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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우네'
독일의 전설에 나오는 식물로 판타지와 게임에 자주 등장하며 맨드레이크(mandrake)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알라우네를 얻는 자는 영원한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땅 속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이것을 얻기위해선 그 줄기를 잡고 뽑아내야 하는데, 이것이 땅 속에서 빠져나올때 처절하고 무시무시한 비명을 내지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비명 소리를 들은 이는 모두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얻고 자하는 이는 개에게 끈을 묶어 끌도록 하고 정작 본인은 귀를 막고 물러서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끌어낸 개는 그 비명 소리에 죽지만, 개 주인은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것도 영원한 행복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며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평생을 보내지만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고, 또 요구한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 일 수 있을까?
알라우네는 그 뿌리가 땅 속에 있을 땐, 그저 평범한 식물에 불과하다. 사람들에게 그것은 한적한 시골 논두렁에 핀 잡초일지도, 혹은 도심의 공원 한켠에 자라는 이름모를 잡 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 그것의 진가를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흔한 산책로에 핀 잡초가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고 해도 갖고 싶어하는 이가 생길 것이고, 그 순간 영원한 행복은 이것을 누리고자 하는 이의 어두운 탐욕이 될 것이다.
영원한 행복은 개의 희생과 평안하고 안락한 땅 속에서 끌려나와야만 했던 알라우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매일 산책로를 지나는 이들이 당연하게 느꼈던 상쾌함과 평온함을 깨뜨리고 얻어진 것들이다. 그곳을 지나던 많은 이들은 푹 파여진 알라우네의 빈 자리를 보며 공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알라우네는 누군가의 행복이 되어주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떠나 세상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 진가를 알게 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는 탐욕의 인연을 끊지못한 채 탐스럽고 화려한 꽃을 피우고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느웃느웃 서산으로 지는 해가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아이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 끌어 골목 끝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고사리같은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엄마의 걸음이 몹시도 지쳐 있는 듯 하다. 수선한 낡은 구두의 끈 한 쪽이 끊어져 나갔지만 상관없는듯 털털 바닥을 힘겹게 끌고 있었다.
빛 바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손에서 힘없이 달랑거리는 작은 핸드백이 아이는 신기하다.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항상 손으로 꼬옥 감싸쥐고 걷곤 했던 낡은 핸드백이 힘없이 달랑거리고 있는 모양새가 재미있기만 하다. 하나,둘...... 달랑거리는 낡은 핸드백에 발을 맞추며 걷던 아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말 없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엄마가 작은 옷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눈길이 닿은 그곳엔 노란 개나리색 원피스가 걸려 있었다. 어제까지만해도 목 없는 마네킹이 챙 넓은 하얀 모자를 눌러쓴 채 벗꽃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는데, 오늘은 노란 개나리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서 있다. 아마도 벗꽃처럼 하얀 원피스는 다른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가던 길을 멈춘 채 하염없이 서 있는 엄마가 이상한지 아이는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엄마의 손를 잡아 당겼다. 멍하니 노란 원피스를 바라보고 서 있던 엄마의 눈에서 힘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아이의 손등에 떨어졌다.
"엄마...."
"어~ 그래, 성현아! 다리 아프지? 엄마가 업어줄까?"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소리에 서둘러 눈물을 훔친 엄마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아이를 향해 등을 내어주었다. 냉큼 엄마의 등으로 폴짝 뛰어든 아이가 좋아라 목을 잡고 매달렸다. 영차하는 소리를 내며 대롱대롱 신나게 발을 흔드는 아들을 업고 자리에서 일어선 엄마는 옷 가게 안의 노란 원피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남아있던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아내곤 걸음을 채촉했다. 등에 매달려 가던 아이의 눈에 개나리색 노란 원피스가 남아있다.
"엄마, 저거 예뻐?"
"응?......그래, 예뻐."
"나중에 내가 사줄께."
"응?"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사줄께."
