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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묵상글 ( 연중 제15주일. - 여행자가 아니라 파견된 자. 등 )
* 아침 6시전에 묵상글을 일부 올리고 이어 김찬선 신부님글을 올렸는데
임시저장 된 것이 있어 이를 삭제하는 과정 중에 없어졌는지
조금전 다시 묵상글을 읽으려고 확인 중에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게재합니다. ( 올리지 아니했던 키엣 대주교님 글 추가)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24. 07. 14. 16:15. 김춘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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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14 05:48
- 여행자가 아니라 파견된 자
배가본드(vagabond)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말로 여행자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이것을 영영사전에서는
‘wandering aimlessly without ties to a place or community’라고 풀이합니다.
풀이하면 어떤 일정한 장소나 공동체에 매임 없이
그리고 아무 뚜렷한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 참으로 여행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좀 더 고상하게 성지 순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한곳에 매인 삶이 답답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저는 함부로 의심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
아무튼 여행이나 순례나 공통점은 어떤 곳에 매이지 않고,
머물던 곳을 떠나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나 복음의 제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행자나 순례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행자와 순례자가 자기 스스로 떠나는 것이라면
예언자와 사도들은 부르심 받고 파견받아 떠나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여행자와 순례자가 자기가 좋아서
그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곧 자기가 끌리는 데로 간다면
예언자와 사도들은 가기 싫어도 가라고 하시니 가고,
가고 싶지 않은 곳도 가라고 하시니 가는 것이 다른 것이지요.
실로 저희 수도자와 선교사에게 관건은 파견의식입니다.
여기서 파견의식이란 파견 예절의 뜻이 아니라
나는 파견되는 존재라는 정체성 의식을 말함입니다.
내가 파견되고 안 되고는 파견자의 뜻이고,
어디로 파견되는 것도 파견의 뜻이며,
파견되지 않으면 있는 곳에 계속 있는 것도 파견자의 뜻입니다.
그런데 수도자건 신자들이건 이런 파견의식이 없어
파견자의 뜻을 생각지 않고 ‘셀프파견’을 하려 합니다.
옛날 수도자들은 선교사로 파견될 때
선교사가 될 생각이 없는데도 선교사가 되라고 하니 되고,
갈 곳도 자기 선택이 아니라 가라는 곳이, 갈 곳이 되었는데
지금은 내가 선교사가 되고 싶어서 되고
가고 싶은 곳이, 갈 곳이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집니다.
여행자나 순례자와 예언자나 선교사의 차이는 여행 짐을 봐도 알 수 있지요.
요즘 여행자들은 웬 짐이 그리 많습니까? 짐이 짐스럽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비판합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짐스러워하면서 여행 짐은 하나도 짐스럽지 않은가 보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짐에 관한 규정을 파견 규정으로 내려 주십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너에게 짐이 되고 지장이 되지 않게 하라!
아무것도 네가 의존하는 필수품이 되지 않게 하라!
네가 오로지 지녀야 할 것 곧 짐은 주님뿐이다!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평화만 너의 짐이다!
주님의 파견 규정에는 가야 할 곳도 있습니다.
가야 할 곳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경치 좋은 곳 또는 명승지가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목적이 복음 선포이니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파견 규정에는 마무리 규정도 있습니다.
떠나갈 때 파견자의 뜻대로 파견되었듯
마칠 때도 파견자의 뜻대로 마쳐야 합니다.
더 있고 싶다고 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환영받지 못할 때 뒤끝이 작렬해서도 안 됩니다.
발의 먼지를 털고 깨끗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에는 그곳을 깨끗이 떠나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뜻은 새로운 곳으로 가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도 그리고 어떤 사람도 애착하지 말고,
그저 하느님 뜻에 따라 있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라는 주님의 뜻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행자가 아니라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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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 남성이 상체에 ‘타투’를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많이 했고, 또 그 친구들이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정했습니다. 이 남성의 어머니께서 우연히 아들의 타투한 것을 보았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김치 담던 반찬 통으로 아들의 머리를 두들겨 패며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사실 이 남성은 부모의 말씀에 늘 순종하며 살았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할 때마다 긴소매 티셔츠를 입거나 토시를 해서 상체의 타투를 가렸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운전하다가 전방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신호를 기다리는 앞차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에 앞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운전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빨리 윗도리 벗어!”
숨기고 싶었던 아들의 타투가 이런 상황에서는 드러내고 싶었나 봅니다. 이렇듯 숨기고 싶은 면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잘못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단정짓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으려 노력하면 어떨까요? 그러나 만약 도저히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그만둘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시지요. 부족함 없이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에 제자들은 모두 실망했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해서 예수님 없이 그 모든 것이 가능할까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있는 것까지 놔두고 떠나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만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곧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에 자리 잡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늘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을,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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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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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마르 6,12-13)
우리는 모두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파견 받은 이”라는 신원에서 주어집니다.
