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우리는 지금 편지가 사라진 시대에 산다. 불과 40여 년 전 일이지만 그때는 가슴에 있는 절절한 사연을 편지를 써서 서로 주고받았다. 우체부가 지나가면 누구에게 선가 올 편지를 막연히 기다리는 그리움에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편지는 e메일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까 육필로 쓰는 절절한 사연의 편지는 사라지고 없다. 그 고운 필적과 정이 넘치는, 그 친구를 만나는 듯 반가웠던 편지는 이제 교통이 발달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향토문학지인 봉화문학에 문체와 감성이 풍부한 봉화 고향에서 주고받았던 지난날의 편지를 소설에 대신해 본다.
이제 내 인생도 마무리를 지을 날이 머지않아 온다. 숨겨둔 옛날 편지뭉치를 정리하는 속에서 애인의 편지를 찾으려다가 많은 량의 전규성 형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무려 20여 통이나 되었다. 규성 형은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귀내 마을에서 태어나 전경수 봉화가축병원장과 전영준 전 봉화군군의회의장 전학규 상운우체국장 전만유 전 상운농협조합장 전우걸(안동) 전우겸(서울) 전영동(청주) 전우종(사상관계로 가정의 몰락을 비관 자결)등과 한 마을에서 자랐다. 규성형은 사람의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정이 많은 그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참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면서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5년 전 하늘나라로 갔다. 1938년 태어나 1998년 6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전규성 형의 명복을 빌면서 이 편지들을 정리해 본다. 막상 친구가 이승을 떠나고 없는 마당에서 편지를 정리하려니 가고 없는 깊은 우정에 가슴이 저려온다.
형의 회답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형의 금도(襟度)는 나를 안아주었소. 진정 형은 나의 인형(仁兄)이오. 하지만 이 몸이 친구의 구실을 할지가 의문입니다.
때는 오곡이 성숙하는 계절! 형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니 우선 다른 무엇보다 반갑습니다. 지금쯤 벌레 소리도 엷게 들려오는 고요한 들판을 홀로 거닐며 푸른 자연을 감상하겠지요. 때로는 구천 하늘도 바라볼 것이고 그리고 또 잊지 못할 그 누이(siste)의 환상에 감상되어… 황혼이 깃들면 반겨 찾아 줄이 없는 집으로(?) 어쩐지 쓸쓸한 것 같이만 느껴집니다.
형! 형의 의남매를 맺은 그 누이의 사연을 읽었소. 얼마나 굳은 약속이었고 참다운 사랑이었건만 지금은 허공에 사라진 그 누이, 믿지 못 할건 여자의 마음입니다. 형에 대하여 동정을 불 금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비견(鄙見)을 드리오니 양지(諒知)하시기 바랍니다. 형! 우리는 시방 청춘입니다. 원대한 장래를 꿈꾸는 청춘입니다. 이 청춘시절에 일개의 여자 때문에 비애(悲哀)에 젖어 산다는 것은 청춘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요. 이 청춘 시절에 백년대계의 지반을 닦아야 하지 않겠소. 의남매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하오. 조금 냉정해 집시다. 물론 다감하지 않으면 야수와 같은 무지한 인간이 될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단념하고 새 출발이 제일이지요. 그런 줄 알면서도 미련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이던가요. 청춘은 "이성은 투명하되 믿음과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냉정한 입장에서 판단하여 인생행로의 착오 없이 바른 코스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폭로란 일시적 설 분은 될지 모르지만 남아로서 비굴한 짓밖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살―, 아! 그렇게도 사랑했던가요. 젊은 베르테르와 같이! 하지만 그의 남편은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여하간 이젠 그 누이에 대한 사랑은 잊고 증오의 불꽃도 꺼버려야 합니다. 피차의 행복을 위하여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그 전에 그에게 악의를 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솔직히 사과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이도 사람인 이상 자아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행복을 빌고 형의 행복도 찾아가는 길의 굳센 행진곡을 울리는 날을 이 소제(小弟)는 기원합니다.
오늘도 조부님 산소를 성묘했더니 바람은 서늘하게 불어오는데 무덤 가에 핀 청초한 코스모스가 나를 반겨주더군요. 조부님의 영상 앞에서 어찌 형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겠어요. 형이 있는 전단의 맑은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요.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인생상담이라도 나누고 싶지만 실천을 못하는 놈이 변명한들 무엇하겠소. 추수가 끝나고 첫 눈이 내릴 때면 내 분명히 형에게로 가리다. 절대로 식언은 아닐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 서로 편지나 자주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편지를 해줄 사람은 형뿐이오. 그러면 댁내의 안녕하심과 형의 옥체 조섭(調攝) 순조롭기를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단기 4291년 9월 25일.
하식형!