"그래, 우리 성현이, 나중에 커서 돈 많이 벌면 엄마 꼭 사줘!"
어린 아들이 귀가에 대고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엄마가 환하게 웃어보인다. 하지만 그 웃음 끝에 묻어있는 쓸쓸함이 고개를 돌린 엄마의 두 뺨을 타고 내리고 있었다. 이제 다섯살이 된 어린 아들을 업고 어두워진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 모습은 한없이 처량하기만 하다. 엄마는 알고 있었다. 등에 업혀 잠든 어린 아들은 이해 할 수 없겠지만 노란 원피스 역시 결코 엄마의 옷이 될 수 없을 것이이란 걸,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버린 벗꽃같은 흰 원피스 처럼......
언제인가 작은 옷 가게에 벗꽃처럼 흰 원피스가 처음 걸리던 날, 그녀는 그 옷가게 앞을 지나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 곳을 지날때마다 벗꽃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이곤 했었다. 그리고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설레이는 꿈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버린 하얀 원피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버린 하얀 원피스처럼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 역시 다른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목 없는 마네킹이 다시 갈아입은 노란 개나리색의 원피스 역시 자신의 몫이 될 수없다는 것을.
그 날 밤, 잠에서 깬 어린 아들은 신문로 싸여있는 작은 뭉치를 앞에 놓고선 숨 죽여 울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촉 낮은 백열등 아래 초록색 병이 놓여진 것을 본 아이는 조용히 이불을 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어쩐지 그래야 될 거 같아서, 왠지 엄마에게 들키면 안될 거 같아 다시 조용히 잠자리에 누워 이불을 당겼다.
아이의 뒤척임에 잠시 숨을 죽였던 엄마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날 밤 이후 아이는 엄마가 우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도..........
그때가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엄마의 눈물을 본 것이. 그렇게 숨 죽여 울고 있던 엄마를 본 그 날로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날처럼 숨 죽여 울고있는 엄마의 모습에 아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전에도 그랬었는데, 그 전에도 저렇게 엄마가 울고 있었는데, 그 날 이후로 아버지를 볼 수 없었는데, 그랬는데 또, 엄마가 울고 있다.
"엄마, 왜 울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그냥 우리 성현이가 어디 가버릴까봐 걱정 되서..."
"나 안 가. 엄마랑 여기서 오래오래 살거야."
"그래, 가지말고 엄마랑 살자."
숨이 막힐 것처럼 꽉 끌어 안은 채 울고 있는 엄마를 보며 어린 성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날 밤, 어린 아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잠들지 않기위해 애를 썼다. 행여 엄마가 가버릴까봐, 그 전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사라져버릴까봐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에 눈을 뜬 엄마는 잠든 아들의 손이 자신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고 있는것을 보았다. 아직 잠에 취해있는 어린 아들을 품 속으로 끌어당기자 아들은 기다렸다는듯 품 안으로 파고 든다. 품 안으로 파고드는 아들을 다독거리며 엄마는 중얼거렸다.
"절대 뺏기지 않을거야. 절대로........그 사람은 자격 없어."
하지만 엄마의 다짐은 그리 오래지 않아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다.
올 초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 성현은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린 성현을 맞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현이 학교를 가고 나면 엄마는 식당으로 일을 하려 나간다. 그리고 밤 늦게 성현이가 잠이 들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아주 가끔씩 엄마를 기다리며 깨어있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빨리 자야 빨리 크지.'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었다.
성현은 빨리 자라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엄마에게 노란 원피스를 사주고 싶었다. 없어져버린 옷 가게에 걸려있던 노란 개나리색 원피스를 기억하고 있던 성현은 언젠가는 그 원피스를 엄마에게 사줄 것이라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성현은 문 앞에 놓인 낯선 신발을 보게되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집이다. 연탄 아궁이 덮개 위에 올려놓은 김치찌개와 전기 밥통 속의 밥을 퍼 그렇게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하는 평일 오후다. 밥을 먹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거나 혼자 방바닥에 업드린 채 숙제를 해야하는 평일 오후였다. 그랬는데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낯선 구두와 함께 낡은 엄마의 신발이 놓여져 있다. 엄마의 신발을 보며 반가움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성현은 방안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화가 난듯한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잔뜩 주눅이든 채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와선 안된다고 말하는거 같았다.
