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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泉선생書
소재지=흥해사방공원정상
원문출처=東文選卷之七 / 七言古詩
興海松羅途中觀海濤
석재(石齋)박효수(朴孝修)
颶風歘起飜滄溟。天水相兼晦且冥。
銀山萬朶低復屹。百千雷鼓同一聲。
扶桑將漂地軸動。龍王坐愁宮殿傾。
波臣搖蕩水族亂。誰之所爲鯤與鯨。
安得杖我倚天劒。一揮鱗甲雪碎輕。
直敎東海淨如練。復瞻白日涵淸明。
蛟螭蝦蠏樂得所。游泳聖澤之泠泠。
흥해ㆍ송라 길에 바다의 파도를 보며
[興海松羅途中觀海圖]
박효수(朴孝修)
세찬 바람 갑자기 일어 바다를 뒤집으니 / 颶風欻起飜滄溟
하늘과 물이 서로 붙어 캄캄해지다 / 天水相兼晦且冥
만 송이 은산은 낮아졌다 다시 일어서고 / 銀山萬朶低復屹
백 가지 천 가지 우레 북은 한 소리로 어울린다 / 百千雷鼓同一聲
부상 떠나갈 듯 지축이 흔들려 / 扶桑將漂地軸動
용왕은 궁전이 무너질까 걱정이리 / 龍王坐愁宮殿傾
파신이 흩어지고 수족이 어지러워지니 / 波臣搖蕩水族亂
이는 누구의 소위냐 곤어와 고래일테다 / 誰之所爲鯤與鯨
어떻게 해서 나의 의천검 뽑아 / 安得杖我倚天劍
한 번 휘둘러 그 비늘을 눈처럼 찍으랴 / 一揮鱗甲雪碎輕
동해 바다 바로 비단결 같이 고와져 / 直敎東海淨如練
다시 태양을 받아 청명해지며 / 復瞻白日涵淸明
이무기ㆍ용ㆍ새우ㆍ게 그 생리를 즐기노라 / 蛟螭蝦蠏樂得所
임의 성스러운 덕택 속에 놀아 헤엄치게 할꼬 / 游泳聖澤之泠泠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興海松羅途中觀海濤
석재(石齋)박효수(朴孝修)
颶風欻起飜滄溟
天水相兼晦且冥
銀山萬朶低復屹
百千雷鼓同一聲
扶桑將漂地軸動
龍王坐愁宮殿傾
波臣搖蕩水族亂
誰之所爲鯤與鯨
安得杖我倚天劍
一揮鱗甲雪碎輕
直敎東海淨如練
復瞻白日涵淸明
蛟螭蝦蠏樂得所
游泳聖澤之泠泠
흥해ㆍ송라 길에 바다를 보며
석재(石齋)박효수(朴孝修)
興海, 松羅途中觀海濤
(興海에서 松羅 가는길에 바다의 波濤를 보며)
颶風欻起飜滄溟
~ 세찬 바람 갑자기 일어 바다를 뒤집으니
天水相兼晦且冥
~ 하늘과 물이 서로 붙어 캄캄해진다.
銀山萬朶低復屹
~ 萬 송이 銀山은 낮아졌다 다시 일어서고
百千雷鼓同一聲
~ 百 가지 千 가지 우레 북은 한 소리로 어울린다.
扶桑將漂地軸動
~ 해뜨는 東海 바다는 떠나갈 듯 地軸이 흔들리니
龍王坐愁宮殿傾
~ 龍王은 宮殿이 무너질까 걱정하리라.
波臣搖蕩水族亂
~ 波臣이 흩어지고 水族이 어지러워지니
誰之所爲鯤與鯨
~ 이는 누구의 所爲냐 鯤魚와 고래일테다.
安得杖我倚天劍
~ 어떻게 해서 나의 倚天劍 뽑아
一揮鱗甲雪碎輕
~ 한 番 휘둘러 그 흰 비늘을 가벼이 부순다면
直敎東海淨如練
~ 東海 바다는 바로 緋緞결 같이 맑아지고
復瞻白日涵淸明
~ 다시 太陽을 받아 淸明해지려니.