무언의 광음 속에 풀지 못한 꿈만 안은 채 또 한해가 흘러갑니다. 회상에 잠길수록 과오만이 남는 청춘이 애달프기만 합니다. 인생의 환경 조건은 아무리 변명을 해도 현실을 초월하지 못하는, 그대로의 수동적인 나의 인생이 서럽기만 합니다. 형! 지난날의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내 길잡이의 채찍을 주저 없이 내려주소서. 단기4292. 1. 1. 구천 전규성 배.
하식형!
얼마나 저를 원망하고 꾸짖었겠소. 면목 없습니다. 저는 신록이 짙어지는 5월 바야흐로 온 누리의 만물이 피어나는 계절인 만큼 청춘의 가슴도 부풀어집니다.
제(際)하여 춘부장께옵서 안녕하시오며 형도 일신 완쾌되어 활동을 맘대로 하는지 궁금합니다.
형! 저가 해군에 입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리라 믿으며 왜 이 길을 지향했느냐 엔 어떻게 나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한때의 청춘을 불행히도 건강을 잃었던 형은 건강한 몸에 무슨 불만이 있겠느냐고 나무랄지 몰라 거북하긴 하나, 아시다 시피 진학을 못한 청춘의 애달픔이 한이었습니다. 남들은 팔자가 좋아 공부를 하는데 이 몸은 어찌하여 농촌생활에 시달리며 열등감으로 가슴만 울립니다.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나도 배워서 인격을 도야할까. 어린 마음에 가슴을 조리던 그때가 어제 같으이다. 하나 경제가 허락하지 않고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손에 잡힌 몇 권의 강의록으로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의 격이 되고 보니 일찍이 복을 타고나지 못한 불우한 이 몸은 무엇을 원망해야겠소. 결코 하늘을 쳐다보아도 창공은 푸르건만 나의 마음은 서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 형은 저에 대한 기대는 있었을 것입니다. 벗의 친분으로! 그러나 주경야독이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의지가 박약하고 노력성도 없는 인간이라 할지 모르지만, 종일토록 일에 시달리다 지친 심신이란 말하지 않아도 어떠리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저에겐 필요했던 것입니다. 벌써 1차의 고배를 맛보았음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해군에 가면 시간 여유가 있어 공부할 수 있다." 누구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망망한 대해 푸른 창파에 청운의 꿈을 풀어보는 사나이의 기상이 되리라!
절대 육군과 다른 세라복에 대한 호기심에서도 아니고 병역의무 완수의 충성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나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 솔직한 입대 동기의 심산이었습니다. 형은 웃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이라고. 참으로 이런 착각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군대란 입히고 먹이고 그냥 두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도 대가려니와 군대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음이 이제야 각성됩니다. "군에 가면 집에 일은 어떻게 하노?" 가족들의 말을 들을 때는 정말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몸만 생각하고 집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부모님의 말씀, 땔나무 한가지라도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정형편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머리 속에 정리하고 군무에 열중하는 것이 나의 갈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입대하고 보니 전우들 전부가 고졸 대졸 이상이며 국졸은 나 혼자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서글퍼지며 또한 자존심이 꺾입니다. 학력은 제일 낮으나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것은 또한 어떤 감동을 돋구기도 합니다. 하나 수병의 신세로서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질지는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 멀리 진해 역에서 기적 소리가 울리면 나를 실어다준 열차이기에 향수의 그림자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형의 건강을 빌며, 이만 그칩니다. 단기4292년 월 일. 우(友) 규성 서.
하식형!
오랜만입니다.
휴가 때 행자(나의 생질녀)네 집으로부터 안부는 들었습니다만 춘부장께서와 댁내 제절이 평안 하시온지요. 소제는 군무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는 언제나 형의 원렴지덕으로 알며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벌써 기해년도 저물어지려 하니 흐르는 세월에 보람 없이 청춘만 보내는 것 같아 안타까운 가슴만 태울 뿐입니다. 고향의 산천은 차가운 눈 속이라도 여기는 더운 바람 속에 밤을 새웁니다. 이러기를 한해 두 해, 꿈같은 인생의 공상은 작아만 집니다. 내 나이 스물을 넘어 셋을 헤아리고 보면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는 날이지만…그러고 신년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나도 몰래 마음은 잡히지 않습니다. 푸른 하늘 밑 정든 고향이 그립기에 형의 생각 간절히 틈틈이 그려보지만, 한 장의 안부 드리기도 어려우니 무심한 인간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럼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라며 이만. 단기4292. 12. 25. 소제(小弟) 규성 서.
경자(庚子)년을 보내며
추억이 회상되는 세모에 이 한밤 정박등(碇泊燈) 아름답게 꽃피우는 군항에서 엄마의 모습을 그리며 얼어붙은 밤하늘의 달빛이 선창에 지는 것을 보며, 가슴에 스며드는 애수는 한이 없습니다.
