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굴이야기’ <19> 실크로드 사막길 향해서 ⑦
물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막의 도시들
니야의 불탑.
신강 위구르 자치구 서남부 호탄(和田)시 다마구(達瑪溝)향을 중심으로 한 남북 100km의 지역에 6세기 이후에 건립된 20여 개의 불교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특히 2000년 발견된 남부지역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2002년부터 불교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 3개의 불교 유적지를 발굴했다.
이 명칭의 유래는 달마(達瑪), 범어 ‘Dharma’의 음사어로 추정된다. 이 불교 유적의 대다수는 6~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 중 1호 사찰은 남북 2m, 동서 1.7m, 면적은 4.5㎡에 불과하지만 400년 동안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먼저 만들어지고 후에 사찰이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잔존하고 있는 불상의 높이는 0.65m이고 사면에 벽화가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벽화 중의 인물 모양이 풍만하고 둥근 모습으로 호탄 미술을 대표하는 위지파의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다. 벽화의 잔편도 120개나 출토되었는데 천불도, 비사문천 등 다양한 종류의 벽화가 나왔다. 현재 유지를 그대로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실크로드 문화재 중 온전한 불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로 보인다.
폐허만 남은 오아시스 도시 ‘니야’
사막남로의 니야는 다클라마칸 사막 중앙 남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 한 대에는 ‘정절국’이라 불렸으며 <한서> ‘서역전’ 등에 480호, 인구 3360명, 병사는 500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니야는 당시 니야가 있던 지점으로부터 1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은 도시는 없어지고 폐허만이 남아 있다.
옛날 니야 지역은 물이 풍부해 <대당서역기>에 “큰 늪지대가 있기로 건너가기가 어렵고 갈대가 우거져 있어서 길조차 없다. 성으로 향하는 외길만이 걸어 다닐 수 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옛 니야 지역을 향해 흐르던 니야강이 모래 속에서 물줄기가 바뀌면서 현재의 니야 지역까지 무려 120Km나 이동을 함에 따라 일년의 강우량이 겨우 29mm(서울의 하루평균 강우량 정도)밖에 안되는 옛 니야 지역은 메마르고 말았다.
위구르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
1959년, 옛 니야 지역에서는 많은 미라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선 아내가 순사한 듯한 인골도 나타나 당시 오아시스 국가엔 순사의 풍습이 남아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 해골은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머리도 검은색’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필자의 추측으로는 셈족 계통의 인간이 아닌가 싶다. 현재 사막에 사는 위구르족도 셈족으로 그 모습이 비슷한 바, 아마도 위구르족이 당시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나야 강은 존재하고 있다. 천산의 녹은 물이 흘러내릴 때는 니야 유지의 입구까지 물이 차기는 하지만 니야 고성 터까지는 물이 흐르지 못한다고 한다. 조사단도 이 나야 강에 물이 차서 미처 진입하지 못할 뻔하였다.
<대당서역기>에는 니야의 동쪽으로는 ‘대유사’라 하여 모래가 흐르며 움직이는 부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대유사를 400리 건너가면 토카라의 옛터가 있고, 거기서 동으로 600리 가면 찰마다나, 즉 옛 찰마국이 나오며, 거기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가면 누란이 나온다고 대당서역기에 적고 있는데, 니야를 제외하고는 현장이 인도로 가던 그 시기에 이미 사람의 흔적이 없는 버려진 도시들로 대당 서역기에 기록되어 있다.
1901~1930년 까지 스타인에 의해 발굴되었었는데 이 유물들은 스타인 콜렉션으로 반출되었다. 고성의 유지는 현재 확인가능 한 불탑으로부터 남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유적지는 불탑을 중심으로 남북 25km 동서 5km에 달한다.
강을 따라 산재해 있는 문화재들
1996년 중국과 일본의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공동탐사단이 발굴할 당시 주택, 성곽, 고사(枯死)된 과목(果木)등을 발굴했다. 고성의 유적지는 동서 185m, 남북 150m의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곽의 유적이 남아 있다.
조사단이 조사시에도 불탑 1기, 불탑 주변의 승방지, 마을유지, 민가터 등을 볼 수 있었다. 누란 지역과는 달리 밀집한 문화재가 아니라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유물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당한 규모로 니야 강을 따라 성과 부속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타버린 포도나무.
간다라 영향을 받은 불탑들
불탑의 높이는 6.5m로 높지는 않지만, 현재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방형 기단 위에 복발형 탑신을 얹은 간다라 양식의 불탑이 보인다. 이 지역의 문화는 간다라 지역과 연관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사막지대의 황량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BC 2세기에서 AD 8세기경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96년 당시 조사 시 키로쉬티어로 쓰인 30개의 서판(書板)이 발견되었다.
모래 속에 깨어진 채로 묻혀 있던 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이들 서판(書板)은 쿠산 제국에서 만들어져 타클라마칸 사막지대의 고대 도시국가에서 8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됐던 키로쉬티 문자의 흔적 및 쿠샨제국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서판에는 서선왕의 이름이 등장하고 잇는데 <후한서>에 나오는 데로 이 지역을 병합했던 선선의 역사가 확인되었다. 또한 선선(누란)지역에서 불교사원과 승려들이 사용하던 인도의 문자가 키로쉬티어로 추정해 볼 수 잇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도한 이지역의 쿠샨의 영향력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포도장원 옆 보존돼 있는 민가터
조사 이후 많은 건물을 해체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건물의 유지는 잘 보존되어 있다. 포도장원 근처에 있는 민가 터에서는 직물 및 토기편 동전들이 아직도 산재해 있다. 포도 장원의 안쪽에는 고대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포도 항아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도 아직 유지 및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고대 니야강를 건너던 다리의 흔적도 잘 유지되고 있다.
니야의 동쪽으로는 ‘대유사’라하여 모래가 흐르며 움직이는 부분이 있는데, 삼장법사가 사오정을 만났다던 ‘유사하’의 모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 대유사를 400리 건너가면 토카라의 옛터가 있고, 거기서 동으로 600리 가면 찰마다나, 즉 옛 찰마국이 나오며, 거기서 동북쪽으로 1000여리 가면 누란이 나온다고 대당서역기에 적고 있는데, 니야를 제외하고는 현장스님이 인도로 가던 그 시기에 이미 사람의 흔적이 없는 버려진 도시들로 기록되어 있다.
니야라는 도시가 무려 120Km라는 엄청나게 먼 거리를 이동해 간 것은 모두 물의 흐름을 따른 것이었다. 물론 단 한 번에 사람들이 120Km의 거리를 이동해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점점 말라가는 강을 보며 당시의 니야인들은 부처에게 기도도 해 봤을 것이고, 우물을 파거나 하는 노력을 하며 어떻게든 니야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거대한 움직임 앞에서, 이러한 노력이 모두 수포가 되면서 니야는 강을 따라 120Km를 이동하고 말았다. 사막의 도시들은 물에 따라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세월의 흐름일 수도 있지만, 사막을 답사하면서 물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