<제1 독서>에서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음에서, <제2 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 ‘사명’이 주어집니다.
<제1독서>는 남 유다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자, 사제 아마츠야가 그를 위협하며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왕실 사제인 아마츠야가 자신을 반대하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자신의 신원과 권한이 침해당하고 위협당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어, 일종의 제도권의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선포는 아프게 찌르기에 때로는 받아들여 지지 못하고, 주변부로 내쳐지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내쳐졌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성문 밖에서 매달리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옥중서한의 서두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그분의 피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이 ‘사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성령을 파견하셨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과,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마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붙잡으셨듯이, <제2독서>에서 우리를 창조 이전에 이미 선택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 7).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파견 받은 자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곧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마르 6, 8 참조)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려줍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 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 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그래서 말씀의 권능에 위탁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마르 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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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를 파견 한 이유는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선포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는데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서로의 협력으로 선교의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명 이행의 객관성과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보장해 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한눈팔지 마라!’오직‘주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라’는 당부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 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나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 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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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는 천동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매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와 금성의 모양 변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금성을 관측하면 달처럼 다양한 모양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천동설에 의하면 금성은 초승달 또는 그믐달 모양으로만 보여야 했기 때문에 금성의 위상 변화 역시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구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지구는 1시간에 약 1,670km의 속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자전)하면서, 태양을 둘러싼 대략 9억 6천 만km에 달하는 타원 궤도를 1년 동안 돌고(공전) 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일주 운동과 계절 변화인데 일주 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행성이며, 태양은 우리은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항성이며, 우리은하는 우주의 변방에서 우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꿈을 확장시켰습니다. 우리는 달을 탐사하였고, 화성까지 탐사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천동설과 지동설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성당의 중심은 아닙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은 중남부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성당은 포트워스 한인 성당입니다. 그리고 대략 4시간 거리에 오스틴, 휴스턴, 샌 안토니오 성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에 엘파소, 덴버, 콜로라도 성당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가기에는 먼 거리에 피닉스, 라스베이거스 성당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제들이 함께 모여서 연대하는 것이 조금 어렵습니다. 중남부 지역 대표 신부님과 휴스턴, 오스틴, 샌 안토니오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꾸르실료 담당 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레지오, 엠이, 성령기도회도 담당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4시간 거리에 있는 성당이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피정도 함께 하면 좋겠고, 성령기도회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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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더러운 영들에 관한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 권한으로 세상에서 활개 치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냅니다.
이것은 복음 선포의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 말고, 또 다른 모습을 제자들에게 지니라고 하십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그리고 돈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을 연장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에어컨이나, 자동차, 컴퓨터 이것들은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없었던 것이고요. 그런데 밀이나 쌀, 옷, 잠자리에 필요한 것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과 직결된 것들까지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을 더욱 잘 선포하기 위해서? 아니면 불쌍해 보이게 하려고? 아니겠지요?
복음 선포의 모습 중 가장 중요한 모습은 바로 ‘하느님을 믿는 마음’입니다. 내 생명을 위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복음은 선포되지 못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 누구보고 믿으라고 말하겠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그분의 말씀을 모르고, 그래서 하느님이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하는데 누구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언제나 가난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빵보다, 보따리 보다, 돈보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잃어도 그것을 얻어도 하느님께 오직 감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바라던 신앙이고, 지금 우리에게도 바라는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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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힘
선을 우리는 빛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 반대로 죄는 어둠이라고 표현 합니다.
빛은 드러납니다. 환하게 모든 것을 밝힙니다.
어둠은 숨깁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숨죽입니다.
고해소 안에 있다가 보면 아직도 죄의 힘 아래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고해는 밝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해는 핑계를 늘어놓는 것뿐입니다.
내 탓이 아닌 남의 탓을 합니다.
고해하러 왔음에도 어둠에 지배당하고 있는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나와 섰을 때 우리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 용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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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사랑과 함께하는 여정
먼 길을 떠날 때, 멀리 오래가는 여행일수록 짐은 많아집니다.
복음전파라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먼 여정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선교에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선교는 주님의 자녀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지니는 것입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과 일치됨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행장이며 그 친밀함이 선교를 마칠 수 있는 원천입니다.
