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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惠超 : 慧超)는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자취가 전해지지 않았으며, 우리 역사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잊힌 인물이었으나 한국 불교사에서 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 구법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신심이 투철한 순례자였으며, 서역 순례에서 돌아와 당나라에서 입적할 때까지 불법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기 위해 치열하게 수행 정진한 고승이었다.
혜초는 성덕왕 시대인 700년대 초에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출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불과 16세였던 719년(성덕왕 18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광주(廣州)에서 남인도 출신 밀교(密敎) 스님 금강지(金剛智 : 705~774년)를 만나 불법을 공부하다가 그의 권유로 멀고도 험한 인도로 구법 순례를 떠났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지리 여행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는 것이 최근까지 알려진 정설이다. 그가 순례 여행을 떠난 당시 나이가 겨우 약관 20세였다고 하니 구법 득도를 위한 그의 정신은 참으로 거룩하고도 거룩하다고 하겠다.
구법 순례를 위해 천축행을 감행했던 이가 혜초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지만 그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세계사적인 기록을 남겼고, 그 두루마리 필사본이 1000여 년 뒤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혜초라는 한 위대한 고승의 이름을 영영 잃어 버릴 뻔했다. 그러므로 이 또한 오묘한 불연(佛緣)이요 위대한 법력(法力)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왕오천축국전>의 영인본이 단 한 차례도 발간된 적이 없었다. 다만 1943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에 의해 번역되어 <삼국유사>의 부록으로 나온 것을 시초로 번역본만 두세 권 나왔을 뿐, 중국에서는 이미 1909년에 영인본이 나왔고, 우리나라로부터 불교를 전해 받은 일본에서도 1911년에 <왕오천축국전> 주석서에 이어 영인본을 펴냈으며, 1938년에는 독일에서 세계 최초로 번역본을 펴냈다.
부끄러운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혜초가 중국인이 아니라 신라의 고승이라는 사실도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서였으며, 일본에서는 1990년에 영인본의 개정판까지 나왔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 노릇은 이 개정판 서문에 ‘왜 한국에는 이 책의 영인본이 없는지 모르겠다.’는 대목도 있으니,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결국 우리는 그동안 입으로만 우리 것을 찾자느니 하고 떠들기만 했다는 말이니 이야말로 구두선(口頭禪)이 따로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가산불교문화연구원(원장 지관 스님)과 불교사 연구가인 숙명여대 정병삼 교수가 <왕오천축국전> 영인본과 번역본을 출간하여 때늦은 감은 있으나 체면을 조금은 되찾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 문화관광부에 의해 1999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기념행사들이 베풀어지기도 했다.
한편, 최근에 한 중국학자가 혜초에 관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아 <왕오천축국전>을 재조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는 혜초(慧超)가 아닌 혜초(惠超) 스님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이렇다. 중국용문석굴연구소의 온옥성(溫玉成) 명예소장이 1992년 10월 18일자 <중국문물보(中國文物報)>에 ‘서행(西行)한 신라 고승 혜초는 본래 소림사의 제자였다(西行的新羅高僧慧超是少林弟子)’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혜초는 혜능 ․ 신수 등과 함께 중국 선종(禪宗)의 오조(五祖)인 홍인선사(601~674년)로부터 선종을 전수받은 법여(638~689년)의 제자’라면서, ‘<왕오천축국전>의 저자도 지혜 혜자 혜초(慧超)가 아닌 은혜 혜자 혜초(惠超)’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혜초의 서역 순례 시기도 지금까지 알려진 719년(신라 성덕왕 18년, 당 현종 7년)부터 723년까지 5년간이 아니라 689년(신라 신문왕 9년, 당 중종 6년)부터 709년까지 11년간이라고 주장했다.
