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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18일 대구지하철 2호선 개통
개통을 하루 앞둔 10월 17일 대구지하철 2호선 용산역 부근에서 개통을 축하하는 구조물 위로 애드벌룬이 띄워져 축하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8년9개월 동안의 대역사(大役事) 끝에 대구지하철 2호선이 18일 오후 2시 개통됐다.
1997년 1월 착공됐다. 당초 개통을 2002년으로 잡았으나 IMF사태로 사업기간이 3년 연장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총사업비는 2조3330억원.
총길이는 29㎞다. 달성군 다사읍 문양역에서 수성구 고산동 사월역까지 정거장은 모두 26개. 이중 7곳은 상행과 하행을 별도로 이용해야 하는 ‘상대식’이고, 나머지 19개는 승강장 가운데서 상·하행 동시에 이용이 가능한 ‘섬식’이다. 1호선은 안심역만 섬식 정거장이었다. 또 반월당역은 1호선과 환승이 가능한 중심역이 된다.
주행시간은 문양에서 사월까지 49분. 50분 30초 걸리는 1호선(길이 28.3㎞)과 함께 시내 교통망을 빠르게 할 전망이다.
2호선에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위한 시설이 1호선에 비해 크게 보강됐다. 26개 전 승강장에는 엘리베이터가 모두 69대나 설치돼 있다. 장애인 전용 화장실도 43곳. 에스컬레이터도 208대 설치돼 이동성과 편의성을 크게 높였다.
전동차에는 휠체어 장애인 전용 공간이 3곳 있고, 전동차의 출입문 턱도 휠체어 통행을 위해 거의 없앴다.
여성화장실의 경우 변기 수를 남성화장실의 변기 수와 동일하거나 많게 설치했다. 유아용 변기가 설치된 화장실이 별도로 갖추어져 있고, 그 안에는 기저귀를 갈아줄 수 있는 기저귀 교환대까지 있다. 버튼을 누르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는 에티켓벨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응급상황에 대비한 비상호출기도 설치됐다.
오전 5시30분부터 밤 12시까지 운행된다. 오전 7시20분부터 8시40분까지, 오후 6시10분부터 8시40분까지의 출퇴근 시간은 5분 간격이며, 그 외의 시간은 7~10분 간격이다. 이용요금은 10㎞까지는 800원, 10㎞를 초과하는 구간은 900원, 13세 미만 어린이는 절반 할인된다. 장애인, 국가유공자, 65세 이상 경로우대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 부모와 같이 이용하는 만 6세 미만의 어린이는 2명까지, 장애인(장애등급 1~3급)의 동반자 1인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교통카드를 이용할 경우 일반인은 10%, 중·고생은 20%의 할인 혜택이 있으며, 대학생은 일반용 교통카드를 구입해 지하철역이나 버스승강장 교통카드 충전소에서 대학생용으로 사용자 신분을 변경하면 20%의 할인 가능하다.
반월당역 등 3곳에는 대규모 지하공간이 개발돼 쇼핑센터로 활용된다.
또 용산·범어·대공원역 등 3곳에는 ‘떠 오르는 태양’ ‘범어의 사계’ ‘도약과 전진을 위한 여명’ 등 대구시민의 염원과 희망을 담은 조형물이 각각 설치돼 있다. 26개 정거장 어디에서도 문화행사가 가능한 것도 특징.
대구지하철건설본부 한동수(韓東洙) 본부장은 “앞으로 시민들이 애용할 수 있도록 더욱 좋은 지하철을 가꿔나가겠다”고 말했다.
▶ 1685년8월18일 낭트칙령 폐지
신ㆍ구교간의 갈등으로 36년동안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위그노 전쟁’이 한창일 무렵 프랑스 변방의 신교(新敎) 국가 나바르에 젊은 왕이 있었다. 그는 1572년 프랑스 왕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가 1만명의 신교도가 죽음을 당한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을 겪고 그곳에 3년반동안 볼모로 잡힌다. 그 또한 ‘위그노’라 불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자 교황이 그를 파문하면서까지 왕위계승을 막았지만 그는 1598년 앙리3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자리에 오른다. 그가 바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사랑받았던 앙리4세였다.