그 다음 주님께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
물질적 풍족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영혼을 궁핍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안위와 성공을 맛보면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을 이뤄냈다는 착각과 오만함, 자만심을 갖게 됩니다. 그 오만함은 자신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주님의 은총이 세상이 아닌 자신에게만 실현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정신과 의지의 빈곤, 곧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자각함으로써 주님께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 겸손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겸손함으로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을 지니고 떠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선교의 시작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소외되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보는 눈과 같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언제라도 찾아 떠나는 마음처럼, 진심으로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는 마음, 주님의 자비를 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열심히 본당 일을 돕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 나는 지금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일까? 주님께서 다른 일을 주셨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지금 주님을 진실 되이 모시고 주님의 뜻이신 선교에 대해 자문한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 행동이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주님과 함께, 주님께 의지하고, 공동체와의 연대감과 자비의 사랑 더욱 필요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형제와의 진실된 사랑을 이룰 수 있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사랑으로의 연대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바른 선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언제나 함께 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도직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나는 지금 선교를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지 돌아보십시오.
3. 이웃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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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의 축복된 삶
“회개, 찬미, 순종”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참 좋습니다.
“주변을 챙길줄 아는 사람이 백성을 다스릴 지혜도 얻는다.”<다산>
사랑 실천의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섭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
참 멋진 진리 말씀입니다. 천리향, 만리향 꽃같은 사랑의 행복한 수도공동체라면 성소자는 물론 목마른 영혼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아 올 것입니다.
어제와 자고 난 지금의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요셉수도원 설립 37주년 및, 75년 제 생애 최초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참으로 생전 처음 침실에 아담한 50만원짜리 침대를 놓았고 그 느낌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그 소감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치스러운 고가의 침대가 아니라 안도했습니다. 돌침대가 아닌 흙침대입니다. 순전히 참 좋은 분의 사랑과 원장수사의 분별의 결단으로 이뤄진 쾌거입니다. 물론 사랑의 성령님께서 개입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저와 두분의 친애하는 도반 70대 노수사들에 대한 수도공동체의 각별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평생 무소유의 비워가는 단순한 삶을 추구해온 저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습니다만,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침대 놓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침 어제 강론 제목에서 강조했다시피 노쇠해가는 삶과 더불어 겸손과 순종 수행을 통한 영적 면역력을 강화하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원장수사에 전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대로 잘 어울리고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동네 경노 잔치라도 열린 듯, 신기한 구경거리나 있는 것처럼, 수도형제들 내 일처럼 기뻐하며 싱글벙글 웃으며 흥분된 모습들로 다녀갑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듯 신선한 분위기입니다. 평생 방바닥에 붙어 자다가 높은 침대를 사용하니 내 존재가 격상된듯한 고귀한 느낌도 선물처럼 받았습니다!”
업무차 어제 오전 10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 37분만에 뉴욕공항에 도착한 원장수사의 답신입니다.
“설치가 잘 되어서 제 일처럼 기뻐요. 저는 지금 막 착륙했어요.”
이어 맨먼저 침대 놓는 아이디어와 성금을 후원한 분으로부터 받은 답신입니다.
“어머나! 벌써 들어왔군요. 너무너무 보기 좋고 깔끔합니다. 오랫동안 궁리 끝에 말했던 것이 일사천리로 성사되어 기쁩니다. 아마 낼은 매트레스가 들어오겠군요. 세분 노수사님들 건강하시기만 빌겠어요!”
또 어제 오후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분은 제 면역질환으로 피부에 뚜렷한 흔적을 보고 자기가 잘 아는 한방병원에 예약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니 그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일에 전력투구하다 생긴 면역질환이기에 “부끄러워할 상처”가 아닌 “영적전투의 훈장勳章”처럼 자부하니 당당한 느낌도 들고 주님께서 알아서 조처해 주시리라 믿는 마음도 있습니다.
정말 부끄러워할 것은 “죄짓는 일”이지 결코 “피부병의 흔적”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저런 깨달음이 남은 생애 더욱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삶을 어떻게 충실히 살아낼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묵상중 떠오른 세항목입니다.
첫째, “회개하라!”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에게 우선적 자질은 회개입니다. 회개은총입니다.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참된 회개뿐입니다. 파견에 앞서 제자들은 회개와 더불어 그 텅빈 자리에 주님은 더러운 영들의 대한 권능을 가득 넣어 주셨고,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무소유의 홀가분 차림으로 떠나니 이 또한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을 택한 회개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말그대로 이런 회개를 통한 자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자유이겠습니다.
