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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수(肩隨) 30년
염무웅(문학평론가. 영남대 독문과 교수)
1.
내가 김윤수 선생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신문』에 실린 그의 글을 통해서였다. 리얼리즘에 관한 이론적 고찰을 담은 짤막한 논문으로서 대략 1970년쯤에 발표된 글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보니 그해 10월 19일자에 젊은 시절의 희미한 사진과 함께 「리얼리즘 소고(小考)」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는 필자의 이름 뒤에 '문리대강사·미학'이라고 소개되어 있었으므로, 당시 한창 가깝게 지내던 미학과 출신의 시인 김영일(김지하)에게 김윤수씨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당분간 숨겨두려던 귀중품의 알맹이가 드러나 아쉽다는 듯, 그러나 기왕 드러난 바에야 자랑 좀 해야겠다는 듯 싱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윤수 형님 말이야? 너 그 형님 어떻게 알았어?" 그래서 나는 학교신문에 난 글을 보고 이름을 알았다고 대답했을 것이고, 그는 아마 김선생에 대해 이런저런 찬사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잊은 지 오래나, 다만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나아 있는 것은 좋아하는 선후배를 기탄없이 '형님''아우'로 부르는 김영일의 그 협객문화적 호칭법이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당시에 김윤수 선생의 글에 선뜻 주목하게 된 것은 아마 그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회경제적으로 급격하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긴장 또한 덮어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국가사회 전체가 물량적·의존적 근대화를 강압적으로 밀고나가는 소수의 권력진영과 그러한 근대화에 의해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다수의 민중진영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열은 필연적으로 양 진영간의 정치적 적대와 이념적 대결을 초래하였다.
소위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간의 논쟁이라는 것도, 비록 엉성하고 미숙한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이념대결의 한 국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수-참여논쟁이란 의제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든가 또는 그밖의 이런저런 고상한 명분을 내세워 논쟁으로부터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차라리 어느 한쪽의 입장을 택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비열한 자기기만일 가능성이 있다. 어떻든 전태일의 분신투쟁 같은 결정적인 지표를 제외하고 문학의 영역으로만 시야를 좁히더라도 신경림·조태일·김지하의 시와 이문구·황석영의 소설은 1970년대 초의 우리 사회와 문학이 적어도 휴전 이후의 남한역사에서 어떤 중요한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음을 실증한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언급하게 될 김윤수 선생의 논문 「예술과 소외」와, 『창작과 비평』 같은 호에 발표된 황석영의 중편소설 「객지」는 문학사적으로 하나의 분수령일뿐더러 사회사적으로도 하나의 이정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리얼리즘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게양된 문중문예의 이념적 깃발이었고 또한 그 이론적 도구였다. 그러므로 당시 대학에서 독일어 시간강사 노릇을 하면서 어렵게 『창작과 비평』 편집을 전담하고 있던 나로서는 김윤수 선생 같은 독실한 미학자의 민중진영 동참이 절실히 요망된다고 여겨졌다.
김선생을 처음 어디서 만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소개자인 김영일과 동석이었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희미하다. 어쨌든 나느 김선생과 만나자마자 금방 의기투합하는 것을 느꼈고, 그후 김선생이 노총각 신세로 어머님을 모시고 살던 정릉의 연립주택을 꽤 여러번 찾아간 일도 생각난다. 언젠가 한번은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민기도 놀러 와서 여럿 앞에서 기타를 치며 「아침 이슬」같은 곡을 노래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물론 이것은 김선생과 더 가까워진 다음의 일이고, 처음 만났을 때에는 『대학신문』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좀더 본격적인 리얼리즘론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창작과 비평』1971년 봄호에 발표된 논문이 「예술과 소외」다.