"왜 말을 안듣는거야! 이러고 살면서 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야!!"
"상관하지 말아요.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내 아들이야! 왜 상관말라는 거야!!"
"아들? 버리고 갈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아들이라구요?"
"어디에 있건 내 아들인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아."
"그냥 모른척 살아요. 나도 이제껏처럼 없는듯이 그렇게 살테니깐......."
"상황이 달라졌어. 성현이라고 했나? 이젠 그 아이가 필요해."
"자식이 필요하면 데려가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물건이예요?"
"물건은 아니지만 어쨌든 난 그 아이가 꼭 필요해."
"그 쪽에도 아이가 있잖아요. 그 여자가 싫어할거예요."
"상관없어. 난 다만 내 아들이 필요한 것 뿐이니깐.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서 원하는 책 한 권 마음대로 사 줄수도 없으면서, 왜 아이를 못주겠다고 하는지 이해 할 수 없군."
"돈이 전부는 아니예요."
"돈 보냈어. 그 정도 돈이면 충분히 새 출발 할수있을거야. 그러니깐 얘 보내."
"싫어요. 모른척하고 갈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제라도 제 호적 바르게 찾아줘야지. 내 아들인데. 미혼모 엄마 밑에서 크게 놔둘수는 없지."
"그렇게는 안돼요. 나도 알아봤어요. 당신 자격 없잖아요."
"친자확인소송 내서 내가 친부라는 거 밝히면 돼!"
"그거.....당신 할 수 없을 거예요."
"뭐?"
"나 겁주려고 그러는 거 다 알아요. 세상이 알게 되는 게 무서워서 그래서 날 보고 그렇게 죽은 듯이 살라고 했으면서 소송을 내요? 당신이? 아뇨, 당신은 결코 그거 할수없을거예요."
"아내도 알고있는 사실이야."
"하지만 세상은 모르잖아요. 당신이 겁내는 거 당신 아내가 아니라 세상의 이목이잖아요."
잠시동안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낡은 미닫이 문이 열리며 낯선 남자가 방을 나왔다. 성현은 그때 처음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라는 낯선 사내의 얼굴을...... 어쩌면 보았을지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시절의 아버지를....
처음 본 아버지의 얼굴은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무뚝뚝한 얼굴로 그렇게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어린 아들을 잠깐 내려다보던 아버지란 사내가 가고 난 뒤, 엄마는 또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린 아들을 안고 울고 있었다.
그 날은 여느 다른 날과는 달랐다. 엄마는 학교를 가기위해 아침을 먹고 있던 성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성현의 수저에 반찬을 집어올려주며 엄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당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성현아!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야 해."
"응."
"낯선 사람 따라가면 안돼."
"낯선 사람 누구?"
"누구든. 아무튼 낯선 사람은 절대 따라가면 안되는거야. 알았지?"
"응."
"엄마 일 끝나는대로 빨리 올 거니깐 학교 갔다오면 집에 있어야 돼."
"놀러가면 안돼?"
"집 근처에서만 놀아. 너무 멀리가면 안돼. 알았지?"
"응."
"성현아."
"응?"
"사랑해. 엄마랑 둘이서 오래오래 같이 살자."
