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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묵상글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 주님께서 칼을 주신 뜻.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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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께서 칼을 주신 뜻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주님께서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때의 칼은 어떤 칼일까요?
찌르라는 칼일까요? 자르라는 칼일까요?
죽이라는 칼일까요? 끊으라는 칼일까요?
말씀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그것은 명백합니다.
관계를 끊는 칼입니다.
지인과의 관계가 불의한 관계일 때
그때 그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며 뇌물을 받으라는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불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지나친 애착 관계일 때
그때 그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며칠 전 저의 어머니 11주기 미사를 형제들과 같이 봉헌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내용의 강론을 저의 형제들에게 했습니다.
자식들이 더 살아주길 바랄 때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시라!
이젠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하기 전에 돌아가시라!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했느냐 하면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돌아들 가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제가 생각할 때 저의 어머니는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고,
여러 가지로 저희의 모범이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2년 전부터 저희 어머니가 이상해지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집착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수도원 들어갈 때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으셨고,
수도원 들어가고 난 뒤에는 전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제가 집 걱정할까 봐 집 얘기도 하지 않으셨고,
당신 걱정할까 봐 당신 아프신 얘기도 일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년 전 많이 편찮아지신 뒤부터
저에게 전화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안부 전화였고 안 와도 된다고 하셨지만
실은 보고 싶으시다는 전화였지요.
그래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자식들에게 집착하지 마시고,
이제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시라고,
이제는 저희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딸이 되시라고
저는 어머니께 간곡하고도 긴 편지를 드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괴롭고 불효막심한 내용이었지만
이것이 어머니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정을 떼는 저의 단호한 권고를 들으시고 처음에는 무척 괴로워하셨지만
그때부터 어머니께서도 정을 끊는 영적 싸움을 아주 심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악령과도 싸우셨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이 보인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께서 제게만 유언하신 적이 있는데,
당신이 13살 때 보신 그 환시와 같은 거였습니다.
열세 살 때의 이 환시 때문에 아무리 어려워도 그 어려움들을 이겨내며 사셨는데
돌아가시기 2년 전에는 하늘 보기를 그치시고 자식들에게 집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아가시기 직전 곡기를 끊으시면서 다시 그 환시를 보셨던 것인데
제게는 곡기도 끊으시고 자식들에 대한 애착도 끊으시고,
비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실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칼을 주신 뜻도 이런 것이라고 다시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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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작년 휴가 때, 어떤 자연 휴양림에서 겪었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휴양림 안에 아주 근사한 식당이 있다고 해서 예약해서 시간 맞춰 입장했습니다. 그 식당의 자리는 산 중턱에 있었고 경치가 한 마디로 “끝내준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식당 주인이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렇게 여유롭게 혼자 여행도 다니고 좋겠어요.”
솔직히 저는 이 식당을 보고는 이곳의 주인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이렇게 좋은 경관 안에서 여유를 느끼면서 책도 읽고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제가 바라는 것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주인이 얼마나 좋아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이 식당 주인이 저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평화스러운 곳에 살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음이 진정으로 평화로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분의 마음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이분께서도 저를 바라보면서 평화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혼자 여행하면서 평화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 식당 주인을 부러워하면서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평화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함을 아쉬워합니다. 그 아쉬움 속에서 평화는 깨지고 맙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남이 가지고 있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고 만족하는 삶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니 평화롭지 못해서 계속 두리번거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지요. 그만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평화를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세상이 가리키는 평화와 달랐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화를 칼로 잘라버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를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함이 진정한 부러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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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먼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기꺼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라. 다음으로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라(H. L. 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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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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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의 칼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 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 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지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간, 부부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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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사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임마누엘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중에 성당이 폭격을 당했고, 성당 앞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도 폭격으로 손이 부서졌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다. 네가 나의 팔이 되어다오.” 성당을 복구하면서 예수님의 동상은 팔이 없는 그대로 보존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임마누엘’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의 지나온 날을 영상처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옆에는 발자국이 같이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제 옆에 저 발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에 늘 함께 있었단다. 젊은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째서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제 곁에 없었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란다. 그때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임마누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통 받는 이들에게 ‘임마누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순간에도, 영광의 순간에도, 절망의 순간에도, 기쁨의 순간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2번이나 차와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인도를 걸어가는데 후진하던 차와 부딪혔습니다.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횡단보도의 파란불에 걷고 있는데 좌회전 하는 차와 부딪혔습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 와서 신부님들과 함께 샌안토니오의 미션엘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서행하던 우리 차를 뒤에 오던 차가 받았습니다. 차 트렁크의 유리가 깨지고, 파손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에는 인색했습니다.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려 했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찾습니까? 그분은 예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래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가난한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갔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도, 시련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 가득한 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소유와 욕심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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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조금 무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이지 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칼을 비교적 잘 다룹니다. 그렇다고 해서 해로운 곳에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쓰는 칼의 용도는 이렇습니다.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다듬거나, 다질 때 주로 사용합니다. 이런 행위는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는 행위입니다. 특히 가정에서 이렇게 요리가 완성되면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요리를 나누며 행복을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쓰는 칼의 용도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데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칼은 다른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다치게 하는 용도로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칼’은 위의 두 가지의 칼 중 어떤 칼을 의미할까요? 저는 첫 번째 ‘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늘 두 가지 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 사이에서 늘 선택해야 합니다. 둘 다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한길만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칼입니다.