앞서 발표된 「리얼리즘 소고」도 어느정도 그렇지만 이 「예술과 소외」도 우리의 당면한 문예현실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글은 아니다. 1966년 김선생의 대학원 졸업논문 제목이 「칸트의 미 분석론에 관한 연구」임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그 무렵 김선생은 칸트의 이른바 자율성 미학으로부터 20세기 현대소설의 소외현상까지를 관통하는 어떤 이론적 비판의 도구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술과 소외」에는 멈포드·마르쿠제·하우저처럼 당시의 '창비'독자들에게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학자와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한스 제들마이어나 에른스트 피셔 같은 생소한 미학자 내지 평론가들도 거론되고 있다. 이것은 아직 폐쇄적이고 냉전주의적인 한계 속에 갇혀 있던 당시의 우리 학문풍토에 비추어 김선생의 독서범위가 대단히 진취적이고 광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이론적 구상이 아주 방대하고 야심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고 보니 『창작과 비평』1971년 봄호에는 김선생의 논문과 나란히 에른스트 피셔의 「오늘의 예술적 상황」(Uberlegungen zur Situation der Kunst)이 수록되어 있다. 그 번역원고를 다듬느라고 무척 고생한 기억이 나는데, 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경직성과 관료주의를 비판한 전(前) 공산당원의 문제의식과 반(半)봉건적 자본주의사회의 예술적 소외와 비인간화를 극복하고자 고민하는 남한 미학자의 문제의식이 그때 '창비'에서 만나고 있었음을 나는 이제 뒤늦게서야 깨닫겠다.
2.
「리얼리즘 소고」가 언제 『대학신문』에 발표되었는지 확인하려고 뒤지다가 덤으로 찾아낸 김선생의 글이 있다. 1971년 4월 5일자 『대학신문』에 실린 「회화에 있어서의 리얼리티」라는 글이다. 지난번과 똑같은 사진이 곁들여 있는데,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르나 아주 젊은 얼굴이다. 예술 전반에 걸친 리얼리즘 문제를 높은 수준의 추상차원에서 정리한 지나번 글보다 더 짧으면서도 범위를 회화에 한정시킨만큼 더욱 예각적인 고찰이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어쩌면 김선생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렸을지 모를 그 글의 전문을 아래에 그대로 옮겨 당시 김윤수 선생의 관점과 사고를 실(實)문장으로 중계한다. 다만, 신문지질과 인쇄술 및 교정능력이 너무도 저급하여 판독이 잘 안 되는 글자들이 적잖았으므로 한두 군데 틀린 곳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01년 3월부터 정확히 30년 전에 김선생이 정릉 연립주택 2층 자신의 책상에서 그 글을 쓰고 있었음을 상기하는 것도 하나의 감상법이다.
繪畵에 있어서의 리얼리티
리얼리티란 말의 본래의 개념은 우리의 경험이나 사유 등에 의해 파악된 관념적 표상 이전의 또는 그와의 독립해 존재하는 사물·事象을 뜻하며 상식적으로 말해서 상상이나 착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건전한 지각에 의해 얻은 표상에 대응하는 실재성이다. 이처럼 일견 명백한 듯이 보이는 리얼리티가 경험되고 개념화하여 인식을 얻기까지 서로 다르게 풀이됨으로써 실재론과 관념론에서처럼 해석상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인식론을 떠나서 본질적으로 현실과 상상의 통합물인 예술의 영역에 이르면 더구나 자연의 재현을 거부하는 오늘의 회화에 있어서는 더 한층 미묘한 문제로서 제출된다. 회화에 있어서의 리얼리티의 개념도 반드시 일의적이 아니어서 실재 자체를 중시한다는 의미에선 '현실성'이요 실재를 충실히 표현한다는 의미에선 '사실성'으로 풀이되어 전자는 추상성에 대해, 후자는 理想化에 대해 대립 개념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실재하는 사물이나 쌍은 3차원적인 세계다. 이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표현한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이 모순을 시각적인 이미지로써 해결한 데서 회화가 성립할 수 있있고, 그러기에 회화는 장구한 시일에 걸쳐 재현예술로서 발전해왔다. 원칙적으로 보아 실재의 사물을 충실히 재현한 회화에서는 모두 리얼리티가 있다고 보아야 옳을지 모르나. 회화가 예술인 이상 자연을 충실히 묘사했다고 해서 반드시 리얼리티가 있는 것도 아니며 추상화라고 해서 모두 리얼리티가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리얼리티 문제는 현실적 기준과 회화적 기준의 상관관계에서 밝혀져야 옳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생생한 면을 회화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모방'의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먼저 우리는 대상의 외적 객관적인 이미지를 충실히 묘사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넓은 의미에서 유럽의 경우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다. 