하던 녀석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봐야 하지 않겠어? 철규는 의가양양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해적고양이에게 총을 겨눴어. 화단 옆에도 애들 몇이 있어서 해적고양이는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잘 모르겠나 봐.
“철규야, 그러지 마.”
반장이랑 다른 아이들이 철규를 말렸어. 사실 철규도 고양이를 진짜 소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 쏘고 싶었으면 진작 쐈겠지. 나처럼 아이들이 자기를 무서워해 주길 바랐는지도 몰라. 아이들이 말리니까 오히려 철규는 뭐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총을 쐈어!
“핑!”
“카야앙!”
해적고양이가 총알에맞았는지 제자리에 펄쩍 뛰어올랐어. 그러고는 화단 뒤쪽, 수풀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뛰어 갔는데 숨어 있는 게 다 보여. 철규가 다시 총을 겨눴어.
순간 나는 기분이, 뭐랄까, 확 나빠졌어. 해적고양이는 내가 잡아야 해. 다른 녀석이 괴롭히게 둘 순 없어.
“야, 하지 마라!”
철규와 반장, 아이들이 나를 쳐다본다. 철규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어.
“뭐라 그랬냐?”
정말 못 들었나?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봐. 아, 호흡이 가빠지고 손끝이 떨려.
“고양이 그냥 놔두라고.”
철규는 나를 향해서 총을 겨눴어.
“핑!”
앗, 따가워! 내 다리에 총을 쐈어. 플라스틱 총알인데도 많이 아프네. 해적고양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난 문뜩 해적고양이가 검은 고양이와 싸우던 일이 떠올랐어. 다른 고양이를 지키려고 자기보다 더 큰 고양이와 싸웠지! 난 해적고양이가 검은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던 것처럼 철규에게 달려들었어. 순간 철규가 한쪽 팔을 뻗어 내 멱살을 잡고 밀어. 녀석의 팔이 길어서 내 팔이 녀석에게 닿지 않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철썩!”
녀석이 다른 손으로 내 빰을 때렸어. 눈가에 별이 돌아. 얼굴이 얼얼해. 내가 반장 눈을 때렸을 때 반장도 이렇게 아팠을까? 미안한 마음이 드네. 더구나 반장은 고맙게도 철규에게 그만하라며 말리기까지 해. 철규는 나를 더 때리지는 않았지만, 땅에 쓰러트리고 내 위에 올라탔어. 해적고양이는 검은 고양이를 끝까지 좇아갔었어. 포기하지 않았지. 난 고개를 돌려서 내 목을 누르고 있던 천규의 손목을 깨물었어. 있는 힘을 다해서 물었지. 철규가 “악!”하고는 내 멱살을 놓았어. 순간 나는 몸을 비틀어 일어났어. 주저앉아 손목을 잡고 있는 철규를 밀쳐 쓰러트리고 올라탔어. 주먹을 쥐고 철규를 때리고 있는데(사실 별로 때리지도 못했어.) 누가 내 목 뒤 옷깃을 잡고 나를 일으켰어. 씩씩대며 돌아보니 선생님이네. 철규는 내게 몰린 손목이 아픈지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는데 울지는 않아. 내가 울고 있지.
울지만 않았으면 다 좋았는데, 왜 아니겠어. 선생님이 부모님을 모셔오라는군. 걱정 없어. 그냥할멈은 내가 해적고양이를 지키려고 반에서 제일 센 놈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철규는 동의하지 않겠지만)을 알면 좋아할 거야. 이모는 나한테 결혼하자고 할지도 몰라.
학교를 나서는데 뒤에서 웬 차가 빵빵거려. 뭐야? 돌아보니 마귀할멈이 차에서 고개를 내밀어.
“웅재야, 얼른 차에 타!”
마귀할멈이 이 시간에 학교에는 왜? 담탱이가 연락했나?
“웅재야, 병원 가야 해. 할머니 돌아가셨어.”
“응?”
“일단 타!”