모닥불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황혼에 사라지며 우물가 아가씨의 두레박 소리가 들리는 고향은 솔잎도 푸르고 평화롭겠지요. 석유등잔 사랑방에 동무들과 둘러앉아 도란도란 정담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리는 듯 보고 싶은 모습들이 애달프게도 떠오릅니다.
고요히 한 해를 지난 일을 반성해 보니 정녕 철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당초에 세운 뜻이 이다지도 허무할 수야. 무능하고 노력 없는 탓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속아 사는 인생인가 합니다. 하기야 새까만 졸병이 허구 많은 함정생활 해상훈련에 이제는 어느 정도 자부심도 생깁니다만, 신년에 해당되는 해륙상 교대가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해는 친지들에게 인사할 사람구실을 다 못한 뉘우침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후회한들 무엇하며 미지근한 구태는 새해와 함께 깨끗이 청산하고 살렵니다.
참 빠른 것은 세월입니다. 아까운 젊은 날은 속절없이 흐르기에 무정한 세월은 가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고기잡이 돛단배는 수평선에서 애만 태웁니다. 한때는 많은 날을 원대한 이상에 몸부림치는 날도 있었지만, 순정이 발로하는 천진한 사랑도 없지는 않았지만, 열지 못한 문이라서 꿈으로만 남았습니다.
오늘도 한 많은 청춘 속에 등대를 멀리 시련의 배를 타니, 매서운 풍랑노도가 때로는 만경창파에 끝이 없어 항해에 서러운 청춘만이 낭만에 흘러갑니다. 그러나 젊은 혈기는 뛰고 언제나 간직하고 외어보는 꿈이기에 동녘 바다에 해 떠오르면 내 힘은 솟아납니다. 이 해가 저문다해도 희망의 새 날이 오고 아련한 무지개 같은 막연한 기약이지만, 염원의 희구에 신념을 숙제로 남기고 경자 년은 갑니다. 단기4293년 12월 25일. PCS 203호 선상에서 전규성.
하식형!
미련하고 무지한 놈이라 무척 나무랐을 것이나 그래도 용서하고 소식전하여 주는 금도(襟度)에 소제는 감격합니다. 그간 휴가는 몇 번 갔었습니다만, 형을 찾아갈 겨를을 갖지 못하여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행자에게 물으니 안동 봉정사에 가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 이 무슨 곡절입니까. 소생하는 봄이 와 희망의 도정에 오른 형껜 나날이 꽃이 피리라 믿었건만, 11월에 주신 형의 서신을 선상생활 관계로 12월 하순에야 받고 너무나 의외 사연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하고 또 다시 봐도…왜 그런지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불행하신 형에게 아무런 일조도 안 되니 소용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지? 이제는 회복되었으리라 믿으며 그렇기를 기원합니다. 부디 낙심하지 말고 치료에 만전을 기하여 속히 일어나도록 하십시오. 물론 난관도 있을 것이나 우선 사람이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멀리서 그리운 소제의 마음은 어떻다 글로는 다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래도 우리는 앞날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던지 일어나야 합니다. 저의 군대생활은 이렇고 저렇고 문제가 될게 없습니다. 형이 완쾌되어 활보하는 날 저의 가는 길도 힘이 날 것입니다.
저는 건강한 몸으로도 경자년이 다 가도록 아무것도 남김없이 덧없이 세월만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다운 형이여, 형의 건강만 해결된다면, 부디 속히 완쾌되기를 하느님께 빕니다. 드릴 말씀은 많으나 이만 줄이고, 두서 없이 붓을 놓습니다. 단기4293년 12월 28일. 규성.
인형(仁兄) 하식!
중복(中伏) 폭양(曝陽)에 어떻게 지내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러면서도 도시 잊은 냥 한자의 안부도 드리지 못한 소제의 신의 없는 도리가 참으로 밉고 면목 없습니다. 그러나 하회 같은 형의 관용을 믿는 마음에서 붓을 들었습니다.
형을 뵈온지 벌써 3년이 되는 동안 몇 차례 휴가는 갔었지만, 형께서는 성의부족이라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항상 바쁘기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행자에게 물어서 형의 안부는 들었습니다만, 언제나 건강한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군 생활에 아무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더위도 이제는 마지막 고비이고 일손이 끝난 농촌에선 가장 즐거운 "풋구"가 이때가 아닌가 하여 막걸리를 한 잔 쭉 들이키고 얼큰히 취해서 뜨거운 햇볕 아래서의 노고를 풀며 농부의 낙천적인 시절의 회상과 함께 술이 넘어가는 듯 막걸리 생각이 간절합니다.