이와는 달리 대상의 이미지를 주관적 체험에 의해 변경하고 재구성하는 경우로서 자연을 美化·理想化한 고전파, 그 반대의 쉬르레알리즘, 대상을 해체한 입체파, 그리고 현실에 반응한 주관적 감정의 표출로서의 표현파 등을 들 수 있다. 어느 경우이건 객관적 대상의 이미지를 기준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화면상에서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한 일단은 리얼리티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의 이미지를 완전히 또는 최소한 확보한다고 해서 리얼리티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그것을 어떻게 회화적인 '현실'로 형상화하는가에 따라 그림 밖의 현실이 그림 속의 현실로 될 수 있다. 이것을 예술적 감동의 측면인 迫眞感과 결부시켜 생각할 때 현실성이 남아있다 해서 모두 박진감을 주지는 않지만 박진감을 주는 작품은 적어도 회화상의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한걸음 나아가서 창작상의 두 개의 기본적 태도-리얼리즘과 추상화의 경우를 구별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추상화를 포함한 모던아트가 자연 재현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에서 비롯했던 점에서 그것은 철저히 反현실적이었다. 처음 모던 아트가 현실을 은유나 추상에 의해 암시적으로 나타내려 했었지만 이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의외의 새로운 사실, 즉 조형의 자율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조형성이란 원래 회화에 있어서의 표현 방식의 하나이므로 자연 재현의 경우건 非대상회화의 경우건 모두 조형성(표현성)을 기반으로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모던 아트 이후의 현대 회화에 있어선 현실성과 조형성의 관계가 뒤바뀌어버린 것이다. 현실성보다는 추상성을, 이미지보다는 조형을, 의미보다는 지각을 선택하게 되었다. 허버트 리드는 모던 아트에 있어서의 현실주의와 추상주의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현실과 추상을 결합시키려 했던 주앙 그리의 "나에게 있어 회화는 피륙과 같다. 피륙은 전면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 씨줄은 재현적 미적 요소로써 날줄은 기교적·건축적 또는 추상적 요소로써 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실은 서로 의존하고 補足해 있어서 만일 어느 한 쪽이 없어지면 피륙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리'이후의 화가들은 추상적 요소만으로써 작품을 창조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과 추상을 분리시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가시적인 이미지로 구성하려는 '나옹 가보'의 예를 들고 있다.
이렇게 보면 리얼리티란 말은 이미 본래의 實在性에서 고도로 추상화되어버렸으며 완전히 미적 개념으로 파악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객관적 현실을 미적으로만 파악할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지각될 수 있고 창조될 수도 있다. 예컨대 山은 산의 형태, 색채 그대로가 미적으로 지각될 수도 있고 그것이 다른 갖가지 형상으로 변경되어 지각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변경된다 하더라도 그 山 자체가 가진 aspect 이상 리얼리티를 확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과연 山의 리얼리티라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로서 대상을 미적 지각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日常性 내지 실재 사물 본래의 것으로 보는 예로서 pop art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리얼리티를 강조한 나머지 實物을 화면에 도입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른 이미지로 변화되어 회화적인 리얼리티를 상실해버린다. 이 경우는 일상성과 회화를 동일시한 데서 비롯한 오류이다. 그러므로 회화에서의 리얼리티는 생생한 현실을 종합적인 이미지로 파악하여 그것을 화면 속에 형상화하는 데서 물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것은 예술적 감동도 줄 수가 있다.
리얼리즘이냐 추상회화냐의 문제는 현실에 대해 작가가 취하는 태도에 관한 사항이니까 일단 별문제로 친다 하더라도 회화가 적어도 리얼리티를 표현하기 위해선 순수히 미적 지각에 의거해서는 안된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인간을 풍부하게 해준다 함은 각자가 저마다 예술작품을 달리 지각한다는 데도 이유가 있지만 그보다도 오히려 공감을 통해 기쁨을 얻고 현실적으로 인간이 풍부해짐을 의미한다.
3.