그는 위그노였지만 즉위하자마자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4월13일에는 낭트칙령을 발표한다. 칙령에 따라 위그노에게는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파리만 빼놓고는 어떤 지역에서든 예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신교도는 지역을 제한받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고 가톨릭은 신교를 인정한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종교통합이 효과가 있었는지 종교전쟁은 서서히 끝이 나고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685년 10월18일, 태양왕 루이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위그노가 누려온 모든 종교적ㆍ시민적 자유가 박탈돼 다시 종교혼란에 휩싸이자 40만명 위그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그들은 영국ㆍ네덜란드ㆍ프로이센 등지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은 속이 시원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상인ㆍ공예인ㆍ군인들로 구성된 위그노가 떠난 공백은 프랑스에 너무나 컸다.
▶ 2011년 오늘,
산악인 박영석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의 코리안루트 개척 중 목숨을 잃다.
"하강을 끝내고 전진캠프로 가려면 우측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좌우로 눈사태가 심하게 발생하여 통과하지 못 할 것같다"는 마지막 교신을 남겼다. 히말라야14좌, 세계7대륙 최고봉, 3극점 (북극, 남극, 에베레스트)
등정성공!
▶2005년한국·루마니아 확대정상회담(서울)
▶2005년2005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개막(김대중 컨벤션센터)
▶2005년‘만인의 연인’ 심은하 결혼식
▶ 2005년 10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大邱 都市鐵道 二號線)이 개통되다.
대구광역시의 동서를 잇는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은 기점
문양역에서 종점인 영남대역
까지 총 영업거리 31.4km다.
원래 수성구의 사월역까지만
먼저 개통됐다가, 개통 2년 후
경산 연장 구간이 착공되었고
2012년 9월에 연장 개통됐다.
반월당역에서 1호선과,
청라언덕역에서 3호선과 환승이
가능하며, 전동차를 제작한
회사는 (주) 현대로템이다.
▶2004년인도판 ‘로빈후드’ 쿠스 무니스 와미 비라판 사살
▶2002년약대 6년제로 전환. 2007년까지 단계적으로 도입키로
▶1997년코카콜라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회장 사망
▶1996년유엔 국제해양법재판소 발족
국제법해양재판소가 1996년 10월 18일 발족됐다. 1996년 8월 1일 유엔본부에서 해양법 협약에 가입한 1백2개국 대표들의 투표로 재판관 21명이 선출됐고 이들 중 가나출신의 토마스 멘사 재판관이 초대 재판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에서는 고려대 박춘호 교수가 재판관에 선출됐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지난 1994년 발효된 유엔 해양법 협약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이에 앞서 유엔은 지난 1982년 점증하는 해양분쟁의 틀을 잡기 위해 15년간의 작업끝에 전문과 부칙 4백50개조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바다에 관한 세계법`인 해양법을 만들었다.
해양법재판소는 이 법률을 만든 뒤 협약 가입국들이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상정해 강제수단으로 창설케 됐다.
▶1990년첫 남북통일음악제 평양서 개최
▶1989년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
▶1989년헝가리 41년 만에 헌법 개정안 통과. 국호를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공화국`으로 개명
▶1989년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퇴진
▶1988년노태우 대통령 유엔연설, 6자회담 제안
▶1985년서울지하철 3~4호선 준공
▶1984년 진도대교(첫 사장교) 개통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과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을 연결하는 총 길이 484m의 교량 폭 11.7m 의 사장교.
한국 최초의 사장교이며 진도대교의 개통으로 인해 해남군에서 광주광역시까지 4시간 30분 가까이 걸리던 소요시간이 2시간 30분으로 단축되었다.
역사적인 교량이라 다리 입구에 이순신장군 동상과 진도군을 상징하는 진돗개상의 있다.
▶1984년시인 앙리 미쇼 사망
▶1981년그리스총선, 사회운동당 승리
▶1979년부마사태로 비상계엄 선포
1979년 10월 15일 오전 9시 반경. 조용하던 부산대 교정 곳곳에 두 종류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
“학원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 유신헌법 철폐, 독재정권 퇴진!”
두 선언문은 학생들에게 이같이 호소했다. 시위 집결지는 도서관 앞, 시간은 이날 오전 10시. 그러나 학생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6일 다시 부산대. 오전 10시 한 학생이 인문사회관과 도서관을 뛰어다니며 외쳤다.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합시다!” 이번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독재 타도! 유신 철폐! 학원 사찰 중지! 구속 학생 석방!”