온옥성 소장이 이런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728년 소림사에 건립된 ‘황당숭산소림사비(皇唐崇山少林寺碑)’로서 비문 가운데에 ‘법여의 제자 가운데 혜초(惠超)가 있었다. 생각이 뛰어나고 , 서역으로 구법 여행을 다녀왔다’는 대목이다. 또한 같은 소림사 진견대사(728~784년)의 석당문(石幢門)에도 ‘혜초(惠超)는 멀고 가까운 곳을 다니다가 이국에까지 다다라 한층 존중함을 더했다’라는 구절도 들고 있다.
이런 내용을 국내에 소개한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배진달 교수도 “혜초의 귀당 행로인 중앙아시아 쿠차의 쿰트라 천불동 가운데 나한동(708~709년 조성)에 혜초와 관련된 명문(銘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고 말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설이 사실이라면 혜초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금강지로부터 불법을 전수한 밀교승이 아니라 달마조사로부터 이어진 정통 중국 선종의 고승이라는 말이 되니 기존의 학설은 완전히 뒤엎어지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졌던 그의 출생 연도인 704년 설도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왕오천축국전>의 저자는 혜초(慧超)인가 혜초(惠超)인가. 혜초는 두 사람인가, 아니면 한 사람인데 이름자만 달리 표기된 것일까.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필자는 이런 의문들을 논하거나 해답을 제시할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며 탐험가이며 또한 문화재 약탈자이기도 한 폴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감숙성 돈황석굴 천불동계곡에서 발굴되었으며 현재 파리 국민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루마리 필사본 형태인 <왕오천축국전>은 혜초대사의 위대하고 장엄한 구도정신이 함축된 불교 기행문학의 예술적 가치로서 뿐만 아니라, 혜초대사 재세 당시 동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생활상과 국제정세를 전해주는 세계적인 희귀자료로서 손꼽히고 있지만 앞뒤가 마멸되고 제목과 저자 이름도 없는 등 상당 부분이 멸실된 상태이다.
펠리오는 연구 결과 이 필사본이 그동안 <일체경음의> 제100권에 이름만 전해오던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기록이 혜초의 친필 원전이 아니라 약 100년 뒤에 3권을 1권으로 축약한 필사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뒷날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인도에 가면 불교의 4대 성지가 있다. 석가모니불이 탄생하신 카필라바스타(가비라)의 룸비니, 큰 깨달음을 얻으신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인 사르나스의 녹야원(鹿野苑), 세수 80세로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 등이다.
부처님, 불타(佛陀)란 이름은 붓다, 곧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석존(釋尊 : 釋迦世尊)은 ‘석가족(샤카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불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로서 기원전 563년께에 카필라바스타라는 소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반왕(淨飯王 : 슛도다나), 어머니는 샤카족의 나라 카필라바스타의 이웃 부족인 콜리아족 출신인 마야 부인이었다. 마야 부인이 해산이 다가오자 고향인 레바다로 가서 출산하려고 길을 떠났다가 가비라에서 60리쯤 떨어진 룸비니 동산에서 싯다르타를 낳았다. 뒷날 불법의 수호자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호칭을 얻은 아쇼카왕(재위 : 기원전 268~232년)이 석존의 자취를 좇아 성지 순례를 하면서 이곳에 탑과 석주를 세웠다.
싯다르타는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외아들 라훌라도 낳았으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무상한 인간사에 대해 오래 고뇌하다가 29세에 출가, 왕자에서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마가다국 우르빌라의 세나 마을을 흐르는 네란자라강(尼連禪河) 근처에서 고행 정진하다가 아슈바타나무 아래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의 아들 고타마 싯다르타가 큰 깨달음을 얻은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그 나무 아슈바타는 그로부터 ‘깨달음의 나무’, ‘도(道)의 나무’라는 뜻에서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부다가야이다.