문학에 있어서나 미술에 있어서나 리얼리즘은 그 자체의 본질적인 요구와 지향으로 보아 순수한 이론의 영역에만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러한 현실인식이 각 예술장르들 고유의 매체와 형식들을 통해 탁월하게 미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사회과학 같은 데서 통용되는 개념적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종교적 깨달음의 깊이라든가 예술가적 체험의 절실함에 대하여 언급할 때 거기 구현되는 현실과의 전면적인 대결의 수행에 가까운 어떤 것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에서의 현실인식과 미적 형상화는 분리되어 있다기보다 상호규정적으로 일체화된 하나의 통일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존해온 현실의 객관적 모순들 및 그런 현실 모순과 마주선 예술가 개인들의 갖가지 내적 편향과 불충실성은 김윤수 선생이 「리얼리즘 소고」에서 지적한바 "현실성을 둘러싸고 본질과 현상, 살재와 가상, 오브젝트(object)와 이미지(image) 사이에 불일치가" 끊임없이 발생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일치를 극복하여 진정한 예술적 리얼리티를 달성하는 일은 결코 현실과 절연된 관조적 영역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불가피하게 객관현실 속에서의 치열한 투쟁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예술작품의 창조작업에 요구되는 바로 그동일한 치열성은 제대로 된 예술작품을 알아보고 평가하는 이론가에게도 자신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 내지 리얼리티를 거론한 두 편의 짧은 글과 리얼리즘론이 돌파해야 할 현대사회의 모순을 분석한 한편의 논문을 발표한 김윤수 선생의 행보가 초기의 그러한 순수이론의 범주를 뛰어넘어 좀더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을 이론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파고들게 된 것은 실로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창작과 비평』 1971년 봄호에는 김선생의 논문과 함께 강명희의 「서양화의 수용과 정착」이라는 꽤 긴 글이 실려 있다. 사진이나 삽화를 그 때까지 아마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창비'로서는 여러 장의 그림 동판을 싣고 있어 자못 파격적이다. 이 강명희는 그후 전혀 미술사가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아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강명희의 그 글은 김선생의 열성적인 지도하에 씌어진 석사학위 논문의 보완·수정이다. 다시 말해 그 글에는 전적으로 김선생의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체게 개괄적이고 통사적인 그 글이 김선생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지는 않다. 그리하여 김선생은 잠시 강명희에게 말겼던 과제를 스스로 떠안아 이인성(李仁星)·이중섭(李仲燮)의 미술사적 위치와 업적을 논의한 「좌절과 극복의 논리」(『창작과 비평』1972년 가을)를 집필하고 이어서 「춘곡 고희동과 신미술 운동」(1975년 겨울)「화단풍토의 반성」(197년 가을)「광복 30년의 한국미술」(1975년 여름)등의 논문을 연달아 발표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여기에 서구 근대미술의 한국적 수용 문제를 이론적·비판적으로 논의한 서론을 보태어 1975년 11월 한국일보사'춘추문고'의 하나로 『한국현대회화사』를 출간한다.
이 책은 문고판 200면의 소책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김선생 자신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책이름 그대로의 한국회화사"인 것은 아니다. 고희동·박수근·이인성·이중섭이라는 대표적 사례의 분석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미술사론이라고 하는 것이 아마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70년대 중반의 한국미술계(및 미술사학계)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이 방면의 문외한인 내가 감히 발언하기 어려운 대목이긴 하나, 내 짐작에 김선생의 당시 작업은 식민지 초기부터 해방후까지의 한국회화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점검함으로써 우리 미술에 있어서의 역사의식의 회복과 주체적 시각의 확립을 겨냥하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문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해 있던 미술계에서 김선생의 시각은 실로 대담하고 도전적인 것이었다. 김선생의 것보다 20여년 뒤에 씌어진 김선생의 입장과 비슷한 논문 때문에 현직 교수가 국립대학에서 쫓겨난 것을 보더라도 미술계의 보수성 및 김선생의 선진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역시 문외한의 추측이거니와, 김선생의 이런 외로운 선구적 활동에 힘입어 그 활동의 이론적·실천적 토대 위에서 70년대 말경 젊은 미술인들에 의해 '현실과 발언'동인이 결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 책이 나온 다음에도 「김환기론」(『창작과 비평』1977년 여름)「오지호의 작품 세계」(『계간 미술』1978년 봄)「문인화의 종언과 현대적 변모」(『한국현대미술전집』9권, 1980)같은 글이 계속 발표된 것을 보면 김선생이 '춘추문고'의 그 책이름에 걸맞은 회화사의 완성을 위해 작업을 쉬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시선을 밖으로 돌려보자. 