그냥할멈이 죽었다고? 오예! 그럼 이제 나 혼자 방 쓰는 건가? 잠깐, 그런데 앞으로 학교엔 누굴 데려가지? 내 게임기는?
나는 마귀할멈과 병원에 도착했어. 그냥할멈은 당뇨병이란 게 있었는데 그게 잘못되서 심장이 멈췄대. 뭔 소린지는 모르겠고, 하여튼 집에 혼자 있다가 죽었대.
병원 지하로 내려가니 큼지막하게 장례식장이라고 쓰여 있어. 조금 뒤 마귀할멈은 자기에게 정말 어울리는 검은색 옷을 입고 나타났어. 마귀할멈과 신발을 벗고 안에 들어가 보니 하얀색 꽃 한가운데에 그냥할멈의 사진이 놓여 있어. 그 옆에 이모가 있어. 이모도 검은 옷을 입었네. 두 눈이 퉁퉁 부었어. 이모도 누구한테 맞았나? 아니, 이모가 울고 있어. 계속 울어. 손에 든 손수건이 흠뻑 젖었어. 이모가 나한테와서 나를 꼭 안아 줘.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웅재야, 할머니한테 인사해. 이제 할머니 못 봐.”
그때 아저씨 몇 명이 들어왔어. 마귀할멈은 아무 표정 없이 한쪽에 가서 섰어. 아저씨들이 그냥할멈 사진에 대고 절을 해. 이모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래.
사람들이 간 다음 나도 마귀할멈이 시켜서 절을 했어. 한 번 했는데 또 하라기에 또 했지. 두 번 하고 일어나서 한 번 더 하려는데 마귀할멈이 그만하라고 내 어깨를 잡아끌었어. 허리만 숙이고 못 하게 했지. 그냥할멈과 나의 우호적이었던 관계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하려는데 마귀할멈은 그것도 못 하게 막은 거야.
이모가 여전히 우는 걸 보면 지금은 상당히 슬픈 상황이 맞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별로 안 좋거든. 그런데도 마귀할멈은 눈물 한 방울 흐리지 않아. 그렇게 미워하던 그냥할멈을 안 보게 되었다니 좋아 죽겠나 보군.
한 달이 지났어. 난 게임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지만, 방을 혼자 쓸 수 있게 되었지.
일요일이라서 마귀할멈은 집에 있어. 방에서 낮잠을 자. 난 창고로 쓰는 방에 갔어. 그냥할멈 물건을 쌓아 두었는데 이모가 내일 어딘가로 가져다준다더군. 내 게임기를 살 돈이 그냥할멈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찾아봐야겠어. 방 한쪽 구석 항아리 뒤에 돌을 얹어 둔 자루가 있어. 저기 넣어 두었나?
돌을 치우고 보니 맛있는 냄새가 올라와. 이건 짭짤한 과자 냄새인데? 자루 안에 그냥할멈이 고양이들에게 주던 사료가 반쯤 들어 있어. 젠장. 그래도 냄새가 좋아서 몇 개 잡아 입에 넣었어. 그리 나쁘진 않군.
“미야옹미야옹…….”
고양이가 왓나 봐. 그냥할멈을 부르는 건가? 벽에 있는 시계를 보니 네 시다. 그냥할멈이 고양이 먹이 주던 시간이야.
난 바가지로 사료를 한가득 펐어. 바가지를 들고 살금살금 마당으로 나갔지. 그냥할멈처럼 먹이를 한 움큼씩 쌓아뒀어. 냄새를 맡았는지 하나둘 고양이가 모여들어. 혹시라도 마귀할멈이 알면 펄쩍 뛰면서 ‘저눔 시키, 이젠 저눔이 고양이를 불러들이네!’라고 소리 지르겠지.
