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투지 - 매일 1000배씩한 경혜의 절 이야기
백일기도오체투지 : 1-4. 걷지 못하는 아이
만배백일기도 (crystaldrop)
내가 절을 하게 된 것은 성철 큰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죽을 것 같았던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그리고 장애를 딛고 이 사회에서 내 자리를 당당하게 서게 된 것은 바로 절 때문이었다. 장애인으로 태어났지만 그것을 오히려 내 삶에 플러스로 작용하게 만들어 지금의 삶의 좌표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과 인생 그리고 그것의 법칙인 인과(因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의 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마음의 힘은 바로 성철 큰스님과의 만남에서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몇 번의 기회를 얻는다고들 한다. 그 기회를 잡아서 제 것으로 잘 만든 사람은 성공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그 성공의 기준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기회와 마찬가지로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전환점이나 등대가 되어준 귀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내게는 폭풍우치는 밤바다의 배와 같은 내게, 등대의 빛으로 존재하시는 성철 큰스님이 바로 그 귀한 분이시다.
성철 큰스님이 열반하신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93년에 낙엽들이 새로운 생명을 위해 기꺼이 제 몸들을 낮은 곳으로 낮출 때, 11월 4일 큰스님은 열반에 드셨다.
성철 큰스님을 만난 것은 죽음의 벼랑 끝에서였다. 그것은 일곱 살 때였다. 첫 돌이 지나서 뇌성마비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집안 형편상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던 내가 갑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의 고열과 경기를 일으키며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힘겨운 몸짓으로나마 걷기도 하고 의사표현도 하는 등 많이 좋아지고 있던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갑자기 고열과 함께 심한 경기를 일으키며 온 몸이 굳어져간 것이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때 엄마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막연히 해인사 백련암으로 달려갔다. 성철 큰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내가 발병하던 그 날 엄마는 내 곁에 없었다. 엄마와 나, 동생 경아는 이미 일 년 전쯤 집에서 나온 상태였다. 엄마 아빠는 이혼을 하셨고 엄마가 어린 두 딸의 손목만 잡고 험난한 세상으로 뛰어든 것이다. 우리 가족이 아픈 역사를 갖게 된 데에는 내가 큰 몫을 한 것 같아 항상 자라면서 늘 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1975년 1월 12일, 경주의 한 작은 개인병원에서 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의 결정체로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엄마 뱃속에서 세상으로 힘겹게 빠져나온 아기가 울지를 않더란다. 태어나면서 “으앙!”하고 터트리는 첫 울음, 바로 세상과의 첫 대화를 하지 않더란다.
의사와 간호사가 엉덩이를 수차례 때려도 울지 않던 내가 어느 한 순간 그저 가늘게 두어 번 울었다는 것이 곧 나의 암울한 태생을 예견한 전주곡이었다. 태어날 당시 몸무게는 1.6킬로그램, 곧장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당시의 현실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할 아빠는 오랜 시간 실직상태였던 것이다. 부산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아빠는 사실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과 아빠는 서로 다른 언어로 얘기를 했을까. 아빠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고 가족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자신의 이상(理想)이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 속에서 아빠는 좌절했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게도 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대 그리고 여러 가지 책임감이 아빠를 비겁한 도망자가 되게끔 했을까. 하지만 아빠의 선택은 결국 엄마와 두 딸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불행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때 혹 인큐베이터에서 엄마와 같은 체내의 시간을 연장했다면 내가 달라졌을까. 돈이 없어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한 나는 그저 엄마의 관심과 사랑과 소망으로만 자라나야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무색하게도 엄마의 첫 아기는 점점 다른 아이들과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백일이 지나도 목을 가누지 못했고, 육 개월이 지나도 앉지 못했다.
