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급속히 확대되는 식민지 교역을 방어하는 것에 성공함에 따라 재정 위기를 버텨냈다. 한편, 스페인의 군수품 지원 때문에 아일랜드에서의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잉글랜드의 교역로는 공격받았기 때문에 전쟁은 잉글랜드에게 있어 수렁과도 같은 소모전으로 변해 있었다. 북아메리카에 대한 잉글랜드 인의 이주는 스튜어트 왕조 초기까지 지연되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신세계 영역의 지배를 굳힐 수 있었다.스페인은 잉글랜드가 스페인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받아들일 때까지 잉글랜드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대서양 해상 교통로를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이 가톨릭 동맹을 지원함에 따라 프랑스 왕 앙리 4세로 하여금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여 프랑스가 가톨릭을 유지하게 할 수 있었다(반종교 개혁의 우선 목적이었다).그러나 잉글랜드 역시 프로테스탄트 개혁 방위, 아일랜드 유지, 그리고 네덜란드 인에 대한 지원으로 스페인이 저지대를 완전히 재정복하는 것을 회피하는 등 전쟁 목적의 일부를 달성했다. 그리고 앙리 4세에 대한 지원으로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고 이것은 제2차 백년전쟁(1688년 9년전쟁부터 1815년 나폴레옹 전쟁까지)까지 계속된다.일본어 위키백과 <영국-스페인 전쟁 (1585년)> 중 발췌
스페인은 급속히 확대되는 식민지 교역을 방어하는 것에 성공함에 따라 재정 위기를 버텨냈다. 한편, 스페인의 군수품 지원 때문에 아일랜드에서의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잉글랜드의 교역로는 공격받았기 때문에 전쟁은 잉글랜드에게 있어 수렁과도 같은 소모전으로 변해 있었다. 북아메리카에 대한 잉글랜드 인의 이주는 스튜어트 왕조 초기까지 지연되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신세계 영역의 지배를 굳힐 수 있었다.
스페인은 잉글랜드가 스페인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받아들일 때까지 잉글랜드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대서양 해상 교통로를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이 가톨릭 동맹을 지원함에 따라 프랑스 왕 앙리 4세로 하여금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여 프랑스가 가톨릭을 유지하게 할 수 있었다(반종교 개혁의 우선 목적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역시 프로테스탄트 개혁 방위, 아일랜드 유지, 그리고 네덜란드 인에 대한 지원으로 스페인이 저지대를 완전히 재정복하는 것을 회피하는 등 전쟁 목적의 일부를 달성했다. 그리고 앙리 4세에 대한 지원으로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고 이것은 제2차 백년전쟁(1688년 9년전쟁부터 1815년 나폴레옹 전쟁까지)까지 계속된다.
일본어 위키백과 <영국-스페인 전쟁 (1585년)> 중 발췌
1587년, 롤리 경은 체사피크 만에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115명의 새로운 개척민을 파견했다. 이들을 이끈 이는 이전의 로어노크 탐사에 동행했던 예술가이자, 롤리 경의 친구였던 존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이후 지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롤리는 로어노크 개척지에서 도움을 줄 12명의 보좌관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우선 로어노크로 가서 그렌빌의 사병들을 모으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1587년 7월 22일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잉글랜드 요새를 지켰던 한 명의 유해로 추정되는 해골 한 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들은 당시 새로운 식민지를 돕는데 이 병력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그렌빌의 병력이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함대 사령관 시몬 페르난데스는 그들이 로어노크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식민지 정착민들을 배에 싣고 귀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화이트는 크로아탄 부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며, 전년에 전투를 벌였던 랄프 레인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적의에 가득한 부족들은 그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 직후, 식민지 개척민 조지 하우가 알베말 만에서 게잡이를 하려 홀로 탐사를 하다가 한 인디언에게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개척민들은 화이트 지사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설득한다. 잔여한 개척민들은 대서양을 건너서 온 남녀와 미국 땅에서 최초로 출생한 잉글랜드인이었던 화이트의 손녀까지 모두 115명이었다.화이트는 1587년 말 잉글랜드로 향행했다. 그 시기에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페르난데스가 좀처럼 귀환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위험했다. 구조선 계획은 겨울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선장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무적함대와 교전에 동원된 잉글랜드 배들로 인해 로어노크로 돌아갈 수 있는 여분의 배들의 남아 있지 않았다.스페인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3년동안 재보급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사략선 원정대를 데리고, 카리브해에서 돌아 오는 길에 로어노크 섬 앞바다에 들를 수 있는 약속을 받아냈다. 화이트는 손녀의 3번째 생일인 1590년 8월 18일 로어노크 섬에 상륙했지만, 개척지는 버려져 있었다. 그의 대원들도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의 개척민들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실종에대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 둘러 친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라는 글자였으며, ‘크로’는 나무 근처에 새겨져 있었다. 