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빈다는 것/조미정
한지함 속에서 누비 한복 한 벌을 꺼낸다. 쪽빛 삼회장저고리와 감색 두 폭 치마가 펄럭거리며 강물처럼 펼쳐진다.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과 기도가 박여서일까. 비단 천을 만지작거리자 안팎으로 가지런하게 누벼진 바늘땀이 가슴으로 굽이친다.
누비는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두고 한 땀 한 땀 홈질하여 짓는다. 눈 뜨자마자 시작해서 해거름까지 붙잡고 있어도 한 평 남짓 누빌까. 조급증이 일렁이지만 급한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담는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누비는 낱장인 천들을 한 장으로 만드는 화합의 침선이다.
누비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몸의 치수대로 마름질한 후 품이 조금 더 넉넉하게 재단한다. 촘촘히 박은 땀이 주변의 천을 물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솜에 거뭇거뭇한 목화씨도 눈에 보이는 대로 제거한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들이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결혼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신행 다녀온 첫날부터 마음이 삐걱거렸다. 남편은 늘 시댁 일이 우선이었다. 집안일이 산더미 같은데도 어머님이나 형님이 부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손이 양반이라 전구 하나 갈아 끼울 줄 모르는 장남 대신 막내아들이 집안의 궂은일이란 가리지 않고 도맡았다. 제사나 차례상도 마찬가지였다. 전은 막내며느리가 굽고 생색은 맏며느리가 냈다. 어진 남자라고 콩깍지 꼈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물러 터졌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남편이 곁에 누워도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자리가 어긋난다 싶을 때마다 올을 튀긴다. 일정한 간격으로 누빌 자리를 표시한 다음 씨실 한 올을 살짝 걷어 올린다. 엄지손톱으로 훑어 제자리로 다시 밀어 넣으면 밋밋하던 천에도 가는 발자국이 남는다. 등대 불빛 같은 실 자리를 따라 바지런히 땀을 놓으면 길을 잃거나 선이 삐뚤어질 염려가 없다.
첫 아이의 출산은 난산이었다. 아이가 거꾸로 돌아가서 가슴을 들이박았다. 까무라들기 직전 어머님이 다짜고짜 분만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들이겠는교? 딸이겠는교? 수술했는데 딸이면 남우세스럽다 아닌교. 옛날엔 며칠 진통해도 아들만 쑥쑥 잘 낳았다.” 그때 나는 길을 잃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슴팍을 팡팡 쳐대는 일이 잦아졌다.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아이가 며칠 만에 신생아실에 입원했을 때도, 남편의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논두렁으로 전복되었을 때도, 잘못 서준 빚보증으로 집이 풍비박산 났을 때도 남편은 혼자서 등짐을 떠안았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배려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야속했다. 자초지종을 모르던 어머님은 아들 잡지 말라며 외려 나한테 불호령이었고, 목이 멘 나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펑펑 울었다.
솔기를 박을 때 시접은 누비 간격보다 좁게 둔다. 그래야 천을 폈을 때 툭 불거지는 곳 없이 평평해진다. 그런 평정심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는데 고부 사이에서 쩔쩔매는 남편을 볼 때마다 울컥울컥 울화가 터졌다. 마음에 뿔이 났던 시절이었다.
다음은 두 겹 천 사이에 솜을 놓을 차례다. 평평하게 펴서 겉감 위에 놓는다. 하지만 몽글몽글한 솜은 자칫 뭉쳐지거나 한쪽으로 밀려 나가기 쉽다. 마음의 문을 닫는 바람에 가족 친지들과의 사이가 멀어진 일, 남과 비교하여 처지를 비관한 일 등은 마음 한 자락 밀려가던 일이었을 것이다. 얼른 가장자리를 시침해 고정하고서는 창구멍으로 안팎을 뒤집는다.
그럭저럭 옷 모양이 갖추어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누비는 일만 남았다. 누비 간격이 틀어지지 않도록, 안과 밖이 가지런하도록 미간을 찌푸린 채 바늘땀을 놓는다. 한 줄 놓고 속상한 마음 내려놓고 두 줄 놓고 다시 부아가 나며 세줄 놓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스물여섯째 줄에 이르면 측은해진다.
지난날들을 되짚어본다. 밥 짓는 아내 대신 포대기로 아이를 업어주던 남편, 만삭의 몸으로 제사 장을 보러 갔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을 때 우산 들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남편, 떨어질 만하면 김치를 담가 주시고 시댁에 들릴 때마다 바리바리 보따리를 싸주시던 어머님. 돌이켜보면 남편은 남의 편이 아니라 늘 내 편이었고 어머님께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도 왜 그리 삐뚤어진 땀이 많았을까. 이제는 한 땀 박고 고마움을 다독이고 한 땀 쉬고 미안함을 털어낸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뒷면을 어루만지자 누비의 이랑에서 청량한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누비의 길은 멀고 험하다. 오랜 시간 인내하고 공들인 다음에야 겨우 모양을 잡아간다. 참는다고 해서 속으로 삭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바늘땀을 훤히 내보임으로써 서로가 소통하는 법도 배웠다. 삶이 무거우면 간격을 넓혀 드문누비로 땀을 떴고, 일이 잘 풀린다 싶으면 잔누비로 섬세함을 더했다. 하루하루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평누비였지만 마음자리마다 골이 졌던 오목누비인 경우도 허다했었다. 화사한 색실로 모란꽃을 수놓았던 특별한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삶을 누비다 보니 어느새 한 벌의 옷이 지어졌다.
누빈다는 것은 함께 가는 과정 같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하루아침에 자랄 수 없듯이 부부 사이도 산전수전 겪은 다음에 더욱 돈독해지는 듯하다. 안과 밖이 함께 한 땀씩 걷는다. 천과 천 사이에 만들어진 두툼한 공기층은 서로를 어루만져주던 측은지심이다. 곧게 뻗은 바느질 선은 끝까지 놓지 않는 부부애쯤 되겠다.
지금도 나는 가끔 마음자리에 뿔이 난다. 하지만 예전처럼 새우 눈으로 흘기진 않는다. 장인의 솜씨는 아니나 최선을 다해 만든 누비옷 한 벌 지녔기 때문이다. 누비의 성품은 질박하면서도 견고하다. 여간해선 모양이 틀어지지 않는다. 그런 누비의 성정을 닮고 싶을 때 반짇고리를 꺼내 든다.
초를 입혀 매끈한 명주실이 생의 징검다리를 겅중겅중 건너간다. 톡톡! 튕기며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방한 선들의 세상이 펼쳐진다.