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85
3월3일[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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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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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3GOSKmcN0w
[서울대교구 손경락 사도요한(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신부님 집전]
**사순특강**
https://youtu.be/J98QBHBIkMY (최황진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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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을 묵상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상거래는 하느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면서,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급격히 훼손되고 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확고한 위치와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최고 의회는 사제 가문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일반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물 좋은 장소, 막대한 목돈이 오고 가던 장소였던 성전에서의 상거래와 뒷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잔뜩 돈독이 올라있던 그들이 최상의 수입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으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이상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작정하고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성전 정화 작업을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성전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바닥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홀대받고, 음흉한 사람들의 주머니만 가득 채워주는 훼손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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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Vze1t-VR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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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집의 주인과 그에 따른 손님들>
사람은 관계 맺는 동물입니다. 예전에 군대에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귀신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건 귀신 때문이 아니라 귀신을 맞아들일 만한 집을 만든 자신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 본성상 관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관계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저의 어렸을 때 집에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어 가 본 적이 있는데 지붕까지 내려앉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쥐나 뱀, 벌레들이 사는 곳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집의 주인을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관계 맺는 대상이 달라집니다. 관계 맺는 대상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나의 집이 결정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아버지 집을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장사꾼이 주인이 되면 그 집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외면하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전은 모든 인간을 맞아들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1970년대에 미국 뉴욕주 아미티빌 한 저택에서 무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집에서는 이전에 로널드 디페오 주니어가 자기 가족 여섯 명을 살해한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엽총으로 일가족 모두를 쏘아서 죽였지만, 각 방에 돌아다니면서 총을 쐈는데도 아무도 총소리에 깨거나 저항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로널드는 자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두 명이 자신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조지와 캐시 루츠 가족이 싼 가격에 집을 구입하여 들어왔습니다. 루츠 가족은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이상한 현상들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집이 귀신 들린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제를 불러 성수를 뿌리려고 할 때 갑자기 정전되더니 날카로운 소리로 “다 나가!”라는 비명이 들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물건이 움직인다던가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과 대화하고 친구라고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노린다는 말을 듣고는 짐도 챙기지 않고 도망을 쳤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무도 없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밤에도 계속 찍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죽었던 아이와 비슷한 아이의 얼굴이 찍히기도 하였습니다.
집은 이전 죽은 이들을 주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은 존재들입니다. 죽은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시기하여 죽이거나 쫓아내려 합니다. 그러면 산 이들은 그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사람을 미워하는 어떤 것이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은 타인과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처럼 뱀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웃을 받아들이는 집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39세에 아기를 낳다가 사망한 여왕 뭄테츠 마할을 위한 무덤입니다. 왕은 여왕을 그리워하여 그녀의 집을 그녀가 살기를 원할 만하게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수많은 사람이 와서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듭니다. 만약 뭄테즈 마할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다면 사람을 받아들일 만한 집이 지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피라미드를 생각해 봅시다. 피라미드는 죽은 왕을 매장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왕이 저승에서 살 수 있는 금은보화를 많이 저장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만 아는 죽은 인간이 왕이 되면 그 공간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탈리아 오르비에또나 피렌체에 가면 아름다운 두오모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좀 특이합니다. 이슬람식의 문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터키를 점령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부수기가 아까워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성당들을 지을 때도 당시 이슬람 세력이 강력할 때 혹시 점령당하더라도 이슬람 사원으로 쓸 수 있도록 성당을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은 이렇듯 종교가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를 모실 성전이 되어야 모든 이를 사랑할 존재로 구원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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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Failure is a part of life. If you don’t fail, you don’t learn. If you don’t learn, you will never change.(실패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에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은 제 삶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곤 했습니다. 33년 전에 저는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처음 본당으로 가서 보좌신부로 지내는 중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당시 교구장이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병원엘 찾아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병원에서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저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늘 새롭습니다.