어디에 가든 환대를 고맙게 받아들이되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미련없이 떠나라 합니다. 다만 주어진 선교사명에 최선을 다할뿐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는 그대로 참된 회개의 열매인 믿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파견의 궁극 목표가 다음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요,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많은 마귀는 쫓겨나고 많은 병자는 기름부음을 받아 병이 치유되니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회개가 단연코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매사 겪게 되는 힘든 일들을 회개의 계기로,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즉 자아초월의 계기로 삼을 때 상처나 짐은 영적성장과 성숙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죽을 때가지 끊임없는 회개요 회개의 여정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 “순종하라!”
즉각적인,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삶은 지상명령의 순종입니다. 순종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갑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자살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살아내는 순종일 때 구원입니다.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 순종의 인내, 순종의 겸손, 순종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형제들간 상호순종도 물론입니다.
순종이야 말로 영적성숙의 잣대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단번에 순종은 없습니다. 순종의 여정입니다. 순종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날로 깊어 익어가는 순종입니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순종에 충실할 때 마지막 거룩한 죽음의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배웁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배우지도 못합니다.
순종의 훈련, 순종의 습관입니다. 봄철 배꼭지는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을 열매 익었을 때 잘 떨어지는 배꼭지처럼 사람도 영성이 잘 익어야 이런 자발적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참으로 눈밝은 주님은 정확히 아모스를 주목했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불렀고 그는 지체없이 순종했음이 다음 그의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예언자도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던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저는 초등학교 8년동안 교사생활하다가 주님께 붙잡혀 34세 늦깍기로 수도원에 들어왔고 올해로 수도생활 42년째입니다. 다시 산다 해도 이렇게 주님께 붙잡혀 올 것 같고, 또 이렇게 살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셋째, “찬미하라!”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여기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순종의 열매가 찬미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의 찬미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간 월요일마다 바치는 찬미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찬미에서는 자연히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합니다. 어느 한 대목도 생략하기가 아깝지만 전반부 만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존재를 끊임없이 격상시키는, 날로 주님을 닮아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 우주와 인류의 구원이 망라된 참 웅대하고 아름다운 찬미가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축복 선물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 늘 함께 하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우리들의 축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회개의 삶에, 순종의 삶에, 찬미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선포도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축복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온누리에 미치는 찬미의 축복 선물입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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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채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보내지는
나의 길은
보내시는
님의 길이오니
보내지는
나의 채비는
보내시는
님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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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무소유의 가난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무소유의 가난 체험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겸손과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무소유의 가난은 참된 겸손으로 인도합니다.
겸손은 헐벗음, 배고픔, 불안정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겸손은 당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되면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다른 많은 온갖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기에 분주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 관해 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만이 마음안에 자라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위대합니다. 그들은 미천, 초라, 허무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간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곳 까지 그곳은 너나 할 것 없이 벌거 벗는 곳입니다.
비안네 성인은 “‘아! 겸손! 겸손! 우리가 성인이 못되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모든 악을 엮은 묵주요, 겸손은 덕을 묶은 묵주입니다. 겸손은 마치 저울대 같아서 사람이 한쪽에서 자기를 낮출수록 다른 쪽에서 더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무소유의 가난은 단순하고 순순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종류의 안락함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집과 종족 마을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에 대한 애착마저 버려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믿음이요, 꾸밈없는 믿음이다.
무소윤의 가난을 통한 겸손과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요한의 말을 묵상하며 참된 신앙여정을 걷도록 합시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
쉬운일 보다 고된 일을,
위로되는 일보다 위로없는 일을,
보다 큰것보다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 보다도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 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다다르러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가지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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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롱게른(Lungern) 성당의 성체 탈취와 기스빌(Giswil)의 성체성당
스위스-1492년
그 곳을 지나가던 한 알프스 사람이 그들을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때 그는 한 찢어진 자루에서 금으로 된 물건이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의섬 쩍게 생각하여 가까운 산 중의 오두막집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해 주었다. 그 용감한 사람들은 도둑을 잡으러 가기로 하였고 그 곳으로 다가가자, 이를 알아챈 도둑 두 명은 급히 달아났다. 그러나 한 명은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붙잡혀서 재판관에게 끌펴갔다. 그는 금으모 된 성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범죄를 부인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난 뒤에 성체를 버린 기스빌 숲속의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도난당했던 성체가 있는 곳을 알게 되자 룽게른의 주임신부는 즉시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스빌 숲으로 급히 달려 갔다. 그들은 성가를 부르고, 또 속죄의 기도를 올리면서 행렬을 지어 그 성체를 다시 성당으로 모셔왔다.