70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어깨를 겯고 경찰 저지선을 뚫었다. 그날 오전 11시경이었다. 시위대는 시내 중심가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오후 3시경 부산시내 국제시장에 시민 3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오후 8시경 시위대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남포동 파출소를 부수고 경찰을 포위했다. 파출소에 걸린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불태워졌다. 17일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부산대엔 임시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부산대 학생과 동아대 학생들이 시내 곳곳에서 뭉쳤다.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은 18일 0시였다. 공수부대가 폭력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무자비한 진압에 수많은 시민이 다쳤다. 계엄군의 총칼 아래 부산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항쟁의 기운은 이미 마산으로 퍼졌다.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경남대 학생들과 시민들이 “우리나라 거리마다 맑은 피를 뿌리자!”고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20일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폭력적인 공권력을 앞세운 계엄령 앞에 결국 부마항쟁은 막을 내렸다.
부마항쟁이 한창이던 1979년 10월 17일. 그날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선포한 지 7년째 되는 날이었다. 7년간 유신체제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1979년 8월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강제해산, 그해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등의 탄압이 잇따라 자행되기 전까지는. 독재에 대한 염증과 분노는 기어코 부마항쟁으로 터져 나왔고 유신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렸다. 4·19혁명 이후 30년 만에 시민과 학생이 뭉쳐 독재에 저항했다. 1주일여 뒤인 26일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978년카터 미국 대통령, 중성자탄 생산명령
▶1977년서독 특공대, 인질구출작전 성공
▶1972년미국-소련, 통상협정 조인
1971년 10월 18일.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유상철(柳想鐵) 출생.
2021년 6월 7일 사망.
1990년대 전반에 걸쳐 한국에 큰 영향을 줬던 선수 중 하나이다. 왼쪽 눈을 거의 실명당했지만, 노력과 훈련을 통해 극복했으며 2002년 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월드컵 첫 승과 4강 달성에 큰 기여를 했던 선수이다. 2019년 말에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생존 가능성이 희미함에도 끝까지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투병해왔으나, 2021년 1월 초 암세포가 뇌로 전이되면서 병세가 나빠졌고 집중 치료를 받아왔지만 6월 7일 향년 51세로 숨을 거두었다.
▶1970년장훈,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 타율 기록
▶1967년 소련 인공위성 비너스4호, 최초로 금성에 착륙
소련이 1967년 10월 18일 역사상 최초로 금성탐색위성 비너스 4호를 금성표면에 연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비너스 4호는 이날 오후 1시34분 매초 11km의 속도로 금성에 진입, 과학실험실은 90분뒤에 낙하산으로 착륙했다.
비너스 4호는 금성의 대기권에서 자력대나 방사능대 혹은 질소성분은 전혀 포착하지 못했으며 단지 엷은 수소층을 포착했다. 금성의 대기층은 거의 대부분 탄산가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산소와 수중기는 단 1∼0.5%에 불과하다. 지구대기권의 산소성분은 전체의 21%에 달하며 수중기는 전체용적의 0∼4%에 이르고 있다. 금성 대기권의 온도는 비너스4호의 금성진입진도에 따라 섭씨 40도에서 2백80도의 분표를 나타냈다. 기압도 1내지 15기압의 차이를 보였다.
▶1962년케네디, 그로마코 소련외상과 독일문제해결방안 토의
▶1962년알제리아와 쿠바 수교 합의
▶1961년라오스왕국, 푸마를 임시정부 수상에 임명
▶1950년고당 조만식 선생 사망
▶1950년무공훈장령 공포
▶1948년소련군, 점령체제 끝내고 북한철수 개시
▶1947년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무기휴회
▶1946년1시간반 길이의 정규방송 시작
▶1941년세기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체포
▶1941년일본 도조(東條) 히데키 내각 성립. 이 내각이 태평양전쟁 개시
일왕 히로히토 '도조를 새 총리로 지명'
도조 내각이 출범한 날이다.(전범 내각 이자 일본 극우의 뿌리!)