30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에서 사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그래야 했습니다. 저는 매일 송별식을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서는 미국으로 가는 것을 취소하였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주교님께 전한 사람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도 생겼습니다. 돌아보면 주교님의 따끔한 질책이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술에 대한 절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자리가 있어도 10시 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산보하고, 책을 읽으니 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습관을 하나 가지면, 그 습관이 나를 변화 시켜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적성성당으로 갈 수 있는지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고 본당신부로 잘 지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은 땅은 넓었지만 교우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 나오는 교우는 10명 미만이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도 100명 미만이었습니다. 당연히 주일헌금도 적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33년에 3년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저는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농산물 직거래도 하였고, 서울에서 오는 학생들의 농촌봉사 활동도 받았습니다. 차가 없어서 성당에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단을 만들었습니다. 4대의 봉고차가 교우들의 집으로 가서 모셔왔습니다. 여름에는 전 신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큰 본당에 있는 동창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혈압도 있었는데 적성성당에 있으면서 모두 좋아졌습니다. 저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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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계약과 정화를 통한 해방과 자유이다. 계약을 통하여 받은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를 위해 인간이 행하여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십계명은 자유의 표현이며, 종살이를 벗어났다는 보증이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해방과 정화를 끊임없이 요청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진정한 해방을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습관이나 율법주의 혹은 순전히 의미를 잃어버린 외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성전 정화의 의미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이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거룩한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곳으로, 그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며, 하느님 안에 진정한 자유를 느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타성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그 가치관을 바꾸어놓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결정적 만남의 장소인 성전의 예식 기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옛 예식과 당신 자신을 교체해 놓으신다.
예수님의 이 격렬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하는(18절)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말씀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19-21절) 이는 징표를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몸을, 즉 사람들이 수난의 비극을 통해 짓밟은 당신을 하느님의 권능으로써 사흘 후에 부활시킬 당신의 몸을 징표로 제시하신다. 그 징표는 당신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분 자신과 동일시되는 징표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개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 먼저 “내 아버지의 집”(16절)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성실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메시아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나중에 가서야, 부활을 체험한 후에 깨달았다(22절). 여기서 이 성전 정화가 십자가와 수난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는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이미 성전이 되셨다. 이 성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실현한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꿈인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영원히 실현되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우리도 그 성전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 신비로 우리의 삶을 감싸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 자신의 정화가 필요하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과 십자가, 성전의 정화에 대한 것을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두 우리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시는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4,15; 15,14) 만일 우리의 신앙이 성전 앞에만 머물러 있고 고통과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 속에 빠져있는 신앙이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도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해방되고 끊임없이 정화되어 그리스도라는 성전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는, 구원을 차지하려면 주님께서 내려주신 계명을 잘 지키면서 나 자신이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감으로써 지성소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나 자신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전이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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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고 그분을 만나는 곳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의 집으로 간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하다는 뜻이며, 서로 긴밀히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고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집’은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조용하며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하고 안전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여야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방해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을 보십니다. 이것들은 ‘제사’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고, 제사는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절대적인 자리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사실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는 각종 동물과 장사꾼들로 지저분해지고 혼잡해진 외적 환경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하였던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내적 타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것처럼, 파스카를 준비하는 우리 자신의 성전(마음)에도 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을 보신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타락과 위선과 죄를 보시겠지만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우리 자신, 구원으로 장사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러한 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명한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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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교 정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구약성경 즈카르야서에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그날에는 말방울에도 ‘주님께 성별된 것’이라고 새겨지고, 주님의 집에 있는 솥들은 제단 앞에 있는 그릇들처럼 될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주님께 성별된 것이 되어, 제물을 바치려는 이들이 모두 와서, 그 솥들을 가져다가 고기를 삶을 것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0-21)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이 예언이 실현된 일입니다. <‘그날’이 시작되었음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날’은 ‘메시아의 날’, 즉 메시아의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구원의 반대쪽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심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보면서 시편 69편 10절,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를 생각했습니다. 원래 시편 69편은 ‘의인의 수난’에 대한 시편이고,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적용하던 시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시편 69편 10절을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열정이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즉 성전 정화 때문에 수난과 죽음이 닥치게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마당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안마당’은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바깥마당’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바깥마당’에서 장사꾼들이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팔았습니다. 아주 비싼 가격으로...... 그리고 봉헌금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가지고 온 외국 돈을 이스라엘 돈으로 환전해 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사고파는 일이 이루어졌는데, 파스카 축제처럼 큰 축일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몹시 붐비는 장터가 되었습니다. ‘바깥마당’이라고 해도 그곳도 분명히 성전에 속한 곳이었고 거룩함이 지켜져야 하는 곳이었는데, 거룩함이 지켜지기는커녕 세속의 장터처럼 혼잡하고 탁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본래의 거룩함을 회복시키신 일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것은 사람들을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승들을 성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채찍이라는 말만 보고서 예수님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사실상 종교 정화이고, 종교 개혁입니다. 장사꾼들의 뒤에는 사제들이 있었고, 장사꾼들은 장사를 해서 번 돈의 일부를 사제들에게 ‘자릿세’나 ‘뇌물’로 주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어쩌면 진짜 장사꾼들은 사제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그랬다면, 장사꾼들은 물품 판매를 대행하기만 하고, 대부분의 이익금은 사제들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일은,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 전반에 관한 문제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척 하는 것, 그것은 심각한 신성 모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시는데, 유대인들은 “그래도 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이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일인데, 왜 갑자기 시끄럽게 소동을 일으키느냐고 따집니다. 어떤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이사야서 56장 7절의 말씀을 성전 정화의 근거로 삼으셨습니다.(마르 11,17)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준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도 “그렇게 해도 된다.” 라고 주장했던 일들이 많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그런 일이 없는가? 정말로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성전 정화 이야기’를 대할 때, ‘파는 쪽’의 문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는 쪽’에는 문제가 없을까? 돈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비싼 값으로 물품을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받고 구원을 파는 것도 나쁜 범죄이고, 돈으로 구원을 사는 것도 나쁜 범죄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사는 쪽이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사고방식과 분위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종교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에서 소외당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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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이용진 가시미로 신부님]
<항상 기도하는 거룩한 집>
찬미 예수님!