주님의 성스러운 몸이 여러 시간 동안 모독당하고 내버려졌던 곳에서는 수정같이 맑은 샘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샘물은 오늘날까지 남아서 여행자의 목을 적셔 주고 있다. 그 근방에 사는 신앙심 깊은 농부들은 그 곳에다가 목재로 된 정취가 넘치는 성당을 지었다. 그리하여 그 성당은 “성체성당(Sakramentskapelle)" 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 성당 안에 결려 있는 그림에는 성채를 도둑질하는 도둑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두운 밤 동안 성체가 버려져 있던 숲은 그 이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인 “성체의 숲(Sakramentswald)" 이라고 불리워졌다. 그 곳에서는 7월의 첫 째 일요일 다음 날인 월요일에 도둑맞았던 성체를 즐겁게 다시 찾은 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성찬식과 강론이 있는 경건하며 즐거운 숲의 축제가 벌어진다. 그리고 이날 이외의 다른 여름 달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평화가 깃든 기스빌의 성체의 숲으로 순례를 한다.(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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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나기정 다니엘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6&id=2099354&menu=4770
https://blog.naver.com/marcotour/223511647357.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교회는 변화 중이다. 공동체는 항상 쇄신되어야(Ecclesia reformanda) 하듯이 그렇게 오늘의 현실에 맞추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전에는 교회의 일꾼인 사제와 수도자를 더 많이 확보하려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들이 교회 발전에 많은 기여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사제와 수도자의 수가 감소하고, 평균 연령은 고령화 추세이다. 이로 인해 교회의 일꾼은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설교로 변화시키고 회개시키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이에게 기름을 발라 고쳐주라는 요청이 있지만, 더 이상 파견할 사람이 너무나 부족한 실정이다.
사제와 수도자의 감소로 다른 이들이 그 역할을 맡는 경우들이 점차 늘고 있다. 공동체의 다른 평신도 봉사자들이 여러 그 직무들을 수행한다. 그들은 오히려 각 분야에 더욱 전문성을 띠고 활동한다. 사회 윤리적 소유권, 에너지와 환경 문제, 건강, 소외된 자들의 인권, 사형제도 폐지 문제, 사회 정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투쟁한다. 그리고 변화와 회개를 가르치고 설교한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악의 세력인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라고 파견하셨다. 모든 이가 파견받은 것이다. 우리 자신도 변화시키고, 회개시키고, 정화시키며, 악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일에 파견받은 것이다. 우리는 소명받은 자로서 언제나 자신의 역할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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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주신 소명에 따라 자신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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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 그분 이끄심으로 파견된 우리는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099352&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7-13 ㅣNo.174175
짧은 인생이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이를 선택한다. 연인, 친구, 또는 아내나 남편으로 각자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이들이다. 주님의 선택은 자유롭다. 주님께서는 장점이나 탁월함 때문만은 아닐 게다. 철저하게 그분 자유이리라.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그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그분의 말씀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게 아닌, 내가 너희를 뽑았다.”
이에 걸맞게 사도 바오로도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고 그의 여러 서신에서 언급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그분 은총 없이 살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이들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오직 그분께 의탁한 채 산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 등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사실 이렇게 파견된 그들은 더러운 영을 쫓고 병자를 고칠 때마다 그 큰 능력들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수도 있었을 게다.
그리하여 더는 행여 제자들이 자만심에 빠질 것 같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지니지 말라 하셨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그 어떤 것도 지니지 말라셨다. 그래도 정 부족하면 오직 그분께만 매달리라는 뜻이리라. 그렇게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하느님 힘은 늘 함께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머무는 게 아닌 떠나서는 발걸음 가볍게 회개를 선포하며 평화를 전했을 게다.
이 부르심과 더불어 떠남을 나선 그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복음 전하는 이로 이끄심을 먼 훗날 깨닫게 되었을 게다. 우리도 살면서 숙명 같은 삶을 견디고 사랑해야 할 때가 많이 있으리라. 병든 노부모, 장애 지닌 자녀, 누군가의 잘못도 안을 경우도. 어쩌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 지금은 무거운 십자가이겠지만, 부활의 희망으로 바뀔 그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당신 제자들에게나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신다. 부족하면 청하고 없으면 매달리란다. 당시 제자들에게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악령을 몰아내는 권한인 능력을 가졌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하느님 힘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거다. 제자들은 그 힘에 이끌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교회’다.