우리 선택이 늘 주님 쪽이기를, 늘 하늘나라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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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이라는 이름의 의상
나라마다 전통의상이 있습니다.
가까운 나라들의 대표 전통의상을 예로 들어보면, 중국의 의상은 치파오라 하고 베트남의 전통의상을 아오자이라고 합니다. 이 두 나라의 의상은 몸매가 드러나게 입는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이들의 의상에 ‘진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의상은 ‘한복’입니다. 한복은 위의 두 나라의 의상과 다릅니다. 우리 한복은 몸매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몸의 크기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한복은 드러나지 않게 몸을 감싸는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우리 한복에 ‘포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어쩌면 포용은 우리 민족의 정신일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나 감싸 안는 모습 말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감싸주는 모습은 참으로 멋진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포용’, 이 두 글자가 우리 삶 깊이 들어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의 치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안아 주고 감싸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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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다운 삶
“날마다 내적으로 성숙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삶”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화답송 후렴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참으로 어른스럽게,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방법을 배웁니다.
“어른스러움이란 세월에 따라 잡히지도, 세월을 거스르려 하지도 않고, 기꺼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다.”<다산>
“나이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말을 듣는 법을 터득했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논어>
나이 일흔에는 매사 하는 일이 자유로우면서도 죄를 짓는 일이 없었다 하니 그대로 하늘의 뜻과 일치된 공자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과연 나이와 더불어 내적으로 성숙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도 시공을 초월하여 강렬한 호소력을 지닙니다. 주님의 제자다운 삶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 하시며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의 생각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요 우리 예수님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예언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의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정의와 공정, 선행의 삶이 없는 전례의 헛됨을 지적한 말입니다.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전례를 가득 채우는 참 좋은 정의로운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삶이 빠진 전례는 공허하고 헛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회정의의 실천이 얼마나 엄중하고 절박한 하느님의 요구인지 오늘의 부정의한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까이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할 정의와 공정, 선행, 약자를 보살피는 자비행의 삶과 함께 가는 전례일 때 하느님도 기꺼이 받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명이 너무나 단호하여 충격적입니다. 그대로 예언자의 계보를 잇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표현이 거칩니다만 예수님 자체가 칼입니다. 빛의 칼, 지혜의 칼, 진리의 칼, 정의의 칼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와 더불어 빛과 어둠, 지혜와 무지,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로 갈리니 저절로 분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가짜 평화, 거짓 평화입니다.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성규4,25)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여기서의 분열은 잠정적인, 참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과정적 분열일 뿐입니다. 새삼 값싼 평화는 없음을, 참평화와 일치에 이르는 지극한 인내와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역시 값싼 은총도 값싼 평화도 없듯이 값싼 제자직도 없음을 다음 예수님 말씀이 웅변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참으로 사는 길은, 참으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길은, 주님 때문에 죽어서 사는 길은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죽을 때까지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제자직의 삶은 없습니다. 제자다운 삶임은 물론 참사람의 길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제자들에게 강조하는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는 것입니다.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이어지는 환대의 사랑, 환대의 신비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여기서 너희는 우리 제자들을 물론 더 넓게 보면 인류가족에게 해당된다 생각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배경에 두고 있는 제자들이자 형제들이요 이들을 환대함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주님을 배경한 참 고귀한 품위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환대할 때 보상이 따를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자녀답게 스스로 이웃을 환대하며 품위있게, 어른스럽게 살아감이 얼마나 주님의 제자다운 삶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이고 오늘 기념하는 성 보나벤투라입니다. 13세기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뤘던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경건과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 박사(The Seraphic Doctor)”라 불렸고,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깁니다. 보나벤투라 이름에 담긴 사연을 들으면 성 프란치스코와의 섭리적 인연임을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보자 “잘 왔노라(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란 전설도 있고, 그가 병이 나았다는 전언을 듣고 “좋은 소식이로다(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성인은 파리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오래 재직할 수 없었음은 그가 40대 초반 프란치스코회 제7대 총장으로 뽑혔기 때문입니다. 