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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구즉 마을 사람들
3년 전 건강 상 이유로 술을 끊었다. 불과 몇 년 전의 ‘날 보러 와요’란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기만한 조촐한 시즌, 이는 내게 많은 후유증을 남겨주었다. 알콜 중독자 손 떨리 듯 갈피를 못 잡고 정서불안이 심했고 상실감이 컸다. 생각 외로 술은 파괴력만큼이나 관성력 또한 큰 것이었다. 절망 같은 외로움에 정말 ‘날 보러 와요’ 란 의미가 간절했다. 나는 산책 겸 다니던 갑천 루트를 변경했다.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았다가 또 다시 정적을 찾는 것은 나로선 더 이상 무리였다. 비록 공기는 맑지 않지만 그래도 도심을 활보하자면 마음 속 적막강산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루트는 관평동을 지나 송강동을 두루 살피고 돌아오는 코스다. 2시간의 행로, 이제는 구력도 제법 붙어 웬만한 부동산 업자보다 내 지리가 더 확실한 정도다. 그러면서 나름의 많은 개똥경제학도 수수했다. 관평동과 송강동, 둘 다 도시계획 하에 개발이 이루어진 곳들인데 관평동은 2005년도에 송강동은 1989년도 쯤 이루어진 동네다. 그런데 보유한 년 수만큼 거느린 족보가 너무 판이하다. 한마디로 관평동은 서울 새색시이고 송강동은 영락없는 시골 촌색시 형상이다. 관평동에는 브랜드 없는 가게가 r거의 없는데 반해 송강동은 브랜드 없는 가게들이 대부분이다.
통닭집, 족발집, 빵집 등등 체인점이 다 그렇고 마트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샌드위치 가게만 해도 송강동은 천오백 원 짜리 아줌마 샌드위치인데 반해 관평동은 요즘 유명한 서브웨이가 자리하고 햄버거도 송강동은 겨우 하나인데 관평동은 이름 있는 햄버거 가게만 4군데나 있다. 은행마저도 돈줄을 아는 것인지 송강동은 신협이 주름 잡는데 관평동은 TV선전에 나오는 은행들이 즐비하다. 불과 큰 도로 하나 차이인데 이렇게 다를까. 건물을 보면 대충 또 땅값을 알만하다. 송강동은 어느 건물이든 지하 주차장이라는 게 아예 없다. 반면 관평동은 거의 대부분 지하 주차장을 갖고 있으며 대신에 지하층에 노래방 같은 점포는 없다. 이는 땅값 때문 그러한 것이다.
상가는 200 m² 에 차량 주차 한 대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옛 건물들은 이를 위해 그만큼 공간을 비워두든지 기계식 주차설비를 했지만 지금은 아예 지하에 주차시설을 갖춘다. 지하층을 점포로 놓아봐야 그다지 효용성이 떨어지고 빈 공간으로 아깝게 1층 공간을 주차공간으로 비워두는 게 더 손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하층은 소방법이 강화되어 점포를 갖추기에는 스프링클러라든지 시설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당연 송강동 보다는 관평동 땅값이 훨씬 비싼 것이다. 비싼 땅 위에는 비싼 가치의 상품이 필요하다. 당연 그러기에 고급 브랜드가 들어가는 것이고 세 값도 만만하지 않은 것이다. 집값도 거의 두 배 차이가 난다.
관평동 롯데마트 지나 길 건너 내가 잘 가던 통닭집, 몇 년 전 롯데마트의 통 큰 통닭 사건이후 그들은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그 자리에 또 통닭집이 들어서 있다. 나로서는 송강동은 참 이해가 안 가는 동네다. 통닭도 7천 원짜리 통닭부터 다양한데 저가 브랜드로서 빛을 발하는데 저가도 저가 나름, 저가 통닭 브랜드가 또 그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었다. 한 번 세어 보았더니 엣날 치킨 신통 치킨 박군 치킨 등등하여 12종류나 나온다. 통닭집만 그런 게 아니다. 송강동 전통시장 반경 50미터 안쪽으로 족발집이 무려 7개나 되고 그 범위 안에 또 노래방이 8개나 있다. 피자 집도 마찬가지다. 관평 동은 이런 배치가 용납이 안 될 것이고 같이 죽자는 말 밖에는 성립이 안 될 것인데 송강동은 난립 속에서도 끄떡 없이 그럭저럭 먹고들 산다. 이는 또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솔직히 이점은 아직도 나는 연구 중에 있다.