이것이 그분 유언의 선교이다. 그러니 선교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하느님 힘이다. 다른 것은 준비 못 해도 이 힘은 지니자. 모두가 쉽게 조직을 갖추고 많은 이가 동참하면 힘이 생길 것으로 판단하곤 한다. 세속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을 게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엄청 다를 수도.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하느님 힘이 파견된 자와 함께하지 않으면, 결국은 힘 둘 바 모르고 시들게다.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소리 없이 문 닫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선교는 마음먹기가 아니다. 주님 이끄심에 맡기는 행위이다. 사도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건만 힘이 있었다. 주님께서 그 힘 주셨기에. 우리 역시 그분께 매인 이로 살자. 우리도 이를 위해 파견된 이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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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돌무화과나무를 가꾼 경험과 기술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의 일에 관한 모든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소유’를 요구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언제나 주인이나 스승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단죄, 험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같은 잘못된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만일 하느님의 일 때문에 이웃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꾸 갈등을 겪는다면, ‘누구의 힘’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성체 앞에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 자녀로 부르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말씀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 안에서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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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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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무엇을 믿고 제자들을 파견하셨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당신과 함께 지낸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이
파견될 정도로 능력을 갖추거나
훌륭한 사람들이었는지 물을 때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파견에 앞서 예수님께서
권한을 주셨지만
그것마저도 제자들의 어떤 모습을 보고
선뜻 그렇게 행동하셨을까
놀랍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였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다는 것도
특이한 점인데
더욱이 당신이 하시는 일을 똑같이 하도록
파견하셨다는 것은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음은
확실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 더 중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통해 무엇인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그들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능력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일 역시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꼭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만
당신의 일을 맡기지는 않으십니다.
능력이 없어도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단지 하느님의 도구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 고유의 방식대로 일이 진행되고
그 안에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능력을 키울 필요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기도 하고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부분도
생각 외로 진행되는 것을 볼 때
하느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나의 능력만 바라본다면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담이나 걱정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면
그 부담은 좀 덜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함께 이루어 가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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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여름 캠프 온 아이들을 위한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대형 식자재 마트에 갔습니다.
이것저것 잔뜩 산더미처럼 카트에 싣고 계산대 앞에 서니 근무하시는 자매님께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묻습니다.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그 상황에서 ‘사실 저는 천주교 신부인데요!’ 하기도 거시기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식당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식당이 아닌 것 같은데...아무튼 더위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야 재미있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일이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는 자영업자들,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실까,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마트 직원의 질문 앞에 다시 한번 제 신원, 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각별히 총애하셔서 이름을 불러주시고, 선택하시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는데,
그러한 소명에 기쁘게 응답하고 있는지, 마지막까지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 때로 근사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폭군이나 압제자의 잔악한 횡포나 그릇된 지도층 인사들의 타락 앞에서도 그저 숨죽이고 지낼 뿐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 한번 보십시오. 주님으로부터 예언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고관대작들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며, 그의 파렴치한 치부를 아무런 가감없이 고발합니다.
서슬퍼런 예언의 말씀 앞에 왕들조차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평생 한두번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생애는 핍박과 돌팔매질과 추방과 놀림의 연속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도망다니기까지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거룩한 주님의 지성소 베텔 땅을 더럽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가서 예언하며 밥 먹고 살아라, 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질책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스 7,14-15)
보십시오. 아모스 예언자는 철두철미한 신원의식, 겸손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근본, 본래 처지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본래 양치는 목자요,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농부였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결핍 투성이요 천덕꾸러기였던 원래 나의 허물을 벗고 사목자가 되고 책임자가 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변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잊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어딜 가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 나를 보필해야 합니다.
슬슬 주님께서 혐오하시는 거짓 목자, 삯꾼으로 전락하는 중입니다.
요즘 저는 일부러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골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까마득한 시절에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산업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근로자였습니다.
예언자요 사목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나의 근본, 내 결핍 투성이의 보잘것없던 모습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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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오늘의 주제는 복음 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셨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래서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예언자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고(마르 1,14 참조)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를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해 신뢰도 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 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 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일 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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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즘엔 왜 기적이 적게 일어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받고 파견받습니다.
병의 치유는 하느님만의 능력이고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치유의 기적을 좀처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예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자전거를 탄 10대 소년이 차에 깔린 것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차를 들어
올렸습니다.
소년은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아저씨, 조금만 더 높이요, 조금만 더 높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중년 남성은 차를 20센티미터 이상 들어 올렸고
그 소년을 친 운전사가 소년을 빼냈습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그 소년에 제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거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톰 보일이고, 이 일은 2006년 여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뜻밖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2005년 여름 영국 선더랜드에서 친구와 함께
캠핑하던 23세 카일라 스미스는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 사고를 당해 차가 뒤집혔습니다.
신장 165센티미터의 가냘픈 스미스는 자신도 등뼈 두 마디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과 함께 타고 있던 친구를 빼내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조건 차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친구의 다리는
못 쓰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 팔을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 차 지붕을 밀어 올렸죠.”