돌이 지나도 걸음마는커녕 여전히 생후 몇 개월짜리의 행동발달에 머물고 있는 나, 엄마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한편으로 끊임없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병원을 찾았다. 진작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 미루었던 것은 경제상황 때문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두려웠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난, 두려웠다. 너무 두려워서 차마 병원으로 갈 수 없었어.”
그저 내가 성장이 더딘 편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엄마는 매일 가슴 속으로 주문을 외듯, “어서어서 자라라.” 그렇게 되뇌기만 했다. 애써 병원 간판을 외면하면서 말이다. 엄마의 주문은, 그러나 물거품처럼 무력했다. 병원에서는 날벼락 같은 선고를 내렸다. 뇌성마비.
“설마! 설마!”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나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쫓아다녔다. 오진이길 바라면서. 그러나 현실은 악몽보다 더 지독했다. 내가 장애라는 선고를 받은 뒤부터 아빠는 더 깊이 술 늪으로 빠져가고 있었다. 아빠한테 거는 기대가 워낙 컸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망가져가는 아빠 그리고 뇌성마비인 손녀 때문에 어두운 표정으로 인생의 석양을 그렇게 보내셨다. 그 분들의 쓸쓸해 보이던 모습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철도청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하셨고 별다른 수입없이 퇴직금으로 생활하셨는데 아빠가 무직상태였으므로 우리 집의 경제상태는 빤했다. 게다가 그 당시만 해도 의료보험 혜택이 되지 않아 3일 정도 치료를 하면 한 달 생활비가 날라갔다. 나 때문에 우리 집 생활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고 결국 내게 필요한 치료는 얼마 가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보통의 가정에서 보통의 사람들에게 2세 탄생은 축복이지만 우리 가족과 나에겐 하나의 비운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이상한 아이’, ‘병신’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엄마 가슴에 박혀 늘 피 흘리게 하는 대못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나 때문에 남몰래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엄마에게 하늘은 힘이 되라고, 희망을 가지라고 동생을 보내 주었을까. 내가 태어난 지 14개월 만에 내 동생 경아가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동생은 나와 달랐다. 신체발육이 어찌나 좋은지 우량아에 가까웠다. 9개월에 대소변을 가리고 돌 무렵에는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경아를 보면서 엄마는 환희를 느끼면서 동시에 그 두 배 만큼의 아픔을 느끼셔야 했다. 그때까지 기어 다니는 나 때문에. 나는 그렇게 4살까지 기어 다니는 아이였다. 다섯 살쯤 되어서야 겨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걸음을 떼놓을 때 엄마는 감탄하고 또 감탄하여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데도 눈물이 글썽거리셨다고 했다.
아빠는 그 동안 몇 번 취업을 하셨지만 늘 뜻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 두었고, 아예 술로 사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빠는 가끔 엄마와 나, 경아를 때리기 시작했다. 술 속의 독이 결국 아빠를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소의 모습마저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것은 내가 맞으면서 아파서 소리 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내 입에다 수건이나 옷가지 등을 입에 물리고 때리던 아빠의 얼굴이다. 결국 엄마 아빠는 헤어졌고, 엄마는 양손에 각각 경아와 나를 잡고, 정말 우리 둘의 손만 붙들고 집을 나오셨다. 이 잔인하고 냉혹한 현실 속으로 어리고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뛰어든 거였다.
게다가 한 아이는 걸을 때마다 팔다리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실로 연결된 헝겊처럼 덜렁거리고, 말을 하려면 온 얼굴근육을 다 움직이며 한참을 걸려야 겨우 한 두 마디 소리되어 입 밖으로 나오는 아이였다. 하지만 엄마는 울거나 한숨쉬지 않았다. 두 아이가 세상 속에서 제 꿈을 펼쳐나가고 있을 때까지는 눈물과 한숨을 당신의 가슴 속 깊이 넣고 자물쇠를 채워버리신 것이다. 그랬다. 나의 엄마는. 우리 세 모녀의 홀로서기는 구타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또 다른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단칸방에서 우리 세 사람은 엄마의 하루하루의 노동으로 겨우 배고픔을 면하며 살았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었다. 결심만으로 살 수 없는 현실이었고 엄마는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죽자. 하늘이 우릴 버리는 모양이다. 우리 이에 죽자.”