김선생이 대학강사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 무렵 이 나라는 1969년 박정권의 삼선개헌 강행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가파른 고빗길을 치닫고 있었다. 특히 1972년 10월의 소위 유신체제 선포는 폭력에 의한 일인통치의 제도화였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부정이었으며 민중의 생존권 요구에 대한 탄압의 전면화였다. 그런 와중에도 김선생과 나는 1973년 같은 해에 용케 대학에 전임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이화여대에, 나는 덕성여대에. 그러고 보면 이 무렵 정치의 암흑화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대학 지배는 아직 엉성한 구석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한 것에 비하면 대학교수나 종교인 등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당시의 지식인운동 자체가 아직 초보적인 성격의 것이어서 체제에 본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정치 권력이 알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화적 태도는 조만간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인·언론인·문인·예술가·교수 등 지식인들의 민주화요구도 점차 민중운동과 합류하면서 유신체제의 토대를 흔드는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73년 말 장준하 선생을 중심으로 한 헌법개정청원운동에 김선생이 참여한 데 이어서 이듬해 정초 60여명의 문인들이 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였고(1974. 1. 7) 바로 다음날(1. 8) 박정권에 의해 소위 긴급조치 1호가 발포된 것은 저간의 긴박한 상황전개의 일부를 알려준다고 하겠다. 그래도 이 무렵에는 성명에 참여한 문인과 교수들을 하루이틀 연행해 가기는 했어도 그 이상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결성에 즈음해서는 김병걸·백낙청 교수가 공무원의 정치참여라는 이유로 해임 또는 파면되었다. 김선생은 사립학교 교원이었으므로 현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론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정치적 압박은 시시각각 조여들고 있었다. 1975년 12월 초 나는 월북시인(이용악·오장환)의 시집을 복사하여 소지 배포했다는 혐의로 신경림·백낙청 선생 등과 일주일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나왔다. 그들 중앙정보부로서는 당시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고 비판적 문학활동의 거점이기도 했던 '창비'의 주요 멤버인 사람들이 아무리 조사해봤자 겨우 시집 몇권 복사해 가지고 있는 따위 좀스러운 짓밖에 하지 않은 것에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전해(1974) 1월 긴급조치 1호가 발포된 직후에 이호철·임헌영씨 등을 대상으로 소위 '문인간첩단'이라는 것을 날조해본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그러니까 1975년 11월 김선생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먼저 잡혀와 있었다. 최근에야 나는 영남대 정치학과 김태일 교수를 통해 그때의 겨위를 조금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운동권 학생이던 이화여대 이혜경(현재 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가 어느날 김선생의 연구실을 찾아온다. 그런데 김선생은 자리에 없고 김선생 책상 위 고무판에 웬 유인물이 한 장 놓여 있다. 그것은 김윤수 선생이 김지하의 어머님으로부터 전해받은 유명한 「양심선언」이었다. 연구실에서 김선생을 기다리는 동안 무심코 그것을 읽던 이혜경씨는 점차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그는 더 이상 김선생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인물을 들고 나와 그때 사귀던 서울대 의대생 양길승씨(현재 성수의원 원장이자 이혜경씨의 남편)에게 가지고 간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것을 필사(복사가 아님!)한다. 그러고서 이혜경씨는 원본을 김선생 연구실에 도로 갖다 놓았고, 양길승씨는 필사본을 근거로 자신이 지도하던 독서써클 후배들(즉 당시 대학 2학년이던 지금의 김태일 교수 등)과 함께 동대문시장에 가서 줄판과 철필 및 등사기 따위들을 사고 선언문을 여러 부 등사하여 여기저기 뿌린다. 그러지 않아도 이 문제학생들을 잡아들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당국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김선생도 사건의 배후인물로 걸려들게 되었는데, 재판이 열리기까지 김태일 교수는 어떤 경로로 그 문건이 자신들 손에 들어왔는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김선생은 이 사건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1976년 8월에 출소하였다.