모든 주택과 요새는 허물어져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서둘러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를 떠나기 전에, 화이트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강제로 떠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몰타 십자를 나무 근처에 새겨두게 지시했다.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이것을 그들이 크로아토안 섬(현재의 해터러스 섬)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수색을 진행할 수 없었다. 큰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으며, 그의 병력들도 더 이상의 진행을 거부했고 다음 날 그들은 길을 떠났다.[중략]스페인은 식민지를 발견하기는 원하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어노크를 해적 기지로 이용하려는 롤리 경의 계획을 알고서, 스페인은 로어노크를 파괴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그곳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부정확한 보고를 얻고 있었으며, 실제보다 식민지 개척이 훨씬 잘 되었을거라고 상상했다.1590년, 그들은 아주 우연히 식민지의 잔해를 발견했지만, 주요 본거지의 외곽에 만들어 둔 지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본거지가 체사피크 만 지역(존 화이트가 예정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스페인 전쟁으로 화이트가 적절한 때 돌아오지 못하자, 신대륙에 있었던 스페인 당국은 그러한 모험을 할만한 충분한 지원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위키백과 <로어노크 식민지> 중 발췌
1587년, 롤리 경은 체사피크 만에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115명의 새로운 개척민을 파견했다. 이들을 이끈 이는 이전의 로어노크 탐사에 동행했던 예술가이자, 롤리 경의 친구였던 존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이후 지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롤리는 로어노크 개척지에서 도움을 줄 12명의 보좌관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우선 로어노크로 가서 그렌빌의 사병들을 모으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1587년 7월 22일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잉글랜드 요새를 지켰던 한 명의 유해로 추정되는 해골 한 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새로운 식민지를 돕는데 이 병력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그렌빌의 병력이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함대 사령관 시몬 페르난데스는 그들이 로어노크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식민지 정착민들을 배에 싣고 귀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화이트는 크로아탄 부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며, 전년에 전투를 벌였던 랄프 레인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적의에 가득한 부족들은 그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 직후, 식민지 개척민 조지 하우가 알베말 만에서 게잡이를 하려 홀로 탐사를 하다가 한 인디언에게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개척민들은 화이트 지사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설득한다. 잔여한 개척민들은 대서양을 건너서 온 남녀와 미국 땅에서 최초로 출생한 잉글랜드인이었던 화이트의 손녀까지 모두 115명이었다.
화이트는 1587년 말 잉글랜드로 향행했다. 그 시기에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페르난데스가 좀처럼 귀환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위험했다. 구조선 계획은 겨울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선장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무적함대와 교전에 동원된 잉글랜드 배들로 인해 로어노크로 돌아갈 수 있는 여분의 배들의 남아 있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3년동안 재보급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사략선 원정대를 데리고, 카리브해에서 돌아 오는 길에 로어노크 섬 앞바다에 들를 수 있는 약속을 받아냈다. 화이트는 손녀의 3번째 생일인 1590년 8월 18일 로어노크 섬에 상륙했지만, 개척지는 버려져 있었다. 그의 대원들도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의 개척민들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실종에대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 둘러 친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라는 글자였으며, ‘크로’는 나무 근처에 새겨져 있었다. 모든 주택과 요새는 허물어져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서둘러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를 떠나기 전에, 화이트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강제로 떠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몰타 십자를 나무 근처에 새겨두게 지시했다.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이것을 그들이 크로아토안 섬(현재의 해터러스 섬)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수색을 진행할 수 없었다. 큰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으며, 그의 병력들도 더 이상의 진행을 거부했고 다음 날 그들은 길을 떠났다.