저 피어나는 뭉게구름은 젊은 꿈을 실은 듯 갈매기가 넘나드는 수평선이 멀기만 합니다. 연분홍 황혼이 물들인 부두엔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데 출항하는 뱃고동 소리는 님을 싣고 떠나는 듯 심금을 애타게 울려줍니다.
행복한 사람들에겐 한없이 아름다운 항구의 정서이지만 서러움 속에 세월을 보내는 저의 심사는 고독의 처연함만 자아낼 뿐입니다. 그러나 젊은 몸 내일을 위하여 방심하지 않고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함으로써 유감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겸연쩍은 자랑입니다만 군에 입대한 이래 아무런 과오 없이 지금에 이르렀으며 가장 모범적인 수병으로 단체생활에 있어 선망의 대상으로 칭찬 받고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점잖다. 착실하다. 얌전하다. 무언의 실천자다. 보급 창에 전 수병(水兵) 같은 사람만 있다면, 모범인물이야, 등등의 평을 들을 때마다 부족한 저의 얼굴은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해군에서 최저 학력인 저가 최고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처신에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각오가 섭니다.
그런데 저에겐 특별한 소질은 없으나 금년 4월 15일 국가고시의 개정은 학교를 정규 코스로 안나온 사람은 이만저만의 난관이 아니란 것을 형도 아시겠지요. 우선 중졸자격증을 가지기 위해서 중학과정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견우직녀가 만난다는 칠월 칠석도 다가오고 보니 낭만적인 전설이 생각납니다만, 헤어진 얼굴들이 떠올라 슬퍼지기도 합니다. 이왕이면 좀 시원한 글을 드리려고 마음먹었으나 재미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모자라는 점이오니 양지하시고 난 필 이만 줄입니다. 단기4294년 8월 15일. 소제 규성 서.
송구영신(送舊迎新)
정처 없이 훗날리던 추풍낙엽도 한 시절 꿈인 양 홀연히 사라지고 한공(寒空)에 달린 조각달만 고독한 여수(旅愁)를 울립니다.
희구하던 이념을 한 가닥도 이루지 못한 채 신년으로 넘어가는 신축(辛丑)년 세모(歲暮)에 덧없이 흐르는 세월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명멸하는 과거를 회고하면 군인이란 생활은 휴일도 없이 초하루부터 만경창파에 몸을 싣고 푸른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임무를 끝낸 남해 출동을 시두(始頭)로, 향수를 실은 가지가지 추억의 실마리는 감회가 무량합니다. 묵묵히 반성할 때 철없이 어리석고 무지와 모순된 낭만이었습니다. 앞으로 이를 각성하여 발본색원하고 바른 일을 전도의 귀감으로 삼으려 합니다.
아―, 명증(明 )한 물결이 내 마음을 비칠 때 초탈한 유리(遊離)에 번뇌는 씻었지만 심원한 창공에 애달픈 원한의 흉리(凶裏)에 서린 달은 그 곡절을 모르겠습니다. 면면한 만단(萬端)의 독선은 저를 곤고(困苦)케 하여 심란한 격정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숙명일지도 모르는 비운의 반발과 체념이 교차되어 비장한 고심의 각오와 회포(懷抱), 그리고 발자(撥刺)한 기백(氣魄)의 충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찍 진학하지 못한 환경이 한이 되어 원대한 꿈을 안고 가난을 넘어 시련을 극복하려고 노력한지 어언 십여 년의 성상이 지났습니다. 여태 아무런 결정(結晶)을 맺지 못한 자괴심(自塊心)을 금하지 못하나 이는 애오라지 내일의 개척을 위한 자강불식(自强不息)한 지조에 있음이라고 자위하고 싶습니다.
오직 "참된 사람" 인격의 자질을 구비하려는 이면의 진실과 부단한 최선의 노력이 촌음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 나의 신조요. 현실이 아무리 고달픈 역경이라 할지라도 은근한 이상을 견지함이 절대 허망한 공상이 아닌 것이 나의 투철한 건설적인 이념이었습니다.
지금은 겨울이니 희망의 정열이 약동하는 봄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 몸의 정력이 다하도록 알뜰한 내 생애의 염원을 기필코 달성함에 있어 일로(一路)매진(邁進) 할 것을 다시 한번 명심하고 명랑한 새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단기4294년 12월 23일. 규성 서.
