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복 严复 경남에서 내려오기 전 딸 엄욱(顼的最)에게 보낸 최초의 가서(家書)
严复(1854~1921) 离京南下前致女儿严顼的最早家书
출처:서령경매 소스: EK 이페어케이 플러스
도록 번호: 1351
견적 RMB: 30,000- 50,000
호가 RMB: 402,500(수수료포함)
1351
엄복(严(, 1854~1921) 경남에서 내려오기 전 딸 엄욱(顼的最)에게 보낸 최초의 가서(家書)
편지봉투 1장 2장 (봉투 1장 포함)
약 1918년 7월 27일 작
식문:아기수람:아기전에 편지를 봉함하였습니다.대단히 받았습니다.누나들께서 편지를 받으신 것을 모두 보았습니다.어제 큰형 신운 둘째 누나가 감기에 걸렸는데, 아니오.이미 좋은 줄 알았지? 한기를 새기고 난방을 할 때가 있으니, 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 옷이 많아야 한다.좀 입어라, 음식도 더욱 조심해라, 누나가 분부하는 대로 잘 들어라.북경에는 연일 비가 내리고,전선이 모두 망가져 어머니와 함께 집에 틀어박혀 카드놀이를 하느라 사람이 없었다.네 형은 하나, 셋, 오상을 만나 마이 선생에게 산학 강의를 한다.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어느 날 맑을지 모르겠다.이어 귀경하면 평소대로 공부한다.북경 밖 사방에 이미 물이 차서 상반기에 가뭄이 들고 하반기에 물난리가 나서 밭집마다 모두 기근이 든다는 소식을 듣고 당신은 불쌍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다섯째는 완쾌되었다. 패운이 진에 오니, 좋은 누나가 좋아?거 그 후에 어디에서 극을 공연하기로 결정되었습니까?나는 전에 큰누나 둘째누나에게 천진에서 금제품을 좀 사오라고 했지만, 경중삼양이 이미 열렸으니, 어머니는 이 곳의 품삯이 좀 싸다며, 스스로 날이 밝아서 사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큰누나 둘째누나는 바쁘지 않다.양력 7월 27일에 아버지가 그림을 그렸다.도장:엄(주)
편지봉투 식문: 천진일조계 추산거리 리잔동야엄 우미남수계.경서단구형부길
출판: 1. 엄복가서 P4-5, 엄복찬, 상무인서관.
2. 《엄림심화: 엄복, 임구유묵집》 P101-105, 황산서사.
저술 : 3. 엄복가서 P6, 엄복찬, 상무인서관.
설명: 엄복사녀 엄욱상관.
이것은 엄복리경남하전소(南离前所)의 작가서로서, 시장에서 본 엄(的最)에게 보낸 최초의 가서(家書)이다.1918년 7월 27일.그 당시 엄욱은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다.
편지를 쓸 때 베이징은 "연일 큰비로 전선이 모두 망가졌다"고 말했고, 베이징 밖은 "사방에 이미 물이 차서 전반부였다.해에는 가뭄이 들고, 하반기에는 물난리가 난다.집집마다 모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이와 병행하여 행한 것은 홍헌이 황제를 칭한 것이다장훈의 복위 실패 후 야기된 정치 불안.엄한 복수로 좋은 마음이 없다"어머니와 함께 집에 틀어박혀 있었고, 카드놀이를 한다고 해도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복처자 주명려(어머니), 엄거(형님), 엄대(큰누나), 엄대(큰누나), 엄대(엄대)가 등장한다.((둘째 누이), 흠집(다섯째 동생)등.
엄복은 두 처와 첩을 거느리고 5남 4녀를 낳았다.편지 쓸 때 엄씨는 이미 나이가 들어 이순에 이르렀다.그러나 여러 해를 거쳐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늘 함께하였다.제 자녀들이 남북을 멀리하고, 그 마음이 유난히 깊고 욕심이 없는 자는 자식들이 먹을 것을 찾는다.밖에서는 더 멀리 떨어져 노년에 귓속말을 나누기 힘들다"고 했다.1919년 6월 2일5일 엄서와 함께 엄복가서).편지에서 엄복일필은 문풍을 고쳐 자애로운 마음으로 총애한다.익살스러운 말투와 소박하고 앳된 스타일,아버지로서 좀처럼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다면。
선통 2년(1910) 8월부터 엄복(复便)은 장라(張在)가 북경에서 집을 찾아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자. 그 후 베이징의 정국이 반복되면서엄수는 가족을 천진으로 옮겼는데, 이때는 신해 전후였다.북양정부에 입문하여 북경대학 총장으로 복직하였다."베이징은 아직 대국이 아니다."온 가족이 서울로 돌아온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도저히 결단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이다.경진 두 지역에서 각각 한 채의 집을 구입하여 사용하다가족을 안착시키다. 이 편지는 쓰기에 흠집이 생겼다.자녀들은 모두 천진에 거주할 것이다.
또 편지에는 경중에 연일 쏟아지는 폭우를 언급하며 "패(也没有)를 치라고 해도 사람이 오지 않는다"고 엄중히 말했다.검엄 복연보, 그 말년에 "연회에 참석하느라 바빴다.카드놀이, '집 지키는 일' '내기에서 49위안을 잃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엄복의 두 번째 부인 주밍리(朱明,19)는 1900년 상하이(上海)에서 결혼했다.《정효서 일기》에 "주통영문, 자언반드시 엄한 자가 시집가고, 엄문하여 의실로 삼을 것이요, 빨리 말하시오."주씨 집안은 물론이고 일찍이 한 집에 30여 대의 전세 차량을 운영한 적이 있다자동차 운행. 엄과 부활.둘째 아들 선, 띠띠, 셋째 딸 、, 、, 욱이 있다.