우리 둘을 앉혀 놓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표정은 슬픔도 분노도 느낄 수 없었다.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어찌나 무섭고 충격적이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무섭고 급한 마음에 그렇잖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말이 더욱 힘들게 내 속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있는 힘껏 엄마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 살자. 살자.”
왜 그렇게 매달렸을까. 어린 게 죽는 게 뭔지 알기라도 했을까. 게다가 아무리 어려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았는데도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엄마한테 매달렸을까. 살자고, 죽지 말자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엄마가 내게 되물었다. 꽉 잠긴 목소리로.
“뭐 먹고, 어떻게 살아갈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꾸 돌아가는 얼굴을 엄마에게 향하게 하려고 기를 쓰며.
“엄마. 내가 망태기 쓰고 돈 벌어올게. 어차피 이런 몸에 망태기 쓰면 돼. 엄마 내가 돈 벌어올게.”
그때 엄마의 얼굴에 비로소 표정이 떠올랐다. 엄마는 불처럼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얼마 후 엄마는 우리 두 자매를 힘주어 껴안았다. 얼마나 세게 안았는지 팔이며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엄마 말씀처럼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고 다시 악착같이 살았다. 남들처럼 먹거나 입지 못한다는 각오로 또래 아이들과는 참 다르게 살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물었다.
“망태기 쓰고 있으면 돈을 번다는 건 무슨 말이니?”
오랜 시간이 걸려 내가 한 대답은 이랬다.
“언젠가 시내버스를 타고 갈 때였어. 엄마 무릎에 앉아서 창밖을 보는데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날 때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와 장애아이 하나가 가마니 같은 망태기를 쓰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돈을 던져주는 것을 봤어.”
엄마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본 것이 얼마동안이었을까. 어려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엄마의 표정이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던 내가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마! 넌 다른 사람과 다를 뿐이지, 다른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살고 싶어? 사람들한테 불쌍하다고 동정 받으면서 살고 싶어? 그게 싫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해!”
엄마의 목소리는 크지도, 화가 난 목소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은 아주 단단하고 그리고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뜨거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그리고 그 화살은 평생 나와 함께 시간을 지내왔다. 내가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나를 자극하면서. 몸이 불편하면 마음은 비례하여 더 빨리 자라는 걸까. 난 그 나이에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집을 나와 막막하기만 해서 죽을 생각까지 하던 엄마가 먼 친척이 하는 공장이랑 인연을 맺게 되었다. 베어링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엄마가 들어가게 되었을 땐 사실 거의 부도 직전이었다. 그런데 운명처럼 엄마는 그곳에서 점차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디자인이나 기능을 가진 제품을 만들면 영업이 되겠다는 판단이 빠르고 정확했다. 친척인 사장할머니는 엄마의 능력과 각오를 보고 마지막으로 회사에 투자를 했고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엄마는 자신도 신기하게 여길 만큼 그쪽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또한 인정받았다. 제품개발에 대한 감각은 물론이고 영업 분야에서도 실력을 발휘해 회사는 점점 되살아나고, 당연히 우리 생활도 넉넉한 정도는 아니지만 벼랑 끝에서 조금은 뒷걸음칠 수 있었다. 우리는 생활비를 부엌 서랍안의 봉투에 넣어두고 다 같이 공동관리를 하는 생활을 했었다. 우리 자매는 6살, 7살 때부터 천 원이나 이천 원을 가지고 하루 반찬을 사고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엄마의 자녀교육법이었다.
그리하여 집을 나온 지 1년 정도 만에 우리 세 모녀는 창원의 13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옮겨가 새롭게 살기 시작했다. 희망을 안고 내일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