오랜만이외다. 너무 무심하다고 원망하시겠지요. 용서하십시오. 그동안 어떻게 지내시는지 늘 궁금하여 알고저 했습니다만 바쁜 가운데 94년의 태양이 최고로 낮아졌다가 이제 다시 떠오릅니다. 물론 다방면으로 주의가 깊은 형이시와 설사 황량한 들길이라 해도 형 만은 결코 무의미한 발길을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별지의 글과 같이 저의 지난 한 해는 그리 자부심을 가질만한 결실이 나오지 못하여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항상 정성스러운 형의 두터운 우정 감사하오며 이후 더욱 변함 없는 정의를 베풀어주옵소서. 머지않아 귀향하여 순박한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건설하며 인자한 형을 모시리다. 그럼 형의 건강을 빌며 이만. 단기4294년 12. 21. 진해 해군보급창 재고조사과 전규성. ☆이 글은 연하장에 타자로 첬음.
형의 혼인을 경하하며
현란한 은백색의 고향 산야에 임인(壬寅) 신년의 희망과 만복은 인형의 가슴에 왔습니다.
형껜 생각수록 자꾸 죄송스런 마음만 앞을 가립니다. 물론 저의 불민한 탓이죠. 보내주신 글월은 봉견(奉見)하였습니다. 결혼 한다고요. 그래서야지요. 저는 일신 건강히 군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형의 염려지덕분으로 알고 다시금 감사 드립니다. 매사에 현명하신 형이시니 신부도 재덕이 겸비하신 줄은 의심치 않으며 반가운 마음 한량없습니다.
그런데 형께선 내가 약혼을 했는 줄 알고 있아온데 정혼을 했으면 어찌 형께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아니면 원망도 하였으리라 생각되오나 다음 조용히 말씀드릴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란 특수한 제약의 단체인바 여의치 못한 사정 드리게 됨 괴로운 바이며 무어라 변명할 면목조차 없습니다. 거룩하고 성스럽고 경하스러운 형의 혼례 석에 일석을 같이 못할 것 같으니 관대하신 아량으로 해량 하옵소서. 그러나 몸은 비록 먼 남쪽 군항 하늘 아래 있더라도 결코 광대한 그 날 잊지 않고 형의 영원한 가약에 행운과 축복을 빌 것이오니 불초한 소제 많이 나무라시고 축복 속에 결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군대의 일이란 단언은 못하지만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구정에 휴가를 갈 예정이오니 그때 상면의 기회를 갖겠습니다. 그럼 형의 건강을 빌며 이만 난 필 줄입니다. 1962.1. 9. 소제 규성 배.
하식 인형께
군항의 봄은 왔어요. 화풍(和風)은 난양(暖洋)에 일고 매화의 암향(暗香)은 심서(心緖)를 적십니다. 정녕 이 봄은 형의 신혼 생활에 행복과 환희를 가져오고 명랑한 새날의 아침일 것입니다.
다정한 형의 글월은 참으로 반갑게 읽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하렴 하여 주심으로 몸 성히 군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사를 무사히 치르셨다니 다행이옵니다만, 불민한 소제는 부끄럽습니다. 관대하신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겠죠. 그런데 형께선 좀 겸사의 말씀을 하셨지요. 안동 듬버리 의성 김씨면 견문 있는 명문인바 형의 지(智)와 인(仁)으로서 조화된 사랑이 넘치리라 믿습니다.
정초 몸살은 호사다마라 해동과 함께 건강상 말짱히 씻기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데 언제나 저의 소식을 반갑게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팔자는 불운인가 봐요. 여태 아무런 향상을 가진 것 없으니 환경을 탈피하고 자아의 발전에 노력한지도 시간상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건만, 하나 여의(如意)한 것 없으니 이것이 속아 사는 인생일까요.
그런데 반갑고도 감사한 말씀, 중매를 한번 서겠다고요? 정말 한번 하여보셔요. 형의 호의라면 무슨 용의인들 없으리까. 그러나 원체 못난 인간이라서 물론 형은 알고있지만 어디 의중 인물이 있을라구요. 아닌게 아니라 저는 지금 시각을 둔 운명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형의 글 받자오니 새로운 희망과 혈맥이 돌고 은인을 만나게 되는 느낌과 희비의 교차가 나도 몰래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신의가 있으시고 사랑과 지도를 베푸는, 매번 존경하는 터이지만 이번 말씀은 정말 비상한 충동과 기대를 주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저의 길은 지금 슬픈 운명의 지경으로 기우러지고 있는 중입니다. 해결책이 막연한 차시라 소제는 우선 체면도 없이 그저 "바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에요. 이제 저는 비운의 혼사가 된 것도 과언이 아닌 형편이옵고, 제대 날짜도 5월 4일로 목전에 둔바 향후지사에 대한 고견도 한번 듣고저 하온데 저의 신상이 복잡하다보니 그만 의지를 하려는 마음이 불현듯 생깁니다.
원컨대 이 마음 헤아리시와 저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시면 고맙겠어요. 저의 사정 얘기는 한번 조용히 뵈옵고 말씀드릴 날이 있으리다. 그러면 소론의 요지에 구체적인 말씀과 방안을 이 글 받으시는 대로, 하신(下信) 하여 주시면 그리고 낙관적인 희망이 있다면, 하시(何時)라도 달려가겠습니다.