위기상황에서 총장직에 오른 그는 엄청난 책임감과 그에 따른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쉼없이 활동합니다. 그는 36개의 분파로 나뉠 정도로 심각했던 프라치스코회의 내적갈등의 완화라는 결실을 이룸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설자로 일컬어 집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의 지혜와 성덕을 흠모하여 1273년 3월23일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임명장을 들고 왔던 교황 사자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던 성인을 만납니다. 추기경이 된 성인은 리용 공의회 참석중 교황과 동서교회의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병환으로 선종하니 진인사대천명후의 거룩한 죽음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53세로 선종하기 까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와 수도회에 충성을 다했던 성 보나벤투라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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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닮은 나>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
보내시는 당신
계시어
보내지는 나
있으니
보내지는 나
받아들임이
보내시는 당신
받아들임이도록
보내시는 당신
닮은
보내지는 나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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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 집에 들어갈 때마다 빌어 주라고 하신 평화는 어떤 평화입니까? 천사들이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루카 2,14 참조) 하고 노래한 평화는 어떤 종류의 평화입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면, 왜 모든 예언자가 평화를 기쁜 소식으로 선포한 것입니까? 무엇보다, 질병이 없어졌을 때가 바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암이 제거되었을 때가 바로 평화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수술로만 하늘과 땅이 결합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이런 방법으로만 신채의 건강한 조직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부분은 잘라 내야 합니다. 군대 지휘관은 오직 이런 방식, 곧 반란자들을 제거함으로써만 평화를 유지합니다. 바벨탑에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평화가 그들의 선한 불화로 끝났습니다. 그리하여 평화가 섰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하느님은 자신의 본질, 곧 사랑을 위해 우리를 의지한다. 액카르트는 이 주제를 다른 자리에서도 전개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내 사랑하는 이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느님의 생명과 하느님의 존재는 나의 영혼을 의지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은 나를 몹시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기분이 좋으시든 그렇지 않으시든 간에 나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이 사랑을 없애 버리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신성을 없애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신 것만큼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203)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갈라 1,11-24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경위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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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10,34)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갈망에서 그리스도를 추종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추종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것과의 절단이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7.38)라고 말씀하신 그 근저에는 ‘무엇이 더 중요하며, 어떤 일이 먼저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생명을 얻고 더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그에 필요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평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묻는다면 그 응답은 참으로 여러 가지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세상적인 평화, 곧 기복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2,14)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며, 이 평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가져온 부활의 선물입니다. 부활의 선물인 평화를 충만히 누리며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오늘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연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10,3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때, 참된 평화를 얻지 못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무척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14,2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이해가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주는 평화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현세적 평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주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룬 평화이며, 우리 역시 이 평화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 동일한 여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이 평화를 저해하는 불화와 불목의 요인을 마치 칼로 절단하듯이 잘라내는 아픔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만일 그 대상이 부모나 가족, 누구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인간적으로 어렵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추종하기 위해, 복음의 가치 실현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구원, 곧 제 목숨을 얻기 위해(10,39참조) 기꺼이 그 요인을 잘라내는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평화란 불화와 불목의 요인을 제거하고 극복하고 난 뒤에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가족과의 불화와 갈등을 두려워하거나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무서워해서는 아니 되고, 그 불화와 갈등의 요인을 직시하고 직면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처럼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불화의 요인을 제거해야 하고 절단해야 합니다.