[중략]
스페인은 식민지를 발견하기는 원하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어노크를 해적 기지로 이용하려는 롤리 경의 계획을 알고서, 스페인은 로어노크를 파괴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그곳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부정확한 보고를 얻고 있었으며, 실제보다 식민지 개척이 훨씬 잘 되었을거라고 상상했다.
1590년, 그들은 아주 우연히 식민지의 잔해를 발견했지만, 주요 본거지의 외곽에 만들어 둔 지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본거지가 체사피크 만 지역(존 화이트가 예정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스페인 전쟁으로 화이트가 적절한 때 돌아오지 못하자, 신대륙에 있었던 스페인 당국은 그러한 모험을 할만한 충분한 지원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
위키백과 <로어노크 식민지> 중 발췌
잉글랜드의 정치인, 탐험가, 작가, 시인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으로 널리 알려진 월터 롤리 경. 그는 1584년, 잉글랜드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지인 로어노크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이주민들의 부적응과 불만, 원주민과의 불화로 개척에 실패하고야 맙니다.
하지만 1587년, 그는 존 화이트를 감독관으로 삼아 로어노크 섬에 다시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칙허에 따라 체서피크 만으로부터 제임스 강을 따라 64km 떨어진 내륙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합니다.
첫 번째 로어노크 식민지가 실패한 까닭이 원주민들과의 불화라고 생각한 화이트는 원주민들과의 관계 개선에 특별히 노력하였으며, 이는 향후 그가 버지니아 회사의 주주가 됨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 식민 개척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풍자화. 펠리페 2세가 저지대를 상징하는 암소의 등 위에 올라타려 헛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먹이를 주고 있으며, 빌럼 1세는 젖을 먹고 있다. 꼬리를 잡고 있는 앙주 공 프랑수아는 똥을 맞고 있다.
한편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잉글랜드의 개입으로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습니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를 극도로 증오하였는데, 이유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신교도(제일 중요)2. 가톨릭을 탄압함(역시 중요)3.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가 내전으로 인해 잉글랜드로 도주했을 때 18년 간 유폐당함. 메리 1세는 가톨릭 교도였으며,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메리 1세를 정당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자로 인식하고 있었음. 4. 프랜시스 드레이크로 대표되는 사략 활동이 에스파냐 무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힘. 5. 잉글랜드가 1562년부터 시작한 대서양 노예 밀무역. 6. 위그노 전쟁에서 개신교도인 앙리 4세를 지원함. 7.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지원함.
1. 신교도(제일 중요)
2. 가톨릭을 탄압함(역시 중요)
3.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가 내전으로 인해 잉글랜드로 도주했을 때 18년 간 유폐당함. 메리 1세는 가톨릭 교도였으며,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메리 1세를 정당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자로 인식하고 있었음.
4. 프랜시스 드레이크로 대표되는 사략 활동이 에스파냐 무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힘.
5. 잉글랜드가 1562년부터 시작한 대서양 노예 밀무역.
6. 위그노 전쟁에서 개신교도인 앙리 4세를 지원함.
7.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지원함.
1583년 1월 17일, 네덜란드 반란군을 지원하던 앙주 공 프랑수아가 안트베르펜에 입성했다가 민병대의 매복에 휘말려 간신히 도망쳐나왔으며(French Fury), 1584년 6월 10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합니다. 같은 해 7월 10일, 네덜란드 반란군의 지도자였던 오라녜 공작 빌럼 1세마저 암살당하죠.
한편 네덜란드 총독 파르마 공작 파르네세가 1584년 7월부터 안트베르펜을 포위하기 시작하여 1585년 8월 17일 점령하였으며, 1585년 3월에는 브뤼셀도 항복하는 등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자, 엘리자베스 1세는 1585년 8월 20일 논서치 조약을 체결하여 병력, 군마, 지원금을 제공하게 됩니다. 펠리페 2세는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반군노무 새끼들. 여왕이 아니라 모두가 네덜란드하고 한↓ 패↗들이야!!"