어쨌든 지나가는 말이 아니기를 빌며 또한 저의 청춘의 길이 열리기를 형 앞에 기도 드리며 간절히 애원합니다. 그럼 드릴말씀 많사오나 다음으로 미루고 내내 형의 건강과 행복을 축복 드리며 필을 이만 줄이옵고 다음 서신 기다리겠습니다. 1962. 3. 14. 어(於) 소제 규성 상서.
하식 인형께
뵈온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시며 부인께서도 평안 하신지요. 소제는 언제나 형의 원념지덕에 잘 있사와 행(幸)이옵니다. 하오나 시절이 바뀌도록 일자 안부도 드리지 못하게 되었음이 여간 죄송스럽지가 않습니다. 그저 형의 관용과 해량 있으시기 바랍니다.
멀리 파란 하늘, 심원한 사색의 계절도 월색(月色) 고요한 추야장(秋夜長)의 고독 속에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무언가 슬퍼지는 내 마음의 사연이라도 엮어 보고 싶습니다. 희미한 호롱불이 적적한 방안에 가득할 뿐, 테이블 위에 놓인 백지 조각의 심사가 더욱 정적으로 이끕니다.
하기는 안전(眼前)에 야기되는 결실의 야경도 농민의 보람과 아름다운 향촌의 정서를 느끼게도 하지만, 이 가을 다시 피는 들국화의 청초한 자태, 수줍어함은 이 가슴에 가고 없는 추억의 그리움을 못 견디게 합니다. 아득한 꿈인가를 나도 모르게요.
지난 여름 형을 뵈온 후 8. 27 ~ 9. 8 일 까지는 대구에 있는 경북도 농촌진흥원에서 농촌지도자 수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정에 의하여 일체 동리의 일은 보지 않고 있기로 했습니다. 어쩐지 자아에서부터 사생활에 충실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형! 쓸쓸한 소제 한번 찾아주세요. 드릴말씀 다음 올리기로 하고 두서 없는 난 필 양찰 하시옵고, 인형의 귀체 건강하심과 삶의 영광을 빕니다. 1962. 10. 15. 구천에서 규성 배.
하식 형께
은백 세계의 애애( ) 한 자연은 희망의 신년을 복되게 하여줍니다. 형은 부인과 함께 복 많이 받겠지요. 보내주신 글월과 신년특집 신문은 반갑게 받았습니다. 함께 보내신 캘린더도 벽에 붙여놓았습니다. 하온데 정말 형께서 저를 아끼시는 보답의 한 끝도 드리지 못하는 소제의 불신한 도리 무어라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할수록 죄스럽기만 합니다.
오붓한 신혼생활의 아름다움과 화락한 결혼생활에 청춘을 구가함이 소제는 부럽고 또한 찬미하여 드립니다. 더구나 관대하신 아량도 우인의 귀감이 되옵고 낙오되는 경의(敬意)의 그림자를 일깨워 주오이다. 너무나 무능한 인간이기에 인형의 기대에 그토록이나 존재의 해결을 못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용서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참으로 지난 임인 년은 저에게 있어 불운과 악의의 한해였습니다. 한편으로 영광스러운 일도 있었는가 합니다만 폭풍이 휩쓴 상처가 더하게 남아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부모님께 불효하고 모든 친지에게 불신하였음이 어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만 저로서는 오직 마땅히 해야된다는 양심의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형! 그러나 저는 불운을 원망하지도 않고 또한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남긴 임인 년이었어도 마지막 세모(歲暮)에 있어 희망의 서광은 비쳐집니다. 아마 형께서도 반가워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너무 지나친 저의 욕망인지는 몰래도요.
어느 한 곳을 알게되어 저의 청춘도 앞날을 약속했습니다. 이제 막 이루어진 일이 옵기에 아직 자세한 것도 서로 알지 못합니다. 우선 소식부터 전해드리니 해량하셔요.
사업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인생행로란 순풍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옵니다. 그러나 이지적이신 인형의 지략으로는 타개하시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언제나 바쁘겠지만 한번 구천을 찾아주실 기회는 없으신지요. 요즘은 방학이래서 경수군(봉화가축병원장)도 집에와 있다오. 저도 영주 다녀올 예정은 갖고있습니다만 여의(如意)할지 조금 있어봐야 알겠습니다. 이만 총총 줄입니다. 1963. 1 3. 구천 소제 규성 배상.