고전적인 육군대장 출신의 도조가 총리에 임명됨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일본은 동아시아를 넘어져서 태평양지역 지배야욕을 노골화했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력과의 충돌을 불러왔다. 미국은 일본에대해서 규제조치를 취했고 이제 전쟁은 불가피하게 됐다.
도죠는 기습공격으로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파괴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진주만 공습명령을 내린 것은 총리로 취임한지 4개월도 안된 12월 초였다.
도조 내각이 무모하게도 미국에 싸움을 건 것은 독일이 서구유럽에서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이다.
도조는 결국 일본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일본이 패전하자 그는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죽기전에 발견되
살아난 그는 도쿄전범재판에 회부되었고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죽은지 70년 지난 요즘에도
오늘 날 그의 망령은 아직 일본사회를 배회하고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서 더욱 강력히 부활하고 있는것이 최근 극우화의 길을 걷고있는 일본사회의 기류이다.
▶1931년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사망
축음기,전구,영사기 등 무려 1천 3백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은 생애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몸은 머리를 여기저기 옮겨주는데만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70세를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끼는 나머지 라디오방송이 나 전기식레코드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을 곧 싫증내고, 자기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우겼다.
세 아들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몰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 제조에 나섰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다. 70대 후반이 되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섰으나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다. 너무 늦게 시작해 경쟁에서 뒤쳐졌기 때문이다. 80세가 되자 에디슨은 이번에는 고무제조에 호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미국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었다. 그는 "고무 생각만 하고 고무 이야기만 하고 고무 꿈을 꾸었다"고 에디슨의 부인은 회고했다. "미국은 5년 내에 고무생산국이 된다"고 에디슨은 자신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고무의 비해 제조과정이 복잡했고 무엇보다 품질이 형편없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노년을 보냈던 에디슨은 결국 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다.
초년의 성공이 그의 말년을 발목잡는 결과를
낳게된다.
사실 초창기에 전기 및 전구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던 시절 절호의 찬스를 스스로 놓친사건도
특유의 고집에 기인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자신의 직원이었던
테슬라의 조언과 아이디어(교류전기방식)를 일언지하에 무시하고 자신의 '직류전기방식'만
고집했다.(직류 와 교류시스템을 전부 가질수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림)
결국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 손잡고
전기발전사업 전반에 걸쳐 선수를 빼았게된다.
이는 에디슨이 창업한 그 유명한 'GENERAL ELECTRIC(GE)'을 J.P 모건에게 매각할 수 밖에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1923년전국산업대회 열림
▶1922년윤덕병 등 조선노동연맹회 결성
▶1918년체코 독립선언
▶1912년제1차 발칸전쟁 발발
▶1912년이탈리아-터키, 로잔느조약 조인(트리폴리전쟁 종결)
▶1907년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헤이그협약` 채택
▶1902년 정부, 최초의 기념우표 발행
대한민국 최초의 '기념우표' 고종즉위 40주년 발행. 1902년에는 고종황제 주기40주년 기념 우표를 전환국에서 최초로 발행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 한국에 통신권이 일본에 강탈당하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일본우표를 사용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1884년 우정사업의 개시와 함께 이해 11월 18일 우정총국에서 최초로 우표를 제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의뢰해 발행한
이 우표는 문위우표로 당시 화폐단위가 '문' 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문위우표은 5,10,25,50,100문짜리 5종 이었으나 우정국 낙성식(1884년12월 4일)을 계기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이들 우표는 널리 통용되지 못했고 우정 사업 자체가 중단됐다.
최초의 기념우표는아니고 당시 쓰이던 우표임!
▶1893년프랑스 작곡가 구노 사망
▶ 1871년 영국의 수학자, 발명가 찰스 베비지 사망
배비지 [Babbage, Charles, 1792(91).12.26~1871.10.18]
나무와 쇠만 가지고 컴퓨터를 만들 수 있을까. 그렇다. 전기와 반도체 없이도 컴퓨터를 만든 사람이 있다.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시대를 앞서간 천재다.
은행가 집안에서 1792년에 태어나 풍요 속에서 성장한 그는 기계를 만들고 계산하는 데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속도측정기며 소떼를 모는 기계를 만들며 자라던 그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을 공부했으나 곧 질시를 받고 곤경에 빠졌다.