에스파냐는 프랑스에서 가톨릭 동맹을, 아일랜드에서 제2차 데스몬드의 난을 지원하는 등 이미 각지에서 잉글랜드와 대리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나, 이제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에 돌입합니다.
1587년 2월 8일, 메리 1세가 처형당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있었다는 것이 죄목이었습니다. 1577년과 1586년, 그녀는 펠리페 2세에게 "아들 제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펠리페 2세에게 양도한다"는 편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결국 1587년 7월 29일, 교황 식스투스 5세는 펠리페 2세가 선택한 자를 잉글랜드 왕위에 올릴 권한마저 주었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이 지도에서 잉글랜드 왕국까지 노랗게 칠해질 뻔한 순간...
한편, 북해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함대가 전투를 벌이는 것을 확인한 잉글랜드 해군이 급히 네덜란드를 지원함에 따라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결국 네덜란드는 안트베르펜을 포함한 남부 저지대의 모든 클레임을 포기하며, 상당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전쟁을 종결합니다. 이로써 네덜란드 공화국은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으나, 잉글랜드를 참된 신앙으로 되돌리겠다는 펠리페 2세의 야심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에스파냐의 3만 대군이 노포크에 상륙할 것이라는 급보를 전해들은 잉글랜드는 군대를 노포크에 준비시키는 동안 해군을 동원해 상륙군의 발을 묶습니다.
어차피 이길 가망이 없는 해전이므로, 상륙을 방해한다는 목적만 달성하고 즉각 도주합니다. 치고 빠지는 것은 사략선장으로 명성 높은 드레이크 경의 주특기죠.
제대로 된 지휘관도 없었던 에스파냐의 오합지졸들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이끄는 군세에 매복 포위당해 대패를 당하고,
패잔병들은 옥스포드셔 부근까지 도주한 끝에 전원이 포로로 붙잡히게 됩니다.
3만 군세가 두 번째로 에식스에 상륙하려 하자, 이번에도 해군이 출동하여 발을 묶는 전략을 씁니다.
에식스 백작이 똑같은 대승을 거두면서,
보급이 끊겨 굶주리는 패잔병들을 런던 북쪽에서 전원 포로로 획득하게 됩니다.
이후 이어진 몇 번의 해전에서 잉글랜드가 패배하며 함선을 날려먹긴 하였으나, 에스파냐 육군을 6만 명이나 잘라먹은 덕분에 잉글랜드 본토는 안전합니다. 우세한 해군력으로 잉글랜드를 봉쇄할 수는 있을지언정, 상륙 후 보급로를 유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펠리페 2세는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요구는 놀랍게도 에스파냐가 개척 중에 있는 모든 플로리다 식민지였습니다. 마침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사략함대가 에스파냐 개척지들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개척자들은 잉글랜드 여왕에게 충성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드레이크 경에게 직격타를 얻어맞은 산아구스틴(세인트오거스틴)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으나, 나중에 상륙한 잉글랜드 수병들에게 진압당하고 맙니다.
1590년 9월 2일, 런던 서머셋 하우스에서 런던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영서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습니다. 에스파냐가 지불한 배상금으로 잉글랜드는 모든 채무를 갚게 되었습니다.
북아메리카 식민 경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된 엘리자베스 1세는 1591년 7월 10일 '확장 칙령'을 선포하고 버지니아 회사 창설을 허가합니다.
1592년 3월 23일, 로어노크 식민지 개척의 선구자 월터 롤리 경이 사망했습니다. 그는 1591년 여왕의 시녀였던 엘리자베스 스록모턴과 비밀리에 결혼하였으나 이 사실이 발각되자 런던탑에 수감되었으며, 석방을 3개월 앞두고 병사하였습니다. 그가 죽게 된 시점을 전후로 하여 아들 커루가 태어나 가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 여왕은 성공회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청교도들을 다음 배제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탄압은 하지 않고 대신 신대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1592년 8월 3일, 잉글랜드 의회는 식민 헌장을 통과시킴으로써 북미 식민 개척에 국력을 집중시킬 것에 동의합니다.