석존의 깨달음은 곧 모든 고뇌에서 자유로운 해탈(解脫)이요, 해탈에서 터득한 진리는 곧 자비의 길, 광명의 길, 평화의 길인 열반(涅槃 : 니르바나)인 것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부처님이 서기전 483년 세수(歲壽) 80세로 열반에 드신 중천축국의 쿠시나가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남천축국 ․ 북천축국의 순서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돈황, 고비사막, 천산북로나 천산남로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는 육로 대신 중국 남부 광주(廣州)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돌아 인도 동쪽 벵골만으로 가는 항로를 이용하여 오늘의 캘커타 부근에 상륙한 듯하다. 남아 있는 <왕오천축국전>에 동천축국에 관한 기사가 매우 적은 분량밖에 없는 것을 두고 학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혜초의 서역행이 다른 구법승들의 행로와는 전혀 다른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불국기>를 남긴 당나라 법현은 육로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왔고, <대당서역기>를 남긴 현장은 육로로 왕복했으며, <남해귀천기>를 남긴 의정은 해로로 왕래한 반면, 혜초는 해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현재 남아 있는 <왕오천축국전>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보(寶 : 佛․法․僧 삼보에서 보자만 남은 것으로 추정)를 사랑하지 않는다. 맨발에 나체며 외도(外道 : 異敎徒)라 옷을 입지 않는다……. 음식을 보자마자 곧 먹으며 재계(齋戒)도 하는 일이 없다. 땅은 모두 넓다. (중략) 노비를 소유하고 사람을 파는 죄와 사람을 죽이는 죄가 다르지 않다……―
이 대목이 동천축에 관한 기록으로 보이며, 곧 이어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중천축국의 쿠시나가라 기사가 나온다. 번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한 달 뒤에 구시나국(拘尸那國)에 다다랐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다. 성은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한 선사(禪師)가 그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었다. 해마다 8월 8일이 되면 비구와 비구니들, 도인과 속인들이 그곳에 모여 대대적으로 불공을 올린다. 그때 공중에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또 그로 인하여 이 날을 기해 불교를 믿으려고 마음먹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 탑 서쪽에 한 강이 있는데 이라발저수(伊羅鉢底水 : 아이라바티)라 한다. 남쪽으로 2000리를 흘러 항하(恒河 : 갠지스강)로 들어간다. 그 탑이 있는 곳 사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매우 황량한 숲만이 우거져 있다. 그러므로 그곳으로 예불을 올리러 가는 사람들은 범과 무소에게 해를 당한다. 이 탑의 동남쪽 30리 지점에 절이 하나 있다. 이름이 사반단사(沙般檀寺)이다. 거기에는 30여 호의 집이 있고 그 가운데 세 집이나 다섯 집에서 항상 그 탑을 청소하는 선사를 공양한다. 지금도 그 탑에서 공양하고 있다(이하 멸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산상 설법을 하던 영취산에서 고향인 가비라로 가던 길에 이곳 쿠니시가라에서 열반했다. 혜초가 서역 기행을 하던 때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1200년 정도가 지난 뒤였는데, 당시 인도―천축국은 다섯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었고, 이미 부처님의 4대 성지는 모두가 황량한 폐허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인도는 불교 국가가 아닌 힌두교 국가이다. 석가모니불도 재세 시에는 그의 설법이 인도 전역에 고루 미치지 못했고, 심지어는 사촌아우로서 제자가 된 제바닷다 등의 암살 미수 사건, 제자들의 배신, 교단의 분열 같은 험난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결집하여 꾸준히 전파했으며, 이에 따라 불교는 차츰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아쇼카왕의 열렬한 불교 신앙심에 따른 보호 육성에 힘입어 불교는 크게 번성하였으나, 기원전 2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이후 인도 불교는 승단의 분열과 강력한 외적의 침범에 따라 급속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불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12세기에는 인도 대륙에서 거의 사라진 반면,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어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였고, 불교사상의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마침내 동양문화의 정수요 바탕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혜초의 인도 순례는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왕오천축국전>의 첫 부분을 좀 더 소개하기로 한다.