또한 비싼 돈이 들어가는 재능 쪽 학원은 대개 관평동에 있으며 송강동은 영어학원도 개중에는 많은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유난히 태권도장이 많다. 이는 왜일까. 그 아이들은 내 퇴근 시간에 거의 맞춰져 우르르 쏟아진다. 직감 적으로 맞벌이부부가 많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든다. 그 시간 때부터 2시간가량 유동인구가 급격히 느는 곳이 송강동 동네다. 종합하여 나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송강동은 서민들이 사는 동네다. 서민들은 먹는 것에 약하다. 돈이 생기면 평소 못 먹었던 저것부터 정복하고 말리라 하는 생각이 먼저 차지한다. 저 소득층 고용을 늘리려는 정부 정책은 이를 고려하기도 한 것이다. 어느 정부든 큰 건설사업을 하나 선정하는데 이번 정부는 세종시에서 서울까지 도로를 내기로 했다. 건설공사보다 고용과 소비진작에 파급효과가 큰 것은 없다.
그에 반해 중산층 생각은 좀 다르다. 스테이크를 쓴다든지 아니면 문화적 충동을 충족하는 쪽에 기울기 쉽다. 그것이 인생의 고상한 멋이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31평 보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촌의 슈퍼가 더 잘되는 이유는 다 그런 심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서민의 돈으로 제일 만만한 게 바로 족발과 통닭 그 수준이 아니곘는가. 거기에 노래 한 곡 뽑으면 그날은 축복 받은 인생살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묘하다 싶은 것이 있다. 내 단골 통닭집을 허무하게 무너트린 대형마트가 기세로 보아 곧 관평이고 송강을 집어 삼킬 줄 알았는데 내가 보기엔 영 맥을 못 춘다.
어은동 살 때의 길 건너에 위치한 대형마트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 가만 보니 송강동에서 길건너 대형마트로 향하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적다. 정반대로 동네 전통시장하고 옆에 위치한 중형 마트가 호황이다. 여름 철 냉방 빵빵 때문에라도 다른 데서는 쇼핑을 즐긴다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이 관찰의 결과는 아주 간단했다. 중형마트 과일 값은 대형보다 훨씬 쌌으며 세일한다는 대형마트 소식 때 말고는 고기 값도 마찬가지였다. 단 화장지만 대형이 쌌기 때문 골라서 사러 다닌 알뜰한 결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타당성이 완결되지는 않는다. 분명 자급자족 같은 끈끈한 뭔가가 그들에게 있다싶었다. 내가 잘 가는 생태 집 젊은 사장은 말끝마다 ‘잘 못하면 이 동네는 금방 소문이 나요.’ 란 말을 많이 썼다. 뒤가 보덕봉이란 산으로 내 근무처와 경계를 이루며 막힌 곳이라 소문이 도망 갈 구멍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분명 동네는 관평동의 사통팔달과는 다르고 서로들 잘 알고 있는 것 같이만 보였었다. 내가 송강에 구즉이라는 동네를 맨 처음 찾았을 때는 1985년 봄이었었다. 그때만해도 배나무를 배경으로한 전원풍경 그 자체였다. 근무처 상관이 나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가더니만 옹기종기 모인 집들을 헤집더니 손가락으로 한 집을 가리켰다.