스미스는 BBC 등 영국 언론에 나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더 나가는 무게를 들어 올릴 당시 자신은 차 무게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이런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때의 특징은 ‘사랑’은 있는데 더는 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데
있습니다.
이를 ‘가난’, 혹은 ‘청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이르셨습니다.
억지 가난이 아닌 다 내어주어 더는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당신 영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지만, 2017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며 후원금을 모은 뒤
수만 명으로부터 12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모아 외제차를 사고 요트 파티를 하는 등 호화 생활을
즐기는 데 쓴 일당이 잡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받은 돈 일부를 후원하기는 하였습니다.
사진은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고 그들에게 기부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병원에 갈 돈 정도는 줄 수 있으면서 그것은 아끼고 주님께 치유의 기도를
하면 들어주실까요? 하느님은 조롱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에 기적이 없다면 아직은 교회가 신자들이나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이 교황청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유럽 전역에서 걷은 돈들이 수레에 실려 교황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자랑스럽게 “저것을 보아라.
이제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사도 3,6)라고 하던 때는 지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도 “맞습니다.
교황님,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라고 하던 때도 지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 마르티노 수사는 흑인입니다. 수도회의 재정 사정이 나빠지자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팔아 수도회의 재정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줄 때 빵이 무한정 늘어나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이런 분들의 시복·시성 조사 때 꼭 하는 게 기적 심사입니다.
성인의 생전에 일으킨 기적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뒤에 거룩함의 표징으로 일어나는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성인이 더는 줄 것이 없이 되었을 때 분명 그 성인을 통해 당신께서 더 내어주십니다.
이러한 표징들이 많아야 초대 교회처럼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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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의 그 마음으로.>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ㄴ-11).”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도 ‘응답’입니다.
따라나선 것만이 응답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ㄱ).”
이 말에서 ‘해로운 것’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쓰레기’는 ‘가지고 있을 가치가 없는 것’, ‘버려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가치 없는 것들을 버려야 정말로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또는 버리지 않으면,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아까워하면서 버리지 못한 그것들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지 못하게 막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 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당신을 처음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렸던 그 마음 그대로, 또 그 모습 그대로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빵, 여행 보따리, 전대, 돈, 여벌옷 등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해로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버렸던 ‘쓰레기들’을 되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선교활동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은, 이미 버린 쓰레기들을 되찾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너무 심한 말이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표현이 상당히 강하긴 한데, 그것은 그만큼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재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정말로 신앙생활에 큰 방해가 됩니다.>
또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텐데, 우리는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고 삶이다.’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3) “가져가지 마라.”는 “가져오지 마라.”이기도 합니다.
‘빈손’으로 떠난 제자들은 돌아올 때에도 ‘빈손’이어야 합니다.
4)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어디에서나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거든”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여기서 ‘아신다.’는 ‘알고 계시니까 주신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을 먹이실 수도 있지만,
착한 이들을 통해서 먹이시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십니다.
사실 믿는 사람들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고, 그게 걱정이 되니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걱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걱정에 사로잡혀서 걱정만 하다가 믿음이 희미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면 걱정이 희미해집니다.>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숙식을 제공한다면, 그 도움을 주님의 은총으로 믿고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뜻인데,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다른 집으로 옮겨 가지 마라.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주는 대로 먹는 것과 민폐를 끼치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민폐를 끼치는 짓을 하는 것은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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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본 분들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일은 '짐을 더 줄이지 못한 것'입니다. 출발하기 전에 짐을 최대한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수 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길을 걷다보면 처음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챙겼던 물건들도 나중엔 너무나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져서 하나씩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끝까지 남겨두는 '진짜 필수품'은 정작 몇 개 안되더라는 것이지요.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물건이 필요할지 꼼꼼히 따져가며 챙기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는데에 도움이 될만한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잘 챙겨야 하는데 정작 필요한 물건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정말 필요할 것 같아 챙겼는데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쓰지 않고 '짐'만 되는 물건들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음에는 정말 꼭 필요한 것만 잘 챙겨서 짐을 줄이리라'고 다짐하지만,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해야만 안심하는 어리석은 욕심쟁이인가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즉, 이 세상의 어느 한곳에서 편안히 ‘머물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과감하게 ‘떠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가벼워져야만 중간에 지치지 않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다다를 수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몸과 마음의 짐을 비우고 가벼워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를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 고대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 가운데에 하느님 나라가 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고 포용함으로써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이자 목표라는 겁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자기가 파는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를 직접 써보고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지닌 품질 자체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런 물건을 파는 스스로가 당당하고 떳떳하기 어렵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당당하고 떳떳하려면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 뜻을 전하는 데에서 오는 참된 기쁨을 제대로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굳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사람들은 우리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를,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여정을 떠나는 우리에게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더 가지려고 집착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우리 덩치가 커지고 무거워지면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일 자체가 힘겨울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속의 그 어느 것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물질적 도구로서의 지팡이를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를 가리킵니다. 