고양이들은 마귀할멈이 나타날 건 신경도 안 써. 머리를 숙이고 정신없이 먹이를 먹어. 그때 담장 위로 풀쩍! 해적고양이가 나나탔어. 해적고양이는 담장 위로 웅크리고 나를 보기만 할 뿐 내려와서 먹이를 먹지 않아. 저 녀석을 오게 할 방법이 없을까? 지금 잡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난 창고로 쓰는 방으로 돌아가서 한쪽에 쌓아 둔 그냥할멈의 옷 중에 바지를 꺼냈어. 그냥할멈이 자주 입던 꽃무늬가 있는 헐렁헐렁한 바지 말이야. 바지를 입었어. 좀 길어서 젖꼭지 있는 곳까지 쭉 끌어올렸지. 근데 이 바지 정말 편하다..
사료를 한 번 더 퍼서 다시 마당으로 나갔어. 먹이를 좀 더 쌓았지. 해적고양이는 내가 입은 바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해. 난 그냥할멈의 표정을 떠올렸어. 부드럽고 따뜻한 표정. 그냥할멈이 먹일 줄 때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지으려고 노력 중이야. 자, 비슷하지? 이렇게 했는데도 안 올 거야?
“풀쩍.”
좋아! 해적고양이가 담장에서 내려왔어. 슬금슬금 먹이를 뿌려 둔 곳으로 오더니 내 옆을 몇 번 돌아. 난 놈이 도망칠까 봐 가만히 서 있어. 해적고양이가 사료를 먹는다. 다른 고양이를 쫓아내지도 않네. 지금이야, 해적고양이를 잡자! 나의 승리다!
잠깐, 그런데 말이지, 지금 아주 편안해. 가슴이 무언가로 꽉 찬 느낌이야. 해적고양이를 잡을 필요가 있을까? 반장을 때렸을 때, 철규를 이겼을 때 들었던 기분과는 달라. 고양이들이 내 앞에서 내가 준 먹이를 먹고 잇다. 해적고양이까지. 난 해적고양이를 싫어하지 않았나 봐.
그런 기분도 잠시, 등에 소름이 돋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마귀할멈이 나를 쳐다보고 있어! 아까부터 봤나 봐. 여차하면 도망칠 준비를 하는데, 어라? 마귀할멈의 표정이 뭔가 이상해.
엄마 눈에서 눈물이 흘러. 우는 표정은 아닌데 눈물이 줄줄 흘러. 할머니가 입던 헐렁한 바지를 입고 고양이에게 먹이 주는 나를 보고 왜 울까…….
“알았어. 고양이 먹이 안 주면 되잖아! 똥 싸 놓으면 내가 치울게, 뭘 울고 그래!”
엄마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아. 내가 해적고양이를 싫어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할머니를 싫어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를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지.
“우헤헤! 얼라리요! 엄마 울었대요! 얼레리꼴라리!”
엄마는 그제야 눈물을 훔치고는 예전 그 마귀할멈이 되어, “이눔 시키, 넌 좀 맞아야지!”하며 나를 때릴 빗자루를 찾아.
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뛰어갔어. 고양이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도망쳐. 한 마리, 해적고양이만 빼고. 난 대문 밖으로 나가 달렸어. 고개 돌려 뒤를 봤는데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려다 말고 서 있어. 웃고 있는 것 같아. 할머니의 헐렁한 바지가 바람에 출렁거려. 해적고양이는 내 옆에서 같이 달려. 기분이……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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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가운데 한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 이해안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문체가 마음을 사로잡더군요. 특별한 문체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좋은 작품으로 생각 돼 올려봅니다.
다음은 합평방 방장님으로 매 달 수고하고 계신 봄글밭님~~~ 받아주세요^^
첫댓글 헤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 선생님을 '담탱이'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나요? 제가 아는 초등학교 4학년들의 세계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이모와 결혼 운운하는 부분도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기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4학년 나이의 사고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아이는 할머니와 좋은 관계인데 왜 굳이 '할멈'으로 부를까요? 4학년 아이의 캐릭터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 외에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그래요. 그래요. 카톡하다 함 들어놓고는 까먹었어요. 곧 올릴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