蛟螭蝦蠏樂得所
~ 이무기ㆍ龍ㆍ새우ㆍ게 그 生理를 즐기며
游泳聖澤之泠泠
~ 聖스러운 恩澤 속에 놀아 헤엄치게 할꺼나.
박효수(朴孝修, ?~1337,충숙왕 복위6)
는 고려후기의 문신이다. 호는 석재(石齋)이고 본관은 죽산이다.
1317년(충숙왕4)부터 고시관(考試官)을 지냈고,
1320년에 대언으로 시관을 겸했으며, 다음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원나라에 글을 올려 상왕(충선왕)을 환국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지조가 있고 청렴하였다.
왕이 그의 청렴결백을 칭찬하고 학사연(學士宴)을 베풀었으며
연창군(延昌君)에 봉하였다.
포항시는 22일 흥해와 송라를 최초로 표현한 작품으로
영일만의 풍광을 노래한 한시
흥해송라도중관해도(興海松蘿途中觀海濤) 시비를
흥해읍 오도리 사방기념공원 관해루 옆에 건립해
지역의 해안 풍경을 알리는 중요한 관광자원화 하기로 했다.
석재 박효수(石齋 朴孝修)는 약 칠백여 년 전 고려 말의 문신이며 시인으로,
흥해송라도중관해도(興海松蘿途中觀海濤)는 박효수공이
직접 이곳을 지나다가 영일만의 풍광에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읊은 한시이다.
동문선 제7집에 수록된 이번 한시에는 영일만을 물이 맑고
깨끗해 아침 해가 떠오르면 바다와 하늘 구름과 파도가 함께
어우러져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무아지경에 이르며
울창한 송림과 반짝이는 백사장, 은빛 파도,
떼 지어 나르는 갈매기와 바다 속을 노니는
고기떼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고 묘사했다.
사방공원 산 정상의 관해루
♣ 백률사 서루에 대한 정경도 있다- 몽고란으로 불탄 뒤의 형편을 읊은 것.
내 걸음이 좋은 때를 만나서
봄 산에 들리는 것 두견새 소리.
푸른 솔 그늘에서 길 비켜라 외치고
종을 쳐서 구름 절 문 열었네.
보타락가산(관음보살이 거처한다는 산) 올랐는 듯, 보배 구슬이 은하수에 솟은 듯,
갖가지 꽃 철마다 피어 향기롭기 언제나 화창한 봄,
있는 스님 오직 둘 셋, 누구가 향화의 주인인고.
서루에 올라 바라보니, 처마와 도리 날고 춤추는 듯,
남으로 탁 트여 반듯한 거리마다 집들이 늘어섰네.
문물이 옛 신라 땅이라 황금 절집이 사람 집과 섞여, 세는 중 열에 아홉이네.
성스러운 자취 범상한 발자취와 섞여, 길손이 다투어 구경하네.
제일가는 저택, 구슬로 된 궁궐들, 난리(몽고병란) 뒤에 돌밭으로 되었네.
마루에 백의관음 있어 신묘한 조화 둘도 짝이 없어
거문고와 만파식적 구름에 떠온 지난 일이 벽 뒤에 벌렸도다.
병란을 겁내어 예 와서 빌자 전쟁이 곧 감추어져
예 와서 빌자 어리석고 노둔한 데 총명을 주어 마음의 소원대로 응해.
넓은 문 막히지 않아 시원시원한 단 이슬 많아
뿌려진 다음 번열의 고뇌 가시어.
내 피로서 기름지어 이 몸으로 믿음의 향불 되어
다만 원하옵기 우리 임금 만복을 누리시어 삼한이 태평으로 향해
행운을 타고 비운은 털어,
만방에서 어린애처럼 연모하여 와 우러러 젖 빨듯이
억세나 약하나 먹히고 뱉아짐이 없이 자연스레 좋은 시대 열려
세상이 복희씨 옛날로 돌아가도록 하소서….
이를 생각하며 밤 깊이 앉았으니 달이 마루 한가운데 오르도다.
속리산에 관한 시조
높다란 사면 푸른 연꽃일세
긴 사허리 신령스런 구름 몇 겹인가
문장대는 천고의 이끼로 봉하고
만구루 소나무 그늘에 우타굴 있으며
용이 탑 속으로 돌아가니 진골이 남았네
나귀가 바위 악에 누웠으니 성스러운 자취를 묻도다
삼한을 길이 복되게 할 주인 그 누구인가
산호전 위의 부처님일세
박효수(朴孝修) 미상∼1377년(충숙왕 복위 6).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석재(石齋).