나는 구즉 할머니라는 그 분을 쫓아 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밀짚을 비집고 술항아리에서 밀주를 퍼 담았다. 그때도 밀주단속이라는 게 있었다. 구즉은 당시 밀주나 묵이 아주 유명했고 한 때는 양귀비 재배도 했었다고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배우 김지미 씨 고향이 신탄진인데 그 아버지가 왜정시대 때 화적으로 동네를 습격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다. 바로 구즉은 술향이 말해주듯 오랜 전통이 있는 동네로 술 담글 정도 돈도 있고 뼈대가 있는 튼실한 동네였다. 지금은 대전으로 내 사는 곳을 말하지만 그 시절은 달랐다. 고려 때 회덕현은 있었지만 대전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회덕은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갑 천을 건너면 그곳이 바로 회덕으로 경부선에서 대전 못 미쳐 회덕역이란 팻말도 나온다. 이는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 회덕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으며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 공주부 회덕군, 1896년 충청남도 회덕군이 되었다.
회덕은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공주의 두입지였던 구즉면·탄동면·천내면·유등천면·산내면과 청주의 비입지였던 주안면, 문의의 비입지인 지평촌면이 회덕으로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확장된 적도 있다. 바로 이쯤 구즉면이 등장한다. 1914년 쯤 비로소 대전군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구즉면은 무시 못 할 터전이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내 근무처는 길 하나로 탄동면과 대전시내로 나뉘었는데 이 탄동면도 공주군 명탄면을 탄동면으로 바꾼 이름이다. 공주를 가자면 내 근무처에 있는 적오산성을 넘어 대평리로 접어들어 향했다고 하는데 당시는 탄동면이라든지 공주가 대전보다 더 가까운 이름이었다고 한다. 지금 내 근무처로부터 보덕봉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동네 구즉, 구즉면 면사무소는 바로 송강동 옆 현 구즉동 주민센터 뒤 봉산동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곳에는 천년이나 되었다는 동네의 느낌처럼 구나무가 서있다.
구즉의 지명유래는 설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리적 뜻인데 구즉으로 들어오는 길이 일곱 나루이며 또한 두 고개로도 들어오기 때문에 구즉이라 불렀다 한다. 두 고개는 유성에서 봉산동으로 넘어오는 감나무서낭고개[일명 배재기고개]가 되며, 또 한 곳은 대평리에서 신동으로 들어오는 고개[일명 나분들고개]다. 그리고 일곱 나루는 갑천을 중심으로 설명하면, 원촌동 서운앞나루, 전민동 액별[역별]나루, 봉산 앞바구니 나루, 봉산동 들말나루[금강합류지역], 대동 말미깨[말매었던 나루]나루, 금탄동 쇄일나루, 거모[금오]나루라고 했다. 살제 금강과 갑천 산탄진에서 파생된 나루터 흔적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둘째는 집성촌으로 유래를 삼았다는 설이다. 문지동 신창노씨, 전민탑립동 광산김씨, 관평[동아울:묵집] 연안김씨, 송강 봉산의 경주김씨, 경주이씨, 금고동 밀양손씨, 대동 청송심씨, 금탄동 둔곡동 창녕성씨, 구룡동 청주한씨 등의 아홉 집성촌이 있는 바, 9족이 변해서 구즉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전민 탑립동 광산김씨, 회덕현에서 은진 송씨의 송시열, 송준길 선생과 광산김씨의 김장생, 김집 선생 두 가문은 조선 중기 역사에서도 나오는 인물들로 예송 논쟁이라든지 회덕에 동춘당은 유명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렇듯 구즉면이나 송강동은 뼈대 있는 가문들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당시 구즉면에 속한 동리 이름들이 관평동 탑립동 용산동 전민동 문지동...등등으로 당시는 이곳들은 나루터 근처에 보리밭에 불과했었고 바로 송강동 근처 구룡동이나 봉산동이 삼삼오오 대열을 갖추고 면을 이끌었다. 그밖에도 경주 최씨 라든지 금고동에 창녕 성씨, 문평동에 밀양 손씨등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지금도 대부분 그 터전에 본가를 두거나 친척들이 모여 산다. 내가 그 동네 아는 사람들은 같은 성 씨라 하면 적어도 8촌정도 되는 친척들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이 동네에 어느 중중들은 실은 내 이야기의 한 대목으로서 등장하고 깊은 관련이 생긴다. 그래서 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도 있었다.