YAN FU THE EARLIEST AUTOGRAPH FAMILY LETTER SIGNED TO YAN XU BEFORE LEAVING BEIJING
Two pages
Dated circa July 27, 1918
Illustrated: 1. Family Letters of Yan Fu, pp. 4-5, The Commercial Press
2. Yan and Lin's Paintings: A Collection of Yan Fu's and Lin Shu's Legacy, pp. 101-105, , Huangshan Book Press
Literature: 3. Family Letters of Yan Fu, p. . 6, The Commercial Press
Note: Dedicated to Yan Xu, the fourth daughter of Yan Fu.
23×13cm×2
RMB: 30,000-50,000
严 复(1854~1921) 离京南下前致女儿严顼的最早家书
图录号: 1351
估价RMB: 30,000-50,000
成交价RMB: 402,500(含佣金)
1351
严 复(1854~1921) 离京南下前致女儿严顼的最早家书
信笺 一通二页(带信封一枚)
约1918年7月27日作
识文:儿收览:儿前来信一缄,大大已收到,诸姊处信想儿皆已见过。昨大哥信云二姊感冒,不知已好否?刻下寒暖不时,儿不可贪凉,衣服须多穿些,食物更要小心,听姐姐等吩咐便是好孩子了。京中连日大雨,电线都打坏,大大与娘均是在家闷坐,叫打牌也没有人来。汝哥哥遇一、三、五尚到迈先生处讲些算学。天气如此,不知何日睛明,好接儿等回京照常读书。刻闻京外四处皆已发水,上半年闹旱,下半年闹水,田家庄户皆打饥荒,汝说不可怜么?五弟当全愈了。佩云到津,好姐欢喜么?渠此后定在何处唱戏呢?我前叫大、二姐在天津打些金器,但京中三阳已开,娘说此地工价便宜些,要自己天晴去买,如此,大、二姐可不必忙了。阳历七月廿七日,父泐。钤印:严(朱)
信封识文:天津日租界秋山街梨栈东冶严寓眉男收启。京西单旧刑部街。
出版:1.《严复家书》P4-5,严复撰,商务印书馆。
2.《严林心画:严复、林纾遗墨集》P101-105,黄山书社。
著录:3.《严复家书》P6,严复撰,商务印书馆。
说明:严复四女严顼上款。
此为严复离京南下前所作家书,系市场所见写给严的最早家书,约作于1918年7月27日。其时严顼尚不足十岁。
作信时,北京“连日大雨,电线都打坏”,京外“四处皆已发水,上半年闹旱,下半年闹水,田家庄户皆打饥荒”。与此并行的,则是洪宪称帝、张勋复辟失败后导致的政治动荡。是以严复殊无好怀,以致“大大与娘均是在家闷坐,叫打牌也没有人来”。
信中并涉及严复妻儿朱明丽(娘)、严璩(大哥)、严璸(大姐)、严璆(二姊)、严玷(五弟)等。
严复先后娶纳二妻一妾,生五子四女。信札写作时,严氏已年入耳顺,然因经年仕宦于外,常与诸子女睽违南北,其“心尤深不欲者,则儿辈觅食于外,从此会少离多,垂暮之年,殊难割舍耳”(1919年6月25日与严书,载《严复家书》)。信中,严复一改惯用文风,以慈爱宠溺的口吻、朴素稚嫩的风格行笔,流露其作为父亲鲜少示人的一面。
从宣统二年(1910)八月起,严复便张罗在京觅房,准备将家眷接来;后因京中政局反复,严遂将家属迁到天津,时在辛亥前后;辛亥革命后,严复入仕北洋政府并充北京大学校长职,然而此时“北京大局尚未安稳,大家看坏”,对于“全家回京一事,心中实在委决不下”,因之在京津两地各购置一处房屋,用于安顿家眷。此信写作时,玷等子女或均寓天津。
又,信中严复提及京中连日大雨,“叫打牌也没有人来”。检严复年谱,其晚年有“忙于赴宴、打牌、‘看家私’”“赌输四十九元”等记载。
娘,即严复第二任妻子朱明丽,1900年迎娶于上海。《郑孝胥日记》载:“朱通英文,自言必得如严者嫁之,严闻而娶为继室,亦快谈也。”朱氏持家之外,还曾经营过一家有三十多辆黄包车的车行。与严复生有二子璇、玷,三女璆、珑、顼。
YAN FU THE EARLIEST AUTOGRAPH FAMILY LETTER SIGNED TO YAN XU BEFORE LEAVING BEIJING
Two pages
Dated circa July 27, 1918
Illustrated: 1. Family Letters of Yan Fu, pp. 4-5, The Commercial Press
2. Yan and Lin's Paintings: A Collection of Yan Fu's and Lin Shu's Legacy, pp. 101-105, Huangshan Book Press
Literature: 3. Family Letters of Yan Fu, p. 6, The Commercial Press
Note: Dedicated to Yan Xu, the fourth daughter of Yan Fu.
23×13cm×2
RMB: 30,000-5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