칼의 쓰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처럼, 평화를 위한 칼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위한 성령의 칼을 주십니다. 결단과 절단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칼로 단호하게 절단해야 합니다. 오늘도 끊임없이 결단과 절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칼을 잘 사용하십시오. 평화를 위해 칼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 절단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공동체 구성원을 함께 상생하고 함께 부활하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2, 14)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저는 지금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이젠 성인이 되신 성 요한 23세 교종께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한 4가지 기둥을 세우는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 사랑과 자유의 4가지 기둥을 세울 때, 평화란 지붕을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십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네 삶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넘쳐난다면 마음은 늘 꺼림칙할 것이며, 정의가 아닌 불의하고 부정한 일을 할 땐 마음은 늘 켕기고 불안할 것이고, 자유가 아닌 억압과 강요로 어쩔 수 없어서 일한다면 심기가 불편할 것이며, 사랑이 아닌 미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삶이 매일 매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진리와 자유를 실행하며 살아갈 때 참된 평화를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고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것이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할 일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위해 기꺼이 세상이 주는 평화를 포기해야 합니다. 평화는 이렇게 어려움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충만히 누리는 오늘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주님 평화를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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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 예수님의 그 쌍 칼을 들고서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099391&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40714. 17:51 ㅣNo.174202
길 가다가 네거리를 만났을 때 오른쪽 왼쪽 길을 동시에 선택할 수 없다. 넓은 시각에서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받는다. 살면서 둘 다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혹을 받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선에서 양립도 하기도. 둘 다 선택하면 목숨마저는 버리지 않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렇지만 믿음은 오직 한 길이다.
그러기에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을 해야 할 경우에는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는, 다 선택하는 타협을 할 수는 없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는 아예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이렇게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단다. 그리고 가족들이 서로 갈라서서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나. 이는 가족끼리 싸우라는 게 아닌,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면 가족이라도 과감히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당혹케 하신다.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거요 기둥인데, 그분 요구는 너무너무 단호하다.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그 무엇과도 일체 타협은 없단다. 어느 순간 어정쩡 타협하려고 하늘 나라 요구들을 애써 외면하는 그 한순간, 잠시 귀 막고는 그분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자.
그것만이 하늘 나라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사랑은 가장 위대하고 소중하지만, 때로는 그 사랑의 기준이 잘못 되었을 때 우리 삶을 흔드는 장애가 될 게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 그리고 부부 사이를 이어 주는 위대한 사랑의 끈은 우리 삶의 가치를 지켜 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잘 지키려고 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정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느님에게 다가감만이, 결국은 가족 친지와 함께 함이니까.
사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다만,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리면서까지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죽음에 빠트리는 일이니까. 이러니 가족을 진정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주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끄는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결코 없을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는다.” 이는 너무나 가혹해 보이는 것 같지만, 너무너무 명확한 우리 신앙의 지침이다. 사실 하느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와는 모든 면에서 분명 다르다. 힘으로 입을 막고 강제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거짓 평화다. 이는 평화를 가장한 불의나 다름이 없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단다.
거짓 평화는 오히려 세상을 분열시킨다. 예수님은 이를 칼로 베어 버리고 당신 평화를 주시려 오셨다. 그분 평화는 힘으로 남을 지배하는 게 아닌, 자신만을 그저 내어 주며 뜨겁게 사랑만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평화이리라. ‘자, 칼을 받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는 것일 게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참 평화를 찾을 때까지 거짓 평화와 싸워야만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칼 주신 이유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 것만 사랑하지 말고 모두를 안고는 이 세상을 두루두루 사랑해야 하리라. 쌍 칼을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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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사랑을 하여 보았나요?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족의 평화가 깨지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찾아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되는 고통이 그 사람과 함께하며 겪을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에도 당신에 대한 사랑이 있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이 담긴 믿음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기도 시간이 소중해지도록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가슴에 남아 우리를 움직이게도 합니다.
어쩌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분을 외면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후반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줍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바오로 사도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 안에 살아 계신 신비가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주 만나고 그와 자주 대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고, 그러다 사랑하게도 됩니다.
이 방법을 예수님께도 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체 앞에 머무는 신앙생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지닐 수 있도록 합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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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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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
서로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빛을 내시면서
그 빛을 세상에 전해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빛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빛을 받아
세상에 전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으로
그 역할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도
세상에 빛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 구절은
소위 말하는 산상 설교의 앞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 7장까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지침을 주십니다.