그렇게 성현을 꼭 안아준 엄마는 다른 때와는 달리 성현을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 앞까지 온 성현은 무척이나 신이 나 있었다. 엄마는 성현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갈때까지 교문 앞에 서 아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들의 뒷모습이 학교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엄마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가게를 그만둔다 말하고 이사를 할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서던 성현은 커다랗고 까만 자동차가 교문 앞에 서 있는 걸 보았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자동차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성현은 머뭇거렸다. 커다랗고 까만 자동차, 며칠 전 저 자동차가 집 앞에 서 있던 날, 낯선 아버지가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엄마가 울었다. 성현은 앞을 가로막는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낯선 사내를 올려다 보았다. 그들은 손에 든 사진과 성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니가 백 성현이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사내들을 보며 성현은 겁을 집어먹었다. 커다란 검은 자동차에 주눅이 들었던 성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낯선 사내들이 무섭게만 느껴졌었다. 간간히 지나는 동네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그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성현은 목에 매달린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잔뜩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누구세요?"
"우린 니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야. 아버지께서 널 데려오라고 하셨어."
"엄마가 낯선 사람 따라가면 안된다고 했어요."
"낯선 사람 아니구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니깐."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그 놈 참.....니네 엄마한테도 허락 받았어."
"엄마가요? 아저씨 우리 엄마 아세요?"
"그럼 잘 알지. 니네 엄마 저쪽 동네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시지?"
".........."
"그저께 아버지께서도 여기 오셨다고 하던데. 너도 봤지?"
여전히 미심쩍은듯 의심의 눈초리이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성현을 보며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커다란 자동차에 성현을 태웠다. 엄마가 허락했다는 소리에 순순히 차에 타기는 했지만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성현은 불안한 듯 내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가는 길을 기억하려는듯 차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낡은 슬레트 지붕들이 이를 맞추고 줄줄이 늘어선 동네를 빠져나온 자동차는 큰 도로를 달려 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자동차가 멈춰선 곳은 학교 교문보다 더 큰 문 앞이었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그곳에 성현을 내려놓았다. 문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덜컹!'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보는 거대한 저택이 눈 앞에 나타났다. 성현은 눈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저택을 보며 잔뜩 주눅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커다란 집, 자신이 살고있는 집과는 비교도 할수없을 만큼 화려하고 큰 집이다. 큰 집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성현을 내려놓은 자동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홀로 남은 성현이 어찌해야할지를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에서 나온 낯선 아줌마가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입을 쩍 벌린 호랑이 아가리처럼 열린 문으로 성현을 데리고 들어갔다.
"어서 오너라!"
집 안에 들어선 성현은 며칠 전 집으로 찾아왔던 낯선 아버지를 보았다. 낯선 아버지는 성현을 보자 환하게 웃어보였다. 쭈빗거리며 서 있는 성현에게 다가온 낯선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건가? 성현은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고 아버지는 덥썩 그 손을 잡았다.
"반갑구나."
현성은 자신의 손을 힘있게 잡는 낯선 사람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낯선 사내가 자신의 아버지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그것보단 아버지란 사람의 손에 잡혀 들어간 집이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달리기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화려하게 꾸며진 집 안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래진 성현은 집 안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렸고, 그런 아들을 보며 이 태성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성현을 데리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간 이 태성은 많은 방들 중 한 곳의 문을 활짝 열어보이고는 그 안으로 성현을 밀어넣었다.
"이제부터 여기가 니 방이란다."
"내 방?"
엄마와 둘이 살던 집보다 몇 배는 더 커보이는 넓은 방이다. 몇 번을 딩굴어도 떨어질것 같지 않은 커다란 침대와 하루 종일이라도 숨박꼭질 할 수 있을것만 같은 큰 옷장, 고개를 뒤로 젖혀야 꼭대기가 보일 것 같은 책장과 그 속에 빽빽히 꽂혀있는 많은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다. 커다란 책상과 의자 옆으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난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목마와 인형들, 장난감 칼에 장난감 기관총까지, 그 동안 장난감 가게 앞을 지나며 한없이 구경만 했었던 장난감들이 고스란히 옮겨와 놓여있는것만 같다.