성전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만남의 장소이며 나눔의 집입니다. 여기서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탄생되고, 병든 이들이 치유되고, 하느님 사랑에 굶주렸을 때, 배불리는 곳입니다.
이 집에서 하느님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 하소연도 하며 투정도 부리고 감사도 드리면서 은총을 청하고 또 자비를 얻어 누리는 우리의 보금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집이요, 우리들의 집 그리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저 유대인들처럼 소음과 잡념으로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 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삶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 문입니다."(1코린 3.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성전을 장사꾼들로써 상징되는 세상의 여 러 가지 번거로운 일로 시끄럽게 만들지도 말아야 하겠고, 더욱이 더럽혀지는 일은 없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1코린 6,19-20) '우리의 몸인 성전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에 우리는 자연히 성령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과 만나서 하는 그 기도는 성령의 기도가 되어 하느님께서 잘 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럴 때의 기도는 소와 양, 비둘기와 돈 같은 잡념이나 유혹이 찾아 들 지 못하게 하는 영혼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항상 기도하는 거룩한 집이 되게 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리석음"(1코린 1,23)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 자비에 힘입어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 쁨 주고 사랑받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당신 집에 사는 사람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 하옵니다.”(시편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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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현찬 도미니코 신부님]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
성전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건물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자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신성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의 온갖 세속적인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21,12)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하신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상(商)행위뿐만 아니라 성전 안에 온갖 부정과 비리 그리고 각종 음모와 타락이 가득 차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새 성전을 세우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새 성전은 예수님 당신 몸이며 부활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이 사실을 드러내셨고, 그리고 사흘 안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새 성전을 3일 안에 세우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영이 거처하시는 궁전(성전)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코린 6,19) 따라서 사순 시기는 우리 각자의 성전이 정화를 해야 될 기간입니다.
지난날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깊이 성찰하고, 판공성사를 통해 깨끗한 성전으로 정화되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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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경욱 사도요한 신부님]
<성전을 허물어라.>
우리는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머리에 재를 얹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듣고 회개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벌써 3주일째입니다. 그동안 ‘인생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습니까? 복음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실천하며 지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환전상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를 엎어 버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비둘기 장사까지 쫓아내시며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엄하게 꾸중하셨습니다. 이어서 성전을 허물라고까지 명령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전은 하느님을 예배하고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전에 와서도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외적인 형식과 규범만 실천하고 있다면 그곳은 성전이 아니라 시장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없는 성전은 장사꾼들의 장소입니다. 반드시 허물어 버려야 할 짐에 불과 합니다.