1317년(충숙왕 4)부터 고시관(考試官)을 지냈으며
1321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원나라에 상서(上書)하여 상왕(上王: 충선왕)을 환국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평소에 지조가 있고 청렴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관직이 대언에 이르렀고, 충선왕과 친교가 있다 하여
시관으로서 선비를 뽑아 학사연(學士宴)을 베푸니,
왕은 그 비용으로 은병(銀甁) 50개와 쌀 100석을 사(賜)하고
그를 연창군(延昌君)으로 봉하였다.(시험관-익제와 동 지공거)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경상도 慶尙道 [3] >동래현 東萊縣
○ 동래 온천을 노래한 박효수(朴孝修)의 시
골짜기 깊숙한 곳 돌못[石塘]이 펼쳐 있어,
맑게 흔들리는 물 가득히 괴어 있네.
허리에 닿을 정도 겨우 2자 깊이지만,
따스한 연기 같고 안개 같은 것 그 주위에 김 오른다.
아름다운 촛불이며 분홍빛 등불이 물 밑을 비추고 있을 때,
향내 어린 소매 걷고 부축해 욕탕에 들어갔다.
고운 손 자주 놀려 늙은이 등을 닦아 줌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때 낀 살갗이 상설(霜雪)같이 녹아내린다.
마고(麻姑)가 가려운 데 긁어 주듯 상쾌하고,
더운 땀 얼굴에 나서 맑은 물 흘러내린다.
목욕을 마치고는 서서히 흰 모시로 닦고,
머리를 말린 다음 침상에 쓸어지 듯 누웠다.
몸은 가볍고 뼛속까지 시원하여 골수를 바꾼 듯하니,
표표(飄飄)히 나는 학(鶴)의 비상(飛翔) 무엇이 부러울까.
이 몸과 이 세상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달게 한잠 자니,
황홀하게 꿈속에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에 노는 듯하구나.
깬 뒤에는 다시 나그네의 몸으로 되돌아가,
역마의 먼지가 옷을 더럽힐 것이라네.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제21권 > 慶尙道 [1] >경주부 慶州府
백률사(柏栗寺) : 금강산(金剛山)에 있다. 전단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있다.
용암사지: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219번지
이반성면 우체국에서 용암리로 들어서다 제실 앞쪽에 형성된 곡부를 따라 오르면 보인다. 용암사지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폐허지 위에 흩어져 있던 부조 및 석불좌상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옛 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말 연기(烟起) 도선(道詵, 827~898)이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부터 비밀리에 부촉을 받고 선암(仙巖), 운암(雲巖), 용암(龍巖)의 세 사찰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용암사는 이 사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용암사지는 용암사가 있었던 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암사는 고려시대 1314년(충숙왕 1) 무외(無畏) 국통 정오(丁午)가 온 이후로 크게 중창되기 시작했다. 1315년 충숙왕은 제찰사 한중희 등에게 전지를 내려 사찰을 경영하게 하였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에게 사찰을 중창하게 함에 따라 1318년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했다. 당시 전당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정오가 저축한 돈과 모금한 것으로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상을 도금했으며, 대장경도 봉안했다. 당시 염장별감 이백겸과 방우정은 왕명에 따라 설전지 3만여 장과 옻칠한 함상자 140여 개를 만들었으며, 정오의 제자 승숙, 일생 등은 강화도 판당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와 신본과 구본을 합해 모두 600여 함을 만들어 비단으로 치장한 뒤 새 전당에 봉안했다. 이 해 11월 18일 방우정이 다시 왕명을 받아 7일 동안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다. 용암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용암사지에는 해주 정씨들이 세운 화덕재가 있으며, 건물 뒤편으로 용암사지 부도(보물 제372호)를 비롯하여 용암사지 석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석등, 석비 등이 산재해 있다. 이들 석조물 주변으로 와편과 자기편이 지표에서 확인되었다. 용암사지 내에는 건물의 부재로 추정되는 치석된 석재들이 기단, 담장 등에 사용되고 있다.