홍성우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던 그 재판은 지금 돌이켜보면 진짜 재판이라기보다 재판을 소재로 한 하나의 연극 또는 긴급조치의 긴급성이 허구임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모의재판 같았다. 재판이 끝나면 피고역을 맡았던 김선생이나 변호사역을 맡아 수고한 홍변호사나 모두 얼른 옷을 갈아입고 방청객인 우리들과 함께 어울려 밖으로 나와야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술집 같은 데로 몰려가서 좀더 박진감 있는 연극이 되자면 기소의 내용이 너무 부실하니 죄가 될 만한 사건을 더 추가해야 되겠다느니 뮈라느니 하면서 시끌벅적 품평회라도 열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물론 재판이 끝나면 김선생은 다시 수갑을 차고 호송차로 가야 하는데, 유신체제하의 수많은 긴급조치 위반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김선생의 이 사건도 삼엄하고 살벌한 포장지 안에 실로 믿을 수 없이 터무니없는 희극을 내장하고 있었다.
김선생이 출소하고 나서 얼마 뒤 이호철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소백산으로 환영등산을 갔던 일이 떠오른다. 사실 그 때는 김선생도 나도 대학에서 쫓겨난 뒤였다. 소위 재임용제도의 첫 번째 희생자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에서 이 제도를 강행한 저의는 불을 보듯 명백했다. 한마디로,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대학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입을 봉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립학교 재단은 그런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법인데, 정치문제와 아무 상관없이 단지 재단의 입맛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다수의 교수들이 쫓겨났던 것이다. 당시 강원도 원주의 어느 사립대학은 50여명의 교수들 중 교무처장인가 하는 사람 하나만 빼고 전원 탈락시켜 말썽이 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그 재단의 의도와 관계없이 재임용제도 자체가 희화화되는지라 문교부 관리가 내려가서 재단의 지나친 처사를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있던 대학의 학장은 나의 구명을 위해 문교부에 들어가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재임용 탈락이 문교부의 소관사항도 아니었는지 76년 1월 말부터 갑자기 학교 출입이 통제되고 학생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그 때 김선생은 감옥에 있었으므로 이런 번거로움 없이 다만 해직을 통보받는 데 그쳤을 것이다.
당시에는 교수나 기자 등 정치적 해직자들이 많았다. 이 인력이 당국의 직접적 간섭을 덜 받는 대표적 자영업 즉 출판시장으로 진출하기도 하고 기타 여러 방면의 사회운동으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창비'주위에도 더 많은 실업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8억인과의 대화』로 편저자인 리영희 선생은 구속되고 발행인 백낙청 선생은 불구속으로 기소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할 말은 하면서도 늘 조심스러운 방식을 지켜 온 '창비'로서도 언젠가 한번쯤 닥칠 일이 닥친 셈이었다. 이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78년부터 내가 발행인이 되고 그와 동시에 김윤수·백낙청 선생들과 세 사람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김선생의 위치는 필자에서 편집자로 바뀌었고 우여곡절 끝에 83년 1월부터는 마침내 발행인의 직분을 맡게 되었다. 이 무렵 성내운·문동환·김동길 및 '창비' 편집위원 세 사람 등 20여명이 모여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였다. 한달에 한번씩 모여 이런저런 시국담을 나누고 가끔씩 동아투위·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사제단(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유사단체들과 연대하여 또는 독자적으로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금요기도회 같은 데 가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10·26으로 마침내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해직교수들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김선생과 나는 민주화의 기대를 뒤에 남신 채 서울을 떠나 함께 영남대로 내려왔다. 실은 김선생은 1년 전부터 시간강사로 영남대에 나오고 있었는데, 해직교수의 대학 출강을 철저히 억제하던 당시에 김선생이 강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렵 영남대 총장 비서실장으로 있던 고 이수인 교수의 특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나는 복잡하게 들끓는 서울을 벗어나 얼마 동안이나마 조용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가족들을 끌고 아예 대구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그해 봄에서 여름까지의 상황은 우리가 너무나 생생히 알고 있는 대로 나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었다. 계엄해제와 민주화의 실현을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의 움직임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압에서 초고조에 달했던 바대로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그해 5월18일부터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 말까지 교직원들조차 집총한 군인들한테 신분증을 보여야 학교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여러 명의 교수들이 학교에서 축출되었다. 