하식 인형께
고르지 못한 기상과 장림(長霖)에 농사에 피해나 없으신지요. 복중(伏中) 맹염에 제(際)하여 춘부장께서 평안 하시옵고 형께서도 건강히 지내시는지요. 소제는 항상 두터운 사랑을 주시는 형의 염려지덕으로 별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글월과 신문은 참으로 반갑게 수견(受見)하였고 가난한 친우에게 베푸는 우의가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의 근안이 궁금하여 저의 소식도 전해드리고 안부 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지난 봄에 말씀하시던 학교 입학의 요건에도 역시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니 액면적인 기준의 사회 신용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동아일보는 그만 두시고 영남일보를 맡아 하신다니 새로운 개척일 것으로 짐작하며 발전에 일익 있기를 빌며, 사회 진출의 많은 체험으로 의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꾸준한 형의 노력으로 순조로운 경영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소제도 하여놓은 일 없이 금년에는 좀 바쁩니다. 육추(育雛) 성적은 비교적 좋은 편이고 답작(畓作)도 평년작 이상이 예상되어 땀흘리는 보람이 즐겁게 느껴집니다. 저도 김매기나 마치고 하면, 뵈러 가겠습니다만 형께서도 여가 봐서 오랫동안 안 오셨는데 구천엘 한번 다녀가세요. 그러시면 저가 사랑하고 있는 약혼녀의 사진도 보여드리고, 하―실례했습니다. 그런데 여태 기쁜 소식이 없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친구의 도리 상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다가 이제야 알리게 됨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6개월 간은 저의 집안에 한숨과 어두운 세월이었다오. 부주(父主)께서 국민의료법위반혐의로 반년 선고를 받아 안동교도소에 계시는데 오는 8월 8일이 출소 일입니다. 그간의 고통과 낭패는 많았습니다만 지나고 보니 새 희망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렇듯 불운의 교훈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앞으로 진실한 인간이 되기에 노력하기로 비장한 회포가 맺혔습니다. 모든 것이 불민한 소제를 용서하고 채찍을 하여주십시오. 그런데 나날이 수고스럽게 신문을 보내심에 무척 황송 스럽습니다. 구천엔 배달부가 짝수 일에만 오는데 수일 분을 동시에 발송함이 편의가 아닐까 합니다. 이만 난 필 줄이오며 인형의 건강을 기원하옵니다. 1963. 7. 26. 구천에서 소제 규성 배.
하식 형께
자연의 성장 속에 묵연한 신록은 벌써 8월이 다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댁내 안일하시고 형께서 하시는 경영 순조로운지 궁금합니다.
저의 집도 가친께서 지난 8일 귀가 하셔서 아무 걱정 없게 되었고, 소제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꼭 영주를 가서 형을 뵈옵고 말씀도 듣고 해야 하는데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하겠군요. 하식 형! 전에도 인형의 우정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더욱 감사한 마음 잊을 수 없습니다. 정성스럽게 보내주는 신문을 매일 받고 신문을 대할 때마다 다정한 형의 모습이 저의 머릿속에 떠올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마침 인편이 있어 두서 없이 몇 자 올리니 해량하시기 바랍니다. 1963. 8. 13. 소제 규성 배상.
존경하는 하식 형께
들국화의 청초한 향기 속에 바뀌는 계절의 감각을 느낍니다. 고요히 흐르는 중추의 야월삼경(夜月三更)! 애달픈 실솔성( 聲)이 적막을 깨트리는군요. 냉랭한 달빛이 독수공방인 저의 침실에 뚫어진 문틈으로 비쳐듭니다.
고요한 밤 모든 생명들이 안면의 꿈속으로 가버린 이 시간 항상 존경하는 인형과 다정한 명상의 대화를 가지려 하옵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따스한 형의 모습이 향수와 같이 떠올라도 무슨 말부터 먼저 드려야할지 순서조차 잡히지 않으리만큼 가슴이 복받치기도 합니다.
주신 글월은 곧 봉견(奉見) 하였습니다. 의외의 소식에 애석한 충정을 참으로 금치 못했습니다. 심상하셨을 형의 안타까움 오직 하셨으리오만, 어려울 때 일조도 되지 못하는 소제의 무능이 여간 죄송스럽지가 않습니다. 언제나 형께서는 인후 하신 우정에 감사를 드리면서 줄곧 무성의만 한 것이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어려운 세상살이에 "인간은 신의에 살아야 한다"는 말씀의 진리에 동감하옵고 심약하기만 한 일면이 짐작되어 마음 쓰이옵고 재기의 희망이 곧 있을 것으로 알며 또 성공이 있기를 기원하옵니다. 평탄치 않은 사회생활의 역경이란 있기도 많이 있지만 앞으로는 없으리라고 그 누가 단언하리까. 세찬 파랑과 싸우는 것이 인생이란 생각도 듭니다.
