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입문 9] 불교의 마음 / 정병조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네 가지의 한량없는 마음이다. 이는 네 가지의 범행 , 즉 훌륭한 행동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그 네 가지란 자(慈), 비(悲 ), 희(喜), 사(捨)이 다. 흔히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물론 불교는 자비를 실현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훈고학적으로 볼 때 '자'와 '비'는 뜻이 상이한 말이다. '자'란 남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반면에 '비'란 다른 생명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다. 따라서 자비는 서로 같지 않은 두 뜻이 복합되어 있다.
첫째, 자(慈)란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 받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다. 가능한 한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될 것이 다. 자비는 결코 물질적인 베품에 한한 것이 아니며, 부드러운 말씨, 웃는 얼굴도 베푸는 것의 하나이다. 베풀라!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한없는 베품을 통해서만이 진실한 얻음이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비(悲)는 상대방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일이다. 그런데 다른 이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그 사람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을 것이다. 또 연민이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이상이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 그것은 상대방과 내가 한몸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불교의 사고 경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점이다. 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다. 자연을 떠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행복이 자연으로부터 올 수 있다고 한다면, 자연을 보호한다는 발상조차 없는 종교가 불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곧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조차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悲)란, 온전하게 나와 남의 동일성의 확인에서 싹틀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남 의 고통을 제거해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범망경> 속에서 부처님은 10중 48경계를 말하였다. 그중에 동식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구해내 야 된다는 것이 있다.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까워서 동물 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도 죄목에 걸린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남의 고통을 없애주기는커녕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희(喜)란 남의 즐거움을 같이 기뻐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기쁨이란 나누어 가질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누어 가질수록 적어진다. 나의 기쁨을 상대방이 진심으로 기뻐하는지, 시기, 질투에 의해 마지못해 칭찬해 주는 것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남의 잘못을 오히려 내 스스로의 탓으로 되돌리고, 남의 훌륭한 일은 격려해 주는 일이 불자의 도리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남의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기 쉽다. 게다가 남의 잘못은 침소봉대해서 크게 얘기하고, 자기 스스로의 잘못은 적당히 눈감아 버린다.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오뉴월의 훈풍과도 같은 부드러움으로 감싸줘야 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기개로 다스려야 한다.
<법화경>에 상불경이라는 이름의 보살이 나온다. 상불 경이란 '항상 남을 업신여기지 아니한다'라는 뜻이다. 상 불경 보살은 하루 종일 동구 밖에 서서 절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절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끝맺는다. 남자, 여자,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배운 이건 배우지 못한 이건, 걸인이건 부자이건 간에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절을 한다. 그 보살이 상징하는 바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의 업신여기지 않고, 남의 기쁨을 내 것으로 삼는다. 여기에 상불경보살의 깊은 뜻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불경 보살과 같은 이들이 되어야 한다.
네 번째, 사(捨)는 버리는 마음으로 평안한 마음을 뜻한다. 즉, 고락과 희비를 초월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경지이다. <노자>에는 이런 절이있다.
만약 그대가 배움을 위하거든 하루하루 더해가라. 그러나 만약 그대가 도를 위하거든 하루하루 떨어뜨려 버려라.
이것은 내가 남보다 잘나고 더 낫다고 하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버림을 통해서 진실로 위대한 경지가 얻어진다는 것이다. 또 선종에서는 떠러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대장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버린다는 경지에 합치하는 것이다. '내가 차마 이것을 할 있을 것인가?'하는 차마의 마음을 버린다는 것 이다. 그때, 진실한 진리의 경지가 열려진다. 천길 만길 낭떠러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정신이 버리는 정신이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인류의 핵전쟁의 위협, 오존층의 파괴, 공해의 문제 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야기되는 이면에는 버리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가지기에 급급하고 버리는데 인색하기에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빛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버릴 때, 진실로 얻는 것이라는 인식의 공감대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버리는 정신을 다른 말로는 무소유라고 한다. 무소유, 사의 정신에서 창조적인 의지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사섭법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 사섭법(四攝法)이란 영원한 자유, 해탈을 얻기 위한 수행방법이다. 섭(攝)이란 말 그대로 중생들을 교화한다, 중생들을 내 품에 안아 들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섭법이라 하면 중생들을 내 품안에 안기 위한 네가지의 실천적인 수행이라 볼 수 있다. 보시, 애어, 이행, 동사를 사섭법이라 한다.