용암사지에는 고려시대 부도를 비롯하여 석불, 석등, 석비 등이 산재해 있어 불교미술사적으로 진주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天水相兼晦且冥。朴孝修詩:
“颶風欻起翻滄溟,云云。
銀山萬朶低復屹,百千雷鼓同一聲。
扶桑將漂地軸動,誰之所爲鯢與鯨。”
颶=구풍 구
천수상겸회차명(天水相兼晦且溟)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회호리 바람 문득 일어 바다를 뒤엎으니,
하늘과 물이 서로 어울려 어둡고도 침침하다.
은산(銀山)의 일만 봉우리 낮았다 다시 솟고,
백 천의 천둥 소리와 북 소리 일시에 일어나네.
부상(扶桑)이 떠나갈 듯 지축이 흔들리니,
누구의 장난인가 경(鯨 숫고래)ㆍ예(鯢 암고래)의 짓일세.”
하였다.
청하현(淸河縣)
동쪽으로 해안까지 7리이고, 남쪽으로 흥해군(興海郡) 경계까지 11리이며,
서쪽으로 경주(慶州) 신광현(神光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진 19리이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아혜현(阿兮縣)으로,
신라 때 해아현(海阿縣)으로 개칭하여 유린군(有隣郡)의 영현(領縣)으로 두었는데,
고려조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경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 들어와서 태조(太祖) 때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아혜(阿兮)ㆍ해아(海阿)ㆍ덕성(德城).
【성씨】 본현 이(李)ㆍ김(金)ㆍ명(明), 주(朱) 웅신(熊神). 정(鄭) 속성(續姓)이다.남계 길(吉).
【형승】 동쪽으론 푸른 바다를 누르고, 서쪽으로는 중첩된 봉우리가 나란히 섰다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에, “동쪽으론 넓은 바다를 눌러 파도가 만경이요,
서쪽으론 중첩된 봉우리와 나란히 서 있어 운하가 천태로다.” 하였다.
돌성[石堡]은 큰 강을 베개 삼고 조서강(趙瑞康)의 시에 있다.
【산천】 호학산(呼鶴山) 현의 서쪽 9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내영산(內迎山) 현의 북쪽 11리에 있다. 산에는 대(大)ㆍ중(中)ㆍ소(小)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3동석(動石)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견훤(甄萱)의 난을 이 산에서 피했다.
도리산(桃李山) 현의 북쪽 11리에 있다. 신귀산(神龜山) 현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세 용(龍)이 웅덩이에 있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응한다 한다.
별내현(別乃峴) 현의 남쪽 15리에 있으며 흥해군(興海郡)과의 경계에 있다.
용산(龍山)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개포(介浦) 현의 동쪽 6리에 있는데, 일찍이 병선(兵船)을 배치했었으나,
해문(海門)이 광활하기 때문에 항상 풍랑의 근심이 있어서,
일현(迎日縣) 경계인 통양포(通洋浦)로 옮겨 배치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해안 개포 세 곳에 해자(海子)를 파서 왜구를 막았다.”
하였는데, 그 길이는 각각 2리이고, 깊이는 두어 길이 되었으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기로포(二岐路浦)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허혈포(虛穴浦) 현의 동쪽 7리에 있으며, 돌에 빈 구멍이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고송라포(古松羅浦) 현의 북쪽 13리에 있다. 도리포(桃李浦) 현 북쪽 11리에 있다.
벌지(伐池) 현의 서쪽 7리에 있으며 둘레가 1만 3백 척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토산】 방어(魴魚)ㆍ전복[鰒]ㆍ대구(大口)ㆍ청어(靑魚)ㆍ홍합(紅蛤)ㆍ
백조어(白條魚)ㆍ김[海衣]ㆍ미역[藿]ㆍ넙치[廣魚]ㆍ꿀[蜂蜜]ㆍ석이[石蕈].
【성곽】 읍성 돌로 쌓았다. 둘레는 1천 3백 53척이며, 높이는 9자이고, 안에 2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도리산(桃李山) 봉수 남쪽으로 흥해군(興海郡) 오산(烏山)에 응하고,
북쪽으론 영덕현(盈德縣) 황석산(黃石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서청관(西淸館) 객관의 서쪽에 있다.