인사 늦었습니다. 참 인형께선 벌써 옥동자를 보셨다면서요. 진작 축하를 드리지 못한 것이 유감이오나 근간 이웃에 계시는 아주머니로부터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름은 무엇이라고 지었는지요? 부르고 싶군요. 추수가 끝나면 고이 안아보러 가겠습니다.
농촌의 바쁜 계절은 에누리 없이 찾아옵니다. 오늘도 벼를 베었어요. 알고져 하는 소제의 농사는 비교적 풍작이고 재해는 없습니다. 풍요한 이 가을 농부로서의 마음이 흐뭇할 때 부디 한번 오셨으면 좋겠어요. 이때 한번 오셨으면 하는 그리움입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등화가친(燈火可親)이 무슨 인연과도 같이 연관됩니다만, 그 한때의 가친(可親)은 흘러간 추억의 파노라마입니다. 인형이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미 코스는 전향(轉向)했으니까요. 이것도 무능한 소제의 탓이라 하시옵고 나무라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버리지는 말아주십시오.
여태도 다하지 못하는 소제의 구실, 변명도 많이 했고, 형을 속이기도 많이 했지만 형의 아량은 용서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하늘과 땅 모두가 나란히 잠들었습니다. 형께 보내려고 쓰는 이 글이 끝나면 소제의 애인에게 보내는 글을 써야겠습니다. 그러면 내내 건승과 가정의 행운을 빕니다. 1963. 10. 6. 규성 배.
하식 인형께
가려던 영주 방문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농번기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한번 가보려던 것이 그만―. 인형의 우편 배달도 2회나 받기도 하였고 찾아뵈옵고 말씀드린다는 것이 그만―. 정말 "이거 되겠습니까" "안 되겠죠" 무엇이 그리 분망 한지 모르겠습니다.
보내주신 사진 참으로 기뻤어요. 저희들의 천년기념 사진을 인형께서 만들어 주심에 우정의 상징으로 영원히 보관하겠습니다. 참 안부 늦었습니다. 부인께서도 강녕하신지요. 화락한 인형의 가정을 꼭 견학하려 했었는데요. 저의 아내는 지난 5월 18일 친정 집에 갔어요. 지금은 홀로 있긴 합니다만 모심기가 끝나면 인형께 인사하러 같이 가겠습니다. 청신한 녹음 속에 파묻혀 한없는 창공을 바라보며 낭만의 일각이라도 갖고 싶습니다. 기약 없이 자신이 자신을 속이며 오늘도 하루, 내일 또 하루―. 그러다 그저 인생은 그런거라 아는 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형의 건강을 빌며 너무 정회를 푸려고 해서 그런지 가슴만 부풀은 것 같습니다. 1964. 5. 28. 구천에서 소제 규성 배상.
하식 인형께
해마다 바뀌는 계절이지만 이맘때쯤이면 느껴지는 자연에의 새삼스런 상념이 있습니다. 이제 미감(微感)적인 상량(爽凉)으로 도래할 중추가친(中秋可親)의 기대에 인정 어린 친지의 근영(近影)이 한층 그립습니다. 인형! 죄송스런 마음 금치 못하겠군요. 못 다한 소신이 소제의 양심가책의 일면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인형의 건강과 부인께의 안부 궁금했고 그리웠습니다. 정말 부인께 미안하다는 인사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었으며, 귀여운 아기의 재롱 스러운 모습이 보고싶습니다.
인형! 잠깐 넋두리 좀 할까요. 먹어 가는 나이가 그래도 인간의 흉내는 내게 하는 모양이지요. 저 같은 주제가 남의 남편이 되었고―. 소제의 존재가 형께 부끄러이 되고 보니 회고지탄이 절로 나올 지경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현실의 자기를 불평만 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겠기에 어쩌면 좀 뻔뻔스러울지도 모르는 이 글까지 드리는가 봅니다.
그 숱한 날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맞고 보내건만 여가를 어이 그리 마련치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내핍도 못하면서 단조로운 농촌생활에 젖으니 동경하는 도회의 거리에 활보하며 황홀한 극장관람이라도 한번하고 싶은 생리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대단히"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이른봄부터 벼르던 일이었습니다만 오는 9월 2일 인형의 가정을 방문할 예정인데 혹 바쁜 용무나 없으신 지 모르겠습니다. 소제의 처도 같이 가오니 반갑게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오전 10시경 영주 도착하여 한 너덧 시간 놀다가 오후 차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드릴말씀 많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난필 줄입니다. 1964. 8. 29. 구천에서 소제 규성 배상. <끝>
■ 박 하 식
1938년생.
"문학세계" 단편 "삼동할머니"로 등단.
작품집: "이승의 옷" "무수촌" "마음에 한번 핀 꽃" 등.
수상: 금복문화상 경상북도 문화상 한국예술공로상 등.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