성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몇 년 전에 어느 성당에서 신자분의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타 교구에서 전입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산에 와서 성당에 올 때마다 힘듭니다. 왜냐면 성당 안에서 신자들이 너무 떠들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있던 곳의 성당은 고요한 기도의 공간이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하느님의 현존의 장소라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하느님께 예물을 봉헌하기 위한 장소의 의미를 넘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면은 회개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고 있으면서 예물봉헌에 대한 율법 규정만 지키고서 신앙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이 무늬만 신자라는 말에 어울립니다. 가식적이고 형식적이기 만한 예배의 장소로서 성전은 마땅히 허물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져진 새 성전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제사로 세워진 참 성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을 때, 우리 자신도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순 시기 동안 우리 자신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에 힘입어 희생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봉헌물이 되고 참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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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달 학생 복사단 회식이 있었습니다. 고3이 되는 학생들이 복사를 졸업하고 마지막으로 후배 복사들과 식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메뉴는 자장면과 짬뽕이었지요. 그런데 한 친구가 너무 조심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보통 아이들은 급하게 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아이에게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먹어?”라고 물으니, “흰색 티셔츠를 입었거든요.”라고 답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빨래해 주시잖아. 더러워지면 빨래하면 되니까, 음식이 흰색 티셔츠에 조금 묻으면 어때?”라고 하니, 아이는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보기 싫잖아요.”
묵상 중에 이 아이의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음식 묻으면 빨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음식 묻은 옷을 입고서 돌아다닐 자기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우리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죄를 더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나중에 고해성사 보면 되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이 죄를 짓는 내 모습이 과연 예쁠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보기 싫은 모습이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데, 너무 쉽게 죄에 무감각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쓸데없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너무 화가 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를 정도로 화가 나셨을까요? 이 성전 안에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씻기 위해 희생 제물을 봉헌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과 소, 비둘기 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봉헌물을 판매하면서 누군가는 자기 탐욕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그 돈을 낼 수가 없어서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이런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곳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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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집 그대 사람아>
요한 2,13-25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하느님의 집 그대 사람아>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착함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사랑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정의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평화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진실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함께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품음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베풂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섬김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살림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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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든 한 주간을 감사하며 또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전 정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요한2,14-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셨을까요?
이스라엘 성인 남성들은 해마다 성전세로 유다 돈, 반세켈을 내야 했으므로 이방인 지역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돈을 환전해 주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용 짐승을 팔고 돈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잇속에 눈이 어두워 상인들과 제사장이 결탁하여 이윤을 챙기는 부정과 비리가 생겼고 이권 다툼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경배의 본질적인 의미가 왜곡된 모습에 경고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전의 기능은 주님께 드리는 희생제물보다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길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하고 집안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아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앞날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짐승을 잡아 바치는 구약의 제사를 새롭게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안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와 의식만을 강조하는 예배는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게 되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의 몸은 분명 성전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적개심,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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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성전사랑, 계명준수, 지혜추구-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신자가, 수도자가, 사제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일은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신자라면 참된사람이겠고 이또한 평생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참사람되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신자이자 참사람의 모범입니다. 하루하루 100%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교황님보다 부지런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어제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좋으실대로(please)’ 그리고 ‘감사합니다(thank you).’두 말마디입니다.”
어린이들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평범하나 친절한 말마디가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용기의 덕을 요구한다.”
교황청 사법의 해를 맞이하여 교황청 법조인들 알현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교황님과 함께 광범위한 대화를 나눴음에 감사한다.”
교황님 알현후 하신 독일의 수상이자 사회민주당 정치가인 올라흐(Olaf)의 말입니다. 또 교황님은 사별가족들과의 접견중에는 이들이 기도중에 위로를 발견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이 참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을 다할 때, 상대에 대한 진심도 흘러나온다.”-다산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말고,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공자
아주 예전 변호사 사무소를 찾았을 때 벽에 걸려있던 액자 안에 ‘공선사후(私先公後)’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아마도 그 변호사의 좌우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요즘 공천파동중 회자되는 말마디가 ‘선당후사(先黨後私)’입니다. 모두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우선시하는 분별의 지혜를, 참사람의 도리를 알려주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참신자와 참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병원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던중 1회용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탔을 때 녹지 않아 웬일인가 당황했는데 무심코 찬물 꼭지를 눌렀던 것입니다. 좀 멀리서 노모와 함께 기다리던 젊은 자매가 급히 오더니 조용히 다시 다른 컵 따뜻한 물에 믹스커피를 타주고 앞서의 커피를 내다 버리고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얼마나 고맙던지 그 친절한 배려의 사랑에 제가 미혼의 젊은 사람이었다면 프로포즈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로 삼고 싶을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친절한 배려의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자 참신자의 모범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온 인류에게 미사라는 참좋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남기셨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참으로 잘 떠남의 모범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잘 떠나는 참된신자로서의 삶이라면 그대로 참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첫째,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전을 사랑합니다. 성전사랑은 성전정화로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전은 주님이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환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의 성전정화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꾼들을 내쫓으시고 비둘기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을 알아 챘기에 저절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는 성경 말씀을 연상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인 거룩한 성전이 속화(俗化)된다면 정말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마침내 당신 몸이 영원한 성전이 될 날을 내다보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성전에 머뭄으로 이미 그 혜택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다. 건물의 성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공동체가,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이니 성전정화의 개념은 참 넓습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이자 성전정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보이는 성전정화는 물론 공동체 성전의 정화로, 그리고 극기, 절제, 선행, 단식, 기도, 자선 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 성전정화로 드러나야 함을 봅니다.