그 가르침을 보면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과
조금은 다르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저렇게 하라고 들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
즉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는 것에서 옵니다.
즉 하느님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전 방식과 다르게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하느님께서 영향을 미치시기에
우리의 행동에서도
하느님께서 드러나십니다.
우리의 행동을 사람들이 칭찬한다면
그 행동에 영향을 주시는 하느님도
찬양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선택, 우리의 행동으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앞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빛을 내기에 앞서
우리는 빛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기에 앞서
우리 각자도 빛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빛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이고
하느님 때문에 나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 머물면서
참 행복의 나날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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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든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 행하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꽤 납득하기 힘든 의아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심사숙고해서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말씀의 진의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들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극진히 섬겨야 할 세상 안의 하느님입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위치를 가장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제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입지가 참 많이도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이 하느님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에 계셔야 할 하느님께서 밀려나고 또 밀려나서 제일 구석진 곳,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 주방에서, 때로 들판에서 일하면서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으로 끌어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스프를 주걱으로 저으면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형제들의 구두를 수선하면서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큰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 성인의 길을 걸어갈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놓이는 작고 궂은 일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매일 반복되는 별 의미없어 보이는 일들, 그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 역시 성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도 라우렌시오 수사님 비슷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아이들을 위한 식단을 짜고, 시장을 봐오고,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기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더 노력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아주 훌륭한 묵상기도요 관상 기도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형과 동생, 누이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세상사는 동안 연을 맺어주신 선물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서로를 보살펴줘야 합니다. 무한한 인내로 서로를 참아내야 합니다.
서로의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최고선이신 하느님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하느님을 우리 삶의 가장 한 가운데로 끌어와 모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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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러운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러운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말씀을 통하여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0-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같은 상을 받는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 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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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삶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 이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삶의 의미가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는 죽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살아있어야 하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강동원 씨가 연기한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강동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맞아서 눈이 먼 동생과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엄마를 찾아가도 아빠에게 맞으니 그냥 고아원에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동생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자궁외임신이라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형과 도둑질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동원은 애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살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나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14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오빠는 결혼해서 잘만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딸의 탓을 합니다.
사촌 오빠가 밉고 엄마도 미워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수녀님인 이모의 소개로 사형수 강동원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이제 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 삶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신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언제부터 존재했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이유는 신의 존재와 함께합니다.
존재 이유가 없으면 존재의 의욕을 잃고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생존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를 모르고 살면 생존이고, 이유를 알고 살면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서로를 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 이유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다는 분을 만납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사랑해서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할 줄을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많게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컸는데도 부모가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살면 자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을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여기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존재이듯, 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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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34-42).”
1) 예수님은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ㄱㄴㄷ).”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이 갈라서게 되고, 안 믿는 사람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치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오신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분열과 갈등은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가족이 박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마태 10,21).
2)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가족은 사랑하지 말고 ‘나만’ 사랑하여라.”도 아니고, “나를 가족보다 더 사랑하여라.”도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세속의 물질적인 복만 찾으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외면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가정이 신앙 때문에 해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성가정’을 이루기를 바라십니다.
교회는 큰 가정이고,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모순 관계도 아니고, 대립 관계도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식구들의 종교와 신앙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고, 가족의 갈등을 극복하는 일이 힘든 고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앙인답게 살면서, 인내하고,
식구들을 감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찾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우리는 가족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심판 날에 이산가족이 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떨어져 나간 가족들 때문에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3)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는, 제자들의 신원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 활동은 곧 예수님께서 하시는 활동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5절에서부터 시작된 ‘파견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의 복음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만 전해야 합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언자가(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주는 이와 전해 받는 이가
‘같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 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제자라서’인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제자들을(신앙인들을) 맞아들여서 접대하는 것은
곧 그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을 맞아들여서 접대하는 것입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여기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이고, ‘천사’는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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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왠지 모르게 이 말씀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크게 애착하는 관계인 부모나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뜻인건 알겠는데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표현이 왠지 마음에 거슬렸던 겁니다. 그래서 그 원문의 뜻을 찾아보니 우리말 번역이 아주 ‘순한 맛'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리스어 원문은 “나에게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좀 더 센 말로 표현하면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필요없다'는 아주 차갑고 매정한 뜻이 됩니다. 주님을 적당한 선에서 대충 사랑하려는 안일한 마음을 품었던 우리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과 맺은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혈연 같은 인간적 관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 존재, 본능적으로 ‘가족'을 우선시하고 챙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맺어주실 때 사랑으로 서로에게 끌리게 만드셨으니 그렇게 서로에게 끌린 남녀가 자녀를 낳아 형성된 가족이라는 관계가 끈끈하고 단단한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 겁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가족간의 사랑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구원이 바로 하느님과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되어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에 그렇지요.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되려면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추구하는 육적인 애착관계에서 한 걸음 멀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멀어진다고 해서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 안에서 객관적으로 관계를 바라보며 서로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지요.