―하루는 파라나시국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도 황폐되었고 임금도 없다(이하 멸실)…… 저 다섯 명이 함께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으므로 그들의 소상(塑像)이 탑 안에 있다(이하 멸실)……―
―곧 이 녹야원(사르나스), 구시나(쿠시나가라), 왕사성(王舍城 : 라자그라), 마하보리(摩訶菩提)의 네 영탑(靈塔)도 마갈다국(마가다국) 경계 안에 있다. 이 나라―파라나시국에는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가 더불어 행해지고 있다. 마하보리사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본래의 소원에 맞아 매우 기쁘므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이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영취산에서 마지막 설법을 끝으로 인류의 스승으로서 45년 동안의 교화 활동을 마치고 출가하던 길을 되짚어 고향인 카필라로 가던 도중에 육신의 병을 얻어 이곳에서 위대하고 장엄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25년간 늘 가까이서 시중을 들어주던 사촌아우요 제자인 시자 아난다가 사라수 가지를 잡고 슬피 울자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나 언젠가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느니.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생각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죽은 뒤에 가르칠 스승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느니라. 내가 지금까지 말하거나 정해준 교법과 계율이 곧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의 스승 노릇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어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이런 요지의 유훈을 남겼다고 <열반경>은 전한다.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들과 작별을 하노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법이다. 부지런히 힘써 정진하되 게으르지 말기 바라노라.”
그리고 입적한 부처님의 유해는 쿠시나가라 동쪽 교외에서 제자들에 의해 다비를 치렀다. 불법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혜초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성지를 찾아보고 얼마나 가슴 뜨겁고 진한 감동에 잠겼을까.
하지만 <왕오천축국전> 필사본에 남은 혜초의 서술은 기록사진을 보듯이 매우 사실적이며 간결하여 좀처럼 그의 감상이나 흥취를 엿보기 힘들다. 다만 이 가운데에 다섯 수의 오언시(五言詩)가 사이사이에 남아 외롭고 괴로웠던 순례 당시 혜초의 감상적인 일면을 전해주고 있다. 다음은 부처님의 성지를 찾아본 감회를 읊은 작품이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하지 않았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리요.
다만 매달린 듯 험한 길을 근심할 뿐 이미 거친 바람도 아랑곳않네.
여덟 탑은 참으로 보기 힘드니 어지러이 오랜 세월에 타버렸구나.
어찌 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 오늘 아침에 바라보노라. ―
혜초는 파라나시에서 15일쯤 걸어 중천축국에 이르러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던 사위성과 비야리성을 거쳐 가비야라국(迦毘耶羅國), 곧 부처님이 태어나신 카필라성에 다다른다. 그곳도 이미 폐허가 되고 탑은 남아 있으나 스님도 백성도 없다. 다만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을 때 붙잡고 고통 없이 출산했다는 무우수(無憂樹)라는 보리수만 남았을 뿐이다. 혜초는 부처님의 탄생지를 기려 세운 탑을 찾아 예불하는 데에 숲은 거칠게 우거지고 도둑이 많았다고 했다. 기원정사는 최초의 가람인 죽림정사와 더불어 부처님께서 오래 머물며 설법하시던 성지이다.
중천축국을 떠나 남쪽으로 3개월 남짓이나 걸어간 뒤에 그는 오늘의 데칸고원 일대인 남천축국에 이른다. 혜초는 남천축국 땅이 매우 넓어 동 ․ 서 ․ 남쪽으로는 바다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북천축국 ․ 서천축국 ․ 동천축국과 경계를 이룬다고 썼다.
이곳에서 나가르주나―용수보살(龍樹菩薩)의 유적을 답사하고 여러 지방을 거쳐 이번에는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목숨을 건 순례 여행길이라 위험하기도 했고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설에는 혜초가 중국에서 출발할 때 일행이 80명이었는데 귀로에는 겨우 14명만 남았다고 했다.
