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좀 지났지만, 계묘년(癸卯年) 새해 벽두에 토끼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답을 듣는 대화를 시도하고 싶다. 『이솝우화』, 구전 소설 『별주부전』, 고사성어 ‘교토삼굴(狡免三窟)’ 등에서 회자하고 있는 토끼의 위상과 교훈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솝우화』는 거북이와 경주하는 토끼의 자만심을 부각하여 교훈으로 삼고 있으며, 『별주부전』에서는 용왕과 별주부(자라)를 속여서 생명을 구하는 토끼의 재치와 기지를 높이 사고,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과 전국책(戰國策)의 배경이 되는 ‘교토삼굴’은 우리에게 위기관리 능력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배우도록 한다.
먼저 『이솝우화』의 거북이에게 묻는다. “거북이와의 경주가 과연 경기의 규칙에 맞는 시합이었느냐?” 체급이 다르고 분야가 다른 종목으로 게임이 성립하지 않는다. 혹시 토끼와 여행길에 동행하다가 보폭과 이동 속도가 맞지 않아 앞서가던 토끼가 거북이를 기다리다가 잠든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혹시 거북이가 다가와서 깨우지는 않았는지도 알고 싶다.
토끼는 말할 것 같다.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이 토끼를 교만하고 게으른 존재로 만들었다고. 토끼와 토끼끼리의 경주였다면 “정정당당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승리해도 겸손할 수 있는”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말할 것 같다. 서양 버전의 『이솝우화』에서는 거북이가 토끼를 깨워서 같이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별주부전』의 토끼는 지나친 사리사욕으로 인해 위험에 빠지는 모습과 기지를 통해 위험을 벗어나는 총명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해서 얻는 단기적인 이익이 장기적 관점의 공리와 양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자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에서 모두에게 거짓말을 허용하는 일의 결과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한편 별주부는 윗선의 명령이라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한결같은 충성심을 보여준다. 이에 감동한 하늘이 선약(仙藥)을 주어 용왕의 지병을 낳게 했다는 해피엔딩이 토끼의 거짓말을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지도 따져 묻고 싶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의 토끼에게는 미래의 위험을 사전에 철저히 대비하는 정신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세 개의 굴이란 입구와 출구가 같을 수도 있겠지만, 출구가 서로 다른 세 개의 굴인 경우도 있겠다. 아마 토끼는 후자의 경우라고 말할 것이다. 입구와 출구가 같은 굴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하나의 굴이기 때문이리라.
‘교토삼굴(狡免三窟)’의 교훈은 국가의 지도자급 인사가 유념해야 할 덕목이다. 만일을 위해 이중삼중의 대비책을 마련하는 영리한 지혜로 위기를 피하거나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의 저자 이용수 씨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미 CIA에서 고위 정보원으로 정년을 마친 사람이다. 한국의 고위 당국자들이 다른 나라와 협상을 시도할 때 보여준 관행을 지적하고 가슴 뜨거운 충고를 보내준다.
한국이 협상단 대표를 선정할 때 미국 대표와 동기동창인 대학교수를 찾는다고 한다. 협상 테이블에서 악수할 때를 제하고는 개인적인 친분이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미국은 국가 이익의 순으로 A 안, B 안, C 안(양보 불가 최종안)을 준비한다. 한국 대표는 전문성 결여로 미국의 A 안을 선택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40여 년 전의 일이라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고 믿고 싶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의 지혜가 아쉬운 대목이다.
토끼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답을 듣는 대화를 통하여 고정관념과 관행에 안주하지 말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사태를 이해하는 열린 마음이 성숙한 사회의 불씨가 되기를 희망한다.
철학문화 연구소 <성숙의 불씨> 824호 원고(2023. 2. 14)
첫댓글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과 전국책(戰國策)의 배경이 되는 ‘교토삼굴’은 우리에게 위기관리 능력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배우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