내 근무처는 이웃사촌이다 하여 구즉마을에 봉사도 나가고 매달 말 금요일 전통시장도 방문을 한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그들은 어르신 공경을 참 잘한다. 인사성 밝은 사람들이 사는 곳, 생각해보니 바구니 액막이제, 어르신 공동작업장 운영 같은 것들이 잘 이루어지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어디를 가든 탐방을 하다보면 그들 특유의 냄새를 느끼게 된다. 구즉은 자고로 고향 같은 아늑한 느낌과 소박하고 인심 좋기로 소문난 동네라고 하더니만 맞는 말 같다. 그들은 고향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올해 신년 초 아무 생각 없이 보덕봉을 오른 적이 있다. 사람들이 꼭두새벽 많이 나와 있었다. 구즉동 해맞이 행사, 이는 매년 1월 1일 구즉동 보덕봉 해맞이 광장에서 개최한다는데 이렇게 단합이 잘되는 동네가 또 있을까 싶었다. 얼마 전 현 정부에서 차관 급으로 구즉 동네 사람이 발탁이 되었나 보다. 구즉 초 몇 회 아무개라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잔치가 벌어졌었다. 삶이 꼭 먹고 산다는 경제로서만이 말할 것이 아니라는 게 이런 의미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 뿌리, 어울림은 못남도 치유하고 행복과 안녕을 꾸리는 또 하나의 삶의 원천임에 틀림이 없을 테다. 촌스런 족발이 여전히 맛을 간직한 구즉동네는 그래서 좀처럼 외부세계에 흔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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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구나무 6-4-6
○지정날짜 : 1982. 10
○수령(나무나이) : 약 320년
○수고(나무높이) : 약 13m
○흉고직경(가슴둘레) : 7m 20cm
○뿌리부분 직경(둘레) : 9m 20cm
○수관 폭(가지 벌림 정도) : 22m
위치 : 유성구 봉산동 구즉농협 앞에 위치
봉산동 앞바구니마을에서는 매년 음력으로 정월 열 나흗날에 목신제를 지낸다. 바구니마을에서는 이 느티나무를 신목(神木)이라 부른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받드는 나무로 마을이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느티나무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고 있으므로 마을사람들은 정성을 바쳐 목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목신제를 지내는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풍물패가 농악을 울리며 아침노을을 적시며 마을 여러 곳을 돌고는 느티나무 아래로 모인다. 이는 마을의 오방신(五方神)을 모시는 행사로서 느티나무 아래로 모시는 순서이다. 이때쯤 되면 앞바구니, 뒷바구니 사람들이 느티나무 아래로 모여들어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내는 순서는 다른 지역의 목신제와 비슷하다. 제사가 끝나면 이어 놀이가 시작되는데 이 놀이를 바구니홰싸움놀이라 부른다. 느티나무에서 돋아나는 잎을 보고 잎이 동시에 피면 풍년, 여러 차례 나누어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봉산동 느티나무는 도로 옆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지만, 휀스로 경계시설이 되어 보호받고 있다. 휀스에는 주민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게 여닫이문이 설치되어 있다. 가지 벌림이 커서 나무받침대가 네 개 있으며, 나무에는 금줄이 걸려져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줄기부분에는 외과수술흔적이 크게 나있는데, 나무 안이 비어있는 것을 보수한 것 같다. 보호수 표지판에는 수령이 약 2000여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관계기관의 자료에는 약 320년으로 되어 있고 마을 주민들에 따라 말하는 수령이 달라 수령을 추정하기가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