『창작과 비평』『씨 의 소리』등 많은 정기간행물의 등록이 하루아침에 취소되고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느닷없이 끌려가 이른바 심청교육이라는 비인간적 만행을 당하였다. 영남대에서는 김선생고 이수인 교수가 해직되었다. 그런데 김선생의 해직은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좀체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학생데모의 배후로 찍힌 거로구나 하고 당시에 짐작했고 지금도 대강 그러려니 알고 있지만, 교수로 부임한 지 한 학기도 채 안된 김선생이 학생들을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조직의 명수라고는 맏어지지 않는다. 혹시 누군가 김선생을 무고 내지 중상모략한 것은 아니었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그러나 김선생은 의연하게 잘 견디어나갔다. 다만 나로서 아쉬운 것은 그가 한창 물이 올라 있던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결국 얻지 못한 사실이다. 물론 80년대 들어 미술계의 풍토 자체가 많이 달라지고 새로운 시각에서 근대미술사를 공부하는 후학들이 등장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김선생이 이 분야에서 단지 선편(先鞭)을 취하는 것 이상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없적을 이룩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기념비적 으미를 획득할 것이다. 어쨌든 70년대의 그가 주로 '창비'지면에 역사적 연구를 발표했다면 80년대에는 『계간 미술』을 중심으로 현장비평에 주력한 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해직교수들과 마찬가지로 김선생도 84년 10월에 복직을 한다. 그러나 정작 김선생의 고초는 그로부터 꼭 1년 뒤 '창비'의 출판사 등록취소 사건으로 심해지게 되는데, 앞서 말했듯이 그는 해직되어 있던 83년 초부터 '창비'의 대표로 취임해 있었던 것이다. '창비'의 출판사 등록취소에 대한 지식인들의 전국적인 항의서명운동은 그로부터 다시 1년여 뒤인 87년 4월 전두환의 호헌성명에 대한 반대서명운동으로 연장되고 마침내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계승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발족, 한국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결성 및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의 탄생 등이 모두 6월항쟁의 성과로서 가능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민예총의 경우 초대 공동의장(89∼90년)이자 현재(2000∼)의 이사장으로서 김선생은 민족예술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지도자로서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뚜렷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쓰다 보니 점점 공식적인 내용으로 되어간다. 실제로 김선생을 모시고 떠들며 한잔 하는 기회가 차츰 드물어진다. 70년대에는 꽤 자주 자리를 함께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옛날에 없어진 '항아리집'에서 신경림·한남철 선생들과 한곡조 뽑으며 마시던 일도 새삼스럽다. 그럴 때 김선생은 노래에나 이야기에나 아주 열정적이었다. 아니, 그는 매사에 열정적이고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해직교수일 때 돋보기안경을 끼고 '창비'책표지 디자인에 몰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87년 6월에는 그는 최루탄 가스 뒤범벅된 도심의 거리에서 젊은이들에 섞여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였다. 요즘도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청도 운문산으로 가끔 등산을 가곤 하는데, 지나는 길에 운문사 초입에 있는 조그만 초등학교 건물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말한다. "일제 때 저기서 김윤수 선생 부친이 교장으로 계셨대!" 반세기도 더 전인 그땐 이곳이 참으로 벽지였을 것이다. 거기서 뛰노는 소년 김윤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부친은 언제 돌아가셨나? 정릉 연립 주택에서 모친상 치르던 일이 생각난다.
90년대 들어 어느날 김선생과 둘이 우연히 교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스적스적 걷다가 그가 나를 보고 탄식처럼 말했다. "엄형네 복규, 신규가 벌써 대학생, 고등학생이지? 엄형은 든든하겠어." 나는 가슴이 아려서 아무 대답도 못했다. 얼마 후 김선생의 뒤늦은 결혼식이 있었다. 조촐하지만 아주 감명깊은 자리였다. 그런데 신혼여행길에 새벽산책을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모두들 몹시 놀랐으나 다행히 김선생은 차츰 회복이 되었다. 그런 어느날 역시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함께 산책을 하였다.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었고 김선생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이번에 다치신 걸로 선생님을 노상 따라다니던 액운이 깨끗이 떠난 것 같아요. 왠지 제게는 다치고 난 선생님 얼굴이 마치 목욕하고 난 뒤처럼 훤해 보여요."
이제 정년퇴직과 더불어 시작되는 김선생의 긴 노년이 지난 수십년간 알게 모르게 쌓은 공덕의 일부라도 보상받아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활력으로 넘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위 글은 김윤수 교수 정년기념 출판서 <민족의 길, 예술의 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