둘째,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함과 동시의 하느님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십계명은 물론 주님의 계명은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사랑 역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계명준수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사랑 선물인 십계명을 소개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을 하지 마라.
8.거짓증언을 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예나 이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공동체에 적용되는 참신자는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기본 자세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 십계명입니다. 무엇보다 십계명을 포괄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인 경천애인과 황금률, 그리고 마태복음 산상설교중 진복팔단의 실천에 까지 이른다면 말그대로 금상첨화, 사랑의 완성이자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셋째,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이 지혜요, 지혜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은총의 선물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새벽 독서기도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과 아침기도시 성경소구도 은혜롭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 드리세.”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고,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나는 지혜가 주는 재물을 하나도 감추지 않는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세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3-14)
하느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혜가 좋아서 교회학자임임을 깨닫습니다. 지혜중의 지혜가, 지혜의 결정체가, 하느님의 지혜가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지혜로움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1.한결같은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2.한결같은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3.한결같은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신자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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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을 정화하신 얘기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이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성전 안에 가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잡놈들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 성당에 무엇이 많은 것이 싫습니다. 성상이나 성화같은 예술품이 많은 것도 싫습니다.
그것들이 제가 하느님 만나는 것에 도움을 주면 좋겠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는 것이 제게는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성당을 간 분들에게 이런 심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예술품을 보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꼭 거기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의 이런 도발적인 말은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정말 성화나 성상의 도움받는 분들에게도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상은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우상이 아니라 성상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거나 방해받는 사람에게는 그저 예술품이거나 심지어 우상일 뿐일 겁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성전에서 잡다한 것과 잡놈들을 다 치워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아주 과격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위선자들을 말로 세게 질타하신 적이 있으셔도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셔야만 했나 봅니다. 말로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셨는데 말로는 안 됐나 봅니다.
그들의 돈 줄 그래서 그들이 결코 놓을 수 없고 그래서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그래서 치워버리라고 말로 해서 안 되는 것은 주님께서 과격하게 치워버리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폭삭 잃은 것도, 실은 내가 주님 대신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치워버리신 것들일 겁니다.
아무튼 이 정화사건 때문에 주님께 죽음이 닥쳐옵니다.
저라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내 모든 것을 뺏어 간 주님을 그냥 놔두고 싶겠습니까?
당대 기득권자들도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런 주님을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고, 이에 주님께서는“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전을 허물다가 당신 몸이 허물어지십니다. 아니, 당신 몸을 허물어서라도 성전을 허물려고 하신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로마의 침략으로 결국 파괴되고 맙니다.
이제 우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도 허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 몸인 성전을 허무셨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서 잡것들을 치우라는 명령을 실행치 않으면 우리도 우리 몸인 성전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님의 표징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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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성전 정화!>
오늘 복음(요한2,13-25)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 대단한 분노를 드러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성전(성당)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다시 부활하는 곳입니다. 성전이 이런 의미를 지닌 곳이기 때문에 성전의 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표시가 바로 모든 성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47항)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시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요한 2,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예수님의 몸인 성전으로 바뀝니다.
나아가 이 성전은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확장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힘이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파스카 축제인 주님부활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이며,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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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ecXEqhu2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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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3.03.사순 제3주일.’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 21)
허무는 고통을 통해
성전은 다시 살아납니다.
거짓을 내려놓는 것이
자아를 정화하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잃게 될 때
성전의 문턱은
높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바로 우리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전은
인간의 모순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물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새 술은 낡은
부대가 아니라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는
우리들이
되기위해서는
깨어있는 수행의
삶이 신앙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임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참된 행복과
참 기쁨이 하느님께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봉헌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오염된 성전이 아닌
거룩한 믿음의
성전이길 바라십니다.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성전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 기도의
참된 자녀들이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성전입니다.
다시 개울물이
졸졸졸 흘러갑니다.
이 사순시기가
건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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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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