첫째, 보시(布施)란 한없는 베품이다. 베풀 때, 그 사람의 인격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위대한 삶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베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궁핍해서 가난과 역경 속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베푸는 재시가 있고,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 지성적인 가르침에 목마른 이들에게 하는 법시가 있다. 부처님은 상대방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탐욕심으로 보시를 요구할 때조차 베풀라고 하였다. 왜, 자신이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구하겠는가?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 무서워하는 졸렬한 마음 때문에 베풀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므로, 그때에도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을 무외시라고 한다. 그 사람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보시를 행하고자 할 때 우선 물건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 물건이 청정해야 한다. 훔친 물건을 남에게 넘겨주는 일은 옳지 못하다. 또 받는 사람의 경우에서 보자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베푸는 이의 입장에서도 준 것을 자랑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이 무주상보시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보시라고 한다. 무주상보시란 베푼 것을 자랑삼지 않고, 베풀면 또 다른 이득이 오리란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 자비의 정신이 충만해 있는 진실한 보시이다. 그래서 주는 이, 받는 이, 주는 물건이 모두 청정해야 된다는 뜻으로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삼 시청정'이라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 애어(愛語)는 맑고 부드러운 말이다. 거친 말을 사용하는 까닭은 심성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지나치게 전투적이고 살벌하다. 그런가하면 감성적인 언어에 너무 빠지는 경우도 많다. 감각적으로 쾌감을 주는 말을 상용하는데 치우쳐서 불교에서 말하는 애어, 부드러운 말이 오히려 묻혀버리는 기현상을 낳았다. 앞에서도 신, 구, 의 삼업을 말하면서 해서는 안 되는 말 네 가지를 언급하였다.
즉, 거짓말을 하지 말고, 나쁜 말,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말고 속이는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인데, 애어는 이러한 네가지 말의 반대어인 셈이다. 즉, 부드러운 말이다. 그러므로 애어를 위해서 보다 중요한 일은 우리들 스스로가 지성적인 분위기를 갖추는 것이다.
셋째, 이행(利行)은 남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라는 뜻이다. 중생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이 로운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동사(同事)란 자타가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한다는 뜻이다.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몸으로는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은 동사가 아니다. 또 자신은 낭비하면서 남에게는 검약하고 절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같이 일하는 것이 동사의 정신이다. 이 정신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승가의 생활이다. 스님들의 발우공양을 보면, 모두 똑같이 '도가 무르익는 그날을 위해 이 음식을 먹는다'는 맹세를 하면서 공양을 한다. 여기에는 동사의 위대한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의 사섭을 통해서 무엇을 얻는가? 영원한 자유, 해탈을 얻는다. 해탈이란 영원한 자유이다. 그 영원한 자유를 얻을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다. 해탈은 결코 남의 힘에의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탈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사회적인 분위기 등 모든 것이 어우러졌을 때, 드디어 해탈이라고 하는 위대한 결과가 나타난다. 해탈이라는 말은 열반이라는 말과 동의어로도 쓰여 지는데 이것도 역시 영원한 행복을 상징한다. 행복, 복락 등은 모두 순간의 것들이다. 잠시 이 세상 에 머무르면서 누리는 복락이란 덧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추구해야 될 것은 열반의 덕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착하게 구하는 삶의 태도와 악하게 구하는 삶의 태도가 있느니라."
무엇이 악하게 구하는 것인가? 스스로 썩어 없어질 존재이면서 썩어 없어질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부귀와 영화, 권력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면 무엇이 착하게 구하는 것인가? 스스로는 썩어 없어질 존재이면서, 썩어 없어지지 않을 영원의 것, 해탈, 열반을 구하는 삶의 태도가 그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두 가지 선택의 기로가 있다. 착하게 구할 것이냐, 악하게 구할 것이냐?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영원한 깨달 음의 길이 불자들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