【누정】 부옹루(孚顒樓) 곧 성(城)의 동문루(東門樓)를 말한다.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이 있다.『신증』 매죽루(梅竹樓) 동헌의 곁에 있다.
봉송정(鳳松亭)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큰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해문(海門)을 가린다.
【학교】 향교(鄕校)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송라역(松羅驛)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 본도에 딸린 역이 일곱이니,
즉 병곡(柄谷)ㆍ대송(大松)ㆍ망창(望昌)ㆍ주등(酒登)ㆍ봉산(峯山)ㆍ육역(陸驛)ㆍ남역(南驛)이다.
○ 승 1인. 고현리원(古縣里院) 옛 청하현(淸河縣)에 있다.
금정원(金井院)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고송라원(古松羅院) 현의 북쪽 13리에 있다.
【불우】 보경사(寶鏡寺) 내영산(內迎山)에 있으며, 고려 때 이송로(李松老)가 지은
원진국사(圓眞國師)의 비가 있다. 상태사(常泰寺) 호학산(呼鶴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용산(龍山)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청하(古淸河) 지금의 현청 소재지 남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북아부곡(北阿部曲) 현의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등정부곡(等汀部曲)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김해부곡(金海部曲) 현에서 서쪽으로 7리에 있다. 모등곡부곡(毛等谷部曲)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신지부곡(新池部曲)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우천부곡(于川部曲)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남계부곡(南界部曲)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명환】 본조 민인(閔寅) 읍성을 쌓았고 또한 의창(義倉)을 설치했다.
○ 이행(李行)의 시에, “청하(淸河) 고을 생김은, 궁벽하게 넓은 바닷가에 있다네.
밭도 좋고 호구도 많아서, 부창(富昌) 보다 못지 않았건만, 한번 왜적 일어나면서부터,
쇠하고 죽는 것 날로 심하였네. 동네와 마을이 언덕이 되고 풀밭 되어,
오랫동안 노루와 사슴 노는 고장 되었었네. 현관(縣官)이 성을 쌓고,
만호(萬戶)에 신부(信符)를 두고, 배를 만들어 개포(介浦)에 대니, 수륙의 군사 위력이 생겼네
.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밭갈고 집 지어서 제자리로 돌아갔네.
민후(閔侯)는 나의 친구, 일을 맡은 지가 두 해 남짓. 애써서 백성 진휼하고,
개연(慨然)히 의창(義倉)도 회복했네. 또 따라서 관사도 지었으니,
점차로 청당(廳堂)이 마련되었도다. 손님과 나그네 잠자리 편하고,
관리들도 주림을 면하였네. 예전부터 수령의 직분은,
이 밖에 다른 것은 없는 것일세.” 하였다.『신증』 조동호(趙銅虎).
【제영】 천수상겸회차명(天水相兼晦且溟)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회호리 바람 문득 일어 바다를 뒤엎으니, 하늘과 물이 서로 어울려 어둡고도 침침하다.
은산(銀山)의 일만 봉우리 낮았다 다시 솟고, 백 천의 천둥 소리와 북 소리 일시에 일어나네.
부상(扶桑)이 떠나갈 듯 지축이 흔들리니, 누구의 장난인가 경(鯨 숫고래)ㆍ예(鯢 암고래)의 짓일세.”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은 7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서면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북면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역면(驛面) 북쪽으로 끝이 5리.
○ 북아(北阿) 부곡은 북쪽으로 10리, 모등곡(毛等谷) 부곡은 서쪽으로 5리,
신지(新池) 부곡은 서쪽으로 4리, 우천(于川) 부곡은 서쪽으로 10리,
남계(南界) 부곡은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성지】 덕성(德城) 남쪽으로 10리에 터가 남아 있다.
【토산】 대나무[竹].