나의 사랑이 육적인 애착관계를 넘어 하느님과의 사랑이라는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되면 사랑을 대하는 나의 시야도 그만큼 넓어집니다. 그동안은 나만 그리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바라보느라 미처 그 존재의 중요성과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람들, 그분께서 나를 위해 특별한 소명을 맡기고 파견하신 이웃 형제 자매들과도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사랑의 수준이 그 정도에 이르면 예언자나 의인처럼 대단한 존재가 못되더라도 그들이 받을 상을 받게 됩니다. 이웃 형제 자매를 사랑으로 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그리고 그 예수님을 나에게 보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하여 그분을 닮은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환자가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으려면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듯, 인간적으로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관계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안에 안주해버린 관계를 끊어내려면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게 좋은거'라는 세상의 안일한 평화가 아니라, 나의 나태함과 안일함을 도려내기 위한 회개의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물질적인 부와 편리함 뿐만 아니라, 내가 애착하는 관계 더 나아가 나의 소신과 가치관 마저도 주님을 따르는데에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끊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하며 살기를 바라지만,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똑부러지게 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따랐다면 결과는 그분께 맡기면 됩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로워도 주님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몫으로 되돌려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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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삶
<2024.7.15>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2:26~35절)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삶❞
❚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는 것도, 저주스러운 흉년을 만나는 것도 인과응보입니다.
✔ 어떤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 하나님만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26~29절).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응답이 길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27절).. 예레미야의 기도에 반응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향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는 ‘이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인 동시에 유다 전체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바벨론 군대와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어 점령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을 불로 태우고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한 바알과 다른 신들을 숭배하던 모든 집을 불로 태워 제거할 것(28~29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붙여 멸망시키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의 그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서 떠나게 하였고, 격노케 하였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그들을 향한 대가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풍요의 신으로 믿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풍요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폐허가 되게 했고, 잿더미로 만드는 저주가 임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입니다. 우리에게 참 풍요와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진정한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만이 긍휼을 베푸심을 알아야 합니다(30~33절).
‘...예로부터 내 눈 앞에서 악을 행하였을 뿐이라...그의 손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하게...’(30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우상 숭배가 하나님을 얼마나 격노케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매우 고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임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성을 내 앞에서 없애 버리겠다(31절) 선포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등을...돌리고...’ 그들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교훈을 ‘...듣지 아니하며 받지...’아니하였습니다(33절). 그들은 참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신 허무한 존재인 우상을 그들의 구원자로 섬겼으며, 패역한 그들을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부단히 계속되었지만, 이런 노력조차 그들은 거부한 완악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당신의 자녀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기회를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부인과 순종만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만을 위하여 쓰임받기 구해야 합니다(34~35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증한 우상 숭배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성전 안에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더럽게 하였습니다. 힌놈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짓고 몰렉을 위하여 자기 아들과 딸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유다를 죄에 빠뜨리는 역겨운 일을 하라고 명령한 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에게서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죽음을 자초한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여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노아의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때와 같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죄악의 정도를 따진다면 벌써 심판을 받았어야 마땅함에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참으신 까닭은 진실한 믿음을 가진 주님의 백성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둡고 부패한 세상을 살리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에 서지 않으면 믿는 자라 할지라도 순간 사탄의 도구가 되어 악을 행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힘만으로는 충성스럽게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만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는 귀한 도구들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보다 세상과 재물,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임을 깨달아 죄악에서 돌아서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날마다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부인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2:26~3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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