또한 당시 혜초는 감수성이 예민한 20대 초반 젊은 나이로서 외로움도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남천축국을 떠도는 도중에 혜초는 이렇게 읊어 여수(旅愁)를 달래기도 했다.
―밝은 달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뜬구름만 두둥실 사라지네.
그 편에 편지라도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서 듣지도 않누나.
하늘가 북녘에 내 나라 두고 서쪽 끝 타국 땅에 있다네.
날씨 따뜻하여 기러기도 오지 않으니
누가 계림으로 날아가 소식 전해주려나. ―
혜초는 남천축국을 떠난 지 2개월 뒤에 서천축국에 이르렀다. 서천축국은 오늘의 인도 서부 뭄바이 지방이다. 뭄바이는 최근 인도 정부가 되돌려놓은 봄베이의 옛 이름이며, 당시 서천축국은 대식국(大寔國 : 大食國), 즉 회교국인 아라비아의 침략을 받아 나라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고 그는 기록했다.
다시 서천축국을 떠나 북쪽으로 3개월을 올라가 오늘의 인도 북부 캐시미르 지방인 북천축국에 이른다. 이렇게 다섯 천축국을 모두 순례한 혜초는 부처님이 고행하던 설산(雪山)―히말라야와 파미르고원 남쪽 기슭의 여러 소국들을 둘러보고, 이번에는 서부 투르크스탄으로 들어간다. 1개월 남짓의 서북행 끝에 건태라국(建駄羅國 : 간다라)에 다다르고, 다시 50일간의 여행 끝에 오늘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방인 토화라국(吐火羅國 : 토하리스탄)에 이르른다.
이 부분에서 혜초는 파사국(波斯國 : 페르시아), 대식국, 불림국(佛林國 : 동로마제국) 등에 관해 기록했는데 이 대목이 근래 혜초의 순례행이 페르시아 ․ 아라비아 ․ 동로마제국까지 미쳤는가 하는 논란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 뒤 혜초는 안국(安國 : 부하라), 사국(史國 : 칼루시), 강국(康國 : 사마르칸드), 석국(石國 : 타슈겐트) 등을 거쳐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귀당 길에 올랐다. 오늘의 아프가니스탄과 독립국가연합 우즈베크공화국 일대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 혜초는 마침 서쪽으로 가는 당나라 사신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서 지은 시가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다섯 편 가운데 하나인 다음 작품이다.
―그대는 서번(西蕃)의 먼 길을 한탄하나
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탄식하노라.
길은 거칠고 높은 산은 눈이 몹시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둑떼도 많도다.
새는 날지만 깎아지른 산 위에서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 건너기를 두려워하도다.
내 평생 눈물 흘릴 줄 몰랐는데
오늘은 천 줄이나 뿌리는구나. ―
혜초가 파미르고원을 넘어 당의 안서(安西 : 庫車)에 도착한 것은 727년(당 현종 15년) 11월이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원본은 더 이어졌겠지만 아쉽게도 필사본은 이 부분에서 끝난다.
혜초는 장안으로 돌아온 뒤 지난 10여 년간 10만여 리에 이르는 다섯 천축국을 비롯한 서역순례기를 집필하고, 733년(신라 성덕왕 32년, 당 현종 21년)에 스승 금강지로부터 법을 받았으며, 740년에 금강지가 장안 천복사에서 <대승유가천비천발만수실리경>을 번역하는 역경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또한 그 뒤 774년(신라 혜공왕 10년, 당 대종 9년)에는 불공 스님으로부터도 법을 받아 그의 6대 제자의 한 분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고, 780년에는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대승유가대교왕경>의 서문을 지었다고 전한다. 당시 그의 나이 이미 77세였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혜초는 끝내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당나라에서 입적, 생전에 성지를 찾아 그 분의 자취를 기리던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영원한 순례를 떠났다.
황원갑 <고승과 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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