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 손문 시조 손응의 내력
내력:
일직(一直) 손씨는 안동(安東) 손씨라고도 하며, 선계(先系)는 고려 초 중국 송(宋)나라 개국 2대 위(魏) 왕, 3대 기(冀)왕 때 황제(皇帝) 등극을 두고 내란이 일어나 왕족과 귀족 세력이 고려로 망명 귀화하여 온 손응(孫凝)을 시조로 하고 있다.
원래 성은 순(荀)씨였으나 고려 제8대 왕 현종의 이름 순(詢)과 발음이 같다고 하여 손씨로 하사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일직 손씨(一直孫氏) 또는 안동 손씨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손응(孫凝)의 원래 성은 순(荀) 씨였는데 고려 8대 현종의 이름과 음이 같다 하여 손(孫)씨로 사성 되었다.
역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 있는 손홍량 유허비에 의하면 시조 손응(孫凝)의 원래 이름은 순응(荀凝)으로 순(荀) 씨였는데 고려 8대 현종의 이름과 음이 같다 하여 손(孫)씨로 사성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손응 이후의 계대(繼代)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을 지낸 손세경(孫世卿)을 1세 조로 하고 있으며, 일직(一直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 자리 잡아 살면서 본관을 일직(一直)으로 삼게 되었다.
4세조 손홍량은 현재의 일직면 송리리에서 태어났다.
1309년 문과에 올라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을 거쳐 충정왕 때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으며 정평(靖平)이란 시호를 받았다.
4세 손홍량은 밀직사를 지낸 5세 손득수(孫得壽)와 전공판서를 지낸 5세 손득령(孫得齡) 두 아들이 있고, 사위는 흥해 배씨(興海裵氏)로 안동 입향조 배전(裵詮)이다.
5세 손득수의 아들 6세 손영유(孫永裕)는 4세 손홍량의 자손으로 조선왕조에서 첫 출사자로 한성판윤을 지냈다.
6세 손영유의 아들 7세 손관(孫寬)은 진성 현감을 지냈는데 밀양 용평리로 이거 하였다.
7세 손관의 맏아들 격재(格齋) 8세 손조서(孫肇瑞)는 일직면 송리리에서 나서 밀양 용평리에서 자랐다.
14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한림원에 있었다.
외직으로 나가 봉산 군수에 있다가 단종 복위를 꾀하던 학사들이 순절하자 벼슬을 던지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8세 손조서는 도학이 깊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났으며 밀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과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 되었다.
본관:
일직(一直)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일대의 지명이다.
일직현(一直縣)이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직녕현(直寧縣)으로 개칭되어 고창군(古昌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는데, 고려에서 다시 일직현(一直縣)으로 바꾸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 안동 대도호부 일직(一直)의 성으로 임(任)· 손(孫)· 김(金)· 노(盧)· 전(田)· 한(韓) 6성이 기록되어 있다.
번영:
4세 손홍량(孫洪亮)은 1287년(충렬왕 13년) 일직(一直)에서 출생(出生)하여 6대의 왕조(王朝)를 거치면서 벼슬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고 복주부원군(福州府院君)에 봉(封)해져서 가문(家門)을 크게 중흥(中興)시켰다.
특히 그는 40여 년의 벼슬길에서 나라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고려(高麗) 말기(末期)의 어려운 국정(國政)에 크게 이바지하다가 1351년 (충정왕 3) 65세로 치사(致仕)하여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侵入)으로 복주(福州)에 피난(避難)하는 공민왕(恭愍王)을 중도에서 평복으로 맞이하여 난국(亂國)에 대(對)한 수습책(收拾策)을 진언하니 왕이 그의 충의(忠毅)에 감탄(感歎)하여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더하도다(子誠一直人 老而益篤)"라는 시와 함께 정평공(靖平公)의 시호(諡號)를 하사 하였다.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러 개경에 갔을 때 왕은 영정(影幀)과 구절산호용장(九節珊瑚龍杖: 용을 아로새긴 아홉 마디의 산호 지팡이)을 내리며 "경의 두 아들도 나를 섬기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4세 손홍량의 맏아들 5세 손득수(孫得壽)는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사 좌대언(密直司左代言) 등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지낸 아들 6세 손웅발(孫雄發)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으며, 차남 5세 손득령(得齡)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전공 판서(典工判書) 겸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4세 손홍량의 증손 7세 손관(孫寬: 6세 영유의 아들)이 진성 현감(眞城縣監)을 지내고 밀양의 용평리로 이사하여 살면서 오늘날 밀양군 산외면 다원리를 비롯한 영천, 김해 등지에 취락을 이루게 되었다.
7세 손관의 아들 8세 손조서(孫肇瑞)는 1435년(세종 1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거쳐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나갔다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지내며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학문이 뛰어나고 경전(經傳)과 도학(道學)에 정통하여 심경연의(心經衍義)와 근사록연의(近思錄衍義)를 저술했으며 시문(詩文)의 대가로서 당대의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과 친교가 두터웠고, 문하에서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과 같은 거유(巨儒)를 배출하여 명망이 높았다.
그가 죽은 먼 훗날 정조는 예조(禮曹)에 명하기를 "한림 손조서는 드높은 명망과 절조가 있어 일컬을 만한데, 어찌하여 인물 조에 올려 상세히 주를 달지 않는가"라는 유시(諭示)를 내렸으며, 1812년(순조 12년)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증직하고 그 자손(子孫)에게 잡역을 면하게 하였다.
정리:
918년 왕건 태조가 고려를 개국.
936년 후삼국을 통합.
1009~1031. 8대 현종 22년 재위. 그의 이름이 왕순이어서 일직 손문의 시조이신 순응의 성과 발음이 같다고하여 손응으로 바꿔 사성 됨.
1287~1379. 손홍량 정평공. 향년 92세에 영면.
1274~1308. 25대 충렬왕. 34년 재위.
1308~1313. 26대 충선왕. 5년 재위.
1313~1339. 27대 충숙왕. 26년 재위.
1339~1344. 28대 충혜왕. 5년 재위.
1344~1348. 29대 충목왕. 4년 재위.
1349~1351. 30대 충정왕. 2년 재위.
1351~1374. 31대 공민왕. 23년 재위.
1374~1388. 32대 우왕. 14년 재위.
1388~1389. 33대 창왕. 1년 재위.
1389~1392. 34대 공양왕. 3년 재위. 종료. 고려멸망.
34인의 왕 씨 국왕이 474년간 통치.
정평공 영면 1379년-고려멸망 1392년=
정평공 영면 후 13년 만에 고려멸망.
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 국가의 흥망성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니 한숨과 눈물을 짓게 된다.
손재수 인용 정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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