로어노크의 인구가 1000명을 돌파하면서 버지니아 회사의 관리 대상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플로리다에 대한 식민 개척도 성황을 맞이함에 따라 기존 에스파냐 이주민들보다 잉글랜드 이주민들이 수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체서피크의 제임스타운도 잉글랜드 인들로 북적이게 되었습니다.
1565년 9월 16일, 산아구스틴(세인트오거스틴)에서 결성된 민병대의 모습. 리오그란데 강 이북 최초의 유럽인 수비대였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언제까지고 개척지 단위로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잉글랜드령 버지니아 식민지와 구 에스파냐령 플로리다 식민지를 통합적으로 운영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아메리카 식민정부'의 탄생을 선포하고 버지니아 회사의 주주 중 한 사람인 제러미 울프를 '아메리카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식민정부의 수도는 플로리다 동쪽 연안에 위치한 세인트오거스틴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영서전쟁 도중이던 1586년 5월 27~29일,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산아구스틴을 공격하는 모습. 플리머스에서 출항한 드레이크 경은 베르데 곶의 산티아구 섬, 신대륙의 산토도밍고, 카르타헤나를 공격했으며, 로어노크 식민지에 들르기 전에 한 곳을 더 공격하고자 했다. 이때 결정된 것이 산아구스틴이었다. 약탈을 성공적으로 마친 드레이크 경은 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로어노크 섬에 도착했다. 기대하던 보급품은 없었지만 정착민 몇 명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 경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에스파냐는 북쪽에 잉글랜드의 거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연이은 탐험에도 로어노크 식민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한편 드레이크 경의 깽판에 과도한 겁을 먹은 에스파냐 인들은 패리스 섬과 산타 엘레나 등의 몇몇 정착지들을 스스로 포기해버렸고, 이에 따라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은 에스파냐의 영향권으로부터 영구히 벗어나게 되었다.
영서전쟁 도중이던 1586년 5월 27~29일,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산아구스틴을 공격하는 모습. 플리머스에서 출항한 드레이크 경은 베르데 곶의 산티아구 섬, 신대륙의 산토도밍고, 카르타헤나를 공격했으며, 로어노크 식민지에 들르기 전에 한 곳을 더 공격하고자 했다. 이때 결정된 것이 산아구스틴이었다.
약탈을 성공적으로 마친 드레이크 경은 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로어노크 섬에 도착했다. 기대하던 보급품은 없었지만 정착민 몇 명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 경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에스파냐는 북쪽에 잉글랜드의 거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연이은 탐험에도 로어노크 식민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한편 드레이크 경의 깽판에 과도한 겁을 먹은 에스파냐 인들은 패리스 섬과 산타 엘레나 등의 몇몇 정착지들을 스스로 포기해버렸고, 이에 따라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은 에스파냐의 영향권으로부터 영구히 벗어나게 되었다.
1584년 로어노크 섬의 지도. 중앙에 분홍색으로 칠해진 섬이 로어노크 섬이다. 지도 위쪽 거의 끝 부분에 있는 움푹 들어간 만이 체서피크 만인데, 만의 북쪽을 가로막은 넓은 육지로 보이는 부분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도에 보이는 체서피크 만 입구에서 정확히 서쪽으로 뻗은 물길이 제임스 강이며, 이 강을 따라 64km 내륙으로 들어간 지점에 제임스타운이 위치한다.
첫댓글 오랜만에 대항온 한번 들어가 봐야겠네요ㅋㅋ
그캠 스타팅이 아니라 역사적 시점인가 보네요흥미진진!
화이팅!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고 스코틀랜드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이종사촌으로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는 완전 별개의 인물입니다.
급하게 위키백과를 보고 적었던지라 오류도 그대로 옮겼네요;; 수정하겠습니다
첫댓글 오랜만에 대항온 한번 들어가 봐야겠네요ㅋㅋ
그캠 스타팅이 아니라 역사적 시점인가 보네요
흥미진진!
화이팅!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고 스코틀랜드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이종사촌으로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는 완전 별개의 인물입니다.
급하게 위키백과를 보고 적었던지라 오류도 그대로 옮겼네요;;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