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외출 / 이복희
그렇게 좋아하는 짜장면을 반도 못 먹은 채 애꿎은 젓가락 장난만 하고 있었다.
“왜 안 먹어?”
“그냥, 배가 아파서...”
하지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날은 모처럼 엄마가 학교엘 오셨던 날이었다. 다른 엄마들과 달라 거의 학교에 온 일이 없던 엄마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적어도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형무소 아래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그 남자는 엄마의 고향 사람이며 바로 그 형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수인사만 나누고 그냥 헤어질 법도 한데 중국집까지 들어간 것을 보면 아마 친분이 꽤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짜장면을 시켜 주었는데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엄마와 그 남자가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의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가 엄마를 '미스 박'하고 은근하게 부를 때마다 입맛이 싹 떨어졌다. 그리고 정말로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시집오기 전 엄마를 좋아했던 한마을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엄마는 엄마일 뿐 엄마가 여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할 수도 없던 어린 시절에 그 일은 내게 상당히 불온한 느낌으로 남아 있었다.
“그 아저씨가 엄마를 왜‘미스 박’이라고 하는 거야?”
나중에 언니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언니는 아무 느낌도 없는 것 같아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하루는 엄마가 유똥 치마저고리를 곱게 입고 외출 준비를 하고 계셨다. 혹시 그 사람을 만나러 가시는 걸까? 더럭 의심이 들었다. 말끔히 닦은 하얀 고무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방에 가서 시계 좀 보고 와라, 지금 몇 시나 되었나?”
짐짓 못 들은 척하며 딴청만 부리다가 결국 야단을 맞고 말았지만 그런 야단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직 엄마의 외출 목적이 궁금했다.
엄마의 외출이 처음도 아니었다. 외출할 때는 고데기로 앞머리에 웨이브 서너 개쯤 만들어 멋을 낸 엄마가 한복을 곱게 입고 나서는 광경이 전혀 생소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따라 어린 것의 마음에 의심암귀가 들어앉아 심통을 부린 것은 아마 연애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이 아니었나 싶다.
도시 근교에 살던 우리 집에는 시내의 한 책방에서 정기적으로 책을 대출해 주었다. 읽은 책은 돌려주고 새로운 책을 받는 일은 늘 기다려지는 즐거움이었다. 책이 오는 날이면 엄마보다 우리들이 먼저 달려 나가곤 했다.
동화책보다 엄마가 읽으시던 이광수나 김내성 같은 작가들의 책과 러시아 소설들은 더 구미가 당겼다. 문학적인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읽는 재미에 푹 빠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책들이 들려준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 탓이었으리라.
그러나 내 엉뚱한 의심에는 또 다른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렴풋이나마 엄마의 외로움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아닐까.
성향이 전혀 다른 아버지의 커다란 그늘 밑에서 엄마가 꽃피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쩐 일인지 어린 내 눈에 비친 엄마는 늘 알 수 없는 목마름으로 애달파 보였다.
아버지는 자상한 면도 있었지만 무섭도록 엄한 분이었다. 가족들의 소소한 일상에도 규격과 질서를 요구하곤 하셨다. 청결과 부지런함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고 그런 점으로는 어느 누구라도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목수도 되었다가 정원사가 되기도 했고 신기료도 되었다. 자식들 교육은 물론 청소, 때로는 요리나 바느질, 다림질까지 아버지 손이 닿으면 거의 완벽했다. 시장 봐오는 일이나 우리들 옷이며 신발까지도 아버지가 도맡아 사 오셨다. 엄마가 설자리는 없었다.
모르긴 해도 엄마는 점점 정체성을 잃어갔을 것이다. 처녀 시절, 어느 일간지에 시를 투고해서 실린 적도 있었다는 엄마는, 시인이 되고 싶은 여인이었다. 신혼 초의 어느 날, 분분히 흩날리는 봄눈을 보고 즉흥적으로 메모용 칠판에 시 한 수를 적어놓았다가 겪었던 아픔을 두고두고 되뇌이셨다. 아버지 보시기에는 한낱 낙서에 불과했다던가. 그런가 하면 설거지를 미룬 채 책 읽기에 빠져 있는 아내가 아버지에게는 다만 게으른 여자일 뿐이었다.
나는 엄마가 가끔 혼잣말처럼 내뱉던 말들을 잊을 수 없다.
“나무 한 짐 져다가 척 부려놓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툭툭 털어낸 채 바로 밥상에 앉는 사람하고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반식자 우환이야, 반식자 우환...”
그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독 내게만 하신 말씀이었다.
“넌 결혼하지 말고 살아라. 연애만 하면서 살면 안 될까?”
아마 딸에게 그런 말을 하는 엄마는 고금 천지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마디는 엄마가 딸에게 할 말은 아니라며 이상하게 여겨 버리기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여운으로 오래 남았다.
움치러든 엄마의 감성은 결국 나약한 염세주의로 이어졌다. 나이 들어가면서는 혼잣말하시는 일이 부쩍 늘었다. 가끔 벽을 향해 혼자 이야기하시는 광경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지만, 그 속내를 가늠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오히려 자꾸 마음 약해지는 엄마에게 화를 내곤 했다. 좀 강해지시라고, 왈순아지매 같이 씩씩한 엄마가 되어주면 안 되겠냐고 다그칠 때가 많았다.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어떤 경우에 건 오로지 자식을 위해 존재해 주기만을 바란 건 나의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너무나 비좁은 아내의 입지, 겨우겨우 지탱했던 엄마의 자리,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의 자아 사이에서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무너져 가는 엄마를 그렇게 다그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조숙한 척했어도 별 수 없는 철부지 딸이었다.
나중에 엄마를 여자로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어린 날의 내 의심은 아픔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엄마를 의심했다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린 딸의 눈에조차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 보이던 엄마가 안쓰러워서였다. 마음 부칠 곳 없어 쓸쓸해 보이던 엄마가 차라리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가슴에 남모를 설렘이라도 간직할 수 있었더라면 싶기까지 했다.
엄마가 정말 그 아저씨를 만나러 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엄마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도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모르셨을 것이다.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지는 것은 엄마의 빈자리 때문만이 아니다. 남다른 감성을 지녔던 한 여자의 외로움이 아프도록 생생하게 살아나는 탓이리라.
엄마는 겨우 쉰을 넘기고 누구의 의심도 받을 필요가 없는 영원한 외출을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