【누정】 해월루(海月樓) 읍내에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최완식 (역) | 1970
淸河縣
東至海岸七里,南至興海郡界十一里,西至慶州神光縣界十三里,
北至盈德縣界十九里。距京都八百四十一里。
建置沿革
本高句麗阿兮縣。新羅改海阿,爲有隣郡領縣。高麗改今名,顯宗屬慶州。本朝
太祖時始置監務,後改縣監。
官員 縣監,訓導。各一人。
郡名
阿兮,海阿,德城。
姓氏
本縣 李,金,明。朱。熊神。鄭。續。
南界 吉。
形勝
東壓滄溟,西竝疊巘。洪汝方記:“東壓滄溟,波濤萬頃;西竝疊巘,雲霞千態。”
石堡枕大河。趙瑞康詩。
山川
呼鶴山。在縣西九里。鎭山。
內迎山。在縣北十一里。山有大中小三石鼎列於巖上,人稱三動石。
以手指觸之則微動,兩手據撼則不動。新羅眞平王避甄萱亂于此山。
桃李山。在縣北十一里。
神龜山。在縣北十里。有三龍湫,旱禱有應。
別乃峴。在縣南十五里。興海郡界。
龍山。在縣南六里。
海。在縣東六里。
介浦。在縣東六里。嘗置兵船,以其海門廣闊,常有風患,移置於迎日縣界通洋浦。
世傳新羅時置軍營,鑿三海子於浦上以防倭。各長二里,深數仞,遺址尙在。
二岐路浦。在縣東十里。
虛穴浦。在縣東七里。石有虛穴,故名。
古松羅浦。在縣北十三里。
桃李浦。在縣北十一里。
伐池。在縣西七里。周一萬三百尺。今廢。
土産
魴魚,鰒,大口魚,靑魚,紅蛤,白條魚,海衣,藿,廣魚,蜂蜜,
石蕈。
城郭
邑城。石築。周一千三百五十三尺,高九尺。內有二井。
烽燧
桃李山烽燧。南應興海郡烏山,北應盈德縣黃石山。
〔新增〕 宮室
西淸館。在客館西。
樓亭
孚顒樓。卽城東門樓。有洪汝方記。
〔新增〕 梅竹樓。在東軒傍。
鳳松亭。在縣東二里。有長松數百株掩翳海門。
學校
鄕校。在縣北一里。
驛院
松羅驛。在縣北一里。○丞。
本道屬驛七:柄谷,大松,望昌,酒登,峯山,陸驛,南驛。
○丞一人。
古縣里院。在古淸河。
金井院。在縣西七里。
古松羅院。在縣北十三里。
佛宇
寶鏡寺。在內迎山。有高麗李松老所撰《圓眞國師碑》。
常泰寺。在呼鶴山。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龍山。
厲壇。在縣北。
古跡
古淸河。在今治南十里。
北阿部曲。在縣北十里。
等汀部曲。在縣東七里。
金海部曲。在縣西七里。
毛等谷部曲。
在縣西五里。
新池部曲。在縣西四里。
于川部曲。在縣西十里。
南界部曲。在縣南十里。
名宦
本朝 閔寅。築邑城,且設義倉。○李行詩:“淸河之爲縣,僻在滄海傍。
田疇與戶口,蓋不下富昌。一自倭竊發,喪耗日相將。閭井與丘壟,久爲麋鹿鄕。
縣官築城郭,萬戶置符章。製船泊介浦,水陸軍威張。流亡四鳩集,耕鑿安其常。
閔侯吾故人,視事年二强。服膺恤民隱,慨然復義倉。又從立廨宇,稍稍備廳堂
。賓客安寢息,吏俗免飢荒。由來守令職,只此無他方。”
〔新增〕 趙銅虎。
題詠
天水相兼晦且冥。朴孝修詩:“颶風欻起翻滄溟,云云。銀山萬朶低復屹,百千雷鼓同一聲。
扶桑將漂地軸動,誰之所爲鯢與鯨。” 颶=구풍 구
[주-D001] 有 : 底本에는 “在”로 되어 있다. 《東國輿地勝覽》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2] 郭 : 《騎牛集ㆍ淸河縣》에는 “市”로 되어 있다.
[주-D003] 俗 : 《騎牛集ㆍ淸河縣》에는 “民”으로 되어 있다
.[주-D004] 動 : 《東文選ㆍ興海松羅途中觀海濤》에는 뒤에 “龍王坐愁宮殿傾。波臣搖蕩水族亂”이 더 있다.
[주-D005] 鯢 : 《東文選ㆍ興海松羅途中觀海濤》에는 “鯤”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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