적대국인 프랑스에서 유행한 근대 수학에 대한 연구가 적대시되는 분위기 속에 비애국자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적국의 학문에 빠져 있다는 비난에 맞서 그는 모든 것을 측정하고 계산하려 들었다.
‘매 순간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명제마저 ‘매 순간 한 사람이 죽고 1과 16분의1의 사람이 태어난다’고 고쳐야 직성이 풀렸던 희대의 천재가 몰두한 첫 대작은 미분기계. 영국 정부도 여기에 관심을 갖고 1,500파운드를 지원했으나 당시 기술로는 정교한 부품 가공이 불가능해 그의 사망 17년 뒤에야 아들에 의해 완성될 수 있었다.
미분기계에서 막힌 그는 해석기관 설계에 들어갔다. 50자리 수까지 계산 가능한 ‘밀(mill)’은 중앙처리장치(CPU)에, 숫자를 저장하는 스토어(store)는 메모리에 해당될 만큼 오늘날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까지 갖췄던 그의 해석기관 역시 부품의 신뢰도 문제로 완성되지 못했다.
결국 완성작을 남기지 못한 채 그는 1871년 10월18일, ‘인생에서 즐거웠던 날은 하루도 없었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자신의 시대에서는 인정 받지 못했지만 그는 ‘컴퓨터의 아버지’로 기억된다. 나무와 석탄의 시대를 살면서 쇠로 컴퓨터를 만들려던 천재의 몽상 속에 현대 정보화사회가 잉태된 셈이다.
▶1867년미국,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
미국,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달러로 구입!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알래스카는 1867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슈어드 의해 720만달러 (약 80억원) 의가격으로 미국의 팔려 미국땅이 되었다.
당시에는 어리석은 짓(미국의 알래스카구입
건)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세계가 가장 부러워하는 자원의 보고가 되고 있다.
그 때문에 알래스카를 미국의 땅으로 만들었던 윌리엄 슈워드의 이름을 딴 '슈워드'가 들어간 지명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알래스카는 1959년에 미국의 49번째로 미국의 주가되었으며, 주도는 주노, 주의 꽃은 물망초, 주의 새는 뇌조, 주의 나무는 알래스카 가문비, 주의 물고기는 왕연어(킹 샐몬)이다.
지금까지의 일반의 인식은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한 행위는 아주 어리석은 행위로 치부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실 러시아는 알래스카에 자원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매각한 가장 큰 이유는 아래와 같다,
1853년 이후 4년간 치러졌던 크리미아전쟁 (크림 전쟁)에서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병사하는 등 참패로 끝났고, 러시아는 상당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더구나 크리미아 전쟁 당시 영국이 캄차카반도와 알래스카 일대를 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영국령 캐나다와 접경한(붙어있는,아래 지도참고) 알래스카를 방어 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영국에 빼앗겨서는 시베리아 전역까지의 안보를 위협받는 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당시 우호국인 미국의 매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단돈 720만달러에 알래스카를 매각하게 되었다.(1제곱Km/ 5달러)
이후 알래스카를 매각한 러시아는 19세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운명도 뒤바뀌게 하였다.
아깝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죠!
결과적으로 여전히 세계 최대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고 유럽부터 아시아 끝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나라지요
영국이 어떤 나라인가요?
'영토정복'에 항상 굶주려있는 나라 아닌가요.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협회는 바로'왕립 지리학회'
입니다!빅토리아여왕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전세계를 극지방포함해서 지리학상 속속 연구해서
먹어버리는데 '첨병'역활을 바랬기때문이지요!
그 영국이 영국령캐나다를 교두보삼아
알래스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
러시아는 결국 선방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영화를 보시면,
아프리카의 오지탐험(오래된 랜드로버!가 보이면)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배경(잉그리시 페이션트,
아라비아의 로렌스!)
저 유명한 '레이더스 시리즈'(배경은 미국이지만 뿌리는 영국)
하다못해 '미이라'시리즈,
대표적으로'80일간의 세계일주' 등등
이 모든 활동영역에 '영국 왕립지리학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1859년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 출생. 1927년 노벨 문학상 수상
▶1831년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775년수도회 설립자 파울루스 사망
▶1685년낭트칙령 폐지
▶1503년교황 피우스 3세 사망
▶1130년주자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유학자 주희 출생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블로거 안젤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