"맘에 드니? 얘들이 좋아할만한 것들로 꾸며보라고 했는데."
이 태성은 낯선 방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성현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의자를 당겨 앉아 어린 아들과 눈 높이를 맞추었다.
"날 기억하고 있니?"
"네."
"그래? 그럼 얘기가 쉬워지겠구나. 이제부터 아버지라 불러라. 알겠니?"
"네........."
"그래, 그래야지. 넌 이제부터 여기서 나와 함께 살거다. 이제 이곳이 너의 집이야."
"........."
"왜 대답이 없어? 아버지랑 살기 싫어?"
"아니요."
"그럼, 방이 맘에 안드는거니?"
"그게 아니라........ 엄마는요?"
"........."
"엄마도 같이 살아요?"
이 태성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웃음이 사라졌다. 잠시 굳은 표정을 지어보이던 이 태성은 아들을 보며 애써 웃어보이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잘 들어라. 지금까지 같이 살았던 엄마는 잊어버려. 이제부터 여기있는 엄마가 진짜 니 엄마야."
"엄마를 잊어버려요?"
"그래, 이제부터 여기있는 엄마가 널 돌봐줄거야."
"하지만....."
"잊어버려. 이제까지 니가 살아왔던 모든것들을 다!!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야."
"우리...집?"
"그래, 여기가 우리 집이야."
"우리 집은....."
"아니, 이제부터는 여기야. 이곳엔 엄마도 있고, 동생도 있어."
"동생?"
"물론 꼭 친하게 지낼 필요은 없겠지만, 아무튼 이제부터 이곳이 너의 집이야. 알겠니?"
"그럼 엄마는....."
"말했지. 이제부터 여기있는 엄마가 진짜 엄마야."
어린 성현은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까지의 엄마가 진짜가 아니라니, 하지만 다짐을 하듯 엄중하게 말하는 아버지가 무서워 더 이상 토를 달지못했다. 입을 꾹 다문채 눈만 껌벅거리는 아들을 보며 이 태성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아직 어려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자신의 말에 더이상 토를 달지않는 아들을 보자 왠지 마음이 뿌뜻해져왔다. 이 태성은 아들의 어깨를 두어번 가볍게 두들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방을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성현은 며칠 전 어머니와 큰 소리로 싸우던 그때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이곳에서 살게된다면 두 번 다시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나간 뒤 커다란 방에 혼자 남겨진 성현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직 상표도 떼지않은 새 장난감들, 그리고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침대와 이불이 꼭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곳이 몹시 낯설기만한 성현을 장난감에 붙어있는 상표를 만지작거렸다. 장난감은 잘못 만져 망가뜨리기라도 한다면 누군가 달려올것만 같아 쉽사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때 덜컹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트럼프의 여왕!!!'
그녀를 보며 성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던 여왕의 시선은 금방이라도 심장이 얼어버릴것만 같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입술을 꼭 깨물며 하얗게 성현을 노려보던 여왕은 문이 부서져라 세차게 닫고는 나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녀의 차가움에 얼어붙어있던 성현은 조용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첫댓글 도입이 인상적입니다.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망구어엄님. 처음 뵙습니다. 닉이 굉장히 특이하시네요. 이번 이야기는 지난 인소닷이 혼란스러울때 연제하던 것입니다. 헌데 연재글이 지워지기도 하고 없는 아이디라는 메시지가 뜨기도 해 어쩔수없이 연재도중 삭제해야만 했던 글입니다. 이번에 끝까지 연재하려하니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글의 몰입감이 상당하네요. 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도.. 궁금해지게 하는.. ㅎㅎ
잘 읽고 갑니다.
무혜님! 감사합니다. 계속 즐감해주세요.^^
심오하군요
하채경님! 반갑습니다. 너무 심오한 얘기 아니니 가볍게 즐감해주세요.^^
오늘부터 정주행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뜩이님! 처음 뵙네요. 끝까지 정주행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