양치기였던 모세에게 지팡이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작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리치자 물이 반으로 갈라졌고, 그 지팡이에 구리뱀을 걸어 들어올리자 그것을 본 뱀독에 중독된 환자들이 살아나기도 했지요. 즉 모세에게 지팡이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자신과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신다는 표징 그 자체였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팡이를 지니고 가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욕심부리며 집착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서 마련해 주신다는 ‘야훼이레’의 믿음을 마음에 지니라는 뜻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살다보면 사랑과 호의로 나를 받아들이고 보살펴주는 ‘은인’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뜻에 깨어있지 못하면 어느 순간 내가 그에게서 받는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며 이것 저것 자신이 원하는걸 요구하기 시작하지요. 심지어 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이가 나타나면 그 은인을 배반하고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면 나에게 좋은 마음으로 친절을 베푼 그 사람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다시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주저하게 될 것이고, 나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배신한 잘못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자리잡아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이로부터 호의와 친절을 받을 때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보살피시는 그분 사랑의 섭리로 믿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의 결과에 연연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대로 결과가 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남을 원망하며 그들에게 탓을 돌리려는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상대방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이런 저런 조언을 하게 될 때가 자주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한 지적이나 조언이 그에게 피해를 주거나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자기 이익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발끈하여 화를 내기도 하고, 역으로 나를 모함하거나 공격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선한 의도를 왜곡하고 나를 배척하는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지요.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부정적인 마음을 발의 먼지를 털듯 털어버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사람이 몰라주더라도 하느님만은 내 마음을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와 나를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며 꾸준히 기도하면 그분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고 부르시어 당신의 뜻과 바람을 우리 마음 안에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 섭리가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하루 하루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그분께서 우리 삶을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실 겁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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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연중 제15주일.
도로 직면한 현실을 극복하는 삶
<2024.7.14>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2:16~25절)
❝기도로 직면한 현실을 극복하는 삶❞
❚ 눈물의 기도는 연약한 사람이 전능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진실하고 겸손한 심령의 표현입니다.
✔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서 눈물로써 기도해야 합니다(16~19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과감히 전했지만, 막상 바벨론의 칼날에 민족이 능욕을 당할 것을 생각할 때에 깊은 시름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멜의 밭을 법과 규례에 따라 구입하는 절차를 마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16절). ‘슬프도소이다...’(17절)... 예레미야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기도의 서두에 천지의 주제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즉,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의 권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깊으신 경륜의 결과임을 직시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17절). 예레미야는 창조의 크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고백합니다(18절). 그리고 하나님의 책략(계획)과 그에 따른 그분의 역사가 위대하고 능력이 있음을 고백합니다(19절).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그분이 하신 일이 너무 크고 광대해서 인간이 가진 능력으로 감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천하 만민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아버지 앞으로 겸손히 나오는 자들은 그 은혜의 무한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은혜와 복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댐의 물이 철철 흘러넘쳐도 우리 집의 수도꼭지를 틀지 않으면 단 한 방울의 물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천지에 가득해도 우리의 마음을 닫고, 등을 돌리고 있으면 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영혼이 메말라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성도들과 사람들을 위해 예레미야가 품었던 마음으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겸비하여 무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20~2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표적과 기사와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구출하셨고,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돌보셨습니다(20~21절). 또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강성한 국가를 이루게 하셨습니다(22절).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을 선택하셔서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하시려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외면한 채, 멸망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아래 복된 삶을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장애물과 내면의 갈등등으로 극한 상황에까지 내 몰렸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 또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은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무릎으로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은혜를 잃어버린채 행하는 세대들을 위하여서 중보해야 합니다(23~2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명하신 모든 말씀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이 그들에게 일어나게 하셨습니다(23절). 단순히 대적의 침략을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함께 찾아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은 함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24절).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멜의 밭을 예레미야는 샀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 하신 대로 유다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25절).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음에도 돌이키지 않고 악을 행하다가 멸망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게 경고를 주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자신들이 겪게 되는 모든 인생의 고난과 환난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함과 성결함을 잃어버릴 때, 모든 특권 또한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슬픈 눈물은 회개할 줄 모르는 백성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순종을 잃어버린 이 세대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 베푸신 무한하신 은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세대들을 위하여 가슴을 찢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기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갖고서 기도하기를 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안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 하며, 환난의 날에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2:16~2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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